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9편 (39/43)
야광주를 본 곽가량은 다시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번만은... 어떻게든... 꼭... 반드시... .'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곧 흐르는 침을 닦아야했다. "한눈 팔지 말아라. 대가를 너 혼자 짊어진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기관에는 눈이 없어." 천마의 한마디가 콕콕 심장을 쑤셨기 때문이었다. 곽가량은 '예.' 고분고분 답하고 천마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의 행동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영감탱이, 그렇다고 눈을 부라릴 것 까지는 없잖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느낌만으로는 족히 한 시진, 아니 서너 시진 이상이 흐른 것 같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느낌뿐이었다. 실제로는 채 일다경도 지나지 않았다. 일행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천마가 몇 걸음을 옮기고, 주위를 살피고, 일행을 손짓하고, 일행이 따라가고... 똑같은 행위의 반복에 점차 집중력이 둔화되어 가는 것이었다. 물론 일행은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점차 무신경해진다는 것도, 그렇게 되는 원인 중에 가장 큰 원인이 지극히 단조로운 통로의 형태에 있다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한줄기 핏자국이 발견됐다. 그 핏자국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또 다른 피의 주인은 일행 중에서 나오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멈춰!" 간만에 천마의 음성이 활기를 띠었다. 그 점은 세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핏자국은 바닥에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방원 이삼 장에 걸쳐 작은 필(筆) 만한 것에서부터 손톱 만한 것까지 수십 개나 되었다. 마침내 요리조리 천장과 벽 등을 훑어보던 천마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곽가량이 물었다. "아시겠습니까?" 천마는 곽가량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강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칼, 잠깐 빌리세." 강산은 선뜻 금강을 넘겼다. "흠, 무거운데." 천마는 금강을 잡고 가볍게 한번 휘둘러본 후, 갑자기 훌쩍 뛰어올랐다. 중인들이 위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벌써 때가 늦어, 천마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 중인들은 의아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마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야광주였다. 중인들은 비로소 그가 왜 뜀뛰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천장을 보니 본래 야광주가 박혀 있었던 장소가 움푹 패여 있었다. 다만 중인들도 야광주의 용도만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천마가 금강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뛰라고 하면 뛰게. 이 대협께서도... ." "알겠습니다." 한데 말을 하던 중 천마가 갑자기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자네, 내 말 듣고 있나?" 그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는 당연히 곽가량이 존재했다. 그는 입을 헤 벌리고 반쯤 돌아간 눈으로 천장의 패인 곳을 보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가지 않은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으응... 헛! 아, 예예. 그럼요, 듣고 말고요." 천마는 냉랭히 말하고 돌아섰다. "안 들었다면 좋겠군." "에헤헤...!" 곽가량은 입맛을 다셨다. 천마는 신중히 자세를 잡고 앉았다. 보아하니 야광주를 굴릴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야광주가 떠났다. 똑, 또르르르-! 야광주는 천천히 굴러갔다. 중인들의 시선은 야광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특히 곽가량의 시선은 뜨거웠다. 반금련(潘金蓮)을 처음 본 서문경(西門慶)이 지었음직한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야광주가 일 장 정도를 굴러간 순간이었다. 스으! 소리도 없이 바닥이 열렸다. 바닥의 반 정도가 일순간 꺼져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강전(鋼箭)의 폭우가 쏟아졌다. 쏴아아! 강전은 정확히 그 꺼진 공간 속으로만 쏟아졌다. 또 쏟아진다 싶은 순간 그쳤다. 바닥이 열린 동시에 강전이 쏟아졌던 것처럼 언제인지 모르게 바닥도 이미 닫혀 있었다. 겨우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채 가슴속 서늘한 기운을 삭일 시간도 없이 천마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지금이다." 중인들은 분분히 천마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간 뒤 중인들은 멈췄다. 곽가량이 가장 멀리 날아갔다. 그는 천마를 질러 삼 장이나 멀리가 있었다. 천마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곽가량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에헤헤... ." 그러더니 천마의 곁에 바싹 붙어 아양을 떨었다. "천불 선배님, 왜 기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입니까?" 본래 곽가량의 질문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미 드러난 사실들로 미루어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관은 재정비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때문에 곽가량의 목적은 답이 아니었다. 당연히 천마에게 우쭐할 기회를 만들어주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물론 천마도 머리가 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면 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부인지 빤히 알면서도 받으면 기분 좋은 것이 칭찬 아닌가 말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아직껏 곽가량은 침 뱉는 인간을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천마가 힐끗 곽가량을 일견하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 바본가?" 곽가량은 매서운 눈으로 천마의 뒤통수를 째렸다. '송자영은 새 대가리, 천마는 늙다리.' 잠시 후, 곽가량은 강산에게 접근했다. "저, 저기 강형! 칼 좀... 빌립시다." "...... ." "강형! 칼 좀." "하찮은 돌 따위나 캐라는 칼이 아니오." 강산이 싸늘히 내뱉고 성큼성큼 앞서갔다. 곽가량은 부아가 치밀었다. '염병, 고기 먹는 입 따로 있고 푸성귀 먹는 입 따로 있다더냐? 송자영은 새 대가리, 천마는 늙다리, 강산... 강산... 그래, 너 잘났다, 너 잘났어.' 일행은 그 뒤로도 몇 번의 함정을 더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마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와중에 간간이 앞쪽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점점 비명소리가 가까워졌다. 제 24 장 흑선분면지주(黑線粉面蜘蛛). 1 작은 석실이었다. 한 면의 길이가 채 이 장이 되지 않는 작은 석실이었다. 하지만 석실은 그다지 비좁아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의자와 한 개의 탁자, 그 두 가지 물건이 모든 가구를 대신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단아(端雅)하다기보다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석실 내부에는 모두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삼십 중반의 인물로, 툭 불거진 광대뼈와 한 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이 매우 독선적인 느낌을 주는 자였다. 바로 흑지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북도주인 위지광이었다. 또 한 사람은 양평이었다. 그는 여전히 산발한 머리와 제멋대로 자란 수염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헐렁한 흑포 차림의 복면인이었다. 위지광과 복면인은 탁자를 마주한 채 앉아 있었고, 양평은 입구 바로 옆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위지광은 흑포 복면인을 쳐다보며 잔잔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가장 궁금한 점은 왜 손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거요. 사마자웅이 죽음을 당할 때도, 고량이 위험에 빠졌을 때도.... 비록 자당(慈堂)의 명성에 누를 끼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수하들이 아니었소?"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쇠를 긁는 듯 매우 듣기 거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강합니다. 소방주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누구 한 명 절정에 이르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사마자웅은 구청연의 삼 초를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위지광은 잠시 물끄러미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좋아. 상황이 상황인만큼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오?" 복면인이 곧바로 대답했다. "구청연입니다." "그의 정체에 대해 집히는 것이라도 있소?" "나는 그가 삼영(三影)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지광의 눈에서 짧은 기광이 번뜩였다. "삼영이라면, 무천궁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다는 그 세 명의 신비인들을 이야기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말만 무성했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각기 금적(金笛), 은령(銀鈴), 동환(銅幻)으로 불리는데, 그 중 딱히 한 사람을 꼽으라면 동환을 꼽겠습니다." 위지광은 고개를 돌려 양평을 보았다. "양 노사(老士)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내 양평이 대답했다. "유력합니다." 하지만 입만 열었을 뿐, 조는 듯 꾸벅이는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위지광은 거듭 물었다. "그가 만약 동환이라면 실력은 어느 정도겠습니까?" "여기 계신 두 분과 속하, 그리고 폐관(閉關)중인 세 분 정도만이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대천왕(四大天王) 정도로는 안되겠습니까?" "아마 힘들 것입니다." 위지광은 시선을 다시 복면인에게로 돌렸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그러더니 곧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속하, 왕인수입니다." 이내 석문이 열리고 왕인수가 실내로 들어왔다. 그는 힐끗 복면인을 일견한 후 위지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머무는 것으로 보아 복면인의 존재가 의외인 모양이었다. 위지광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강산이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았소?"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한데... ." 왕인수가 복면인을 눈짓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위지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는 분이니 이야기해보시오." "예, 강산이라는 자에 대한 조사는 이미 강호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자들 중에서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루어졌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지략(智略)에 능하고 대적(對敵) 경험이 풍부하여 결코 강호에 처음 출도한 신출내기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이에 맞는 고수 삼천육백여 명의 자료를... ." 위지광이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결론만 말하시오." 왕인수는 서둘러 이야기를 마쳤다. "그들 중 강산과 나이와 용모, 행적, 무공 등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계속 제외시키고 나자 결국 세 명이 남았습니다. 칼을 쓴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외 어떠한 사실도 밝혀진 것이 없는 중원제일의 살수(殺手) 쾌도무영(快刀無影), 신비에 쌓인 청해(靑海) 요궁(耀宮)의 소궁주(少宮主), 그리고 십여 년 전부터 남해(南海) 해남검파(海南劍派)에서 비밀리에 키워내고 있다는 차기 문주(門主) 소설한(素雪瀚). 그렇게 세 명입니다." 위지광은 한 사람씩 그 이름을 되뇌어보았다. "중원제일살수 쾌도무영, 청해 요궁의 소궁주, 남해 해남검파의 소설한.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자들이로군."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참, 세 분을 모시러 갔던 최관은 어떻게 되었소?" 갑자기 왕인수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지광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들이 괴팍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방(幇)의 위기에 나몰라라 하지는 않을 텐데." 위지광의 눈치를 살피던 왕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속하가 가보겠습니다." 위지광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래주겠소? 하면 될수록 빨리 돌아오시오." "예. 그럼, 이만." 왕인수는 대답하고 석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 약간의 시간을 기다려 위지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복면인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이제 쥐새끼들을 하나 하나 때려잡을 시간이 됐습니다.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복면인은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지광이 앞장서서 석실을 나서고, 그 뒤를 복면인이, 다시 그 뒤를 양평이 따랐다. * * * 정욕궁에 들어선지 한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일행은 어느 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원형 석실로 반경 삼 장여의 매우 넓은 곳이었다. 한데 석실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천마가 걸음을 멈췄다. "응?" 이어 눈빛을 빛내며 주위를 쓸어보았다. 무언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뒤따라 들어선 강산도 이내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석실에 입구가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곧 일행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는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응? 이거, 돌아가는 것이 좋겠는데." 뒤이어 들어선 이항이 불현듯 소리쳤다. "후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슷한 시기에 곽가량도 입을 열었다. 강산과 헤어졌던 때가 생각난 것이었다. 제한된 공간... 과연 조건은 당시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강산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이 선배, 곽형, 서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위험한 곳은... ." 곽가량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강산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자신들이 들어온 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문은 그때까지 열려 있었다. "열려 있어...?" "엥?" 곽가량과 이항이 알 수 없다는 듯 문을 바라보았다. 강산이 위험하지 않다고 보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자신들이 들어온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천마의 태도였다. 난처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자신들보다 앞서 간 소삭연혼대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다. 만약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면, 이곳 석실 이상 적당한 장소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는 핏자국도, 부숴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함정이 아닌 통로가 될 확률이 높았다. "왜 그러십니까? 잘못된 것이라도?" 강산은 천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때까지도 천마는 주변을 쓸어보고 있었다. 하나 천마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잠시 후,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원형이 아닌 장방형 광장이 있었고, 분명히 저곳에 통로도 있었는데?" 강산은 다시 물었다. "혹시 오는 길에 비밀통로를 놓쳤을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비밀통로 한두 곳이 없데서야 말이 안되지. 하지만 그것은 관계없어. 원래 몰랐던 사항이니까. 하지만 여기는 중앙통로란 말이야. 이것 참, 중앙통로가 벌써 끊길 리가 없는데... 낭패인걸. 길이 끊겼으니." "그렇다면 이곳에서 통로를 찾아보기로 하지요. 앞서간 자들도 다들 사라졌으니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통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수밖에. 좋아, 흩어져 찾아보자고." 한쪽 벽으로 걸음을 옮기던 천마가 문득 돌아서서 말했다. "자네는 거기 가만히 있어." 곽가량이 볼멘소리를 토해냈다. "저... 말입니까?" "그래, 거기 가만히 있어." "그렇지만... ." 곽가량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으나 천마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곽가량의 볼딱지가 두둥실 부풀어올랐다. 일행은 사방으로 흩어져 석벽을 살폈다. 곽가량은 몇 번 천마의 눈치를 살피다가 벌렁 제자리에 누워버렸다. 천장 중앙에 박혀 있는 야광주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다. 작은 호박만 한 것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것보다도 컸다. 꿀꺽! 여의주(如意珠)가 있다면 딱 그만할 것 같았다. '우선은 칼 가진 놈을 하나 잡아야하는데... 빌어먹을! 형당에서 칼을 그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한데 바로 그때였다. 세 사람이 찬찬히 석벽을 살피고, 곽가량이 거듭 침을 삼키고 있을 때! 그르릉-! 입구가 닫히기 시작했다. 입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자는 곽가량이었다. 곽가량은 황급히 일어나 입구로 뛰었다. 다행히 그는 철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철문을 몸으로 막고 소리쳤다. "빨리!" 그러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철문의 압력은 한 사람이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남은 세 사람이 서둘러 신형을 날려보았지만, 아쉽게도 네 사람이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곽가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을 뺐다. 쿵! 짧은 정적이 흘렀다. "왜 나가지 않았나?" 천마의 물음에 곽가량은 턱으로 강산을 가리켰다. "강형과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합니다." 천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쥐꼬리만한 의리는 있는 놈이로구나." 하나 그 소리는 다른 이들의 귀에까지 전달되지 못했다. 음성이 낮기도 했거니와, 갑자기 들려온 정체불명의 기관음 때문이었다. 그그그! 위험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곽가량이었다. "억? 천장!" 외마디 소리에 중인들은 다같이 천장을 보았다. 그그그그그-! 천장이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 지름 팔 장에 달하는 거대한 천장이 통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이런." "헉!" 중인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 강산이 소리쳤다. "곽형, 입구에서 물러나시오." 강산은 금방이라도 출수할 것처럼 금강을 가슴 앞에 곧추세우고 있었다. 곽가량은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재빨리 비켜났다. 강산의 전신에서 아지랑이와도 같은 기운이 피어났다. 칼끝에서는 맑은 광채가 한 자나 뻗쳐 나왔다. 한데 그 순간,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쿵쿵쿵쿵...! 석벽에 온통 입구, 아니 구멍이 생긴 것이다. 구멍은 틈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고 입구라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딱 한 사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그 모양이나 크기가 석관(石棺)에 딱 어울렸다. 뒤까지 막혀 있는 게 더더욱 그러했다. '들어가라는 것이냐?' 강산은 일순 망설였다. 폭약의 위험을 감수하고 닫혀진 문을 돌파하느냐? 아니면 석관의 위험을 감수하느냐?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이상 확률은 반반이었다. '빌어먹을, 조그만 단서라도 있었으면.' 그 순간, 송자영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며칠 전 흑지의 입구에서 나눴던, 헤어지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였다. '그래. 나라면 반드시 그 안에 어떤 장치를 해놓았을 거야. 힘으로 해결하려는 무식한... 분들을 위해서. 분? 아니, 참, 오호호... 이를테면 폭약 같은 것 말이지. 폭약!' 강산은 진기를 풀었다. "들어갑시다." 천마가 물었다. "이편이 낫겠나?" 강산은 석관 하나를 찾아 들어가며 말했다. "일단 핏자국이나 피를 씻어낸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이 오십여 개의 석관 모두가 죽음의 함정으로 이어져 있다고도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잘못 판단하여 떼몰살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 싶습니다." 그때 천장은 이미 중인들의 머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곽가량은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하나의 석관을 선택했다. 강산의 바로 옆이었다. "염병, 장가도 못 가보고 관속에 들어가다니." 순간, 불쑥 강산의 손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손에 용수가 쥐어져 있었다. "빌려주는 것이오." 곽가량은 코방귀를 날렸다. 하지만 냉큼 받았다. "킁! 빨리나 줄 일이지. 아무튼 고맙구려." 강산은 곽가량에 이어 이항에게도 한 가지 물건을 건넸다. 그 역시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선배,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이항은 얼떨결에 목갑을 받으며 물었다. "이게 뭔가?" "천구입니다." "천구가 무엇...?" ...... "뭐?" "뭐라고?" 이항과 곽가량이 동시에 악을 썼다.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조심하십시오." 이항은 무언가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곽가량의 음성이 들렸다. "이 선배, 나랑 바꿉시다." 이때, 천장은 벌써 중인들의 정강이 어림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항은 겨우 입을 뗐다. "나중에 바꿔주겠네." "약속했습니다. 다른 소리하면 재미없을 줄 아쇼." "염려 말게." 쿵! 마침내 천장이 완전히 내려왔다. 때를 같이하여, 덜컹! 바닥이 사라졌다. 강산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예상됐던 일인 까닭이었다. 2 구멍은 작았다. 두 사람 정도면 꽉 찰 정도였다. 사면(四面)은 기름을 발라놓은 듯 매우 미끄러웠고,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웠다. 하지만 강산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금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산은 조금씩 미끄러지다가 금강을 박아 멈추고는 하였다. 그렇게 대여섯 번이나 했을까? 마침내 바닥이 보였다. 일견하기에 바닥은 평범했다. 요 며칠 사이 지겹게 봐왔던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거꾸로 박힌 창이나 검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현인정의 도움을 받아 함정을 빠져 나왔을 때처럼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잠시 후, 강산은 지면을 밟았다.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졌다면 밟게 될 위치에서 일 장 정도 벗어난 곳이었다. 과연 그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겪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산은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느 동굴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