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8편 (38/43)
그의 입술이 열리며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제법 대단하다는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너도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걸 인정해 줘야 겠다." 그의 양 손이 조금씩 쥐어지며 그에 따라 가공할 기운이 손가락 끝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손가락이 움직이기만 하면 곽가량의 목숨은 저승으로 직행할 게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그긍! 갑자기 어디선가 괴이한 음향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쇠와 바위가 마찰을 하면서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나 그 소리를 듣자 곽가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의 정체 보다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이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는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렸다. 그곳, 그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그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그토록 열려고 애를 썼던 녹이 잔뜩 슬은 철문이었다. 지금, 그 철문이 나직한 굉음과 함께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 23 장 정욕궁. 1 강산의 뒤에는 오순 가량의 중노인 한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 곽가량의 시선에는 오직 강산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가... 강형....!" 그는 마치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어린애처럼 금시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얼굴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강형....!" 늑대 우리 속에서 어미개를 만난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이러할까? 강산을 부르는 곽가량의 음성이 얼마나 애처로웠던지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 조차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였다. 강산은 곽가량의 피에 절은 몰골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한데 그가 채 곽가량에게 다가오기도 전, "네가 바로 강산이로구나!" 음충한 폭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맹렬한 기세로 그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강산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고량이 양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린 채 자신의 미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오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강산은 곽가량을 피투성이로 만든 것이 고량이라고 생각하고는 불같은 살심이 끓어올라 서슴없이 금강을 뽑아들고는 정면으로 그에게 맞서갔다. 쾌애액! 그의 금강은 그야말로 뇌전과도 같은 기세로 고량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손을 쓴 것은 고량이 먼저인데도 나중에 발출된 강산의 금강이 먼저 고량의 면전에 도달했다. 그 눈부신 빠르기에 고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고량은 사실 강산에 대한 소문만 몇 번 들었을 뿐 그와 직접 손속을 겨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강산의 칼을 휘두르는 솜씨는 고량이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났던 것이다. 그가 낙광영을 몇 합만에 간단히 쓰러뜨렸다는 말을 듣고 별로 믿지 않았었는데 막상 부닥쳐보니 그게 아니었다. 고량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전력을 다해 자신의 성명절기인 창응십팔조(蒼鷹十八爪)를 전개했다. 고량의 별호가 신응인 만큼 그는 경신술과 조공(爪功)에 조예가 깊었다. 지금도 강산의 옆으로 몸을 돌아 금강도를 피하며 질풍노도처럼 여섯 개의 조영(爪影)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매와 같았다. 하나 아쉽게도 오늘 고량은 상대를 만나도 너무 잘못 만났다. 예전의 강산이었다면 고량의 재빠른 신법에 고전을 면치 못했을지 모른다. 하나 지금 강산은 강호제일의 신법(身法)인 암향부를 익혀 신법에 관한 한 최고의 수준에 올라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런 상대에게 빠른 신법을 이용한 공격을 펼친다는 것은 섬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량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막 자신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창응십팔조중의 절초인 육합신뢰(六合迅雷)를 펼쳐 강산의 관자놀이를 후려쳐 갔을 때였다. 그의 육합신뢰는 창응십팔조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벼락같은 위력이 있어서 지금처럼 상대의 우측을 돌아 시전하면 누구도 제대로 피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채 반도 뻗어나기 전에 강산의 신형이 갑자기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고량이 움찔 놀라 미처 손을 거두기도 전에 강산의 몸은 처음 위치에서 옆으로 일 장 이동한 곳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고 생각한 순간 강산의 손에 들린 금강도는 섬뜩한 빛을 뿌리며 고량의 옆구리를 쑤셔오고 있었다. 고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칼솜씨가 뛰어난 건 알겠는데, 방금 전의 그 몸놀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예전에 이와 같은 몸놀림을 본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나 이런 의문도 잠시, 고량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사력을 다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쉬악!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던 금강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고량의 발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고량은 모골이 송연해 졌으나, 신응이라는 명호 답게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공중제비를 하며 강산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쐐쐐쐑! 허공이 온통 고량의 갈쿠리같은 손그림자에 휘감겨 버렸다. 고량이 창응십팔조중의 삼대절초인 비응분사(飛鷹分蛇)와 홍비명명(鴻飛冥冥), 천망라작(天網拏雀)을 연거푸 전개한 것이다. 가히 '귀신들린 매'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놀라운 솜씨였다. 하나 그때 방금 전 까지 고량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던 강산의 칼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헉?" 고량은 강산의 칼이 이토록 신묘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라 대경실색하여 다급한 헛바람을 토해냈다. 고량의 손가락이 강산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는 것보다 강산의 칼이 고량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양분(兩分)해 들어오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던 것이다. 고량은 안색이 핼쓱하게 변한 채 허겁지겁 손을 거두며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스슥! 강산은 그의 행동을 미리 예측이나 했었다는 듯 미끄러지듯 두 걸음 이동하여 고량의 코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금강은 무서운 속도로 고량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가공할 동작이었다. 고량은 더 이상 피할 여력을 잃고 무방비 상태로 가슴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막 강산의 칼이 고량의 가슴을 사정없이 관통하려는 찰나, "손에 사정을 두어라!" 갑자기 어디선가 다급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강산은 그 음성이 자신을 따라왔던 천마의 것임을 알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강산과 함께 이곳에 나타났던 천마는 처음부터 고량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량이 금시라도 가슴이 난자당할 것 같자 흠칫 놀라 황급히 외쳤던 것이다. 하나 그의 외침은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강산은 천마의 외침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팔의 힘을 절반이나 빼었으나, 금강은 어느 새 고량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푹! "크윽!" 고량의 신형이 급살맞은 기러기처럼 바닥에 떨어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강산은 황급히 금강을 회수하며 천마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로..." "이런!" 의아해하며 자신을 쳐다보는 강산을 제치고 천마는 황급히 고량에게 다가갔다. "후욱, 후욱, 후욱!" 고량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뚫린 가슴으로 벌건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해도 살려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천마는 고량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어 재빠른 동작으로 그의 가슴 혈도 몇 곳을 짚었다. 그러자 줄줄 흘러내리던 피의 양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고량이 의아한 눈빛으로 천마를 응시했다. "후욱, 다... 당신, 커억!" 그러다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움큼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빨간 핏덩어리 사이로 점점이 검붉은 내장부스러기가 섞여 있었다. "우- 우웨엑! 웩!" 토혈(吐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가슴과 복부에 산처럼 이물질을 쌓을 때까지, 코와 입으로 누런 물을 게워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에 따라 고량의 고개는 점점 옆으로 젖혀졌고, 눈동자는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갔다. 그런 고량을 천마는 다만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토혈이 멈췄다. "웩!" 큰 한소리와 함께 더 이상 아무 것도 토해내지 않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자꾸만 지면으로 박히던 고량의 고개가 발딱 섰고, 눈동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금 초점을 잡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똑바로 천마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천마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생명을 다하는 촛불이 가장 밝은 빛을 뿜어내듯 고량의 변화가 단순한 회광반조(廻光返照)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요...?" 고량이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한 어조였다. 비로소 천마의 입이 열렸다. "량아... 모르겠느냐?" 한없이 부드러운, 어미가 자식을 부르는 그런 음성이었다. 순간, 고량의 눈에서 초점이 다시금 사라졌다. 다만 이번에는 전과 같지 않은... 아련한 옛 추억을 되새기는 그런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고량의 몸뚱이가 부르르 잔 경련을 일으켰다. 어느새 흐릿했던 초점도 돌아와 있었다. "다, 당신... 천, 천 어르신... ." 천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르륵! 고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말 못하는 미물 마냥 눈물만 흘리던 고량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보, 복... ." 하지만 고량은 미쳐 그 한마디를 끝내지 못했다. 감지 못한 두 눈에서는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마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고량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느릿느릿 손을 뻗어 고량의 눈을 감겨주었다. "미안하구나. 량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던들...." 그는 고량이 마지막으로 하고싶었던 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복수(復讐)'였다. * * * 곽가량은 곧바로 내상약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상처가 워낙 위중했던지라 칠주천(七周天)을 마치고서야 겨우 내력(內力)의 반을 회복할 수 있었다. 깨어나 보니 이항 역시 혈도가 풀려 깨어나 있었다. 일행은 서로의 무사함에 기뻐하며 지옥과 같았던 형당을 빠져나갔다.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산은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곽가량이 그 사연을 깨달은 것은 강산에게서 형당을 찾은 이유를 듣고 난 후의 일이었다. "강형이 때맞춰 도착하지 않았다면... 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구려. 한데 어떻게 이곳을 찾게 되었소? 날 봤소?" "일행 중 누군가 잡혔다면 형당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소. 다행히 이분 천불 선배께서 형당의 위치를 알고 있었소." 그 누군가가 송자영을 이야기한다는 것쯤은 팔푼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한 시진 후! 중인들은 곽가량이 숨어 있던 그 삼층 전각의 꼭대기 층에 모여 있었다. 그때까지 일행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산은 단황수사 현인정과 삼마, 휴우신승 공현을 만나게된 사연을 간략히 이야기했고, 이항과 곽가량 역시 헤어진 후 겪은 일은 간추려 이야기했다. "사로잡혀 겪은 고초도 많았지만 덕분에 얻은 소득도 적지 않네. 혈도를 짚히기 전까지 포로들이 토해낸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었거든. 소삭연혼대는 총 여섯 개 조(組), 이백사십여 명이 왔다고 하네. 그 십이지신이라는 자들과 그 외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겠어.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한 자가 한 명도 없었거든. 어쩐지 그들도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네." 곽가량이 이항의 말을 받았다. "지독하게 철저한 놈들이군요. 같은 편 까지도 정확한 인원을 모르다니... 아무튼 십이지신 중 최소한 여섯 명은 왔겠지요?" "아무래도 그럴 테지."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곽가량이 천마를 보며 물었다. "천불 선배께서는 고량을 알고 계신 듯 한데...?" 천마의 표정은 그때까지도 굳어 있었다. 아직도 고량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마는 짧은 한숨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후-! 고량은 과거 금형을 보필하던 소동이었다." 이항이 물었다. "금형이라면 칠대공의 둘째인 수공 금사신조 금비 대협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맞소. 우리는 서로의 위치가 어정쩡해 많은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할 일이 생기면 그 아이가 다녀가고는 했었소." 불현듯 강산이 끼여들었다. "고량 혼자뿐이었습니까?" "아니, 모두 네 명이었다." 이번에는 이항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름이 혹시 왕인수, 탁천군(卓天君), 사마자웅이 아닙니까?" 천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대협께서 그 아이들을 어찌 아오?" "그들이 현재의 삼절방 칠대공입니다. 위로 세 분을 뺀 나머지 네 사람이지요. 곧, 풍공(風公) 신응(神鷹) 고량(固諒), 공공(空公) 무적도(無敵刀) 왕인수(王忍睡), 식공(識公) 광개마(狂介馬) 탁천군(卓天君), 근공(根公) 쌍륜(雙輪) 사마자웅(司馬子雄)입니다." "아-! 그 아이들이." 일순, 천마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대견함과 반가움, 아쉬움 등등이 뒤범벅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내 더욱 미묘하게 변해갔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 세 사람의 기색을 알아차린 것이다. 천마는 강호의 거마답게 그들의 태도에서 그 속사정을 짐직할 수 있었다. 천마가 강산에게 물었다. "그들 중 몇 명이나 남았나?" "둘입니다. 사마자웅은 죽었습니다." 천마는 굳이 사마자웅이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에게 죽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은 다시금 싸늘히 굳어갔다. 덕분에 장내의 분위기는 급전직하(急轉直下), 빙장(氷藏) 마냥 냉랭히 얼어붙어 갔다. 곽가량은 행여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잔뜩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터진다. 그저 나 몰라라 입 꽉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한동안 장내는 조용했다. 곽가량은 '이 정도면... .' 하는 생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천마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크!' 곽가량은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뺨이 간지러웠다. 그는 손으로 뺨을 긁었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코까지 간지러웠다. 곽가량은 코를 매만졌다. 바로 그때였다! 쾅... 쿠르르릉--! 한순간, 거센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큭!" 2 폭발이 일어난 곳은 한 채의 사층 전각이었다. 높이가 십이삼 장에 한 면의 길이만 해도 십오 장이 넘어가는 매우 큰 전각이었다. 그 거대한 전각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한쪽 면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전체로... 그렇게 차례차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항이 놀라 소리쳤다. "진천뢰?" 강산은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곽가량은 그렇지 않았다. "딱히 진천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음성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곽가량이 코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빨간 빛이 보였다. 곽가량이 킁! 코를 한번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흑지의 인물들도 저 정도의 폭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번에 사용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이항이 눈을 끔벅이다가 중얼거렸다. "작은 천구라는 건가?" "아마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강산이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것은 진천뢰가 확실합니다." 천마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강산은 손가락으로 그 무너진 전각을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저곳이 정욕궁일 듯 싶은데, 맞습니까?"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강산의 손가락을 쫒았다. 한순간,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 "저런 것이 안에...?" 이제 전각은 완전히 무너져 풀풀!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정말 완전히!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왓장 하나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마치 숯으로 엮은 밧줄처럼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전각이 무너진 자리에 괴이한 형태의 건물이 나타났다. 구(球)를 뚝 잘라 그 반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의 건물이었다.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곳이 정욕궁이야." 곽가량이 정욕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정욕궁보다는 만인총(萬人塚)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는데." 강산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흑지는 외부와 격리된 세상입니다. 비록 사백 장이 넘을 정도로 거대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정된 공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하에는 숱한 통로가 개미굴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빽빽이 들어차 있습니다. 곧, 흑지는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독립된 공간인 동시에 지반(地盤)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언제 터질줄 모르는 활화산과 도 같은 불확실한 공간인 것입니다." 강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중인들을 쓸어보았다. "계속하게." 천마의 재촉에 강산은 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반이 취약한 한정된 공간이니 폭약이 공멸(共滅)의 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폭발은 곽형이 일전에 봤다는 폭발에 대한 보응(報應)인 셈입니다. 폭약이라면 우리도 있으니 까불지 말아라 하는 얘기가 되겠지요." 이항이 강산을 보며 빙그레 웃음지었다. "허허, 그렇군." 강산은 한마디를 덧붙이며 설명을 마무리지었다. "지금 공세를 취하는 쪽이 소삭연혼대입니다." 그 반구처럼 생긴 건물을 향해 조용히 밀려가는 백여 명의 은신복 무리가 보였다. 유시(酉時) 말,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스멀스멀 밀려드는 어둠에 동화된 소삭연혼대의 모습에서 섬뜩한 귀기가 느껴졌다. 곽가량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총력전인가?" * * * 전투는 매우 치열하게, 그리고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피차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답게 한 치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일백 대 삼백, 그 규모에 걸맞게 사상자들 역시 엄청났다. 순간에 서너 개의 수급이 떨어졌으며, 그 배에 달하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가가각! 쇠붙이가 육신을 희롱하는 소리는 단 한순간도 그칠 줄 몰랐고, 벌건 피는 줄줄이 흘러 혈담(血潭)을 이룰 지경이었다. 그처럼 팽팽하던 국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전투가 시작된지 한 시진 정도가 지난 후, 소삭연혼대 진영에서 다섯 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전투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다섯! 작은 수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다섯은 사백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행은 본래의 은신처를 벗어나 격전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해 있는 상태였다. 잠자코 장내를 굽어보던 곽가량이 강산을 보며 물었다. "굉장한데. 저들이 바로 십이지신일까?" 강산은 잠시 대답을 보류하고 그들을 살폈다. 순식간에 장내의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그들 오인(五人)은 하나같이 비슷한 인상의 인물들이었다. 나이는 모두들 그만그만해 보였다. 오순 후반에서 육순 초반 정도였다. 철갑구는 끼고 있지 않았고, 몸에 찰싹 달라붙는 은신복 대신 펑퍼짐한 갈포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이로 보나 무위로 보나 무천궁의 최고 정예 고수들이라는 십이지신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소." 곽가량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다섯 뿐이지?" 강산은 귀찮아 대충 대답했다. "숨어 있는 자가 있지 않겠소?" "음, 그렇겠군." 일행이 몇 번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전투는 막을 내렸다. 결과는 소삭연혼대의 대승(大勝)이었다. 흑지의 무인(武人)들 중 제 발로 걸어 정욕궁으로 들어간 자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나 소삭연혼대의 피해 역시 작은 게 아니었다. 애초의 일백을 헤아리던 숫자가 반 이상 줄어 살아남은 자라고는 채 오십이 되지 않았다. 대승(大勝)치고는 참담한 것이었다. 잠시 후, 일행은 은신처에서 나왔다. 이미 장내에 제 발로 서 있는 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 남은 자들은 모두 정욕궁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일행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 반개(半開)한 철문이 보였다. 주변에는 무너진 전각의 잔재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만약 문이 열려 있어 맑은 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그곳이 입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문득 이항이 중얼거렸다. "입구가 이곳뿐일까?" 웬일인지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이는 음성이었다. 강산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입구가 스스로 열려있기 때문이었다. 가만 있으면 발견하기조차 힘든 입구가 지금 '나 여기 있소.'하고 스스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조금 전에 소삭연혼대 역시 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 후에 들어갔었다. "초청을 했는데 꽁무니를 뺀대서야 말이 아니지. 이 선배, 갑시다." 곽가량이 호탕이 말하며 걸음을 뗐다. 순간, 천마가 냉랭히 뇌까렸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그리고 곽가량을 젖히고 앞서나갔다. * * * 통로는 매우 넓었다. 대여섯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천장에는 십여 장 간격으로 주먹만한 야광주가 박혀 있어 시야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