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49편 (49/66)
"황제께서는 분명 아씨에게 날 죽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으셨소. 나를 죽인다면 그것은 황상의 칙지를 거역하는 거나 진배없소." 묘대야는 또 한 번 되풀이 외쳤다. 여인은 여전히 깔깔 웃어댔다. "정말 왜 그렇게 아둔하지? 칙지란 뭔가? 황제께서 말씀하신 그 여짐친림이 그럼 칙지가 아니란 말인가?" 묘대야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다. 황상의 분부대로 옥벽 반 조각을 지닌 사람은 황제의 대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얼마든지 자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묘대야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탄식을 하였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정말 그 고담이 하나도 틀린 데가 없구나……." 묘대야는 몹시 착잡하여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구양봉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가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고 아씨의 분부나 받들어라!" 묘대네 넷은 어리석게도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들었다고 자탄하며 속수무책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 자비를 베풀어 넷을 모두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버릇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하나는 필히 죽여야겠다. 묘대야, 너는 어떠냐? 너로 할까, 아니면 과이야로 할까?" 여인은 묘대야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묘대야늘 자기도 모르게 과이야를 돌아보았다. 과이야도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은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들 모두 당혹스런 눈빛이었다. 한순간 과이야가 소리쳤다. "형님, 날 죽이라고 하시오. 내가 죽겠소. 우리 대내오주가 이미 오주가 안 되는 이상 하나 더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묘대야는 마음을 도사렸지만 과이야가 그렇게 나오자 생각을 바꿔 몸서리를 치며 한바탕 웃었다. "흐흐흐…… 꼭 죽여야겠다면 나를 죽여라! 대내오주에선 이 묘대야가 우두머리다. 세 동생에겐 내 말을 따른 죄밖에 없다!" "말은 바로하는구먼!" 여인은 냉소했다. 그리고는 구양봉에게 눈짓을 보냈다. 구양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묘대야를 향해 손을 뻗쳤다. 절망감에 빠져 묘대야는 대항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나 구양봉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얼결에 냉큼 한 발짝 물러났다. "흥, 묘대야! 잔재주를 부리면 더 참혹하게 죽는다는 걸 모르느냐!" 구양봉은 냉랭하게 한마디 내쏘고는 또 손을 쓱 뻗쳤다. 이번에도 묘대야는 또 한 발짝 물러섰다. 구양봉은 화가 나서 손을 휙휙 휘둘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묘대야는 이쪽저쪽으로 물러났다. 구양봉은 대로하여 성큼 뛰어 내달아 묘대야를 붙잡았다. 묘대야는 뒤로 물러서며 금선탈각술(金蟬脫覺術)을 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만 구양봉에게 앞가슴을 틀어쥐이고 말았다. "네 이 놈, 그깟 잔재주로 내 손에서 벗어날 줄 알았더냐!" 구양봉은 번개같이 묘대야의 대혈 몇 군데를 쿡쿡 찔러 놓고는, 목을 움켜쥐며 번쩍 치켜 들었다. "주인을 배반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는 묘대야를 똑바로 노려보며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묘대야도 눈알을 부라리며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내가 죽어 원귀(怨鬼)…… 원귀가 되어서라도 널 가만 놔두지 않겠다!" "말 같지 않은 소리! 귀신도 나 같은 악한은 무서워한다! 네놈이 원귀가 되어도 내 앞에선 설설 길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묘대야는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대내오주가 황궁에 있을 때만 해도 얼마나 황제를 극진히 섬겼던가. 그런데 아차 하는 한 번 실수로 황제한테 쫓겨나 이 여인의 수하가 되고 급기야는 이 계집의 손에 이렇듯 처참하게 죽게 되다니……." 구양봉은 묘대야의 목을 더 힘껏 조였다. 묘대야는 이젠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과이야, 허삼야, 우사야 세 사람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묘대야의 목을 확 조였다. 한순간 묘대는 털썩 고개를 떨구더니 더 이상 미동을 하지 않았다. 과이야와 허삼야, 우사야 세 사람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그때껏 가만 있던 구천인이 후닥닥 과이야한테 덮쳐 들어 다짜고짜 귀때기를 연거푸 후려쳤다. 불이 번쩍 나는 듯싶었다. 과이야는 힘없이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구천인은 과이야의 멱살 을 움켜쥐고 일으켜 세우며 뇌까렸다.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증오한다. 바로 네 놈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쥐새끼 같은 녀석, 네 놈은 살짝 빠지고 묘대야를 죽게 해? 죽어야 할 놈은 바로 네 놈이야!" 그리고는 과이야의 가슴에다 팍팍팍 연거푸 장풍을 날렸다. 과이야의 입으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여인의 말과 다르게 묘대야를 죽여 놓고도 또 과이야까지 죽이려고 덤비자 허삼야와 우사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나만 죽이겠다더니 왜 과이야까지 죽이려느냐?" 그러자 계집은 빙그레 웃으며 코웃음을 쳤다. "하나고 둘이고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다. 너희들이 상관 할 바가 아니야!" 허삼야와 우사야는 격분해서 치를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계속 뻣뻣하게 나갔다간 그들 둘까지도 참살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들은 그저 눈물이 글썽한 채로 과이야가 당하는 것을 지켜 볼밖에 도리가 없었다. 철장방 방주 구천인의 철장은 지독했다. 과이야의 옷 앞자락에 벌써 피가 흥건한데도 입에서는 여전히 울컥울컥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대내오주…… 동생들 둘만 남았는데…… 어서…… 어서 내빼, 어서……." 과이야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치켜 뜨며 우사야에게 한마디하더니 덜컥 숨을 거뒀다. 허삼야와 우사야는 치를 떨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이렇듯 말에 신용이 없다니. 말은 한 사람만 죽이겠다고 해 놓고서 두 사람을 다 죽이시오? 이렇게 지독한 법이 어디 있소?" 그러자 여인은 싱긋 웃으며 묘대야에게로 걸어가 그의 가슴을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네 맏이는 겁이 나서 기절했을 뿐 숨이 아예 넘어간 건 아니다. 좀 있으면 되살아날 게야." 과연 시간이 좀 흐르자 묘대야는 서서히 깨어났다. "고맙습…… 죽이지는 않아서……." 묘대야는 희멀건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허삼야와 우사야는 묘대야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맏형, 과이야가 죽었소, 과이야가……." "뭐라구?" 묘대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온통 피범벅이 되어 내동댕이쳐져 있는 과이야가 눈에 들어왔다. 묘대야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과이야는 왜 죽인단 말이오?" 여인은 깔깔 웃어댔다.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과이야쯤은 죽으나 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이었다. "그때 과이야가 퇴각하자고 했을 때 과이야 말을 듣지 말고 그냥 싸웠어야 했다. 퇴각하지 않고 넷이서 단합하여 싸웠으면 능히 소씨 거렁뱅이를 이길 수도 있었다. 이 놈이 일을 다 망쳐 놓은 거야. 황상의 분부대로 나는 황상 대신이거늘, 내 명을 거역하고 과이야가 너희를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이니, 그는 죽어 마땅하다. 하나 과이야만 탓할 수는 없는 터, 묘대야 네 놈도 네 죄를 알렷다?" 묘대야는 아무 말도 못했다. 허삼야과 우사야도 말이 없었다. 그들의 가슴엔 오직 비통함만 가득 찰 뿐이었다. 여인은 갑자기 요염하게 웃더니 태도를 일변해 묘대야를 지그시 바라보며 자못 다정스레 말했다. "오라버니, 그때 오라버니는 날 오직 강호 사람으로만 알고 나를 집으로 데려가 의형제를 맺었지요. 그리고 그때 나를 철장방에도 데려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오라버니는 철장방 방주가 이미 내사람이라는 걸 감감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기실 나와 구천인 방주는 그때 말은 안 했어도 서로 눈짓으로 할말을 다 주고받았어요. 그때 오라버니를 기름 가마 속으로 집어 던진 것도 다 내가 시킨 거였죠. 오라버니는 기름 가마 속에서 완전히 혼절해 버렸는데 사실은 혼절한 게 아니고 혈도를 눌려 잠이 든 것뿐이었어요. 그 사이 나와 구 방주는 대사를 의논하였죠. 그리고 오라버니가 깨어났을 때는 내가 부러 잠든 척하였으니 오라버닌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수밖에요." 여인은 또 한 번 사람 홀리는 웃음을 방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여하튼 우리는 의남매예요.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난 오라버니를 죽일 수는 없어요. 이번 일은 다 과이야가 책임진 거예요. 과이야에게는 운수 사나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여인은 따스한 눈빛으로 묘대야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한 눈치였다. 묘대야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눈이 멀었지. 이 여인이 황제가 파견한 여인인 줄 눈치챘던 때부터 행동을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런 변이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여인은 이제 묘대야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구천인과 구양봉에게 말했다. "개방 대사는 이제 초보적으로나마 기틀이 잡히긴 했지만 아직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중 가장 중대한 일이 바로 홍칠을 붙잡는 거예요." 여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부귀산인 범장천과 청한자자 노명성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둘은 여인이 자기네를 쏘아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황망히 허리를 굽실거리며 변명을 했다. "방주님, 우리 둘이 홍칠을 추적했을 때 그 놈은 이미 해독이 되어 있는데다가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까지 합세해 셋이서 덤벼드는 바람에 그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범장천은 그저 싸움에 패했다는 것만 수긍하고 나설 뿐, 싹싹 빌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말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여인은 범장천과 노명성을 쏘아보며 꾸짖었다. "그렇게 털끝 하나 안 다치고서야 어떻게 그 대단한 홍칠을 붙잡아올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몸을 아껴서, 그래 무슨 일을 하겠다고?" 범장천과 노명성은 찍소리도 못했다. 여인은 양팔에 구양봉과 구천인을 끼고 있다. 여인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과이야가 죽어 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개방 장로 범장천, 나장태, 노명성 세 사람은 속이 사뭇 떨렸다. 그러나 여인은 의외로 미소를 띠며 한마디 던졌다. "오로지 우리 몇이 일심협력하면 홍칠쯤은 쉽사리 죽여 버릴 수 있어요. 범 장로와 노 장로는 계속 홍칠과 미립을 찾아보세요. 그 뒤는 아무래도 구천인 방주님과 구양봉 대협의 수고를 빌려야 할 것 같아요." 범장천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 찾아내는 일은 자기네들이 하고 정작 손을 쓰는 건 구천인과 구양봉에게 맡기겠다는 것은 분명 자기네들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대접하겠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중임은 맡기지 못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더욱이 과이야의 참혹한 죽음을 대면하고 나서 자기네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터, 그는 더는 이 여인을 위해 목숨을 내걸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구양봉에게 눈길이 미치자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 많은 일을 대협께 수고를 끼쳐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염려일랑 딱 비끄러매시오. 이전에 내가 말한 대로 그 세가지 일만 보장해 준다면 무슨 일이든 모두 도와드리겠소." 구양봉은 고개를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아, 대협의 조카 일 말이죠? 그건 염려 마시라니깐요. 이미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품하게 했으니 불원간에 호소식이 올 거예요." 구양봉이 요구한 세 가지 일 중에서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그의 조카 구양극을 중원에 데려다가 벼슬 자리를 주고 호사를 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말이 조카이지, 실은 구양봉과 그의 형수 모용쟁 사이에 난 그의 아들이기에 구양극에 대한 구양봉의 사랑은 더없이 끔찍했다. 구양극이 중원에서 벼슬 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구양봉은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구양봉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한 듯 여인은 살짝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이번에는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 방주님, 개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저는 개방 일은 모두 철장방에게 맡겨 관리하게 할 셈이에요. 큰 문제 없겠죠?" 구천인은 그 말에 언감생심, 넙죽 읍을 하였다. 홍칠과 미립,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 등은 며칠이나 내처 걸어갔다. 어느 날, 그들은 임안에서 왜 떨어진 한 자그마한 읍에 이르렀다. "미운산 방주님께서는 전에 벌써 이곳에다 우리 사람들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사람들과 힘을 합하면 앞날을 다시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미타 추우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홍칠은 미운산의 선견지명과 주도면일한 처사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진(雨鎭)이라고 하는 이 읍은 사람이 그리 많이 살지 않는 작은 읍이었다. 미운산은 일년 전에 이 읍을 사들여,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점차 타고장으로 이주시키고 믿을 만한 개방 수하들만 남게 했다. 네 사람이 읍 안으로 들어서자 멀리에서부터 두 사람이 반가운 기색으로 뛰어왔다. 다름아닌 개방의 두 분타 타주 나대통과 노유각이었다. 둘은 공손히 읍을 하였다. 홍칠은 급히 말리며 두 사람 손을 덥석 잡았다. 나대통과 노유각은 일행을 한 집으로 안내해 갔다. 정원도 크고 대청도 있는 큰 집이었다. 정원 안팎으로 경비가 사뭇 삼엄했다. 일행은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 선명 당에는 '개( )'자가 크게 씌어 있는 족자가 한 폭 걸려 있고, 그 좌우로 주련도 한 쌍 걸려 있었다. 상련에는 '사방을 먹고 팔방을 돌아다니니 곳곳마다 기분이 좋고(吃四方走八方方方皆順)'라는 글귀가, 하련에는 '오늘을 보고 내일을 말하니 날마다 근심이 없네(看今天說明天天天悠閑)'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하나 횡련(橫聯)엔 아무런 글귀도 없었다. 원래 개방은 횡련에는 글을 쓰는 법이 없었다. 무슨 이치가 있어서는 아니고, 글이 위에 있으면 '개' 자를 누르게 되어 거렝뱅이의 살길이 눌리게 된다 하여 오랜 관습으로 굳어져 온 것이었다. '개'자가 씌어진 족자 아래에는 향로가 놓여 있고 그 뒤로 신패(神牌)가 두 개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개방의 전임 방주 미운산의 신위(神位)요, 다른 하나는 개방 방주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였다. 그것을 보자 홍칠은 울음이 복받쳤다. 비단 미운산과 소씨 거렁뱅이의 비참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에 이르러 개방이 당면한 이 험난한 정국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뭔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개방은 그간 항시 국가 대사를 염려하며 금나라에 대항해 북방의 강토를 수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조정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되어, 조정이 직접 개방 일에 개입해 개방을 물리치기 시작하였는바 천 하 제일의 큰 방( )인 개방은 바야흐로 한 계집의 작간으로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10대 장로 중에 이미 명을 달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한 사람도 있다. 더욱이 그 계집에게 투항해 버린 자도 있어 지금은 오로지 두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만 남았으니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홍칠은 향로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짓찧듯이 땅바닥에다 이마를 쿵쿵 내리 박았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 미립도 숙연히 절을 올렸다. 한순간 미립은 허물어지듯 주저 앉아 아버지를 부르다가 그만 목이 메어 오열을 터뜨렸다. 아버지 미운산이 개방 일로 고생만 하시다가 그 계집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이게 된 것도 다 자기와 미기 때문이요, 바로 그 때문에 개방도 이 지경이 되고 아버지도 참혹하게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립은 비통하기 그지없어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그예 혼절을 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황급히 미립을 업고 방으로 데려갔다. 홍칠의 가슴에선 울분이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개방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그 악독한 계집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개방 형제들과 사부님의 영전을 대할 면목이 없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추우, 나대통과 노유각 네 사람은 가만히 홍칠에게로 다가섰다. 사개 정원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홍칠공도 이젠 알겠지만 그 당시 개방 일이 복잡해지자 미 방주님께서는 내게 미립 낭자는 물론 홍칠공을 꼭 보호하라는 밀명을 내리셨습니다. 미 방주님은 소씨 거렁뱅이에게는 세상 만사를 허망하게 여기는 품성이 있어서 개방의 일을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고 여겨 오로지 홍칠공에게만 방주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지요. 미 방주님이 이렇게 결심하시기까지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후로 우리 둘은 다른 장로들과 같이 그 여인에게 투항한 척하고 온갖 수모 를 다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참아 왔습니다. 분노가 치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을 위해 참고 견딘 것이지요. 오늘 저는 미 방주님과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 앞에서 홍칠공을 개방 제 16대 방주로 천거하고자 합니다. 홍칠공의 의사는 어떠합니까?" 홍칠은 숙연히 머리를 들고 네 사람을 한번 휘둘러보았다. '개방이 이 지경이 되어 있는데 내가 방주를 마다한다면 이건 개방 삼십만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홍칠은 거연히 머리를 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미력하나마 제가 개방 방주를 맡겠습니다." 홍칠의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엔 희색이 돌았다. 그들은 서로들 눈길을 마주치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홍칠이 방주가 되면 개방에도 이제 명실상부하게 영도자가 생기는 것이고, 그 계집을 물리쳐 옛날처럼 개방을 진흥시킬 희망도 가질 수 있다. 네 사람은 향로에 향불을 피우고 제상을 차렸다. 개방의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각각 향로 양 옆에 서자, 대청 안으로 2백여 명 남짓되는 개방 사람들이 엄숙한 기색으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홍칠과 구면이요, 또 개중에는 첫 대면인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 모두는 개방에서도 진정으로 영웅호걸로 꼽힐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팔대(八袋) 제자였던 사람도 있었고, 비록 이름은 나지 않았으나 남에게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무공이 출중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는 숙연히 서서 집법장로 사개 정원의 말을 기다렸다. 사개 정원과 소미자 추우는 자못 위엄을 갖추고 뭇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사개 정원이 입을 열었다. "우진은 비록 작지만 개방의 몇 백 정영(精英)이 뭉쳐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방주의 법장, 녹옥죽봉을 도로 빼앗고 개방의 삼십만 인중을 영도하는 대권을 다시 빼앗아 명실상부하게 개방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일로 매진합시다!" 모두들 용기백배하여 팔뚝을 내두르며 쩌렁쩌렁 환호성을 올렸다. 이번엔 소미타 추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장엄히 선포했다. "이제부터 홍칠공을 개방 제16대 방주로 모시는 계위 대전(繼位大典)을 시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의자 하나를 복판에 가져다 놓았다. 홍칠은 한복판으로 나아가 먼저 미운산의 신위와 소씨 거렁뱅이의 신위에 절을 하고 나서 의자에 가 앉았다. 집법장로가 개방 방주의 신표인 녹옥죽봉 대신 집법장로 법장을 홍칠에게 넘겨주었다. "방주님께 참배!" 사개 정원이 소리쳤다. 먼저 집법장로인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이 홍칠에게 절을 하고 그의 몸에 침을 뱉었다. 그 다음으로 나대통과 노유각이 나서서 절을 하고 침을 뱉었다. 그들 두 사람은 평소부터 홍칠을 흠모해 마지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홍칠을 개방 방주로 모시게 되어 개방에도 서광이 비친다고 생각하니 기쁘다 못해 환희에 넘쳐 희색이 만면했다. 그리고 나서 개방의 2백 용사들이 차례차례로 홍칠에게 절을 하고 그의 몸에 침을 뱉었다. 참배가 끝나자 홍칠이 말했다. "정 장로, 추 장로, 내 소견에는 우리가 이대로 우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방책이 아닌 것 같소. 우리들이 무슨 일부터 해 나가야 할지 두 장로께선 어떤 계책이 없으시오?" "방주님, 제가 보기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사람을 내보내 노명성, 범장천, 노경, 나장태 이 네 악한이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염탐해 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람들을 보내 소 방주님의 시체를 찾아야 하고, 또 세 번째로는 미운산 방주님의 아드님을 찾아봐야 할 줄로 압니다." 소미타 추우가 대답했다. "지당한 말이오." 홍칠은 흔연히 동의하고 나서 그 자리에서 당장 의논하여 각기 소임을 맡았다. 홍칠은 나대통, 노유각과 함께 범장천과 노명성의 동태를 살피고 그 속마음을 타진하기로 했다. 한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각기 소씨 거렁뱅이의 시체와 미운산의 아들 미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대청 안은 새로운 결의와 결연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느라 미립이 다가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마냥 어느결에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와 홍칠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색이 몹시 창백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다소곳이 절을 하고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개방 분들이 저를 구해 주어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어요." "뭐,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