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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46편 (46/66)

2026-09-29 07:52:03 조회 25
"황약사 이 놈, 내 원래는 너는 다치지 않으려고 했었다. 자비를 베풀어 이 다음에 화산에서야 손을 봐 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네 스스로 명을 앞당기기를 재촉하니, 그 건 다 방정맞은 네 놈 말버릇 때문인 줄이나 알아라!" 황약사는 그의 말에 코방귀도 안 뀌고 길게 말을 늘여 뽑았다. "어디 원대로 손을 대 보시지.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 황약사는 느려 터진 동작으로 천천히 옥소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구양봉은 성마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황약사를 겨냥해 사장을 휘둘렀다. 황약사는 슬쩍 옆으로 피하며 옥소를 내뻗었다. 구양봉은 헛손질만 한 셈이지만 절묘하게 황약사의 옥소를 피해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불꽃을 튀었다. 초반에는 구양봉이 열세인 듯했으나 초식을 더할수록 두 사람은 신명이 나서 혼신을 다 했다.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내로라 하는 무학대가로서, 각자가 펼쳐 내는 법수란 정묘하기 그지없고 변화무쌍하며 한 가지 법수를 채 다 쓰기도 전에 벌써 다른 법수를 펼쳐 내곤 하였다. 구양봉은 온몸의 힘을 다 짜내 번개같이 사장을 휘둘러댔고, 황약사의 옥소는 무시로 구양봉의 공문(空門)을 내질렀다. 두 사람이 법수를 펼쳐 낼 때마다 강풍(强鳳)이 일고 번개가 치는 듯했다. "하, 이거 신명난다, 신명나! 구양봉아, 네가 날 이기겠다구? 생각은 자유니, 마음대로 생각하려무나." "너 따위한테 이기고 어쩌고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혼쭐나도록 손이나 좀 봐 주려는 것일 뿐! 흐흐흐……." 구양봉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흩뿌렸다. 둘은 벌써 백여 합이나 정신없이 겨루고 있었다. "야, 구양봉아, 가만 좀 있거라!" 황약사의 한마디에 구양봉도 잠시 손을 멈췄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디 갔지?" 그 말에 구양봉은 문득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데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장과 옥소를 거두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아이는커녕 꼬챙이에 꽂아 놓은 잉어도 서너 마리나 사라져 버렸다. "노독물 이 놈, 무학대가를 자처하는 놈이 그래 고작 남의 집 코흘리개나 넘봐! 내 일찍이 서역 한 땅을 독무대로 삼아 주름잡는 노독물이 그런 연약한 어린 양이나 넘보는 병신 승냥이란 소린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고도 네가 무학대가라 할 수 있느냐!" 황약사가 한껏 빈정거렸다. 구양봉은 쓴웃음만 지을 뿐 대꾸를 안 했다. 황약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봐, 이젠 그 아이를 죽이려 해도 다 글러 먹었으니 나하고 여기 앉아 물고기 안주에 술잔이나 기울이세그려. 내가 자네를 지키고 있는 이상 그 애를 해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일세." 구양봉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꾹 다물고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어제쳤다. "제기랄, 네 놈 꼴상은 보기 싫다만 아이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뛸 마음은 싹 사라졌으니 네 놈 말대로 물고기 맛이나 봐야겠다." 그리고는 사장을 한옆에 푹 꽂아 놓고 화톳불 곁에 퍼질러 앉아 황약사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봐, 자넨 일평생 악한 짓으로 그 손을 피로 물들이면서도 먹는 것 하나는 왜나 질탕하네그려." 황약사가 놀려대도 구양봉은 아랑곳 않고 게걸스럽게 술과 물고기를 꾸역꾸역 입 안에 넣으며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글쎄 그 말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왔다면야 무슨 권고로나 듣겠지만 황약사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니 코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래, 자넨 언제 자비스런 보살님이 되셨나, 엉? 뻔뻔하다, 뻔뻔하다, 엔간히 뻔뻔해야지. 악하기로 말한다면 네 놈 황약사가 이 노독물보다 둘째가라면 더 서러워할 텐데?" 얘기를 주고받고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그 많은 물고기는 벌써 동이 나고 있었다. "이봐, 아무래도 오늘 개방에서 무슨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한번 가 보지 않겠나?" 황약사가 말했다 구양봉은 선뜻 응대를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황약사 놈은 나와 닮은 데가 많다. 누가 좋아하든 말든 제 마음대로 하는 놈이니, 만약 가서 보다가 제 성미에 맞지 않으면 그 여인의 일을 단번에 화닥닥 뒤엎어 놓을 수도 있단 말씀이야. 호락호락 말을 듣고 앉았다간 큰일나겠다. 정신 바짝 차리고 이 놈을 얼러서 여기 붙잡아 두는 것이 상책이다.' 구양봉은 넙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네 놈이 개방 방주라도 된단 말이냐? 무슨 난장판이 나든 자기네들끼리 찧고 까부는 게지 우리가 무에 상관이 있어? 여기서 물고기나 먹고 술이나 마시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홍칠의 교자를 들고 일단 밖으로 나오자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적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경망스러이 서두를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눈치를 채이게 되면 만사가 다 수포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미립에게 눈짓을 보냈다. 각별히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심조심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 개방 사람들은 신임 방 주가 내놓은 국사불문(國事不問) 주장을 놓고 옳으니 그르니 쟁논을 벌이느라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느 정도 용골묘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자 그들은 발을 재게 놀리며 구불구불한 소로를 따라 강변으로 향했다. 갈림길에 이르자 사개 정원이 소리를 죽여 나직이 말했다. "소 장로, 그냥 이 소로를 따라가는 게 어떨까?" 소미타 추우는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아닐세. 강변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세. 그게 더 빨라." 사개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변 쪽으로 길을 잡아 내처 치달아 갔다. 개방 분타 타주들 중 많은 사람이 배를 타고 왔기 때문에 강변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여러 척 매여 있었다. 그 위쪽으로 배를 지키는 사람들이 서로 한담을 나누며 서 있었다. 강변에 이르자 소미타 추우가 소리쳤다. "어느 배가 가장 좋고 빠르냐?" 그들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개방의 두 집법장로임을 알아 보고는 개중 한 사람이 꽁무니 빠지듯 달려왔다. "우리 이 배가 제일입니다. 건강 분타 타주 나대통의 배입지요."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좋다. 우리 둘은 급한 용무로 서둘러 길을 떠나는 참이다. 이 배를 좀 써도 무방하겠지? 자, 지체 말고 배를 몰아라." 소미타 추우는 한껏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자 사공은 즉각 명을 받잡아 부랴부랴 닻을 올렸다. 대단히 큰 배였다. 그들 셋은 홍칠이 탄 교자를 번쩍 들어 배에 올려 놓았다. 마침 순풍이라 배는 거침없이 나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몇 리 길을 내려왔다. 소미타 추우, 사개 정원 그리고 미립은 홍칠을 에워싸고 이물에 서서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미운산 방주님은 불행히도 그 계집년 손에 돌아가셨지만 미립 아가씨는 요행히 빼내 왔구먼. 그나마 다행일세. 일단 미립 아가씨를 어디 조용한 데다가 숨겨 놓았다가 다소 조용해지면 미운산 방주님의 원수를 갚도록 함세." 소미타 추우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개 정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홍칠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황황히 말했다. "아차, 이 정신 좀 봐. 어서 물을 가져 오게, 어서! 홍칠공 얼굴에 발라 놓은 마약을 씻어 줘야지." 미립은 그제야 일의 전말을 짐작하고는, 한순간 주춤하다가 이내 고물로 걸어갔다. 거기에 때마침 두레박이 하나 있었다. 미립은 얼른 두레박을 늘어뜨려 물을 길어서는 이물로 가져 왔다. 사개 정원은 긴 수건을 물에 푹 적셔 홍칠의 얼굴을 여러 번 닦아 주었다. 그러자 홍칠은 한두 번 눈을 꿈쩍여 보고 입술도 달싹거리더니 이윽고 또렷이 눈을 떴다. 다음 순간, 가느다랗게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 방주님은……." 홍칠은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시울은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사개 정원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미운산 방주님은 그만 타계하셨소. 비통하기 그지없으나 되돌릴 수 없는 일, 기회를 보아 그 계집년을 쳐죽이고 원수를 갚아야지요." 홍칠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고 미립을 돌아보았다. 배는 나는 듯이 물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람이 산들 불어 그녀의 옷자락은 한들한들 나부꼈다. 비록 거렁뱅이 누추한 남장을 하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미립은 웬일인지 냉랭한 기색으로 홍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홍칠과 눈길이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하며 멀리 강물로 눈길을 돌렸다. "미…… 미립…… 미립 아가씨!" 홍칠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꾸를 않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미립 아가씨, 거기 좀 서요. 하, 할말이 있소." 홍칠의 목소리가 하도 간절하여 미립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떼다 말고 주춤 멈춰 섰다. "미립 아가씨, 나와 그 계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소?" 홍칠의 말에 미립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결에 소리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세 사람은 하나같이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미립 아가씨, 미운산 방주님 일도 천만부당한 일이요, 비통함을 금할 수 없지만 우리 사부님이 어찌 되셨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런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홍칠은 소씨 거렁뱅이의 생사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미립은 소씨도 이미 죽었으리라 단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죽었으니 아버지 먼저 구양봉을 막고 나섰던 소씨가 살아 있을 리 만무였다. 하지만 홍칠에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미립은 그저 고개를 푹 떨굴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날아들고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돛이 주르르 미끌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대갈일성을 했다. "홍칠, 감히 어디로 도망치려는 게냐? 아무리 잔꾀를 부려 봐야 우리 손바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네 사람은 가슴이 섬뜩하여 얼른 뒤돌아보았다. 선창 쪽에서 몇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앞장서 오는 사람은 부귀산인 범장천이요, 그 뒤로 개방 오의파 장로 일점지 나장태, 평소 늘 음울한 기색으로 말수가 적은 청한자자 노명성이 따르고 있었다. "우리 손에서 그리 쉽사리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한심한 녀석들이로군!" 범 장로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청한자자 노명성도 덩달아 뇌까렸다. "홍칠이, 어리석군! 그리 쉽게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가!" 그리고는 내처 음침한 눈길로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번갈아 쏘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너희들의 얕은 속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더냐. 우리 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새 방주님도 너희들 둘이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감히 우리를 속이고 홍칠이를 빼돌리려고 들다니……." 그러자 사개 정원은 노기가 충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너 따위들이 개방 장로냐? 미운산 방주님은 누가 죽였느냐? 범장천, 노명성! 네 놈들도 공모를 했겠지? 너희들은 귀신도 모르게 일을 처리했다고 자신만만해하겠지만 하늘은 안다. 하늘은 알아! 개방 장로 탈을 쓰고 악모를 꾸미다니, 극악무도한 놈들!" "너희 두 놈이 그간 미운산한테 신임을 얻어 그의 수족 노릇을 해 온 건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깟 놈들이 어찌 집법장로에까지 오를 수 있었겠느냐. 너희 놈들이 미운산과 손잡고 어떤 꿍꿍이를 꾸미는 줄도 모르고, 모두 다 두 눈 멀거니 뜨고 속아넘어갈 줄 알았더냐." 소미타는 노기 서린 눈초리로 범장천을 쏘아보았다. "소검 오평은 비록 그 계집에게 반해 그 계집과 가까이 지내 보려고는 하였을망정, 그 일 때문에 결코 자결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것도 다 너희들의 음모야!" 그러자 노명성은 신들린 사람마냥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그래, 제대로 알고 있군. 그렇담 우리들이 소경만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겠군. 너와 홍칠이는 이미 사형 명단에 올라 있다. 조만간 저승길로 보내 줄 테니 거기 가서 미운산과 소검을 만나 회포나 풀거라." 개방 장로란 위명 아래 은폐돼 있던 노명성의 검은 속마음은 공공연히 드러났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개방 장로 중에서도 무공이 매우 고강한지라 그들을 해치기 위해 이번에는 범장천, 노명성 등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노명성은 범장천에게 흘끔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신호로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뻗쳤다. 범장천은 사개 정원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개 정원은 황급히 소금나수(小擒拿手)를 펼치며 범장천을 막아냈다. 하나 범장천의 법수는 겉으로 봐선 유연한 것 같았지만 기실 역도(力道)가 대단히 강하여 사개는 연거푸 몇 걸음 뒷걸음질쳤다. 사개 정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소금나수를 펼쳤다. 이번에는 죽을 각오로 온몸에 힘을 모아 펼쳤기에 좀전보다 빠르고 힘이 실려 있었다. 범장천은 가까스로 그의 법수를 피해 냈다. 한편 노명성은 소미타를 노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소미타야, 발악 말고 손을 거둬라. 그러면 홍칠이는 죽여도 너만은 살려 주마." 소미타도 질세라 노한 기색으로 대들었다. "개 같은 소리 작작 해라! 방주님께서는 아무리 흉흉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장로들은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네 놈들이 홍칠공을 해치려 하는 이상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다!" 노명성은 내심 미운산의 선견지명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미운산은 벌써 이런 일을 예감하고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시켜 홍칠을 보호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시킨 것임에 분명하였다. 그의 예견은 과연 놀라우리만치 적중했다. "그만 지껄이고 내 주먹이나 받아랏!" 노명성은 주먹을 휘두르며 소미타 추우에게 덮쳐 들었다. 네 사람은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개방의 집법장로로 평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힘만으로는 노명성과 범장천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진력하여 대적하고 있었다. 미립은 옆에서 그들 네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 보기만 하였다. 그녀는 마치 그들의 싸움과 승패가 자기와는 무관한 듯 그저 담담히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기쁜 기색도, 슬픈 기색도, 노한 기색도, 그 누구를 원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즈음 소미타 추우는 주먹을 휘둘러 노명성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노명성이 그의 주먹을 피해 냉큼 뒤로 물러서자 소미타 추우는 그 틈을 타서 소리쳤다. "미립 아가씨, 어서 홍칠공을 데리고 여기를 피하시오." 그리고는 다시 뱃사공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배를 어서 기슭으로 몰아다 대거라. 너희 타주 나대통도 내 명령에는 늘 복종했었다!" 물살이 잠잠한 곳에 이르러 배는 아주 느리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배를 기슭에 대기란 실로 여반장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뱃사공은 선뜻 나서지 않고 어리벙벙하니 소미타 추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범장천과 노명성은 집안의 재물을 모두 나눠 주고 개방에 들어온 장로로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런 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편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의 명도 거역할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두 사람 다 집법장로요, 방주는 무슨 일이든 먼저 집법장로에게 분부를 내리는 법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방주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뱃사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목석같이 서 있기만 했다. 소미타 추우는 안달이 나서 발뒤축을 구르며 고함쳤다. "미립 아가씨, 빨리 홍칠공을 데리고 떠나라니깐. 지금 홍칠공만이 개방의 유일한 희망이오!" 그러나 미립은 꿈쩍도 안 했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는데 이까짓 계집의 목숨이야 하나도 아까울 게 없다. 다만 미기의 안위를 알 수 없어 답답하구나. 혹 죽지나 않았는지. 만의 하나 그 애도 대악당 구양봉 손에 죽고 말았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난 살아야 한다. 악착같이 살아서 동생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하나 홍칠은 어떻게 하나? 저렇게도 홍칠을 살려 주라고 애원을 하건만 내가 왜 홍칠을 살려 준단 말인가? 홍칠은 이젠 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 계집과……. 지금은 꼼짝하지 못해 저러고 있지만 거동만 할 수 있으면 곧바로 그 계집의 치마폭으로 달려갈 위인이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내가 홍칠이를……." 사개 정원도 범장천과 생사결전을 벌이면서도 틈만 나면 소리를 질렀다. "미립 아가씨, 어서 가라는데! 제발……." 사개 정원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그는 범장천의 장풍에 휘말려 그의 장력이 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범장천은 장력을 앞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사개 정원은 그 힘에 끌려 빙빙 돌며 한쪽 귀퉁이로 끌려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배에서 떨어질 판이었다. 다급해진 사개는 야잇 소리를 내지르며 힘껏 소매를 내둘렀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독사 두 마리가 범장천을 향해 휙 날아갔다. 뱀으로 상대를 해치는 것은 사개 정원이 갖고 있는 특유한 무공이었다. 이 독사는 한 마리는 대청(大靑)이고 한 마리는 소청(小靑)인데 독이 대단했다. 독사 두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범장천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뱀이 바로 앞에까지 오자 그는 손가락을 세워 가볍게 툭툭 퉁겨 냈다. 비록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장력이 대단해 독사 두 마리는 그의 손가락에 닿자마자 휙 퉁겨져 그대로 물 속으로 꽂혀 버렸다. "사개 이 놈, 그따위 잔재주로 나에게 맞서 보려고? 허, 어림도 없다. 딴생각 말고 어서 손을 멈춰라." 사개와 소미타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멀거니 지켜 보고 있던 미립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초식을 더할수록 사개와 소미타는 점점 열세에 몰렸고 그대로 가다가는 그들 두 사람은 노명성과 범장천의 손에 죽고 말 형국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홍칠이 앉아 있는 교자를 밀고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그러자 홍칠은 낯을 잔뜩 찌푸렸다. 웃는 것인지, 무언가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요!" 미립은 표정 없이 이 한마디만 짤막하게 하고는 계속해서 홍칠을 뱃전으로 쭉 밀고 갔다. 사공을 협박해서라도 배를 기슭에 대일 작정이었다. 그때 등뒤에서 날카로운 외마디소리가 들려 왔다. "가긴 어딜 가!" 노명성이었다. 그는 소매 안에서 줄 달린 갈쿠리를 꺼내 휙 뿌렸다. 갈쿠리는 쉭 소리를 내며 홍칠이 앉아 있는 교자로 날아가 퍽 꽂히고, 다음 순간 노명성은 갈쿠리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 힘에 배가 크게 한 번 기우뚱거렸다. 미립은 비틀 한쪽으로 기울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홍칠의 교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노명성은 의기 양양해서 뇌까렸다. "이 노명성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겠느냐!" 그러더니 홍칠의 교자를 향해 장풍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한번 기우뚱했던 배는 제자리를 잡느라고 다시 한 번 크게 기우뚱 거렸다. 그 바람에 노명성의 장풍은 헛나가고, 미립은 저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녀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싸움의 판세는 다소 달라져 있었다. 노명성이 홍칠 쪽으로 신경을 쏟자 범장천은 혼자서 이물 쪽을 맡아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를 상대하고 있었다. 혼자서 둘을 감당하기란 그리 수월치 않았으나 그 역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판이라 몇 십 합을 싸워도 견뎌 낼 만했다. 그는 그들 둘을 한꺼번에 이기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고 뱃머리의 높은 위치를 점하고 그저 막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노명성은 뒷짐을 지고 홍칠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홍칠이, 죽을 때가 임박했다. 알고 있나?" 홍칠은 노명성을 바라보며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교자에 앉아 손도 못 쓰고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홍칠의 그 웃음은 차라리 어설프게 느껴졌다. "이렇게 세상을 하직한다고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노명성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홍칠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리쳤다. 노명성의 주먹이 홍칠이 앉은 교자 위로 휙 날아갈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홍칠이 벌떡 일어섰다. 노명성은 그만 기겁하여 손을 딱 멈춘 채 입이 헤벌어졌다. '홍칠이 중독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거 큰일인데!' 개방 중에 미운산을 내놓고는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을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노명성도 익히 알고 있었다. 홍칠이 성한 몸으로 일어난다면 자기들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홍칠은 휘파람을 길게 내불었다. 그것은 사개와 정원에게 노명성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려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신호였으며, 그때껏 가슴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기도 했다. 홍칠의 휘파람 소리에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용기백배하여 진력을 다해 장풍을 날리고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