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44편 (44/66)
좌중은 한동안 옥신각신 갑논을박이 오갔다. 그때 범장천이 휘파람을 홱 불었다. 여느 때보다 높고 평온한 휘파람 소리가 용골묘 저 멀리까지 아득히 퍼져 나가고 좌중은 쥐죽은듯이 고요에 잠겼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범장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립 아가씨가 타구봉법을 익히지 못한 건 사실이오. 하나 지금 우리 개방에 타구봉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소, 없소?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시오!" 나서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묵묵부답이었다. 누구나가 그 두 가지 절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자기들 중에는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노유각은 통탄을 금치 못하며, 목석같이 꼿꼿이 굳어 버린 채 말이 없는 홍칠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온 천하가 떠나가도록 크게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오직 한시라도 빨리 용골모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미운산이 타고 있는 목의차를 밀며 뛰다시피 발길을 재촉했다. 시시각각으로 어둠이 몰려왔다. 풀이며 나무며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드러난 속으로 네 사람의 그림자는 한데 어울려 파묻혀 갔다. 밤이 되기 전에는 용골묘에 닿아야 했다. 멀리 강기슭에서 피어 오르는 화톳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시 대회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파수꾼들이 지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 사람은 화톳불을 보자 한결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 한순간, 불현듯 차디찬 웃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웃음 소리의 주인은 경공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 차례나 그들 네 사람 앞뒤로 훌쩍훌쩍 날아올랐다. 소씨 거렁뱅이는 대뜸 그가 바로 백타산군 노독물 구양봉인 줄을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구양봉,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구양봉은 사장을 들고 우뚝 네 사람 앞에 자취를 드러냈다. "흥, 한눈에 알아보는군. 그러나 오늘이 바로 너희들 넷의 제삿날이 될 줄은 몰랐겠지." 소씨 거렁뱅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양봉 이 놈, 네깟 놈의 재간으로 무엇을 어쩌겠다구? 그따위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렸다간 큰일날 줄 알아라, 이 노옴!" "그래도 입은 살아 있군! 이 소씨 거렁뱅이야, 오늘은 내가 사단을 내고야 말 테니 고비를 넘기겠단 생각은 꿈에도 말아라." 구양봉은 연신 기괴한 웃음 소리를 흩날렸다. 그 소린 적이 살기등등했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은 물론, 미립과 그의 남동생까지도 모조리 요절을 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야, 어서 순순히 목숨을 내놓지 못할까!" 소씨 거렁뱅이는 정황이 예사롭지 못함을 느끼고 미운산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미 방주님은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미운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립과 미기를 돌아보았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소. 자, 너희들은 어서 떠나거라. 한시도 지체해선 안 된다. 곧장 용골묘로 달려가 홍칠공을 찾아 그 여인의 간계를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 자, 어서 떠나거라!" 그 말에 구양봉이 소리쳤다. "허튼소리 마라! 가긴 어딜 간다는 게냐! 너희 넷 중 한 사람도 내 손에서 못 벗어난다." 구양봉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을 들고 소씨 거렁뱅이한테 달려들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항룡유회(亢龍有悔)를 펼치며 장풍을 날렸다. 그는 전에 전임 방주한테서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전수 받았으나 평소에는 절대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개방의 방주가 아니므로 방주의 두 가지 절기를 함부로 쓰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구양봉이 그들 넷을 모두 죽이려고 덤비는데야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구양봉과 사생결단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있는 힘껏 항룡유회 법수를 펼쳐 냈던 것이다. 소겨 거렁뱅이가 항룡유회 법수를 펼치며 장풍을 날리자 구양봉은 내심 흠칫 놀라며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몇 번 돌다가 떨어져 내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살수를 써!" 구양봉은 노하여 눈을 부릅떴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외쳤다. "어서 떠나라는데!" 그러면서 발뒤축을 한 번 구르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이번에는 견룡재전 법수를 펼치며 장풍을 날렸다. 구양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강룡십팔장은 모두 아주 강력한 법수라서 소씨 거렁뱅이가 하나하나 바꿔 가며 법수를 펼쳐 낼 때마다 폭풍 같은 장풍이 구양봉을 덮치곤 했다. 구양봉은 정신을 가다듬어 사장을 거둬 들이고 왼손 손바닥을 칼날같이 모로 세우고는 소씨 거렁뱅이의 손목 혈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소씨 거렁뱅이는 손목을 얼른 앞으로 거둬 들였다. 하나 구양봉이 어찌나 바투 다가섰는지 다시금 장풍을 날리기가 매우 곤란해졌다. 미운산은 형세로 보아 오늘 일은 반드시 피를 보고서야 결판이 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뒷일을 소씨 거렁뱅이에게 맡겨야겠다고 마음먹고는 황급히 미립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어서 나를 밀고 가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미립과 미기는 뒤에서 미운산을 밀며 내뛰었다. 미운산은 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미기야, 네가 먼저 달려가거라. 누구든 개방 사람을 만나면 홍칠공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라. 홍칠공에게 그 여인이 개방을 없애려고 간계를 쓰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다. 자, 어서 가!" "싫습니다, 아버지! 난 아버지와 같이 있겠어요!" 미기는 울먹이며 외쳤다. 미운산은 버럭 성을 냈다. "너는 구양봉이 얼마나 악독한 자라는 걸 몰라서 그러느냐? 자칫 잘못하면 소씨 아저씨와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서 용골묘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사를 망치게 돼!" 그러자 미기는 소리내어 통곡을 했다. 미운산은 더욱 노하여 소리쳤다. "울긴 왜 우느냐? 너는 미씨의 후예다! 사내대장부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거늘, 눈물이 다 무어란 말이냐." 미기는 부끄러운 듯 미운산을 바라보더니 두말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뒤를 한 번 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순식간에 미기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미운산은 마음이 좀 놓여 미립에게 말했다. "미립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 미립은 그만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고 말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운산도 그 말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미립은 묵묵히 아버지를 밀면서 앞으로만 내달렸다.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봉이 싸우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싸움은 쉬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구양봉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 앞에서 소씨 거렁뱅이와 미운산 일가를 몰살시키겠다고 장담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씨 거렁뱅이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비웃겠는가? 나 이 노독물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에 옮긴다. 오늘에야말로 놈들을 모두 몰살시키고야 말리라.' 구양봉은 온몸의 힘을 모아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사장을 휘둘렀다. 소씨 거렁뱅이는 강룡십팔장 법수를 펼쳐 가며 구양봉을 막아냈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룡십팔장 앞에서 구양봉은 도저히 맥을 출 수 없었다. 구양봉의 사장은 번번이 소씨 거렁뱅이의 장풍에 날려 뒤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대로 하여 사장을 땅에다 푹 박으며 쭈그리고 앉아 합마공을 쓰기 시작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이 그렇게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노독물 구양봉이 자기와 내력을 비기려고 해야 그를 한시라도 더 여기에 붙잡아 둘 수 있고, 또 그래야 미운산이 용골묘까지 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양봉에게 무한정 사장을 휘두르게 하다가는 자칫 그 사장에 얻어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구양봉은 쌍장(雙掌)을 들어 전력으로 막아냈다. 아무래도 구양봉의 내력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한 수 위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엉겁결에 휘청휘청 뒤로 밀려났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혼신의 힘을 다 짜내 다시 손바닥을 내뻗쳤다.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는 한동안 서로 손바닥이 맞닿은 채 뻗치기만 하였다. "소씨 거렁뱅이야, 그만하면 네 놈 재간을 다 뽐냈느니라. 왕중양과 황약사가 왜 널 적수로 보는지 이제야 알 만하다. 이제 다른 건 또 없느냐?" 구양봉이 소리쳤다. "시끄럽다. 너는 나를 어쩌지 못하고는 미운산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있거라." 소씨 거렁뱅이가 내쏘았다. 구양봉은 사실 애시당초 소씨 거렁뱅이는 뒷전이었다. 일단 미운산을 요절내기만 하면 반 이상은 성공을 거두는 거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마침내 소씨 거렁뱅이의 입가에서 선지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구양봉은 의기 양양해서 소리쳤다. "이 소씨 거렁뱅이야, 죽음이 임박했는 줄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소씨 거렁뱅이는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구양봉의 합마공이 어찌나 세찬지 그는 몸이 치떨리고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쳇, 네 놈이 미운산을 죽여? 그런 가당찮은 소리를 하다니, 꿈도 꾸지 말아라. 네 놈이 나를 죽이지 못하고는 절대로 여기를 못 벗어나!" 기실 구양봉도 소씨 거렁뱅이와 이렇게 뻗치고 있으려니 초조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언뜻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미운산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일순 난감해져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때 문득 땅에 꽂혀 있는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사장 위 작은 구멍에 들어 있던 뱀 두 마리가 땅에 툭 떨어지더니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가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기어왔다. 뱀들은 어느새 구양봉의 다리로 기어 올라 순식간에 구양봉의 손끝까지 이르러 혀를 날름 거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소름이 확 끼쳤다. 이 독사에게 물리기만 하면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소씨 거렁뱅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방의 안위에만 염두를 둘 뿐, 자신의 생사 따위는 아랑곳 않고 이를 악물고는 구양봉의 손바닥을 있는 힘껏 내밀기만 했다. 구양봉이 또 휘파람을 불었다. 독사들은 이번엔 소씨 거렁뱅이의 팔뚝으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헤헤, 이 소씨 거렁뱅이야! 이제 너는 끝장이다, 끝장!" 구양봉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독사가 팔뚝으로 기어오르자 온몸이 보좌하며 식은땀이 확 돋았으나 그래도 꺾이지 않고 구양봉의 손바닥을 맞받아 손바닥을 힘껏 내밀었다. 구양봉은 계속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따라 독사들은 연신 꿈틀거라며 소씨 거렁뱅이의 뺨까지 올라왔다. 그 순간 구양봉은 갑자기 기괴하게 세 번 웃어 젖히더니 소씨 거렁뱅이를 세차게 밀쳐 냈다. 그때 독사에게 물렸는지 소씨 거렁뱅이는 목덜미가 따끔하며 머리 위로 피가 솟구치는 듯싶더니 몸이 뻣뻣해지며 뒤로 벌렁 넘어가 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뒤쪽 벼랑 밑으로 날려 떨어졌다. 석 장도 더 되는 듯싶은 벼랑 밑은 출렁이는 강물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거꾸로 강물에 처박히고 말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구양봉은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독사 두 마리는 소씨 거렁뱅이의 머리에서 휙 날아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낚아채듯 사장을 거머쥐고는 경공 봉황력을 써서 나는 듯 앞으로 달려갔다. 쌩 하는 바람소리가 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미립은 쉬지 않고 미운산을 밀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 구양봉과 소씨 거렁뱅이가 싸우는 소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차츰차츰 화톳불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순간 뒤쪽에서 냉기가 확 끼치더니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바람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미립아, 애석하게도 소씨 아저씨는 당한 모양이다. 난 여기 놔두고 너는 어서 홍칠이를 찾아가거라, 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홍칠이를 새 방주로 내세워야 한다!" 미운산은 다급히 말했다. "난 못 가요. 아버지를 두고 나 혼자서는 못 가요." 미립은 울부짖었다. 미운산이 미립의 심정을 다 헤아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립은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지만, 홍칠을 마주 대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비록 홍칠과 석실에서 사랑을 나누긴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놈들에게 잡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는 홍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운산은 탄식하며 말했다. "미립아, 나는 너희들 남매 때문에…… 사사로운 정 때문에 개방대사를 망쳤다. 개방 형제들이 알면 그들은 필시 나를 원망할 것이다. 더 이상 개방 대사를 망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너는 내 말대로 어서 가서 개방을 구해라. 그것이 지금 네가 할 일이다!" 미립은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이승에서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사를 눈 앞에 두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가 잠시 중심을 잃고…….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아버지를 뒤에 남겨 둔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에라도 끌리는 사람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미운산은 그저 어서 가라며 손짓만 했다. 미립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눈 가득 눈물이 맺힌 채 이를 악물고 아버지에게 무언의 인사를 보내고는 용골묘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미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섬뜩한 바람소리가 허공을 휙 가르며 귓전에 내리꽂혔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시커먼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미운산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구양봉이었다. "하하하, 멀리도 못 가고 고작 여기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소?" 구양봉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흩날리며 비아냥거렸다. "소씨는 어디 있느냐?" 구양봉은 미운산을 흘낏 흘겨보았다. 야색에 가려 그 형태만 뿌여니 눈에 들어올 뿐, 미운산의 기색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를 만나고 싶소? 하하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 내 이 사장 아래 귀신이 된다면야 염라 전에서 서로 꼭 만날 터인즉!" 구양봉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미운산은 비통해 마지않으며 길게 탄식을 했다. 평소 그는 소씨 거렁뱅이와 자주 다투었고, 또 그리 가까이 지낸 편도 아니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높이 존경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가 결국은 이 구양봉의 사장에 목숨을 잃었다니……. 더욱이 이 모든 책임은 바로 그에게 있는데, 소씨 거렁뱅이는 바로 자기를 구하려다가 이렇듯 참변을 당한 것이다. 미운산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하여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짓는 꼴만 봐도 다 죽어 가는 품이로군. 이왕 죽을 몸, 기도나 드리시오." "이 노독물 놈, 죽기를 각오하고 네 놈을 처치하고야 말리라." 미운산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목의차 바퀴를 굴려 구양봉을 향해 맞받아 달려갔다. 구양봉은 병신이 다 된 미운산 쯤은 상대도 안 된다는 듯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혀 예기치 않게 미운산은 수레에서 솔개같이 가뿐히 내려섰다. 그의 손엔 어느새 지팡이 하나와 검까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미운산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또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구양봉을 향해 찔러 왔다. 비록 다리 하나와 한 손을 못 쓸망정 보기 드문 법수였다. "구양봉 이 놈, 내 다리를 끊어 놓은 원수를 오늘 꼭 갚고야 말테다." 구양봉은 껄껄 웃으며 사장을 휘둘러 미운산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미운산은 마치 날 때부터 다리 하나를 못 쓰는 사람마냥 지팡이를 짚고도 날렵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검을 휘둘러댔다. 구양봉은 적이 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껏 사장을 휘둘렀다. 악전고투였다. 벌써 20여 합이나 싸웠으나 쉽사리 판가름날 것 같지 않았다. 구양봉은 정신없이 사장을 휘두르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 이 놈의 아들딸이 보이지 않는다. 교활한 놈, 먼저 개방 대회에 보냈구나. 저 놈은 그 여인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녀는 저 놈이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 정체를 폭로할까 봐 매우 노심초사했었다. 그래서 나에게 저 놈 일가의 목숨을 모두 끊어 놓으라고……. 이 놈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린 년놈을 다 죽여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구양봉은 급히 사장을 거두며 미립을 뒤쫓아가려고 경공을 쓰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채고 미운산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구양봉 이 놈, 목숨이 아까워서 내빼려느냐!" 미운산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막 돌아서는 구양봉을 겨냥해 검을 푹 찔러 들어갔다. 검날은 구양봉의 옆구리를 스쳤다. 비록 찔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온몸에 식은땀이 쭉 배어 났다. 그쯤 되자 구양봉은 악이 받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이 놈, 일찍 죽지 못해 성화냐? 좋다! 내 사장을 받아랏!" 구양봉은 코웃음을 치며 사장을 치켜 들어 미운산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개방 대회에선 범장천의 그 한마디에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미운산의 딸이라고 해도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개방 방주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개방에 따로 그 두 가지 절기를 익히고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달리 묘책도 없어 아무도 딱 부러지게 뭐라고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범장천은 그것 보라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좌중을 쭉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제가 알아요!"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낭랑하게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한 여인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천천히 내전을 향해 걸어 나갔다. 차림새로 보아선 개방 사람임에 틀림없었지만 미모만큼은 천하일색이었다. 그녀가 72개 분타 타주들 사이를 비집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가짜 미립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반사적으로 범장천과 노명성을 돌아다보았다. 범장천과 노명성의 얼굴에도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미모의 여인은 가짜 미립 앞까지 바싹 걸어가더니 뭇사람을 향해 돌아서며 외치듯이 말했다. "내가 개방의 두 가지 절기,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아, 아가씨는 대체 누군데요?" 좌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개방 방주 미운산의 딸, 미립입니다." 여인은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말에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개방 방주 미운산은 개방 사람들에게 자기 집안일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 연고로 미운산에게 자식이 몇이나 있는지, 실제로 미립이라는 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더욱이 미립을 직접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미립이 어렸을 때 그저 지나치듯 한두 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립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또 하나 나타났으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개 정원이 제일 먼저 나서서 크게 외쳤다. "저기 저 아가씨도 미운산 방주의 딸 미립이라고 하는데, 아가씨도 미립이라구요? 그걸 어떻게 믿소? 아가씨가 진짜 미립이라고 할 만한 증거라도 있소?" 미립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춰 다소곳이 대발했다. "내가 진짜 미립이라는 걸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타구봉법을 한번 펼쳐 보이면 어떻겠습니까?" 사개 정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립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돌아서서 분타 타주 한 사람에게 타구봉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타구봉을 쥐더니 내전 앞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타구봉법을 연시해 보였다 그녀가 '전(纏)'자 구결을 외우면서 연거푸 열 몇 개 법수를 펼쳐보이자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법수 하나하나가 실로 정묘하여 개방 방주 미운산에게서 직접 전수 받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타구붕법을 모두 펼쳐 보이자 누군가가 또 외쳤다. "미운산 방주님에게서 직접 전수를 받았다면 강룡십팔장도 익혔을 터인즉, 강룡십팔장도 한번 펼쳐 보이시오." 미립은 대답 대신 타구봉을 주인에게 돌려주고는 선뜻 두 발을 모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기운을 모아 두 손바닥을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바로 항룡유회 법수였다. 분타 타주들은 비록 강룡십팔장을 쓸 줄은 모르지만 전에 방주가 쓰는 것을 보았던 터라, 강룡십팔장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모두들 경탄해 마지 않으며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아, 강룡십팔장이다!" 미립은 천천히 강룡십팔장 자세를 거두고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리고는 가짜 미립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