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56편 (56/59)
'사부님이 오셨으니 노독물 구양봉이 용이를 감히 해치지 못하겠지만, 구천인은 악한 인간이어서 잘못하면 용이를 해칠지도 몰라.'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았다. 몸에 별다른 장애가 없는 것을 확인한 곽정은 기운을 가다듬어 구천인에게 덤벼들려 했다. 곽정이 덤벼들자 황용이 급히 소리쳤다. "곽정 오빠, 사부님이 계시니까 오빠는 빨리 가요! 가서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요." 그러나 구양봉은 곽정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도 구천인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쪽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홍칠공만 쏘아보았다. 홍칠공이 느닷없이 장을 내밀면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천인과 구양봉이 천하에 악한 인간들이므로 자기가 황약사를 찾으러 떠나고 홍칠공이 구양봉과 싸우는 틈에 구천인이 황용을 납치할 것 같아서 곽정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손바닥에 기를 모아 한 장을 세차게 내쳤다. 강룡십팔장 중에서 장법은 가장 간단하지만 위력은 가장 큰 항룡유회였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목숨을 걸고 내는 장이라 위력이 대단하여 일진광풍이 구천인을 후려쳤다. 옆에서 곽정의 솜씨를 본 홍칠공은 좋아서 껄껄 웃었다. "역시 훌륭하다! 이봐, 구천인, 내가 당신이라면 자식 같은 아이에게 지느니 차라리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리겠다." 구천인은 화가 치밀었다. 성질대로라면 동사니 서독이나 남제니 북개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재간이 모자라 첫번째 화산 무예 시합에 얼굴도 못 내민 주제이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에 물론 자기의 무공이 크게 자랐지만 동시에 그들의 무예도 더 고강해졌을 것이 뻔했다. 그리너 이번 무예 시합에도 얼굴을 내밀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계책이 있었다. 서독은 화산 무예 시합에 가기 전에 암암리에 동사와 남제, 그 리고 북개를 하나하나 없애려 하고 있었다. 구천인은 서독을 도와줌으로써 자기의 원을 풀려고 하였다. 그러는데 곽정이 공격해 온 것이다. 구천인은 일진광풍에 밀려 황용을 끌고 급히 한켠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곽정이 또 한 장(掌)의 기운을 모으자 구천인이 소리쳤다. "네 놈이 계속 무례하게 굴 셈이냐? 그럼 이 계집애를 앞세워 네 장풍에 죽게 할테다." 그 바람에 겁이 난 곽정의 장력이 단번에 약해지고 말했다. 구천인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황용은 구천인의 말을 듣고 깔깔깔 웃었다. 그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린 구천인이 버럭 화를 냈다. "망할 년의 계집애, 웃긴 왜 웃어!" "모두들 말하기를 첫번째 화산 무예 시합에 천하의 5대 고수말고 또 한 사람이 안 왔다고 그러던데요. 그가 왔다면 천하의 고수가 다섯이 아니고 여섯이 될 뻔했지 뭐예요? 누가 못 왔느냐면 철장 방주 구천인이……." 구천인은 황용이 서독과 북개 앞에서 자기를 천하의 6대 고수처럼 말하자 비록 얼굴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런가 하면 홍칠공과 구양봉도 각기 제 나름의 생각을 갖고 고개를 끄덕이며 황용의 말에 찬성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런 체했을 뿐이었다. 홍칠공은 내심 구천인 따위는 발바닥으로 보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그가 천하의 여섯 번째 고수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용에게 무슨 꾀가 있겠거니 하고 찬성을 표시했을 뿐이 었다. 서독 구양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천인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하 무림의 고수라고? 미친 소리군.' 하지만 구양봉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황용의 말에 찬성을 표시했다.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구천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북개, 남제와 동사를 죽여 버려야 했다. 그리고 나서 구천인까지 죽여 버리면 화산 무예 시합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을 테니 자연히 천하 무림의 지존까지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황용이 또 계속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보니 사람들 모두 눈이 멀었어요. 이 철장방 방주가 후안무치한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요. 다른 건 그만두고 됨됨이만 봐도 5대 고수들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데 무공인들 출중하겠어요? 한심하고도 불쌍하지요." "너 이 계집애, 주둥아리 못 닥쳐! 죽여 버릴테다." 그 바람에 홍칠공과 곽정은 걱정이 되었으나 구양봉은 은근히 기뻐했다. '그래, 죽여 버려라. 네가 그 계집애를 죽여 버리면 황약사가 너와 붙을 테고, 그러면 난 옆에서 구경하다가 기회를 봐서 달려들어 황약사를 해치우면 되지. 이것 참 묘한데.' 그런데 황용은 겁도 없이 웃는 얼굴로 구천인에게 대들었다. "나를 죽이겠다구요?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요. 서독 구양봉 선배님을 보세요. 사람들이 그를 노독물이라고 하지만 그도 우리같이 어린 후배들을 죽이진 않아요. 그러나 당신은 우리 사부님이나 아버지, 남제 같은 분과는 맞서지도 못하면서 서독한테는 굽실굽실,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는데 천하 고수는 무슨 천하 고수예요? 천하 고수가 아니라 고주예요, 고주(高走)!" "뭐 고주! 고주가 뭐냐?" 구천인이 물었다. "그것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 사부님한테 물어 보세요. 우리 사부님이 쓰시는 타구봉은 언제나 고주를 때리는 거니까." 그제야 황용이 자기를 서독 구양봉의 개라고 욕하는 것을 안 구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욕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계집애! 네가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구천인은 두 손을 펼쳐 들더니 황용을 치려고 했다. 구천인의 구문수법(狗門手法)에 의하여 혈도를 눌린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구천인의 손바닥이 황용을 후려치려는 순간 곽정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마주쳤다. '이 녀석, 어디 내 철장을 견뎌 봐라.' 구천인은 이를 사려물며 온몸의 내력을 한데 모아 곽정의 손바닥을 눌렀다. 곽정은 달려들어 얼른 그녀를 한켠으로 비켜 세워 놓고 구천인과 맞받아 싸우려 했다. 그런데 눈치를 챈 구천인은 한 손으로는 곽정의 장(掌)을 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 황용을 잡아 등뒤에 끌어다가 감추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힘을 모아 곽정의 손바닥을 눌렀다. 곽정은 온몸의 힘을 손바닥에다 응집시키며 거꾸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랑하는 용이를 위해 죽어도 좋다. 그러나 용이를 구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안 된다.' 구천인의 대머리에선 비지땀이 흘러내려 온몸을 적셨다. 곽정은 구천인의 적수가 못 되었다. 안타까운 황용이 또 소리쳤다. "오빠, 어서 가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와요!" 한편 홍칠공과 구양봉은 아주 태연한 자세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손을 움직일 참이었다. 고수들간의 싸움에선 손짓 한 번에 목숨이 달아나기가 일쑤였다. 이때 어디선가 구성진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이승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맑은 소리였다. 퉁소 소리는 여러 사람들이 놀라게 했으나 잠시 후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구양봉의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내가 홍칠공과 맞설게 뭔가? 설령 홍칠공이 천하 제일의 명호를 얻는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시에 악념이 사라진 구양봉은 홍칠공을 보고 어줍게 웃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홍칠공의 마음도 비단결같이 고와졌다. '이 홍씨 거렁뱅이는 반생을 떠돌아다니면서 악인들을 1백여 명도 넘게 죽였지. 하지만 이렇게 분주히 다니며 악인들을 없애서 무엇하겠다는 건가? 이 구양봉도 악인이긴 하지만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인재인데 내가 죽이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구천인마저 백감(百感)이 교차되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어린 자신을 철장 방주 상관위가 제자로 받아들여 무공을 가르쳐주고 서역에서 사부님이 임종할 때 자기를 방주로 임명하던 일, 그리고 그것에 불복하는 사조나 사숙을 자기와 서독 구양봉이 합세하여 모조리 죽인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조와 사숙을 죽이다니, 이건 반역이 아니던가? 그땐 내가 너무 잔인했어.' 구천인은 이렇게 뉘우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곽정과 황용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둘은 생사를 잊고 오직 자기들만의 애틋한 정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용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구천인과 구양봉을 쳐죽이고 나도 용일 따라갈 테다.' '곽정 오빠는 진정으로 날 사랑하는구나. 나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니 말이야. 몽고의 사막에 있는 화쟁 공주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게 확실해. 그러니 난 이제 죽어도 한이 없어. 살아 있을 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죽은 다음엔 그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진정으로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거야.' 툰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흐느껴 우는 소리처럼 잔잔하고 처량하게 들리던 퉁소 소리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어딘가 쓸쓸하고도 공허한 심정을 자아내게 했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황약사의 꾀임에 빠져 대사를 망치겠어!' 구양봉은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황약사, 어서 나오시오! 그 따위 도깨비 수작은 그만두란 말이오!" 그러자 홍칠공도 휘파람을 길게 불더니 소리쳤다. "황약사, 그 퉁소 소리에 이 거렁뱅이 눈물이 다 찔끔 나오는구려!" 잠시 후에 황약사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딸에게 눈길을 주었다. "용아, 별일 없느냐?" 황용은 방긋 웃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 황약사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아무리 큰 고초를 당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구양봉이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약사, 그동안 내가 여러 번 도와주었으니 오늘은 그 보답을 좀 해줘야겠소. 내가 당신 딸을 여기 붙잡아 놨으니 딸을 데려가려면 오른팔을 내놓고 가시오." 그러자 황약사는 홍칠공을 보며 웃었다. "이보시오, 흥칠공. 당신이 보기엔 내가 오른팔을 뚝 떼어 서독에게 내줄 것 같소?" 홍칠공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 생각에도 오른팔을 잘라 버리는 게 한결 더 보기 좋을 것 같소. 그러면 지금처럼 걸음걸이가 기우뚱거리지 않을 테니 말이오. 키는 몇 척 안 되는데 소매는 한 장(丈)이나 되어 당신이 걸어갈 때 보면 괴물처럼 소매만 너풀거린단 말이오. 그러니 오른팔을 끊어 버리면 소매도 짧아질 것 아니오?" "거렁뱅이 입에선 허튼소리밖에 안 나온다더니 그 말이 맞군. 내가 오른팔을 끊으면 외팔이가 되는데 그걸 감추기 위해서라도 소매를 한 장(丈) 반은 더 길게 해야 한다는 걸 모르겠소?" 둘은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황약사, 홍칠공! 둘이 힘을 합쳐 나를 상대하겠다는 수작 같은데 그런 꿈은 꾸지도 마시오!" 구양봉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사장 끝으로 구천인을 건드렸다. "이봐, 황약사가 팔을 끊지 않으면 그 계집애를 죽여 버리게." 구천인은 차디찬 웃음을 흘리더니 곽정에게 장을 밀었다. 그 바람에 곽정이 뒤로 날려 갔다. "곽정 오빠!" 황용이 놀라 소리쳤다. 곽정이 날려 가는 것을 본 순간 황약사가 몸을 날려 떨어지는 곽정을 한 팔로 부철했다. 그로 인해 곽정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땅을 딛고 서게 되었다. 황약사는 곽정의 손을 잡고 노궁혈(勞宮穴)로 더운 기운을 주입시켜 주었다. 곽정은 가슴속이 시원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황약사, 어서 오른팔을 끊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장(掌)에 당신 딸 목숨이 끝장날 것이오!" 구천인이 고함쳤다. "너하고 생사결단을 할테다!" 곽정이 소리치며 다시 구천인에게 덤벼드는 순간 황약사가 그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구천인, 이리 나와라!" 구천인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내가 자기 딸을 잡고 있는데도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릴 치는 거지? 내가 앞에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구천인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당신 눈이 멀었소? 내가 여기 있는데 왜 고함은 치는 거요? 게다가……." 구천인은 이러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약사의 등뒤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슬금슬금 걸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황약사와 마주섰다. "구천인, 돌아서 저쪽으로 가라!" 황약사가 엄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몸을 빙 돌리더니 황용 앞까지 걸어왔다. 그를 본 황용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한걸음 앞으로 나가 그 사람을 눈여겨보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구천인을 쳐다보았다.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뒤에 서 있는 구천인의 얼굴이 똑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길래 구천인이 갑자기 둘이나 나타났을까? 노독물 구양봉과 거렁뱅이 홍칠공까지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 황 약사라는 인간이 평생 괴상한 짓만 하고 다니더니 기괴한 술법을 써서 정말 살아 있는 구천인을 하나 더 만들어 낸 걸까?' 그들 둘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용의 머리에 손바닥을 대고 있던 구천인은 새로 나타난 구천인을 보자 그만 얼굴이 새까맣게 질리고 말았다. "구천인, 너희 천장이니 천척이니 하는 형제들은 어쩔 셈이냐? 오불관언하겠느냐?" 구천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 외쳤다. "우리 누이동생은 어떻게 했소?" "네 누이동생은 절정곡이라는 곳에 있다. 네가 내 딸을 놓아주지 않으면 너희 남매들을 모두 죽여 주마." 구천인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 다치지는 않았소?" 황용과 곽정은 그제야 새로 나타난 구천인이 가짜 구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짜 구천인은 구천인의 형 구천장이었다. 황용과 곽정은 그 경황에도 웃음이 나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가짜 구천인인 구천장은 동생의 물음에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저거 황……황약사가…… 내 어깨에다 부골독침을 꽂아 놨어." "아니, 이것 보시오. 황약사! 유감이 있으면 나한테 손을 쓸 일이지, 왜 우리 형님한테 이러는 거요? 우리 형님 같은 사람을 해치는 것도 무예인 줄 아시오?" "잔말 말고 어서 우리 용이나 보내라. 그럼 나도 네 형에게 꽂은 부골독침을 뽑고 살려 주지." 황약사가 빙긋 웃었다. 구천인도 황약사가 한 번 뱉은 말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선뜻 말했다. "좋소. 딸을 보내 줄 테니, 우리 형님 등에 꽂은 부골독침을 빼주시오. 그럼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나는 셈이오." 그가 황용을 놓아주려 하자 구양봉이 소리쳤다. "이 사람아, 저 바보 같은 형이야 죽게 그냥 두면 어떤가? 오늘 살려 봐야 내일이면 황약사 손에 죽을 텐데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구양봉은 그렇게 소리치긴 했으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홍칠공에게 틈을 주어 공격을 받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구천인, 네 형은 죽이지 않겠다. 우리 용이를 놓아주면 말이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널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황약사의 말에 구천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이를 갈았다. "제발 누이동생과 우리 형님을 놓아주시오, 당신 딸을 놓아줄 테니." "내가 노리는 건 너다. 그들 둘은 다치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황약사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구천인은 손바닥으로 황용의 혈도를 눌러 풀어 주었다. 곽정 옆으로 온 황용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구천장, 이리 와라." 황약사가 불렀다. 돌아온 구천장의 등에서 그가 독침 한 대를 뽑아냈다. 구천장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황약사, 당신은 날 속였소. 천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지 두고 봅시다." "천하사람이? 천하에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밤낮 도깨비 수작으로 사람들 등이나 쳐먹고 다니는 놈!" 황약사가 껄껄 웃으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이제 구천장이 가짜 구천인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등쳐먹었다는 걸 다들 알게 된 것이다. "형님, 이젠 가시오." 구천인이 볼멘소리를 했다. 비록 다정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였다. "동생, 몸조심하게." 구천장은 시골 영감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구천인, 네가 가는 곳마다 악행을 하고 다니니,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내 오늘 노독물이 보는 데서 널 시원스럽게 죽여 주겠다." 황약사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황약사, 왕중양이 죽었으니 이제 당신이 무림의 지존이 되겠다구? 이거야 삶은 소 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이지!" 구양봉이 불쑥 끼여들어 한마디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노독물 당신은 조만간 내 손에 죽고 말 테니 서두를 거 없소." 황약사가 구양봉을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글쎄, 한 20년 전이면 당신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지." 구양봉은 화가 나서 뇌까렸다. 사실 20년 전이 아니라 l0년 전이라도 구양봉은 황 약사한테 꼼짝못했을 것이다. 구잉봉은 진인(眞人)의 전수를 받아 합마공과 봉황력 이 두 가지의 절세기공을 배우고 나서야 일대 고수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구양봉의 말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황약사는 구천인 앞으로 다가갔다. "너 따위 무명지배(無名之輩)가 이 황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내 오늘 너와 상대해 줄 테니, 어디 네가 먼저 손을 써 봐라." "잘난 체하지 마라, 황약사. 내가 산중에서 철장방을 수련한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된다. 비록 철장방을 미처 익지 못해 화산 무예시합엔 가지 못했다고 너 황약사가 우쭐거린다마는 어디 오늘 이 철장의 맛을 보아라!" 구천인은 기운을 모아 공격 자세를 취했다. '쌍귀고문(雙鬼叩門)'의 자세였다. 이 자세는 강호 각파 무공의 '개문읍도(開門揖盜)'나 '창송역객(蒼松逆客)' 같은 첫번째 무공 자세였다. 그러나 황약사는 별로 개의치 않고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아, 내 저자를 죽여 네 분풀이를 해주마." 황용은 그저 방긋 웃었다. 황약사는 별다른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저 손을 척 내미니 낙영신검장법이 되었다. 그는 손을 가볍게 쓰며 구천인을 겨냥했다. 그러자 구천인은 두 손바닥으로 '역추구정(力推九鼎)' 술법을 쓰며 대들었다. 만약 상대방이 황약사가 아니라 곽정이었다면 이 장법에 벌써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황약사는 구천인의 장풍을 맞아 가볍게 떠오르며 두어 번 걸음을 떼는 듯하니 구천인의 장풍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가 왼손을 등뒤로 가져가고 오른손을 부채질하 듯 좌우로 내치니 구천인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구천인은 두 손바닥에 모든 힘을 다 넣어 쌍장(雙掌)으로 황약사와 맞섰으나 웬일인지 장을 내칠 적마다 황약사의 몸이 그 장풍 밖에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황약사가 팔괘기문(八卦奇門)을 쓰면서 일정일반(一正一反) 일생일사(一生一死)의 기묘한 보법을 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구양봉이 보다못해 소리쳤다. "황약사는 팔괘기문을 쓰고 정반양보(正反兩步)를 하는데 구천인 너는 여전히 정보(正步)만 겨냥하고 힘을 쓰니 어떻게 황약사를 맞히겠나?"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쌍장(雙掌)을 연거푸 내밀었다. 그 바람에 황약사가 맞을 뻔하기도 했으나 그를 넘어뜨리지는 못했다. 구천인은 짝짝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나길래 얼핏 보니 자기 소매들이 황약사의 장풍에 찢어져 나가고 맨살이 보이고 있었다. "용아, 어떠냐? 구천인 꼴이 우습지?" 황약사가 웃는 얼굴로 딸을 돌아보았다. "네, 재미있어요. 하지만 더 찢어 버리면 보기 흉할 테니 그만하세요." 황용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럼 이제 그만 찢을까? 그러지 말고 이 천을 조각 내서 더덕더덕 붙여 주면 보기 좋지 않을까?" 황약사의 말에 황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좀 낫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너도 날 깔보느냐?" 그는 구천인의 소매를 땅에서 주워 찢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떨어진 천을 조각 내는 한편, 몸을 날리며 구천인에게 몇 장(掌) 갈기기도 했다. 약이 오른 구천인은 있는 힘껏 공격을 했으나 황약사의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철장방 무공을 몇십 년 수련했다는 내가 황약사의 소매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그러는데 이미 옷소매를 갈기갈기 다 찢은 황약사가 장(掌)을 내밀며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장(掌)을 지(指)로 변화시켜, 구천인의 어깨를 겨냥하고는 연거푸 손가락을 튕겼다. 그 통에 구천인의 어깨에 구멍이 몇 개나 났다. "용아, 내 이제 이 녀석 어깨에 천조각을 너덜너덜하게 붙여 줄테니 잘 보아라." 황약사는 손바닥을 내밀어 구천인을 공격했다. 구천인은 강한 장풍을 피하느라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어느새 왼쪽 어깨에 천조각이 너덜너덜 달려 있었다. 구천인은 뒤로 물러서서 황약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