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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22편 (22/66)

2026-09-29 07:55:13 조회 28
"이 여인을 죽여버리라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던가요? 그런데도 아빤 내 말을 듣지 않았지요. 아빠가 그까짓 여아쯤 죽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이 년은 아무리 아빠 시중을 잘 든다 해도 저보다 나을 순 없어요. 내가 이 년을 죽여버리는 걸 보시겠어요?" 하자 미운산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네가 손 댈 것 없다. 내 손으로 죽일테니." 운낭은 내심 겉잡을 수 없는 화방수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그동안 정을 나누었던 미운산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베개머리에서는 그처럼 자기에게 부드럽고 다정하던 사내가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운낭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은 날 죽이는 게 좋을 거예요." 운낭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미립이 그것을 보고는 키득키득 웃어댔다. "아빤 속이 좁다는 걸 전 잘 알아요. 아빤 이 년을 끔찍하게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년을 죽이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죽여버리는 게 나아요. 그러니 아빤 그저 구경만 하세요." 미운산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야릇한 두려움마저 미립에게서 받은 미운산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가 죽이고 싶으면 그렇게 하려무나." 미립은 서서히 운낭에게로 다가갔다. "운낭, 네 년은 나와 아빨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아빠와 함께 있는 걸 보고도 모른 체 했었더라면 그나마 목숨은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 년이 모든 걸 똑똑히 그 눈알에 새겨두었으니 오로지 죽는 길밖엔 없어!" 운낭은 자세를 가누면서 미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러자 미립이 머리를 흔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괜한 짓은 말라구.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네까짓 년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대겠다구. 허튼 꿈은 아예 꾸지 않는 게 좋을걸. 얏!" 미립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간 운낭에게 일격을 날렸다. 미립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대번에 운낭의 양 옆구리를 겨냥했다. 운낭이 겨우 피하며 미립을 노려보았다. "이 못된 계집 같으니라고!" 운낭이 욕설을 퍼부으며 장을 날려 반격을 가해왔다. 미립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강용팔장 법수로군! 솜씨가 괜찮은데." 이 장법은 그야말로 뛰어난 것이었는데 미운산이 전수해준 유일한 법수이기도 했다. 이 법수가 바로 <향용유회>라는 것이었다. 운낭이 다급한 나머지 그 법수를 써버렸던 것이다. 놀란 것은 미립이었다. 운낭이 <강용팔장> 법수를 쓰자 쓴웃음을 치며 말했다. "과연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군. 가문의 무예까지 전수해주다니." 그녀의 말 속에는 여인의 예리한 질투심이 그득 깃들여 있었다. "얍!" 미립은 이렇게 말은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운낭에게로 쏟아졌다. 그 무예는 모두 강남 여러 패거리들에게서 익힌 명문묘기(名門妙技)였다. 그럴 때마다 운낭은 다행히 몸을 피하긴 했지만 속으론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찮은 법수 한가지로 위기를 넘기고 있다는 자신이 문득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방극에게서 <강용팔장> 중의 한가지 법식밖에는 배우질 못했다. 아무리 몸을 쓰려고 해도 <항용유회> 말고는 달리 부릴 수 있는 법식가 없었다. 원래 이 <강용팔장>은 가장 뛰어난 절기(絶技)였다. 그러나 운낭은 그중 한가지 법식에만 치중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립이 손을 뻗어오면 그 법식대로 반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힘이 모자라 그 법식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느려진 속도에 비례하여 그 위력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미립에게 비쳐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미립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는 운낭을 노려보았다. "네 년이 아빠의 이불 속에서 더 훌륭한 법식은 터득하지를 못했나 보구나!" 운낭은 그때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미립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천진스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미립이 내뱉는 말이 어디 순진무구한 계집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분명히 천하게 밑바닥을 전전하던 부류의 계집이나 써먹던 말솜씨가 분명했다. 안으로만 삭이려던 분노가 치솟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운낭은 자세를 단단하게 추스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미립에게 쏘아댔다. "네 년이 날 죽이지 못하면 내가 오늘 너를 요절내고 말테다!" 운낭은 미립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것으로 아예 미립을 거꾸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립이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운낭에게로 달겨들었다. "얏!" 그녀는 학처럼 몸을 둥둥 허공에 띄운 채 연거푸 운낭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며 운낭을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동작이 빠르던지 운낭은 미처 피할 겨를도 찾지를 못했다. "받아랏!" 미립이 연거푸 두 장으로 운낭의 어깨를 가격했다. 그리곤 몸을 한쪽으로 틀며 다시 한쪽 장으로 운낭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악!" 운낭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바닥에 사뿐히 자리를 잡고 내려앉은 미립이 입꼬리를 길게 치켜올렸다. 그리곤 곧 쓰러져 있는 운낭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미립이 손가락으로 운낭의 대혈을 누르자 한차례 꿈틀댔다. 운낭 앞에 꿇어앉은 미립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운낭아, 네 년은 이젠 사람노릇을 다 하게 되었다. 네 년은 하필 아빠를 사랑했을 게 무어냐?" 운낭은 꼼짝없이 사지를 미립에게 내맡긴 채 이를 악물을 뿐이었다. 그녀의 입과 귀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립이 다시 입을 열어 비웃음을 쏟아냈다. "네 년은 아빠가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믿겠지? 그러나 이 세상 사내치고 사랑을 영원히 지키는 사내는 없는 거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속인 걸 알고 있느냐?" 그러자 운낭이 겨우 피가 묻어있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인 날 속이지 않았어. 그인 절대 날 배신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소리는 매우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미립은 비웃을 뿐이었다. "아빠가 널 속이지 않았다면 날 속였단 말이냐! 그렇다면 아빠의 몸에 핀 독 때문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믿고 있을텐데 한번 보겠어?" 운낭은 무슨 말인가 간파하지 못하고는 휘둥그러진 눈을 돌렸다. 그녀는 미립이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미립이 웃으면서 손으로 미운산을 끌어당겼다. "아빠, 어서 일어나보세요. 와서 이 여인에게 보여주는 게 어때요?" 운낭은 더욱 긴장된 눈으로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믿어지짖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미운산이 일어서더니 천천히 자기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운낭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미운산이 이윽고 운낭 앞에 다가와 우뚝 서더니 말했다. "운낭, 임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 게 탈이었소."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운낭은 고개를 떨구었다. 운낭이 지금까지 미립에게 당한 수모를 다시 한 번 깊게 새겨주는 말이었다. 운낭이 속으로 자신의 신세를 아프게 꾸짖었다. '원래 다리를 쓰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일부러 꾸며낸 계략이었다니? 만일 저 사람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게 그동안 다정하게 대해주었단 말인가? 나와 여아를 속이면서까지 자기는 다시는 여인과 관계를 나눌 수 없는 처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 저 사람은 지금까지 가면을 쓴 채 나와 여아를 속였던 것이로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나는 저 사람을 믿고 있었다니? 여아는 목숨을 빼앗기고 나는 이런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구나. 저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운낭은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이상 삭일 수가 없었다. "당, 당신은 왜 이런 짓을 꾸몄나요?" 그러자 미운산이 아주 태연한 낯빛으로 운낭을 바라보았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고 믿었거든. 그래서 난 몸이 불편한 척 위장을 하여 놈들을 안심시킨 뒤 하나씩 처리해버리고자 한 것이지." 너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제 확연히 그들의 계략을 알게 된 운낭은 탄식을 했다. "아주 훌륭한 계책이군요......" 미운산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임자 뿐만 아니라 여아까지 나한테 속아넘어가지 않았겠어. 하루는 여아가 나한테 오더니 스스로 옷을 벗더군. 반나절이나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나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지. 그녀는 내가 이젠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닫고는 화를 내며 도망을 치더군." "그렇다면 당신이 여아를 죽였나요?" 운낭이 소리쳤다. 운낭은 미운산이 지금 아주 지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 음모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운산이 어떤 짓을 하려고 하는지 구체적인 윤곽은 짚어낼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말했다. "운낭, 임잔 알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알아버린 거라구. 그렇지 않았더라면 임잔 후에 나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텐데. 임잔 눈치가 너무 빠른 게 흠이라구." 그러자 미립이 갑자기 운낭에게 달겨들어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참 아름답군. 아빠가 당신을 선택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어." 하며 손톱으로 운낭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쁜년!" 운낭의 얼굴에는 몇줄기의 피가 고랑을 이루듯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으로 멈추질 않았다. 다시 운낭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손톱으로 긁어댔다. 운낭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칠갑을 이루었다. 미립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리를 질렀다. "네 년은 아빠가 널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해. 아빤 날마다 나와 정을 통했다구. 하하하!" 미립은 완벽한 승리자를 자청하듯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아주 방자하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미운산에게 다가가 두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간사하게 입을 놀렸다. "매일 저녁 네 년의 시중이 끝나면 난 아빠와 한 이불 속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 이불 속에서의 아빠의 실력은 네 년이 더 잘 알고 있겠지?" 미립의 말엔 더이상 천진한 여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를 않았다. 운낭은 그녀는 분명 음탕한 탕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운낭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했다. '그래, 저 년의 말을 나도 믿는다. 저 미립이란 년은 얼추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계집 같지만 속내에는 음기로 가득찬 탕녀일 뿐이다. 저토록 미운산에게 매달려 음탕한 자태를 자아내는 것만을 봐도 알지.' 운낭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그들을 향해 일침의 반격을 가하고 싶었으나 이미 몸은 망가진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개만도 못한 년놈들아!" 정말 개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이었다. 친부녀지간으로 알고 있던 그들의 행각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버러지 같은 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운산이 운낭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눙치듯 말했다. "임잔 나를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말라구. 이건 대단한 비밀이고 개방사람들 중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임자가 알게 되었으니 비밀이 새어나가면 나의 대사를 망치게 된다구." 그것은 곧 운낭의 끝장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마친 미운산이 운낭을 향해 오히려 일격을 가해왔다. 운낭은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운낭이 일격을 맞고 쓰러지자 미립이 말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처리하죠? 운낭이란 년이 고통을 받을까봐 일부러 한 손에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겠죠?" 미운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순간 마음 속으로 운낭과의 정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운낭이 미립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미립이 그런 자신의 심중을 간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운산은 미립이 쓰러진 운낭에게로 다가가 머리에 꽂혀있던 금비녀를 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립은 다시 그것으로 운낭의 가슴을 찔렀다. "아빠 곁에는 오로지 나밖에는 없다!" 금비녀가 가슴에 꽂히자 아직 숨이 남아있던 운낭이 공중으로 몸을 띄우듯 잠시 꿈틀댔다. 미립은 다시 금비녀로 운낭의 사지에 대고 무차별하게 난자를 해댔다. 미운산이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말했다. "미립아, 저 여잘 용서해라. 어서 조용히 죽도록 내버려두라구." 미립이 두 눈을 부릅 치켜뜨며 미운산을 쏘아보았다. 낯설게만 보이는 얼굴이었다. "미운산. 당신의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지 말아요. 나를 건드렸다가는 당신의 대사도 흔들리게 될지 모르니까." 하며 미립이 으름장을 놓자 미운산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운산의 눈에는 어느새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거의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운낭이 생각했다. '이 여인이 이다지도 흉악한 것을 내 어찌 몰랐단 말인가? 태산이 무너져도 꼼짝도 하지 않던 미운산이 저토록 고분고분하다니. 앞으로 개방이 처할 고초가 막심하기만 하구나.'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에 운낭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운낭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날 빨리 죽여다오!" 그러나 미립은 쓴웃음을 만들며 운낭의 적삼을 찢어 벗겨냈다.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아빠, 당신은 이 여인의 어느 곳을 가장 탐하셨나요? 이 어깨가 아닌가요? 옛사람이 미녀의 미끈한 어깨, 가는 허리 버들과도 같아라 하고 말했다고 하는데 아빤 아마도 어깨를 좋아했겠죠? 아니면 저 허리를 좋아했나요?" 미립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운낭의 어깨를 꽉 깨물어버렸다. 운낭은 더이상 지를 비명조차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저 분통함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운낭의 어깨에서 뻘건 살점이 뜯겨나갔다. "옛날 양귀비 몸의 살점이 향기롭고 흘리는 땀마저 연지와 분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던데 아빠가 좋아하는 운낭의 살점은 왜 이다지도 비린가요?" 하며 미립이 이빨로 문 살점을 퇘 하고 뱉았다. 미운산은 대답을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운낭, 네 년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절대로 여인으로 태어나지 말아야해. 더군다나 미운산과 같은 이런 사내의 여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되지." 라고 떠벌인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어댔다. 그녀는 운낭이 입고 있던 옷의 소매자락을 찢어내어 피가 묻은 자기 입술을 훔쳤다. 미운산은 머리를 푹 숙인 채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이전에는 이 운낭을 가장 소중한 여인이라고 여겼는데 오늘은 저 여인이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구나." 미운산은 차마 운낭의 최후를 지켜볼 수도 없었고 또한 미립에게 어떠한 제동을 걸 수도 없었기에 그저 시선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미립은 미운산의 거동을 살피더니 다시 운낭에게로 표독스런 눈빛을 쏘아댔다. 이제 회생할 기미는 전혀 없이 꺼져가는 운낭을 향해 다짐했다. '미운산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분명히 속으론 몹시 아플 것이다. 나 역시 미운산을 보니 마음이 좋지를 않구나. 더 괴롭히지 말고 내가 지독한 여인이라는 걸 보여주기만 해야겠다.' 그리하여 미립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운낭에게 말했다. "운낭, 네 년이 죽은 뒤 나도 네 년을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그리곤 손으로 운낭의 아혈을 짚고나서 가슴을 향해 힘껏 치명타를 꽂았다. 운낭은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했다. 미립의 손바닥 가격이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 것이라 운낭은 곧 절명하고 말았다. 미운산은 그 자리에 멍청이 서서 운낭의 시체를 들여다 보았다. 운낭의 시체를 바라보는 미운산의 심정은 아주 괴로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미립이 어느새 다가와 미운산의 목에 매달렸다. "아빠, 아빤 무얼 그리 생각하세요?" 미운산이 미립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심으로 이 여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여인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는 미립은 이미 자신이 세운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립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미립이 다시 간사스런 목소리를 미운산의 목덜미에 대고 불었다. "아빠, 아빤 저 년을 원해요 아니면 날 원해요?" 미립의 목소리에 섞여 전해지는 숨소리에 미운산은 긴장감을 맡을 수 있었다. "난 물론 널 원해." 그러자 미립이 와락 미운산의 품으로 덮쳐들어 얼굴을 들이댔다. 미립의 손에 강제로 이끌린 미운산이 침상으로 가 누웠다. 그녀는 미운산의 옷자락을 찢으며 말했다. "난 당신을 원해요. 난 당신을 원한단 말이예요. 당신은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이 나를 먼저 죽이지 않고서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을테니 그리 알아요!" 미립은 미운산의 옷을 벗기고는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내키지 않았지만 차츰 농도가 짙어가는 미립의 애무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고 말았다. 정욕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운산이 이번엔 미립을 덮쳐 옷을 찢어발기고는 짙은 애무를 했다. 두 사람은 한데 얽혀 다시 정욕을 불태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가 이제 더이상 포위를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독이 묻은 상처가 뼈속까지 들쑤시는 바람에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저마다 분사죽통을 내밀고는 어지럽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애탄했다. '이 소씨 거렁뱅이가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는 싸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놈들아! 어찌하여 십여명이나 되는 놈들이 한 영감을 그리도 못살게 구는 거냐?" 그 사람은 히히덕거리며 다가왔는데 장난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것이 아무리 둘러봐도 점잖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러나 그 소리에 개의치 않고 소씨 거렁뱅이를 치려고 더욱 거리를 좁혀왔다. 그놈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넌 누구냐? 순순히 물러서지 않으면 네 놈의 살을 포를 떠 지나는 까마귀에게 던져주겠다!" 그러자 다시 히히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웃기고 있구나. 네 놈들이 나까지 죽이겠다구.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텐데." 이윽고 그 목소리의 임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선비차림을 한 사람이었는데 아주 기괴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도사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아닌 것 같고, 공자 같으면서도 공자 같지가 않고, 어른인가 하면 차림새가 그렇지 않았고, 어린애처럼 보였으나 삼사십살은 넘어보이기도 했다. 그 선비차림이 철장방 무리 속으로 날아들며 외쳤다. "그대들은 무얼 빼앗으려고 그러나? 저 사람한테 무슨 흥미로운 물건이라도 있나?" 그가 다시 히히덕거리자 무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놈들은 그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은 눈치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눈치를 살피다가 선비차림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어서 물러가지 못하겠어!" 그러나 선비차림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얼른 손을 내밀어 상대의 발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상대는 두번이나 공중에서 돌더니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선비차림이 호탕하게 웃었다. "우화화화,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네 놈의 공중제비가 이 노완동보다 썩 나은데." 그때서야 그 자가 노완동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완동은 바닥에 널부러진 놈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퍼부었다. 넘어진 자가 화를 내며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뻗어 노완동의 눈알을 파내려고 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노완동의 눈에 박히려는 찰나 다시 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노완동이 놈의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어 작신 부러뜨리고 말았다. "재미없구나, 재미없어. 웬 놈의 손이 이다지 맛없고 더럽단 말인가? 우하하하하!" 그러면서 여전히 노완동은 비웃는 것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철장방 무리들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법수에 뛰어난 한 고인(高人)의 출현으로 모두들 잔뜩 겁을 집어먹는 눈치였다. 그들은 강력한 상대를 만난 것에 맞춰 새로운 술책을 쓰려고 했다. 무리 중 다섯놈이 갈라져나와 노완동을 재빨리 에워쌌다. 한놈이 분사죽통을 쳐들자 노완동 역시 얼른 손을 쳐들며 소매 속으로부터 죽통을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외쳤다. "그건 뭘 하는 물건이냐? 여기도 있다!" 노완동이 자기의 죽통으로 앞에 있는 두 놈을 겨누었다. 철장방 놈들은 그 죽통을 보자 모두 질겁을 했다. 그 놈들 역시 죽통 안에 들어있는 독액이 몸에 묻기만 하면 처참하게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놈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놈 모두가 물러서는 것을 보던 노완동이 말했다. "좋아, 참 좋단 말이야. 네 놈들보다 내가 독액을 먼저 뿜겠다." 미처 멀리 도망치지 못한 놈들을 향해 노완동이 독액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