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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3[북개홍칠공편] - 19편 (19/66)

2026-09-29 07:55:13 조회 35
"자네들 세 사람은 보아하니 홍안루에 음식이나 먹으러 온 손님같지는 않은데 무슨 속셈으로 날 찾아온 건지 어디 말해 보시지." 까까머리가 대꾸했다. "소씨 거렁뱅이, 네 놈이 강호에서 대단한 자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 하지만 소문만으로야 알 수 있나? 그래 정말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또 마침 네 놈의 머리를 사겠다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 안산 삼귀가 돈벌이도 할 겸 네 놈과 겨뤄 보러 왔다. 어쩌겠느냐? 한판 싸우다가 죽겠느냐 그저 순순히 목을 내놓겠느냐?" 놈이 말을 마치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 목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구? 그게 누구냐? 죽을 땐 죽더라도 누가 날 죽이려 하는지는 알고 죽어야 할 게 아니냐?" "죽으면 그만인데 그건 알아 뭐하겠느냐?" 까까머리는 이렇게 말하며 느닷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소씨 거렁뱅이의 배꼽 아래쪽에 있는 기해혈(氣海穴)을 찌르려 하였다. 적안귀라 불리는 다른 놈도 까까머리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고함을 지르며 덮쳐 들었다. 도사(道士) 행색을 한 세 번째 놈도 장검을 휘두르며 덤볐다. 놈이 쓰는 장검은 끝이 뾰족하고 폭이 아주 좁지만 보통 검에 비해 퍽 길었다. 세 놈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소씨 거렁뱅이는 삽시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녹옥죽봉을 꺼내어 세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먼저 도사의 장검을 쳐 물리치고는 몸을 비틀며 적안귀의 어깨뼈를 후려쳤다. "아이쿠!" 적안귀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 놈은 뒤로 물러서서 놀란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바라보았다.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생각보다 탁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놈은 강호에서 흑도(黑道)의 살인 백정으로서 목숨을 내걸고 나쁜 짓만 해 온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자기들보다 월등 높은 것을 알아차리고도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놈들은 소씨 거렁뱅이와 더불어 죽기로 작심했다. 도사는 장검으로 또다시 소씨 거렁뱅이를 들이찔렀다. 어깨뼈가 부서진 적안귀도 성한 손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틀어잡으려고 날뛰었다. 세 놈은 합심하여 물샐틈없이 소씨 거렁뱅이를 공격했다. 형편이 위급하게 되니 소씨 거렁뱅이의 녹옥죽봉도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술을 좋아하는 소씨 거렁뱅이인지라 그 죽봉도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변화 무쌍하여 그 법수와 법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세 놈도 그에 따라 법수와 법식을 바꾸면서 다섯 합쯤 더 싸워 보았으나 소씨 거렁뱅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적안귀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 힘이 어찌나 컸던지 적안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휙 밀려 나갔다. 소씨는 그 틈으로 몸을 날려 빠져 나갔다. 까까머리가 소리쳤다. "저 놈을 놓쳐선 안 돼!" 소씨 거렁뱅이는 녹옥죽봉으로 그 까까머리의 미간을 냅다 찔렀다. 까까머리는 녹옥죽봉 한 방에 두 눈알이 튀어나오고 피가 솟구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놈이 눈을 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내 눈! 내 눈!" 소씨는 땅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는 놈의 머리통을 다시 한 번 후려갈겼다. 놈은 그대로 혀를 빼물고 즉사하고 말았다. 이때였다. 도사가 검을 휘두르며 배후에서 공격해 왔다. 소씨가 녹옥죽봉으로 놈의 머리를 내리치자 놈은 급히 장검으로 막았다. 순간 장검이 녹옥죽봉에 맞아 부러져 나갔다. 도사는 잽싸게 끊어진 검날을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날렸다. 검날이 소씨 거렁뱅이의 어깨에 들어박혔다. 소씨 거렁뱅이는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날려 도사에게로 다가섰다. 이제 빈손이 된 도사는 당황하여 달아날 생각도 못하고 멍청히 소씨를 쳐다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죽봉을 치켜 들어 냅다 도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도사는 찍소리도 못하고 나무등걸 쓰러지듯 쿵 쓰러졌다.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적안귀에게로 다가갔다. "누가 너희들더러 날 죽이라고 시켰느냐?" 그가 물었다. 적안귀는 튀어나온 눈을 감싸쥐고 고통스레 대꾸했다. "대답할 수 없다. 그래 봐야 기껏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너희들 세 놈은 애초에 나의 상대도 안 되는 놈들이다. 어느 놈이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들은 너희들이 어리석은 놈들이지 뭐냐? 자, 어서 말해라. 누가 시킨 일이냐?" "그렇게 궁금하다면 이 말만은 해 주겠다. 네 놈을 죽이라고 한 건 바로 개방 사람이다. 네 놈의 개방에서 누가 오천 냥 은자를 내놓으면서 우리더러 널 죽이라고 했어." 역시 짐작대로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개방인 가운데 오천 냥 은자를 내어 놓을 만한 사람은 금의파 장로들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놈인지 알수가 있나?' 소씨 거렁뱅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누구냐? 누가 너희들더러 날 죽이라고 시켰느냐?" "말할 수 없다. 네 놈이 날 죽이지 않더라도 조만간에 그 놈한테 죽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너한테 죽겠다. 그 놈이 살아 있어야 다른 놈을 써서라도 널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적안귀는 이렇게 말하고는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허리춤께서 쇠사슬을 꺼내어 제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놈은 요란한 소리를 지르더니 쇠사슬을 위로 힘껏 당겨 올렸다. 소씨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놈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다. 제11장 또 하나의 미립 홍칠은 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색으로 두 눈을 꼭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보아 상처가 꽤 중한 듯싶었다. 홍칠이 미안한 심정으로 말했다. "날 구해 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당신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에요." 처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당신의 상처가 나으셨으면 가 보세요." "소저의 상처가 나은 다음 떠나겠소." 홍칠이 대답했다. 처녀가 자기 때문에 철장방 무리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어찌 모르는 척하고 떠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단지흥과 대리 사걸도 떠나가고 이 집엔 처녀와 어린 소년밖에 없지 않은가? 처녀는 잠자코 홍칠을 바라보다가 수줄은 미소를 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홍칠은 밖으로 나가 문앞에 자리를 잡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처녀와 한 방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짚단을 깔고 되는대로 드러누웠다. 날이 밝으면 처녀에게 밥을 지어 주고 약을 달여 줄 생각이었다. 처녀의 상처는 제법 심각했으나 다행히도 단지흥이 떠나갈 때 남겨 두고 간 약이 있는데다가 홍칠이 보살펴 준 덕분에 상처가 하루하루 나아갔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구질구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홍칠은 처마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갑자기 누군가 낄낄대며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앉아 있는 꼬락서니라니. 정말 상거지가 따로 없구만." 홍칠이 얼른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는데 나이는 홍칠과 비슷해 보였으나 행색은 어린아이와 같은 희한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요? 날 본 적이 있수?" 그 사람은 장난기 섞인 어조로 물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노완동이라는 사람이오. 이름은 들어 봤겠지?" 홍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노완동은 흉내를 내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어댔다. "이거 영 섭섭하구만. 그러면 이 노완동은 몰라도 전진교는 알고 있겠지? 설사 전진교는 모른다고 치더라도 나의 사형인 왕중양은 알고 있을 거요. 당신은 나와 사형을 만나 본 일이 없수?" 그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홍칠은 비로소 그의 무예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그가 전진교 교주 왕중양의 사제라면 그의 무예도 상당히 놀라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누가 오셨나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처녀가 물었다. 홍칠이 대답했다. "찾아오신 분이 전진교 사람이라고 하는데 대협(大俠) 왕중양의 사제라고 하는구려." 노완동이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당신은 개방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소?" 홍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홍칠이라 하오." "그나저나 궂은 날씨에 왜 밖에서 이러고 있소.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소?" 노완동이 물었다. "안 되오." "왜 안 된다는 거요?"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뭇사내가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오." "방금 그 여자 말이오?" 노완동이 히히거리며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그가 문득 홍칠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날 속이는구만. 집 안에 여자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뭣 땜에 거짓말을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거요?" 그제야 홍칠은 집 안에 사내애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대답했다. "그건 낭자의 동생이오. 당신은 남이니까 들어가선 안 되오." 노완동은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참말 웃기는군. 여자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들어가면 좀 어떤가?"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며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흥칠은 그를 막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얼결에 주먹을 날렸다. "이크!" 노완동이 얼른 몸을 피했다. 그는 홍칠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당신 무예가 대단하구려. 개방의 장로들인 과천청 제갈옥생과 운중연 서불성보다 퍽 낫구만." "당신이 제갈 장로와 서 장로를 어찌 아오?" 홍칠이 놀라 물었다. "알다마다. 내 이 손으로 그 두 사람을 죽여 버렸지." 노완동이 과시하듯 말했다. "뭐라구?" 홍칠은 깜짝 놀랐다. "네 놈이 우리 개방 장로 두 분을 죽였다구?" 홍칠은 분노를 느꼈다. "잘 만났다. 네 놈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제 발로 호랑이 굴엘 찾아 들었구나." 그는 냅다 장을 날렸다. 노완동이 잽싸게 홍칠의 장을 맞받았다. 두 사람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10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홍칠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긴 것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노완동이 왕중양 사제로 무공이 대단하리라 짐작했지만 이토록 고명한 무공을 지녔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싸움에만 열중하여 처녀와 사내애가 문을 열고 자기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 지켜 보던 처녀가 보다못해 말했다. "그만들 하세요. 그분께서 안으로 들고 싶어 하시는데 들어오시게 하시지요." 두 사람은 동시에 우뚝 멈춰섰다. "이것 보라구. 들어와도 된다잖아." 노완동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홍칠은 더는 노완동을 막지 않았다. 노완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선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더니 불쑥 내뱉었다. "뭐 대단한 보물이라도 감춰 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구만." 홍칠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노완동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 이제 알겠어. 보아하니 자네가 낭자한테 흑심을 품은 게로구만?" "무슨 허튼소리야?" 홍칠이 펄쩍 뛰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두세. 자네 눈치를 보니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말야.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뭐." 홍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도 사내인지라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어떤 이름 못할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노완동이 한마디로 그것을 꼬집어 내자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처녀도 노완동의 말에 부끄러운지 귀 밑까지 새빨개졌다. 두 사람의 모양새를 본 노완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 노완동은 한쪽에 따분히 앉아 있는 사내애에게 말을 건넸다. "저 두 사람은 정말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둘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게 어떻겠냐?" "당신한테 재미있는 게 뭐 있나요? 있으면 꺼내 보여 줘요." 소년이 물었다. 주백통은 주머니에서 수정으로 된 유리알을 꺼내 들었다. 소년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수정 구슬이군요. 좋아요. 전 아저씨와 놀래요." 주백통은 바닥에 구멍 몇 개를 그려 놓고 손에 들고 있던 유리알을 소년에게 나눠 주었다. 두 사람은 방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재미있게 구슬치기 놀이를 했다. 처녀가 홍칠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전 아직도 맥이 없어 견디기 어려워요. 그래서 침대에 앉은 채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세요?" 홍칠은 고개를 끄덕이고 처녀를 침대에 오르도록 부축해 주었다. 처녀가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처녀는 비록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나 같은 떠돌이 거렁뱅이 주제에 뭘 어쩌겠는가? 그저 목숨을 구해 준 데 대해 감사나 해야지.' 처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의 장법이 개방 방주의 강룡십팔장 같아 보이는데 안 그런가요?" "그렇소. 하지만 이 장법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법수와 동작이 좀 서투르오." 홍칠이 대답했다. "그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 개방 방주의 두 가지 기공(奇功)이란 걸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개방 방주가 무엇 때문에 당신한테 이 법수를 전수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처녀가 다시 물었다. 홍칠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꿈틀 놀랐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소상히 얘기하려다가 얼른 생각을 바꿨다. '이 처녀는 개방의 적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지껄였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구나.' 홍칠의 생각을 모르는 처녀가 계속 물었다. "방주께서 당신한테 강룡십팔장을 전수한 이상 타구봉법도 전수했을 테죠?" 홍칠은 그저 말없이 웃어 보일 뿐 이렇다저렇다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낭자,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아는 것 보니 실로 대단하오. 어떻게 이 강룡십팔장을 알게 되었소?" 홍칠의 물음에 처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그 항룡유회 법수는 너무 딱딱해 보이더군요. 가는 것은 부러지기 쉽고 깨끗한 것은 더럽혀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당신은 손을 쓰는 게 딱딱하기만 하고 축력(蓄力)이 모자란 것 같아요. 그러니 장을 내밀어도 용이 움직이는 듯한 감을 주긴 어렵지요. 비록 몸의 자세가 변하지 않게 하더라도 동작의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요. 항룡유회는 이렇게……." 그녀는 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앞으로 곧게 뻗더니 팔로 파도가 굼실거리는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장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 동작을 지켜 보던 홍칠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항룡유회는 홍칠 자신이 가장 흡족하게 여기는 법수였다. 그는 강룡십팔장을 익히면서 이 법수를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처녀가 자기보다도 항룡유회에 대해 더 많은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칠은 너무도 기가 막혀 그녀를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한 법수 한 법수씩 나머지 장식(掌式)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홍칠은 그녀의 설명을 듣는 동안 강룡십팔장에 대해 많은 이치들을 터득하게 되었다. "내 보기엔 이 강룡십팔장엔 보충해야 할 부족한 점들이 많은 것 같소. 방주께서도 전해 내려오면서 실전된 부분이 있다고 하셨소." 홍칠이 말했다. 처녀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방주님께서 그런 말씀도 해주셨나요?" 처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고치며 말을 이었다. "방주님께서는 당신이 강룡십팔장을 보강해 완벽한 무공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 같군요." 홍칠은 그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체 방주와 어떤 사이길래 방주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저런 얘기를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자기를 인정해 주었다는 의미이므로 내심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가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강룡십팔장을 내가? '용이 하늘을 날으니 어찌 절묘하지 않으랴' 하는 식이로구먼." 그가 큰소리로 하하 웃었다. 처녀도 따라 웃으며 홍칠을 조용히 응시했다. 한쪽에서 사내애와 한창 구슬치기를 하던 노완동은 두 사람이 강룡십팔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 불쑥 끼여들었다. "홍칠공, 당신이 만약 강룡십팔장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면 나는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겠소. 어떻소?" 홍칠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처녀가 다시 말을 건넸다. "당신은 강룡십팔장을 터득하면 개방 방주의 그 타구봉법도 터득 한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되자 홍칠은 자기가 방주로부터 강룡십팔장만을 전수받게 된 과정을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차근차근 그 경과를 이야기해 주었으나 미운산이 불구가 된 일과 소씨 거렁뱅이를 개방 방주로 정하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처녀는 홍칠이 미운산 방주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는 입을 열었다. "미 방주께서는 매사에 용의주도한 분이라 당신이 그분의 강룡십팔장을 배우게 된 건 예삿일이 아니에요. 제 생각에 그분은 당신한테 타구봉법은 미처 가르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홍칠은 또다시 그녀가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누구길래 개방의 일을 그다지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거요?" 처녀는 홍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 "당신은 개방의 타구봉법을 배울 생각이 있나요?" 홍칠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배울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홍칠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개방의 이 타구봉법은 역대 방주들에게만 전수해 내려오는 것인데 이 여인이 어찌 그 절묘한 타구봉법을 안단 말인가?' 홍칠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믿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처녀가 말했다. "당신의 기색을 보니 제가 타구봉법을 알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홍칠이 얼른 대답했다. 처녀는 웃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작은 나뭇가지 한 개를 주워 들고 가벼운 동작으로 타구봉법을 펼쳐 보였다. 홍칠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정채로운 동작 하나하나가 진짜 타구봉법이로구나. 한데 이 여인이 어디에서 이런 타구봉법을 배워 냈을까? 아무래도 이 여인은 개방 방주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한 홍칠이 큰소리로 물었다. "낭자는 이 타구봉법을 누구에게 배웠소?" "방주께서 일찍 당신한테 이 봉법(棒法)을 전수할 뜻이 있었다면 당신은 나한테 배우면 되는 거예요. 무슨 어려운 점이라도 있나요?" 처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낭잔 대체 누구요? 타구봉법을 배우더라도 낭자가 누군지는 알고 배워야 할 것 아니오?" 홍칠의 물음에 여인은 대답할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홍칠이 덧붙였다. "요 며칠 사이에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모두 이상한 일들뿐이오. 우리 개방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낭자도 그 패나 아닌지 모르겠구만. 만일 그렇다면 난 사정을 두지 않겠소." 홍칠은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노완동과 소년이 구슬치기하던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우리 누날 다치지 말아요!" 소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도 너의 누날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자기가 누구라는 걸 밝히라는 것뿐이야." 처녀는 홍칠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전 미립이에요." "미립? 미립이라고 했소?" 홍칠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는 예전에 미립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처녀와는 판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칠은 처녀의 얼굴을 새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여인이 노상 미운산의 곁에 붙어 다니던 그 미립이란 말인가? "낭자는 미 방주와 어떻게 되는 사이요? 홍칠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처녀는 돌연 왈칵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 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다못한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누난 미립이고 난 미기(米奇)예요. 미운산 방주님은 우리 아버지구요." 소년이 큰소리로 말했다. 홍칠은 깜짝 놀라 미립을 바라보다가는 또 미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난 미 방주가 있던 곳에서 미립을 본 일이 있소." 그의 어조에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 처녀는 미운산의 딸 미립이 틀림없었다. 미운산이 방주 노릇을 하기 시작한 후 두 남매는 조정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누군가에게 구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미립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 일들을 홍칠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개방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아버지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둘이서 이렇게 지내게 된 거예요." 홍칠은 비로소 미운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소나마 알 것 같았다. '보아하니 방주의 두 다리는 그 가짜 미립의 독수에 걸려 잘못된 것이로구나. 그 여인이 친딸로 가장해 가지고 그분의 신변에 접근하여 그분을 해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