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5편 (35/43)
"현, 현인... 현 대형(大兄)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냐?" 천불의 입에서 암향부! 세 글자가 나온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데 이 순간 놀란 것은 단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강산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어떻게 암향부를 아는가? 또 현인정은?'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대형이라 부르는 점으로 보아 적어도 원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 * * 반 시진 후, 강산은 어느 동굴에 앉아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천지인 삼불(三佛)은 좌우 측에, 그리고 정면에는 백염(白髥) 백미(白眉)의 신선 같은 노승(老僧)이 위치했다. 최관은 수혈(睡穴)이 짚혀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동안 다섯 사람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산이 먼저 현인정을 만나서 암향부를 전수 받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삼불은 반신반의(半信半疑), 쉬이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산이 품속에서 비급을 꺼내 보여주자 완전히 승복했다. 다음으로 지불이 현인정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지불의 이야기는 한 세대(世代)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삼십오 년 전 세 명의 괴인이 강호에 출현했다. 그들의 출현은 매우 신비로웠다. 출신도 내력도 불분명한 상태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급작스레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강호상에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느 소 문파를 괴멸(壞滅)시킨 것이었다. 그후, 그들은 틈만 나면 살인을 저질렀다. 마치 맹수가 고기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듯,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듯했다. 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그 동안 그들의 손에서 유명을 달리한 자들의 수가 무려 일천. 삼마(三魔)! 각각 천마(天魔), 지마(地魔), 인마(人魔)로 불리는 환우삼마( 宇三魔)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결국 그들은 무림(武林)의 공적(公敵)으로 처리되어 구파의 연합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렇게 일 년여를 쫓겨다니다가 마침내 형산(衡山) 축융봉(祝融峯)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라는 것이 강호에 알려진 내용이지. 한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대부분이 거짓이야. 화산파(華山派) 놈들이 자신들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날조한 거짓일 뿐이지." 천불의 이야기에 지불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럼. 천 명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지. 우리가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도 아니고, 겨우 오백쯤 될까?" 모든 일이 늘 그렇듯 일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상고비급(上古秘 )을 이십여 년에 걸친 고련(苦鍊) 끝에 터득했다. 그리고 강호에 출도한지 며칠 되지 않아 한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일이 커진 것은 그가 어느 소 문파의 사람이었으며, 그 문파의 주인이 화산파의 속가제자(俗家弟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화산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화산에서는 고수를 보냈다. 처음에는 이대(二代) 제자, 다음에는 일대(一代) 제자... 그러다가 급기야는 장로급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하나면 하나, 열이면 열, 가는 족족 소식 뚝! 영영 이별인 것이다. 화산(華山)은 노해 불을 뿜어낼 지경이었다. 하나 방법이 없었다. 그 동안 본 인적 물적 피해만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무림첩(武林牒)이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환우삼마였다. "이 땡초와 현 대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형산 축융봉에 뼈를 묻었을 것이야. 적어도 두 사람은 우리가 무고(無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잠자코 듣고 있던 땡초가 빙그레 웃음지었다. "허허, 무고라... ." 땡초의 법명(法名)은 공현(空賢)이라 했다. 휴우신승(休牛神僧) 공현! 당시 소림의 장로원주(長老院主)이자 당금 소림 장문의 사숙조(師叔祖)뻘이 되는 인물이었다. * * * 강산은 천불과 함께 지상으로 향했고, 두 사람이 떠난 뒤 남은 세 사람은 최관을 깨워 현인정을 찾아 나섰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십오 년 전이야. 위지한승, 그 놈에게서 현 대형이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 놈과 함께 도착했어. 초기에는 현 대형의 시신(屍身)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하여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사오 년이 지나면서 포기하고, 그 후로는 세상만사 귀찮아 이곳에서 반시체처럼 지내고 있는 중이지."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강산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불은 연신 입을 놀렸다. "놈은 오 년 정도를 이곳에 머물다가 지선전주(地宣殿主) 금공추(金公錐) 교양(喬陽)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고 방(幇)으로 돌아갔지. 생각해보니 놈이 돌아간 시기가 우리가 현 대형 찾기를 포기하고 눌러 앉았던 시기와 일치하는군. 죽일 놈! 오륙 년 전인가 놈의 제자 위지광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산은 그저 양념처럼 한두 마디를 거드는 것으로써 많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공현 노스님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됐습니까?" "땡초? 흠, 그만한 중이 없지. 자비(慈悲)와 희생을 몸으로 실천하는 진짜 중이지. 우리에게 삼불이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도 바로 그야. 응, 어떻게 왔냐 물었지? 그냥 우연이야. 현 대형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여정을 재촉하던 중, 우연히 중도에서 만나 같이 오게 됐어. 예전의 우리들 일로써 은연중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 강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흐음! 조금 전에 약속을 정욕궁(正欲宮)으로 정한 듯 한데, 어떤 곳입니까?" "과거에 위지한승이 머물던 곳이야.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고. 한마디로 흑지의 심장부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라면 비세(非勢)라는 이야기니, 갈 곳은 그곳밖에 없지." "그렇군요. 죄송하지만 올해 연세가...?" "음, 내가 좀 겉늙어 보이지? 고생을 많이해서 그래. 오십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른다섯이야." "......?" 천불은 어벙한 표정을 짓는 강산을 보며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지불과 인불이 예순 아홉, 자신은 일흔 하나라고 했다. * * * 언제부터인가 분화구의 중심부에서 죽음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백 명이 한데 어울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번쩍! 한 줄기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서너 개의 수급이 떨어졌고, 가가각!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올 때마다 수 명의 사내가 유명을 달리했다. "크아악!" "커억!" 전투는 외견상 뚜렷이 구분되는 두 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몸에 꽉 끼는 야행복 차림의 소삭연혼대가 그 한 패였고, 경장 차림의 삼절방 무인들이 남은 한 패였다. 전투는 다소 일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다섯에 하나, 소삭연혼대원 한 명에 삼절방 무인 다섯 명 꼴로 쓰러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양상은 매우 팽팽했다. 일백대 삼백, 실력의 차가 숫적 차이로 메꿔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곽가량은 한순간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으아-- 함!" 그가 있는 곳은 본래의 언덕에서 한참을 내려온 어느 삼층 전각의 꼭대기였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삼십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미 한차례 폭풍에 휩쓸린 지역이었다. 곽가량은 코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자식들 참, 질질 끌기는... 고수들이 튀어나와 후다닥! 하면 금방 끝날 것을." 그로써는 지지부진하는 전투가 매우 못마땅했다. 물론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자고이래(自古以來) 구경 중 으뜸은 불구경이요, 그 보다 더한 구경은 싸움구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나 그토록 재미난 구경도 정도 나름이지, 일 각 이 각을 넘어 반 시진... 한 시진에 이르게되자, 재미 뚝! 남는 건 지루함뿐이었다. "에이, 빨리 양패구상(兩敗俱傷)이나 당해버리지 않고."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곽가량이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코를 후비는 동작에 더욱 박차를 가할 때! 쾅-! 천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큭!" 비명을 터트린 자는 곽가량이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코를 감싸쥐고 있었다. "아이고, 코야."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 곽가량은 조심스레 검지를 뺐다. 봉숭아물처럼 연한 빨간 색 액체가 손가락 가득 묻어 나왔다. "피나잖아! 어떤 개자식이." 곽가량은 분노하여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폭탄이 터진 지점은 전투의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많이 치우친 곳이었다. 곧, 전투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소삭연혼대가 점령한 곳이라고 봐도 무방한 지역인 것이다. "으으으...!" "크으...!" 반경 오장여의 구덩이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지면을 구르는 자들이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열 명 이상이었다. 거기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자들이 십여 명, 또한 갈가리 찢겨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자들을 합한다면... 다소 우세를 보이던 소삭연혼대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러서라." 큰 한소리와 함께 야행복 사내들이 물러났고, 우와-! 잠시나마 기세를 올리던 삼절방 무인들도 이내 돌아섰다. 그렇게 전투는 일단락 되었다. "이-, 어떤 자식이야?" 곽가량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폭탄을 던진 자를 찾았다. 하나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가량은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씨팔, 내 이 놈을 잡으면 그냥... ." 그러던 차에 문득 한 사람이 눈에 뜨였다. 멀어서 이목구비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가 삼절방의 인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나온 전각이 삼절방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이요, 또한 남쪽으로- 곧, 소삭연혼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시야가 뻥 뚫린 곳에서는 일부러 길을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는 똑바로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곽가량이 은신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오냐, 너 이놈 잘 만났다.' * * * 일 각 후, 곽가량은 한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사내가 들어간 곳이었다. 그 곳은 아무런 장식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네모반듯한 목조 건물이었다. 창고인 듯 싶었다. 잠시 입구에 바짝 붙어 내부의 동정을 살피던 곽가량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문을 밀었다. 내부는 약간 어두운 편이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곽가량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됐다 싶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건물은 창고였다. 작은 술항아리 크기의 나무상자가 여기저기 한두 길 높이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중 상자 몇 개를 뜯자 갖가지 크기의 대나무못, 꺾쇠, 밧줄 등등이 나왔다. 건축자재였다. 별로 기대한 것은 없었지만,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상자에서 눈을 돌린 곽가량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부는 꽤 넓었다. 대충 헤아려도 백 평은 넘어 보였다. 하지만 그 넓은 공간에서 눈에 띠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둥과 상자와 바닥, 천장, 그리고 가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자 속의 내용물들... 그게 전부였다. '분명 비밀 통로가 있을 텐데... .' 심증은 갔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답답했다. 곽가량은 노기를 꾹 억누르고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통로가 숨겨져 있다면 바닥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데 그때 문득 곽가량의 뇌리에 번갯불처럼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책!' 그것은 한 권의 책에 관한 생각이었다. 곽가량은 갑자기 품속을 뒤졌다. 이윽고 품을 빠져 나온 그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표지가 너덜너덜하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퍽 예스러워 보이는 책이었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곽가량이 그 책을 손에 넣은 것은 십 년도 훨씬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책 값만 해도 무려 금 열 냥, 그것도 주인이 팔지 않겠다는 것을 공갈 반 협박 반으로 거의 빼앗다시피 하여 손에 넣은 것이었다. 책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백팔생사진경(百八生死眞經). 부제: 이런 경우 이렇게 해라. ] 곽가량은 허겁지겁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있다. 있어!" 곽가량이 펼쳐든 책장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바닥에 숨겨진 비밀통로 찾는 법! 첫째, 무거운 물체가 끌린 흔적은 없나 살펴본다.] 곽가량은 첫 줄을 읽고 바닥을 살폈다. 그러다가 이내 환호성을 내질렀다. "캬-! 역시."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끌린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었다. 흔적이 너무 많았다. "잉...?" 곽가량은 입맛을 다시며 두 번째 줄을 읽었다. [둘째, 틈새가 벌어진 곳은 없나 자세히 살펴본다.] "그렇지, 열었다 닫았다 하면 필히 틈새가 벌어지겠지." 곽가량은 환호하며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틈새는 금방 발견되었다. 한데 또 문제가 있었다. 바닥 전체가 한 자 길이의 장방형 판자로 이루어져 있어, 판자와 판자 사이의 이음새란 이음새는 몽땅 다 그만그만하게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 씨... ." 곽가량은 조금 짜증이 났다.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있는 까닭이었다. [셋째, 주위와 비교해 먼지의 쌓인 정도가 다른 곳은 자세하고도 신중하게 살펴본다. 넷째, 갑자기 발자국이 뚝 끊어진 곳은 없나 자세하고도 신중하며 끈기 있게 살펴본다.] 먼지는 쌓인 곳이 없었으며 발자국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에라이... ." 곽가량은 끝내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책을 집어 던졌다. 파라락! 맹렬히 날아간 책이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펼쳐진 장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생사존망(生死存亡)의 위기에서 갈림길을 만났을 때! 동전 한 닢이 필요하다: 네 귀퉁이가 짜부라진 동전이 제일 좋다.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가문의 비전을 펼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 마음가짐이 끝났으면 동전을 머리 위로 치켜올려 엄지로 퉁긴다: 이때 주의할 점은 반드시 엄지로 퉁겨야하며, 퉁길 때 '날아라!' 하는 소리를 힘차게 질러야 한다.] "후우-!" 어디선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연히 곽가량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곽가량은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 강산은 어떻게 할까? ...... "푸-!" 한숨만 나왔다.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 "이것은...!" 미세하나마 바닥이 진동했다. 이어 작은 소리가 들렸다. 드드드! 기관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였다. '그렇군! 강산이라면 기다렸겠구나.' * * * 바닥의 한 부분이 열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 사람이 튀어 나왔다. 사십 중반의 인물로 코밑의 염소 수염이 몹시 약삭빨라 보이는 자였다.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사방을 둘러본 후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낯선 물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백팔생사진경이 있었다. "이게 뭐... ." 그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쓰러진 중년인의 뒤로 곽가량이 나타났다. 그는 백팔생사진경을 집어 품에 갈무리했다. "도움이 되기는 되는군."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중년인은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져 까치집을 연상케 하는 머리에, 텁수룩한 수염이 몹시도 흉악하게 생긴 자였다. 중년인은 기겁하여 물러섰다. 하지만 물러섰다는 것은 생각뿐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마혈(痲穴)을 제압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흉악하게 생긴 자는 자신의 무릎께에 앉아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한 뼘이 넘어가는 커다란 대나무못을 들고 왼손으로는 슬슬 자신의 무릎을 쓸고 있었다. 중년인은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서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비록 단 한 번도 쥐가 되어본 적은 없었지만, 막다른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난 쥐의 심정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순간, 흉악하게 생긴 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딱 눈이 마주쳤다. 찔끔하여 눈을 감으려는데, 그가 웃었다. 그리고 그 함빡 벌어진 입술 새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형씨, 일어났구려." 매우 반가운 음성이었다. 중년인은 엉겁결에 마주 인사하였다. '아, 안녕하시오?' 마혈이 짚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목소리는 새어나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중년인은 그 점을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흉악하게 생긴 자가 입을 열었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매우 처량한 어조였다. 할 수만 있다면 몇 푼 집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 벌써 말하겠다고 말하지 마시오. 제발 이 젊은 놈의 유일한 낙(樂)을 빼앗아가지 마시오.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참을성이 없게 생겼으니... 음...! 이렇게 합시다. 세 방만 버티면 놓아주기로." 중년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두 눈만 끔벅였다. 아마 말을 할 수 있었다 해도 같은 행동을 했었으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흉악하게 생긴 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떻소, 세 방?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끝나는 일 아니겠소. 암, 그렇고 말고! 세 방쯤이야 식전 해장거리도 안되지. 양쪽 슬개골에 하나씩,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회혈(百會穴). 클클클!" "......?" 역시 중년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은 제 무릎 위에서 한 치 한 치 사라져가는 대나무못을 본 후의 일이었다. '으아악, 말할께, 말하겠소, 말하겠다니까... 으아아악...!' "문을 어떻게 여는데?" "그게... 저... ." "아, 굳이 말하고싶지 않으면." "저저저, 저, 저 상자를 돌리면 열립니다." "뭐하는 곳이지?" "형당(刑堂), 형당입니다." "흠, 몇 명이나 있지?" "죄인이 십여 명, 간수가 다섯 명입니다." "죄인이라면, 어떤 자들이야?"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무천궁 사람들입니다." "한 명을 제외하고? 그는?" "머리카락이 홀라당 다 타버린 늙은이인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이 뭐라고 하던데...?" "이항!" "맞습니다. 이항이라고 했습니다." 2 스르르! 소리도 없이 바닥이 열렸다. 계단이 보였다. 곽가량은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혈향(血香)이었다. 그리고 혈향 사이로 고소한 냄새도 났다. 고기 냄새... 살 타는 냄새였다. 통로는 계단에 연해 우측으로 뻗어 있었다. 곽가량은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은 상태에서 고개를 내밀어 통로를 살폈다. 안쪽에 철문이 보였다. 일이 풀리려고 그러는지 조금 열려 있었다. '옳지!' 곽가량은 신속하고도 조용하게 철문에 접근했다. 틈새로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잠시 기다려보았지만 그 외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곽가량은 문을 밀었다. 그리고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면서 말했다. "왜 문을 잠그지 않았나?" 안쪽은 십여 평의 석실이었다.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있을 뿐, 포로도 고문도구도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에 또 하나의 철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저 입구에 불과한 것 같았다. 두 명의 장한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칼을 잡았다. 이어 칼을 빼다 말고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누구...?" 곽가량은 더욱 당당하게 걸었다. "이항은 어떻게 됐느냐?" "별 다른 것은... ." 왼편의 장한이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하며 힐끗 동료를 응시했다. '너는 알고 있느냐?' 라는 눈빛이었다. 하나 오른편의 동료 역시 같은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곽가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병신 같은 놈들!" 두 장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풍공(風公)께서 직접 심문을 하시겠다고 해서... ." 곽가량은 조금 놀랐다. "풍공? 신응 고량 말이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량의 이름을 들먹이는 곽가량의 태도에서 자신들의 무례를 발견했다.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그들의 허리는 직각으로 구부러졌다. "그렇습니다." "예." 곽가량은 쾌재를 외치며 손을 뻗었다. 목 뒤의 마혈을 제압 당한 장한들은 짹! 한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남은 녀석들도 이놈들처럼 멍청했으면 좋겠는데." 잠시 후, 쓰러진 자의 품속에서 열쇠를 발견한 곽가량은 철문을 열었다. 널찍한 통로가 나왔다. 조금 들어가자 통로가 좌우로 갈라졌다. 좌측 통로는 천연동굴 그대로의 모습인 반면 우측 통로는 적당히 인공이 가미된 모습이었다. 곽가량은 망설임 없이 우측 통로를 택했다. 피비린내와 노릿한 살 타는 냄새가 그쪽에서 풍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통로는 밋밋하나마 우측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오륙 장이나 걸었을까, 곽가량은 황급히 벽에 붙었다. 전방에 세 번째의 철문이 나타났는데, 그 철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휴-! 하마터면... .' 곽가량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내부를 살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중앙의 커다란 화로였다. 이어 그 화로 속에서 빨갛고 노랗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