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6편 (36/43)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인두, 집게, 강침 따위의 여러가지 고문 도구들이 보였고, 그리고 화로에 바짝 붙어 그 고문 도구들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음침하게 생긴 늙은이가 보였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이 고문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부를 훑어보던 와중에 곽가량은 문득 자신이 너무 소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가만, 전부 다섯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남은 놈이라고 해봤자 셋, 겨우 셋. 넷도 아니고 다섯도 아닌 셋! 참, 나도.' 곽가량은 냉큼 벽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성큼성큼 고문실을 향해 걸어갔다. 통로를 반쯤 걸어갔을까, 그 음침하게 생겨먹은 늙은이가 이쪽을 보았다. 곽가량은 히죽! 웃어주었다. 늙은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철문에 도착한 곽가량은 부드럽게, 참으로 부드럽게 일 보를 내디뎠다. "여-, 수고들 하는구먼." 곧이어 남은 오른발을 당기며 묵직한 음성을 뱉었다. "내 오늘 푹 쉴 수 있도록 도와주지." 동시에 왼손으로 철문을 닫았다. 쾅! 때아닌 천둥소리가 석실 안에 메아리쳤다. 순간,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저 자식?" "누구야?" "어떤 놈이야?" 그 목소리가 몇 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세 개가 넘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곽가량은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렸다. 네 명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여 마치 푸줏간 고기 마냥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앞에 갖가지 고문 도구를 든 사내 십여 명이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곽가량은 다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포로 셋에 사내는 십여 명, 왼쪽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만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낯익은 얼굴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는 이항이었다. 이항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외상이 전혀 없어 아직 고문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혈도를 짚힌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곽가량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장내를 쓸어보았다. 싸늘한 표정으로 다가서는 사내들이 보였다. 총 이십 명! 문득 위에서 사로잡았던 염소수염 중년인이 생각났다. 그의 한마디 역시 생각났다. 죄인이 십여 명, 간수가 다섯 명입니다! '개자식, 사기 쳤구나! 나가면... 죽여버린다.' * * * "뭐하는 놈이냐?" 늙은이가 물었다. 곽가량은 어색히 웃음지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 하나 미쳐 곽가량이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늙은이가 다시 뇌까렸다. "지저분한 놈이로구나. 치워버려라." 보기와는 달리 성격이 급한 늙은이였다. 곽가량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거리를 좁혀 오는 사내들을 보며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사내들이 주춤 멈춰 섰다. 곽가량은 그 틈을 빌어 늙은이에게 말했다. "이봐, 인상 더러운 것도 모자라 성질까지 더러운 늙은이. 최소한 물었으면 대답은 들어봐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엉, 쥐새끼상판 늙은이." 늙은이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갈 즈음 두 명의 사내가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차앗!" "이놈!" 각각 인두와 강철집게를 쥐고 휘두르는데, 그 힘이 어찌나 장대한지 일류급 고수에 비견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량은 형편없었다. 초식의 날카로움이나 정묘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힘은 일류에 기량은 삼류라... 볼 것 없는 인간백정 놈들이로구나!' 곽가량은 허리를 틀어 그들의 일 초를 피하는 동시에 가슴 복판의 구미혈(鳩尾穴)과 목의 인영혈(人迎穴)을 힘껏 짚어버렸다. 구미혈과 인영혈은 대소(大小), 마훈사(麻暈死)로 구분되는 전신 삼백칠십구개혈 중 사혈(死穴)에 소속된 혈, 둘은 꽥! 한소리 지를 틈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엇?" "저것...?"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탄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과연 곽가량이 무슨 재간을 펼쳤는지, 왜 자신들의 동료가 쓰러졌는지 확실히 보지 못했다. 그저 '놈이 비열한 수법을 썼구나.' 정도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곧바로 네 명의 사내가 곽가량을 향해 짓쳐들었다. "죽일 놈!" "이놈이 감히 사술(邪術)을." 후우웅-, 휘잉! 사람에 한발 앞서 살을 에는 세찬 경력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넷이 둘보다 많은 것처럼, 그 세찬 경력 역시 앞섰던 둘의 기세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역부족, 결과는 같았다. 다섯 개의 신형이 붙었다 떨어지는 순간, 넷이 쓰러지고 하나만이 남은 것이다. "이, 이럴 수가...?" 한 사내가 침음성을 발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의 행동에 자극 받았는지 다른 이들도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순간! "크악!" 처절한 단말마를 토하며 한 사내가 쓰러졌다. 맨 처음 물러섰던 그 사내였다. 사내의 머리에는 양쪽 관자놀이를 꿰뚫고 두 자 길이의 강침이 박혀 있었다. 손을 쓴 자는 당연히 늙은이였다. "빨리 죽여버리지 못하겠느냐." 무시무시한 늙은이의 재촉에 사내들은 다시금 곽가량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몰려들 뿐이었다. 그 중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쥐새끼상판 늙은이, 직접 나서보지 그래?" 곽가량이 비아냥거리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다시 한 사내가 쓰러졌다. "크악!" 가장 말미에 처져 있던 자로, 역시 같은 자리를 강침이 꿰뚫고 있었다. 그를 본 후미의 한 사내가 우와아-!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그 자를 위시로 남은 이들 역시 달려들었다. "죽여라." "차아앗!" 일순, 석실 가득 피와 죽음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일 각 정도가 지났을 때, 장내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곽가량과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수하들의 주검을 덤덤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싸늘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쓸모 없는 것들!" 그때, 맞은편의 곽가량은 왼쪽 어깨에 박힌 강침을 뽑아내고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을 해치우는 순간 발생한 일말의 방심, 그 순간적인 방심이 가져온 결과였다. 강침은 견정혈(肩井穴) 한 치 아래 박혀 있었다. 그나마 방심의 골이 깊지 않아 이 정도로 그쳤지, 하마터면 팔 병신이 될 뻔했다. 곽가량은 뽑아낸 강침을 오른손에 쥐고 나직이 한마디했다. "가르침 감사하네, 쥐새끼상판." 늙은이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화로 속에서 두 개의 인두를 집었다. 두 자가 조금 넘는 것과 조금 모자라는 것이었는데, 어느 것이나 벌건 석양빛을 띠고 있었다. 툭툭 인두를 두드려보던 늙은이가 만족한 듯 씩! 웃음짓더니, 곽가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천궁에 너와 같은 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십이지신이냐?" 곽가량은 정말이지 이 인간 같지 않은 늙은이와 이야기 따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나 정체가 궁금했다. "쥐새끼상판, 예의를 모르는구나." 의아한 표정을 짓던 늙은이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푸흐흐... 좋지, 좋아. 노부는 무정귀(無情鬼) 장무앙(張無殃)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형당을 맡아보고 있지." 정이 없는 귀신이라..., 곽가량은 마음속으로 그 별호를 지어준 사람의 탁월한 안목을 칭찬하며 화답했다. "나는 십이지신의 첫째 왕삼(汪三)이라는 사람으로 별호는 귀백(鬼伯), 자(字)는 청소부(淸掃夫)라고 한다. 특기는 한 자루 불진(拂塵)을 들고 지면에 바싹 붙어 땅을 쓸 듯이 펼치는 연환삼십육진술(連環三十六塵術)이며, 취미는 쓰레기 청소다. 특히 때가 되었음에도 죽지 못하고 아동 바동거리는 반시체 처리에 일가견이 있지." 귀백이라 함은 백귀(百鬼)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곧 모든 귀신을 통솔하는 귀신의 제왕을 일컫는 말이다. 귀백도 귀백이려니와 청소부니, 연환삼십육진술이니 하는 말을 장무앙이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장무앙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놈, 네 간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보겠다." "내 간? 재주만 있다면 꺼내가거라." 곽가량은 가슴을 쭉 내밀며 일 보를 내디뎠다. 순간, 팍! 화로가 쓰러지며 벌건 석탄과 강철집게, 강침 따위가 곽가량을 향해 날아왔다. 장무앙이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킁!" 곽가량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우측으로 돌았다. 때를 같이하여 높이 솟구친 장무앙이 허공에서 돌발적으로 인두를 던졌다. 이때 두 사람간의 거리는 채 이 장이 넘지 않아 인두는 몹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곽가량에게 있어 그 정도의 위험은 위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곽가량이 빙글 반 바퀴를 회전하자 인두는 그의 어깨를 스쳐 바닥에 박혔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 모든 위기가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쉬잇! 곧바로 다른 하나의 인두가 가슴을 노리고 날아왔다. 거리가 가까워진만큼 그 위험의 강도 역시 처음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헛?" 창졸지간 곽가량은 적당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설마 손안의 무기를 전부 던져버릴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때문이었다. 곽가량은 황급히 나려타곤(懶驪打滾)의 수법으로 바닥을 굴렀다. 치사하다하여 금기시되는 수법이었지만, 이 순간 그보다 적절한 수법은 찾을 수 없었다. 퍽!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스친 인두가 바닥에 박히고, 그를 감지한 순간 곽가량은 뛰어올랐다. 꺼리길 게 없었다. 두 개의 인두를 모두 내던진 이상 놈에게 남은 것은 적수공권(赤手空拳)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장무앙과 겨우 석 자 거리를 남겨놓은 순간, 그의 입가에 머무는 음흉한 미소를 본 순간, 그의 양손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강침을 본 순간! '아뿔싸!' 비로소 곽가량은 그것이 혼자만의 달콤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무앙의 인두 던지기는 단순히 이 같은 상황을 연출해내기 위한 밑밥이었던 것이다. "놈, 걸려들었다." 장무앙이 일갈하며 강침을 던졌다. 석 자, 천하에 다시없을 신법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바로 그때! 빛이 번뜩였다. 번-----쩍------! 찬란하도록 강력한 금광(金光)이었다. 금광은 한순간 천지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금광이 사라진 장내의 상황은 그 전과 비교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포로들은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이항은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점은 한 구석에 처박혀 쿨럭쿨럭! 핏물을 게워내는 장무앙의 모습이었다. 그의 이마와 목에는 각기 한 자루씩의 강침이 뿌리째 박혀 있었다. "그... 금... 금황(金皇)의... 우웩! 크으... ."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던 장무앙이 몇 번 토악질을 하더니 곽가량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너, 너... 황궁에서... 커-억!" 곽가량은 잠자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쥐었다. 장무앙이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사, 사, 살려... ." "너는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뒈져도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라." "사, 사!" 뿌득! 곽가량은 강침을 그의 정수리에 꽂았다. 이어 한 명 한 명 포로들의 사혈을 짚고, 쓰러진 자들 중 살아 있는 자들을 가려내 그들의 사혈 또한 짚었다. 그런 연후에야 이항을 끌어내렸다. 이항은 확실히 마혈이 짚혀 아무 정신도 없는 상태였다. "당신이 정신이 없는 게 다행이구려." 곽가량은 이항을 들쳐업었다. 어느 혈을 짚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장 풀어줄 수가 없었다. 운기하여 막힌 혈도를 찾자면 최소 일 각에서 일다경 정도가 걸릴 터, 우선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했다. 곽가량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후 석실을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막 갈림길에 접어들었을 때, 입구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침입자가 있다." "감히, 어떤 자가." "조용!"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낯익은 음성이 끼어 있었다. 고량의 음성이었다. '하필이면... 재수 더럽네.' 한순간 곽가량은 정면돌파냐? 아니면 다른 입구를 찾아볼 것이냐 를 고민했다. 결론은 쉽게 났다. 고량 하나만 해도 만만한 적수가 아닌 터에, 적은 한두 명이 아니다. 또한 고량 정도의 인물을 따라 다니는 자들을 이삼 류라 볼 수도 없는 일이며, 게다가 자신은 부상까지 입고 있다. 그와의 대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사실상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뒤, 그때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결정이 나자 그는 지체없이 맞은편 통로로 뛰어들었다. * * * 맞은편은 감옥이었다. 통로를 따라 수십 개의 감방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죄수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곽가량은 이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죄수들까지 몽땅 동원된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렸건만 기대했던 출구는 나오지 않았다. 출구는커녕 갈림길조차 없었다. 일 각 정도나 달렸을까, 곽가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지, 여기가 감방이었지. 빌어먹을! 다른 곳도 아닌 감방에서 비밀통로를 기대하다니... 내가 멍청한 놈이지." 그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 철문이 나타났다. "엉...?" 막다른 곳, 통로의 끝에서 철문이 나타난 것이다. 곽가량은 만족했다. 재주라도 넘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흐흐, 역시 어르신네의 판단은 틀려본 적이 없단 말씀이야." 다만 문제가 있었다. 개폐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은 개폐장치가 붙어 있었으리라 짐작되어지는 구덩이뿐이었다. 철문 바로 우측에 길이 한 자 정도로 움푹 패인 구덩이가 그것이었다. 부서진 것인지, 부셔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십 년 이상, 어쩌면 이십 년이 넘을지도 몰랐다. 태작태작 녹슨 철문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왕지사 내려줄려면 고래 힘줄 마냥 탱탱한 놈을 내려줘야지, 썩은 동아줄이라니... . 올라가다 떨어져 뒈지라는 거야, 뭐야?" 곽가량은 무슨 소리인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도 모를 말을 지껄이며 구덩이에 손을 넣었다. 개폐장치가 부서졌더라도 그 연결고리는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뭔가 잡혔다. 싸늘한 감촉, 볼 것도 없는 쇠붙이의 감촉이었다. '있다!' 곽가량은 환호했다. 그리고 이내 실망했다. "빌어먹을!" 그 뭔가가 흙덩이 마냥 부서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곽가량에게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고량과 정면대결을 펼치는 것, 그 방법밖에 없었다. 곽가량은 이항을 구석에 내려놓았다. 과거 불귀곡에서의 일전이 생각났다. 그때 두 사람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었다. 결과만을 놓고 따지자면 무승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 곽가량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력금황기(大力金皇氣)의 노출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내력(來歷)의 노출을 꺼린다 정도의 문제가 아닌, 백년 전 한 이인(異人)과 무림인들 사이에 얽힌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가량이 고량을 높이사는 것은, 그 당시 어렴풋이 '고량 역시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구나.'라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곽가량은 툭 철문을 건드려보았다. 바위를 두드리는 듯 억센 느낌이 왔다. 미루어 한 자쯤 되는 것 같았다. '한 자라... .' 전력을 기울이면 못 깰 것도 없는 두께였다. 잔뜩 녹이 슬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가 있었다. 폭약! 만에 하나라도 철문에 폭약이 장치되어 있다면... 일을 저질러버려... 말어...? 고민 중에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후-우-!" 곽가량은 호흡을 골랐다. 제 22 장 양패구상(兩敗俱傷). 1 선두의 인물이 보였다. 칙칙한 회포에 싸늘히 굳은 표정...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고량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을 바싹 붙어 따르는 다섯 명의 청의 중년인들과 한 명의 흑포 노인이 보였다. 청의 중년인들의 차림새는 지극히 평범한 반면 흑포 노인의 차림새는 매우 기괴했다. 흑포에 모자가 달려 있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마치 목내이(木乃伊) 마냥 흑포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이었다. 차림새도 차림새려니와 모자 속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곱이라...! 늙은이, 인상 더럽네.' 곽가량은 재빨리 적세를 가늠해보았다. 연후 고량을 보며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이야-, 이게 누구요? 고형 아니오? 이것 참, 반갑구려. 반가워." 고량이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염이 많이 자라 곽가량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곽가량은 더욱 너스레를 떨었다. "엥?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오? 둘이 함께 사선(死線)을 넘나든 게 몇 번인데... 참, 이거 실망이 용솟음치는구먼." 고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곽가량을 넘어 이항에게로 향했다. 반짝! 고량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과연 고량이 덤덤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너 혼자냐?" 곽가량은 함빡 웃음지며 한 걸음 내디뎠다. 포옹이라도 할 듯한 태세였다. "와하하, 이제 알아보는구려." 곽가량이 걸음을 떼는 것과 동시에 고량의 뒤에 있던 청의 중년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들고 튀어나왔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맑은 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칭-! 수는 다섯이되 소리는 하나! 결코 그들이 녹녹치 않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고량은 수하들을 제지한 후 곽가량에게 물었다. "네 동료들은 어디 있느냐?" 곽가량은 힐끗 고량의 곁에 있는 흑포 노인을 일견하였다. 청의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수의 모습이랄까? 모습을 보인 이후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그랬고, 목내이 마냥 기괴한 차림새가 그러했으며, 또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 그러했다. 곽가량으로써는 적잖이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흑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잠시 후면 알게되겠지.' 흑포 노인에게서 시선을 뗀 곽가량은 뒤늦게나마 눈짓으로 뒤쪽의 이항을 가리켰다. "안 보이오?" 고량이 다시 물었다. "강산이라는 자는 어디 있느냐?" 곽가량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아! 남은 일행. 글쎄,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좀 늦는구려." 순간, 고량의 왼편에 있던 청의 중년인이 싸늘히 일갈했다. "아가리 닥쳐라." 다섯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로, 그는 곧바로 고량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풍공, 이 자는 저희 오룡(五龍)에게 맡겨 주십시오." 고량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무언(無言)은 곧 승낙을 뜻하는 법, 청의 중년인들은 이내 곽가량을 향해 다가갔다. 특이하게 다섯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다가섰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통로가 더욱 비좁아 보였다. 곽가량은 굳이 일렬횡대를 짓는 그들의 행동에서 한 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장기(長技)가 합공(合攻)이라는 점이었다. 조금 전의 칼을 빼들던, 그 일사불란(一絲不亂)했던 동작을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거리를 좁혀 오는 오룡을 무심히 바라보던 곽가량이 문득 안타까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어허, 그렇게 눈먼 쥐새끼 이사하는 것 마냥 바싹 붙어 있어서야 칼질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연애하는 것도 아닐 테고... . 보기에도 답답하니 조금 떨어지는 게 어떻겠소, 여러분?" 중앙의 중년인이 눈알을 부라리며 응대했다. "개자식, 네 목이나 걱정해라." 그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로, 아무래도 그가 이 오룡이라는 자들의 우두머리인 듯 싶었다. 곽가량은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뜻 모를 이야기를 던졌다. "한데 당신은 혹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무엇이 너무한다는 것일까? 중년인은 의아했다. 하지만 그는 응대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짧은 만남이나마 곽가량의 성격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미친 개를 볼 때나 지음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곽가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오룡, 천하의 오룡이 단 한 명을 상대하는데 있어 겁먹은 쥐새끼 꼴이라니." 중년인의 뺨이 실룩거렸다. "쯧쯧! 개가 웃겠구나, 개가... ." 거듭된 곽가량의 이야기에 중년인은 급기야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개자식, 누가 겁을 먹었다는 것이냐?" 곽가량이 그런 소리 말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허허, 그렇지 않다면 왜 내게 칼을 주지 않는 것이오?" "......?" "오 대 일이라는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하나같이 칼을 차고서 말이야." "......?" "칼 한 자루쯤 양보하지 않는대서야 겁을 집어먹었대도 할 말이 없지." "......!" 중년인은 기가 막혔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이건 말이 말 같아야 대꾸라도 해보지 않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