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편 (1/59)
[화산논검2부] - 김용 동사 황약사편 제1장 한 여인의 죽음 집채 같은 파도에 뒤척이는 돛대 복숭아나무 그늘 밑에 웃음꽃 피네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내 사랑과 더불어 바다에서 살으리 바람 자고 새날이 밝으면 푸르른 바다가 우리를 반기리니 퉁소를 불며 통쾌히 놀아 보세! 이는 대송(大宋)의 유명한 시인인 엽몽득(葉夢得)의 시 〈점강순, 을묘년에 소흥의 아름다운 정자에서 노닐며〉이다. 이 시에는 대송 당시 한 기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기인은 황약사(黃藥師)라고 부르는데 문장과 무예가 모두 뛰어나 만약 벼슬길에 올랐으면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위인이었으나 벼슬길을 외면하고 황막한 섬에 외롭게 숨어 살고 있었다. 성미가 도고하고도 괴팍스러운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동사(東邪)', 즉 동해의 사악한 사나이라 불렀다. 위의 시에는 바로 이 동사 황약사와 그의 아내 풍아형(馮阿衡)과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임안(臨安)은 대송의 도읍지라 인가가 많고 물자가 풍부하여 무척 번화한 곳이다. 대로 양쪽에는 저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여기저기에서 싸구려를 불러대며 북새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흥청거리면서 오가는 사람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갖가지 물건들에서 대송의 천자(天子)가 사는 도읍지다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길 저쪽에서 훤칠한 키의 한 서생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다. 상투를 틀어 옥비녀를 꽃은 서생의 얼굴은 말 그대로 관옥 같고 풍채는 한 집단의 두목 같다. 서생은 연한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좌우 양쪽에는 옥환이 매달려 있고 한 손에는 옥소(玉蕭)가 쥐여져 있다. 상등 옥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소는 반들반들 윤기가 돌아 유난히 돋보인다. 그는 바로 무예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강호의 호걸 황약사였다. 황약사가 늘정늘정 걸어오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것 봐요, 옥녀가 나오네요!" 황약사는 고개를 들고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길 복판에는 울긋불긋한 꽃무늬가 새겨진 예쁘장한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곱게 단장한 한 처녀가 막 걸어 나오는 참이었다. 달덩이같이 복성스러운 얼굴에 유난히 윤기가 도는 머리를 한 그녀는 진주알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가마를 둘러선 길손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길손들은 혹시 그녀가 자기를 보지 않나 해 서 공연히 가슴을 두근거렸다. 옥녀는 '결우헌(結雨軒)'이라고 하는 꽃배〔花船〕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 꽃배는 이름난 기생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황약사는 딱히 할 일도 없는지라 결우헌 안으로 휘적휘적 따라 들어갔다. 응접실 안은 한창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길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여러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서른 살 남짓한 뚱보 여인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뚱보 여인은 마주앉은 사내를 건너다보며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뚱보 여인과 마주앉은 사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해골같이 창백한 얼굴은 텁수룩하고 엄청나게 긴 머리칼에 거의 덮여 있다시피 했는데 음침하게 껌벅거리는 눈만 아니라면 틀림없이 앉아 있는 송장이었다. 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의 옆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 입은 귀공자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한복판에 앉아 있던 뚱보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옥녀가 저의 결우헌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렀군요. 열 살에 들어와 열두 살에 손님을 맞기 시작했으니까 지금까지 옥녀가 섬긴 대감님과 공자님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을 거예요. 저의 결우헌의 명성이 이만한 것도 순전히 옥녀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옥녀가 좋은 배필을 만나 시집을 가고파 하니 저로서도 붙잡아 둘 수만은 없군요.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 가운데 어느 분 이든지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돈만 내세요. 그러면 누구라도 옥녀를 데려다가 아내나 소실로 삼을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옥녀의 소원이랍니다. " 뚱보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황약사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망할 놈의 기생어미 같으니! 옥녀를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는 돈 있는 장사치나 귀공자에게 팔아먹으려는 수작 아닌가! ' 옥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길다란 손가락만 애꿎게 매만지고 있었다. 그 무심한 표정으로 봐서는 그녀가 속으로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팽팽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한결 이목을 끌었다. 기생집에서 뭇사내들의 시달림을 받아 온 여인치고는 너무나 청초하고 탄력 있는 몸매였다. 희멀건하게 생긴 웬 왕갓집 도령이 턱을 쳐들며 말했다. "좋소, 내가 은 3천 냥에 옥녀를 데려가겠소! " 그러자 장사치로 보이는 절구통처럼 뚱뚱한 사내가 썩 나서며 외쳤다. "4천 냥!" 그는 축 늘어진 매부리코만 보아도 여자라 하면 오금을 못쓰는 색마 같았다. 귀공자와 장사치가 입을 열자 좌중은 너도나도 질세라 외쳐 대기 시작했다. "7천 냥이오! " "8천 냥이오!" 눈 깜짝할 사이에 옥녀의 몸값은 9천 냥으로 뛰어올랐다. 9천냥이면 대궐 같은 기와집 한 채는 너끈히 살 만한 돈이었다. 기생집에서 밀려나는 계집을 사는 데는 그 반값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옥녀는 워낙 이름난 기생인지라 눈독을 들이고 달려드는 자가 너무 많았다. 문어귀에 서 있던 사내들은 황약사도 옥녀를 욕심내고 찾아온 손님인 줄 알고 점잖게 읍을 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황약사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내주는 자리에 앉아 사내들의 하는 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좌중이 서로 값을 올리면서 티격태격하는 중에 누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열 말을 내리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바로 산발을 한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눈을 감은 채 좌중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기생어미가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무엇을 열 말 내시겠다는 거죠 ?" 진주 열 말이오!" 사나이는 나직이 대꾸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하인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상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보물이었다. 두 하인은 상자를 내려놓더니 탁자 위에 까만 비단을 펴고 나서 뚜껑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자를 여는 순간 좌중의 눈이 모두 휘둥그래졌다. 상자 가득 넘치는 오색 찬란한 진주로 온 방안은 금세 무지개가 걸린 듯하였다. 이어서 두 하인은 펼쳐 놓은 비단 위에 진주를 쏟아 골고루 펴놓았다. 좌중들은 하나같이 금붙이나 보석을 가려내는 데는 귀신 같은 사람들로 한눈에 보통 진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주는 조개의 살 속에서 오랜 세월을 통해 자라나는 것인데, 근래에는 진주를 따는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따내는 바람에 완전히 여문 진주는 매우 귀했다. 그런데 이 사나이가 가져온 진주는 한 알 한 알 완벽하게 여문 것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좌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서로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생어미는 한 무더기 번쩍이는 진주를 보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험상궂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아니, 이 열 말이나 되는 진주로…… 정말, 정말 옥녀하고 바꾸겠다는 말씀이시우……?" 기생어미의 놀라 되묻는 말에 사나이는 집이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이 미녀를 차지하는데 진주 열 말 정도야 아까울 것 없지." 그의 통쾌한 대답에 좌중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내질렀다. 좌중은 험상궂은 사내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예쁜 계집이라 해도 구슬을 열 말이나 주고 데려가다니 쓸개 빠진 짓이 아닌가. 그 중에서 100여 알만 골라 진주목걸이 두어 개만 만들어도 만 냥은 족히 받을 텐데, 만 냥이면 옥녀 같은 계집을 사고도 남을 것이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옥녀에게로 걸어가 읍을 했다. "아가씨, 나와 함께 갑시다." 옥녀 역시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사나이는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한 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황약사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솜씨가 보통 민첩한 게 아닌데 ? 무예가 뛰어난 놈임에 틀림없어. 한데 저 놈이 왜 옥녀를 사갈까? 데려다가 여종으로 부릴 셈인가, 아니면 아내로 삼을 셈인가?' 기생어미는 험상궂은 사나이를 급히 뒤따라 가면서 물었다. "존함이라도 알려 주시지요, 네?" "소인이라고 하네." 사내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소인(巢人)이란 깊은 산속의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巢)와 조(舊)가 한자로 음이 같으므로 좌중은 그 사나이를 조씨로 간주했다. 옥녀를 데리고 마차에 오른 소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성밖으로 빠져 나갔다. 어정어정 뒤따라 나오던 황약사는 급히 떠나가는 마차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주 열 말이나 주고 옥녀를 사가는 그가 암만해도 수상했다. 그는 마차의 뒤를 따라 성밖으로 나왔다. 마차는 질풍같이 달려 저물녘에야 한 호숫가에 다다랐다. 호젓한 호숫가는 은은한 달빛에 싸여 한결 아름다웠다. 마차 위에서 세 그림자가 차례로 내렸다. 소인과 마차를 몬 소년, 그리고 옥녀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세 사람은 서둘러 불을 지펴 놓고 그 주위를 깨끗이 치웠다. 일을 마치자 소년과 옥녀는 한쪽에 물러가서 각기 두 손을 합장하고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이때였다. 소인이 마차에서 사람 하나를 번쩍 안아 내렸다. 다름아닌 옥녀였다. 한쪽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앉아 있는 여자는 옥녀처럼 곱상스럽게 생긴 아가씨였지만 사실은 옥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인은 옥녀를 땅에 내려놓고 부축해 앉히며 말했다. "옥녀,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팔려 다니니 어떻게 살겠소?" 그 말에 옥녀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뭇사내들의 싱거운 평판과 얼빠진 흥정에 놀아나다가 끝내는 사람 같지도 않은 험상궂은 장발의 사내에게 팔려 오다니 이런 사나운 팔자가 어디 있나 싶었다. 소인은 두 손으로 옥녀의 머릿수건을 벗기고 비녀를 뽑아 들더니 휙 던져 버렸다. "이런 걸 비녀라구! 내일 멋진 것으로 하나 사주지." 비녀는 쌩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니 호수로 풍덩 떨어졌다. 소인은 이번에는 두 손으로 옥녀의 귀걸이를 떼어 내더니 휙 하고 호수에 던져 버렸다. 잠깐 사이에 옥녀의 머리에 있던 장신구들이 모조리 없어졌다. '이 사내는 대단한 부잔가 봐, 나의 장신구들이 초라하게 보이니까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려고 떼어 던지는 모양인데…… 하지만 10년이나 아글타글 벌어서 갖춘 것들을 주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저렇게 버려 버리다니…….' 옥녀는 속으로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단 한마디 못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소인은 또 손을 확 뻗쳐 들었다. 가죽만을 씌워 놓은 것 같은 손가락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소인은 손가락을 이용해서 옥녀의 윤기 도는 머리칼을 등뒤로 벗어 넘기기 시작했다. 소인이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매일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 주겠어. 좋겠지?" 옥녀는 사나이의 얼음장같이 차디찬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런 손으로 매일 머리를 빗겨 주겠다니 실로 소름이 끼칠 일이었다. 하지만 옥녀는 감히 싫다는 말은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소인은 게슴츠레한 눈을 껌벅거리다가 옥녀의 뒤통수에 있는 옥침혈(玉桃穴)에 손을 대더니 불현듯 힘을 주었다. 옥녀는 눈앞이 가물가물해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조용히 쓰러지고 말았다. 소인은 옥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옥녀의 길다란 속옷 자락이 그녀의 몸뚱이에 깔려 벗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소인은 옥녀의 속옷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손톱으로 쭉 내리그었다. 속옷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알몸이 달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소인은 한동안 옥녀의 나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며 어깨며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옥녀의 몸뚱어리는 백옥같이 희고 부드러웠다. 또한 여러 해나 기생집에서 시달림을 당한 여자로서는 그 젖가슴이 너무도 풍만하고 팽팽했다. 소인은 옥녀의 두 젖가슴을 움켜쥐고 마구 주무르면서 히죽거렸다. "어허, 이 년의 젖무덤이 이토록 탐스러우니 내 내력을 기르기에 제격인걸!" 소인의 앙상하고 차디찬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옥녀의 몸뚱어리는 움찔움찔 떨곤 했다. 이 광경을 멀리서 훔쳐보고 있던 황약사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톡톡히 혼찌검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옥녀가 '결우헌'이란 기생집에서 맞은 손님들 가운데는 저 소인이란 놈보다 훨씬 더 난폭한 색광들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저 놈은 진주를 열 말이나 주고 옥녀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참말로 윤이 찰찰 흐르는 머리로군!" 소인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옥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이번에는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고 탐욕스럽게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눈동자인가! 이 눈동자에 넋을 잃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 으흐흐……" 황약사는 잠자코 소인이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문득 소인이 손을 내리고 옥녀 앞에 마주앉더니 옥녀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는 한식경이나 까딱하지 않고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품이 아마도 무슨 공력을 닦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소인은 옥녀의 두 손을 끌어다가 자기의 무릎 위에 울려 놓더니 두 손바닥을 쫙 펴서 옥녀의 통통한 젖가슴에 갖다 댔다. '저 놈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황약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옥녀에게 내력을 불어넣으려 한다면 가슴이 아닌 어깨를 잡아야 할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옥녀는 응석을 부리듯이 가늘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신음 소리는 마치 남녀간에 운우지정을 나눌 때의 소리 같았다. 옥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침내 사위가 쥐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황약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저 죽일 놈이 가련한 여자의 몸에서 음력을 뽑아 들여 자기의 내력을 기르고 있잖아? 지금 저 놈이 행하고 있는 괴상망측한 사공(邪功)은 강호에서 실전(失傳)된 지 오래인데 어디서 저 비결을 얻었을까?' 소인이 하는 짓이 무엇인가를 뒤늦게 깨달은 황약사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속으로 별렀다. '남의 몸을 망치고 자기의 힘을 기르려 하다니. 저런 패덕자를 살려 두면 세상에 좋은 일이 없을 테니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좋겠군.' 이때였다. 황약사가 막 뛰어나가려는 참인데 소인이 옥녀에게서 손을 떼고 제법 점잖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난 아가씨를 사왔지만 하룻밤이면 족해. 내일 아침엔 금은을 한 꾸러미 주어서 아가씨가 가고픈 데로 보내 주겠어." 소인은 과연 금은 한 꾸러미를 가져다가 옥녀의 옆에 놓았다. 원래 옥녀는 장사치들 속에 끼여 있던 젊은 귀공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었다. 한데 경매가 시작되자 난데없이 진귀한 진주를 말로 들이대는 이 험상궂은 사내가 나타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험상궂은 사내를 따라오며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날이 밝으면 놓아준다는 소인의 말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풀썩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옥녀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자기가 벌거벗은 알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인은 옥녀의 뒤에 옮겨 앉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옥녀, 단정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그려 보거라." 옥녀는 소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다. 바로 은 3천 냥을 내고 옥녀를 데려가겠다고 맨 처음 소리치던 귀공자였다. 옥녀는 그 귀공자와 함께 '결우헌'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마음껏 즐기던 일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소인은 옥녀의 등줄기로부터 거센 음력이 괴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화냥년 같으니라구. 기생집에서 뭇사내들과 재미를 단단히 본 모양이군.' 그는 속으로 연신 쾌재를 불렀다. 황약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구름 속에서 용이 노닐 듯이 공중운용삼현(空中雲龍三現)으로 번쩍 몸을 솟구쳤다가 소인의 앞에 내려섰다. 소인은 그냥 태연하게 앉아 있는데 호숫가에 앉아 있던 옥녀 비슷한 여인과 마차몰이 소년이 화들짝 놀라 "사불 악귀(邪佛惡鬼)!" 하고 소리치면서 일시에 좌우로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이 두 젊은이를 얼마든지 꺼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옥녀를 구해 내는 일이 급한지라 도화도의 경공보법(輕功步法)으로 살살 피해 가며 곧장 소인에게로 다가갔다. 자칭 사불, 악귀라고 하는 두 젊은 남녀도 만만치는 않았다. 사불이라고 하는 여인은 재빠르게 황약사를 쫓아와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 왔다. 악귀라고 하는 소년 역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황약사의 행동을 방해했다. 두 남녀가 어찌나 극성스럽게 달려드는지 황약사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깐 놈들이 이 어른을 막아서겠다는 게냐?' 황약사는 찰거머리처럼 달려드는 사불과 악귀를 낙영장법(落英掌法)으로 연거푸 갈겨 놓았다. 두 사람은 황약사의 드센 장법을 당해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때였다. 옥녀 쪽에서 애처로운 신음 소리가 연신 들려 왔다. 예기치 않은 사내의 출현에 급급해진 소인이 두 손에 내력을 넣어 더욱 세게 음력을 뽑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옥녀는 별 감각을 못 느꼈으나 소인이 급히 내력을 쓰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며 전신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오장육부가 빠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더럭 겁이 난 옥녀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옥녀는 기진맥진해서 더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멍청히 소인을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에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또다시 한 발 한 발 다가드는 사불과 악귀를 노려 보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짜 맛을 보여 주지 않으면 물러설 놈들이 아니군. 이 두 놈부터 죽여 없애야 옥녀를 구할 수 있겠다.' 순간 황약사의 손이 번쩍 허공을 내지르면서 '탁!' 소리를 냈다. 식지에 감췄던 엄지손가락을 튕긴 것이다. 한 가닥 무서운 바람이 사불의 두 눈을 후려갈겼다. "악!" 사불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싸쥐고 뒷걸음질을 치더니 더는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약사는 사불을 놓아두고 악귀라고 하는 소년에게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그는 조용히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도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물러서거라!" "내가 겨우 몇 해를 살았다구 죽겠어요?" 소년은 히죽 웃어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더니 한쪽으로 비켜섰다. 황약사가 소인에게로 다가섰다. 소인은 이제 왼손은 내려놓고 오른손만 옥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소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쌀쌀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황약사는 매섭게 노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도 옥녀와 몰래 정을 통하던 양반인가 보군! 하지만 한걸음 늦었어. 내가 먹고 남은 찌꺼기밖에 없으니까." 소인은 음흉한 표정으로 비양거리더니 앙천대소를 했다. 황약사는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 옥녀를 살펴보았다. 옥녀는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약사는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옥녀, 옥녀!" 옥녀는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약사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소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 놈이 죽였지?" 소인이 흐물흐물 웃으며 대답했다. "죽이다니? 난 조금도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어. 하지만 날 따르는 계집들은 모두 죽여주기를 바라니 낸들 어쩌겠나? 사실 이 어른이 손을 대기도 전에 계집들 모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야……." 문득 소인은 장발을 날리며 후닥닥 몸을 일으키더니 독수리 발톱같은 두 손을 사납게 펼쳐 들었다. "싱거운 자식, 남의 일에 웬 참견이냐?" 소인은 짐짓 으름장을 놓으면서 슬그머니 도망칠 틈을 노렸다. 그는 황약사를 보자마자 대번에 그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사불, 악귀와 싸울 때 황약사의 날렵한 장법이나 보법으로 미루어 보아 천하에 드문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황약사는 그가 도망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엄중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 세상에 남을 해치면서 공력을 연마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네 놈 같은 흡혈귀는 죽여버려야 하겠다!" 소인은 말없이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불현듯 두 손으로 원을 그리며 황약사를 잡아채려 했다. 음산한 바람이 황약사의 얼굴에 사납게 몰아쳤다. 무림 세계에서 산전 수전을 다 겪은 황약사였으나 가슴이 섬뜩했다. 소인의 쇠갈퀴 같은 두 손은 다시 황약사의 정수리를 향해 뻗쳐 오는 듯 싶더니 돌연 한 손은 가슴팍으로, 한 손은 명치끝으로 날아들었다. 황약사는 소인의 악귀 같은 장법 에 맨주먹으로 맞서다가는 욕을 보기가 십상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번개같이 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