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31편 (31/43)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이 뒤따랐다. 팔, 다리, 어깨, 몸통...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다시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산이 달리 부러진 곳은 없나 사지를 하나씩 움직여볼 때였다. "으으으...!" 강산은 시선을 돌렸다. 대충 신음소리가 나왔을 법한 곳을 보았지만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우중충한 먹빛으로 반들거리는 울퉁불퉁한 지면뿐이었다. 두 번 확인해볼 필요도 없는 동굴 바닥이었다. "역시!" 강산은 실망한 투로 중얼거렸다. 지상일 리가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작은 기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강산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십여 장쯤 이동했을까? 어디선가 솔솔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비릿한 혈향(血香)이었다. 강산은 피 냄새를 좇아 걸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 장이나 걸었을 때, 드디어 전방에 무엇인가 흐릿한 형태가 나타났다. '무덤?' 강산은 그것을 무덤이라 생각했다. 완만한 각도를 이루며 위로 솟은 형태나 그 크기가 영락없이 무덤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산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그것은 무덤은 무덤이되 골육(骨肉)으로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흐으으...!" 그는 무덤의 가장 윗부분에 있었다. 십여 구의 시체를 깔고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다시 그 시체의 밑에는 몇 구인 줄도 모를 백골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흐으... 으으으...!" 사람의 기척을 느꼈을까? 신음소리가 높아졌다. 강산은 품을 뒤져 약주머니를 꺼냈다. 하나 가까이 다가가 그를 본 순간 약주머니를 도로 넣고 말았다. 그의 상세는 처참한 것이었다. 척추가 부러졌는지 몸통은 제멋대로 구부러져 있었고, 사지는 짓이겨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뿐이랴, 눈은 아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튀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가 생자(生者)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어도 이미 수십 번은 죽었어야 될 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상세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산은 천천히 용수를 풀었다. 그는 무천궁의 인물이었다. 소삭연혼대, 그 중에서도 수뇌부일 듯 싶었다. 어쩌면 구청연이 말한 십이지신 중의 한 명일지도 몰랐다. 그가 무천궁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복장으로써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수뇌부라는 것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 야행복을 입은 자들은 그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이나 되었다. 강산은 의문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공력을 조금 손해보더라도 몇 가지 의문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강산은 잠자코 용수를 그의 목으로 뻗었다. 지금의 강산이 그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의(善意)였다. 한데 바로 그때!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기운이 뒤쪽에서 뻗쳐왔다. 그 기운의 강맹함에 강산은 내심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흑! 웬...?' 강산은 황급히 우측으로 굴렀다. 직후, 세찬 경기가 귀를 훑고 지나갔다. 쏴아아! 이어 강산이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다시 한 가닥 서늘한 기운이 배후로 밀어닥쳤다. 강산은 꼴사납게 지면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파파팟! 지면에서 불똥이 튀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강산은 용수를 횡(橫)으로 쓸어 올림과 동시에 용주약랑(龍珠躍浪)의 식으로 후방으로 뛰어올랐다. 용수로 상대의 접근을 막고 그 틈에 자세를 바로 잡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상대의 능력은 강산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가볍게 용수를 젖히고 연달아 이 격을 쏟아 붓는 것이다. 쉬잇, 쉿! '아차!'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말 그대로 후회일 따름이었다. 왼쪽 어깨로 화끈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강산은 다시 나려타곤(懶驪打滾)의 식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후로도 강산의 바닥 구르기는 계속되었다. 도무지 상대가 자세를 가다듬을만한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왼쪽이다 싶으면 오른쪽을 겨냥하고 있었고, 오른쪽이다 싶으면 양쪽을 겨냥하고 있었으며, 목이다 싶으면 하체를 겨냥하고 있었다. 다만 다행이라면 전력을 기울여 바닥을 기어다닌 덕분에 더 이상의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상대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십여 초를 헤아릴 때, 강산은 드디어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움푹 꺼진 지면을 이용하여 상대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그 순간을 이용하여 신형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어쩐 일인지 비로소 위기를 넘긴 강산이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며 우뚝 제자리에 멈춰서고 만 것이다. "헛!" 천행으로 상대 역시 공격을 멈췄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가 멈춰선 이유는 강산이 돌아섰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첫마디에 잘 나타나 있었다. "크크크크... 제법이로구나!" 강산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괴인(怪人)! 인간이되 결코 인간답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를 괴인이라 칭한다면 그는 틀림없는 괴인이었다. 치렁치렁 발끝까지 늘어져 마치 의복 마냥 전신을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두 개의 흉광(凶光), 어깨에서 뚝 끊어져 보이지 않는 두 팔... 비록 반인반수(半人半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이라 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강산이 놀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발치에서 머리카락을 뚫고 삐죽 튀어나온 거무틱틱한 칼 한 자루, 칼은 바로 자신의 애도(愛刀)인 금강이었다. 놀랍게도 지금껏 행한 괴인의 모든 공격이 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 강산은 핏빛으로 번뜩이는 괴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 한 뼘 길이의 열상(裂傷)이 메기 아가리 마냥 쩍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상세였다. 다만 하루 이틀에 치유될 것 같지는 않았다. 강산은 속이 쓰렸다. 일대일 대결에서 당했다는 사실에, 더구나 금강에 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강산은 지혈을 하면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 누구냐?" 괴인은 대답 대신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클클클... 제법이야." 강산은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공격한 것이냐?" "클클... 제법이야." 괴인은 이번에도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제법이다' 라는 소리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알고 있는 단어가 그 '제법이다!' 라는 한마디뿐인 것 같았다. "아는 단어가 그것뿐이냐?" "클클클...!" 자극을 받았을까, 괴인의 눈에서 번쩍! 흉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발치의 금강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움직임을 보인다싶은 순간, 금강은 벌써 강산의 목덜미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강산도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강산은 서두르지 않고 반 보를 물러섰다. 이어 허리를 비틀어 금강을 피한 후, 만홀조천(萬笏朝天)을 펼쳐 용수를 위로 쭉 밀어 올렸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틈을 노린 매우 유효적절한 한 수였다. 하나 역시 괴인은 녹녹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목덜미를 지나쳤다 싶은 금강이 상상할 수 없는 각도로 선회하여 다시금 안면을 노리고 짓쳐드는 것이다. "......?" 강산은 황망히 펼쳤던 초식을 거두며 일 보를 후퇴했다. 초식을 계속 펼쳐 괴인의 다리 한 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리되면 이쪽은 그 대가로 안면을 내놓아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산 역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물러섬과 동시에 허리를 낮추고 획지위로(劃地爲牢)의 일 초로써 괴인의 하반신을 쓸었다. 촤르르! 쇠구슬이 굴러가는 음향과 함께 괴인의 머리카락이 용수에 잘려 흩어졌다. 하나 그 뿐, 기대했던 파육음(破肉音)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카락의 한 부분이 열리며 시커먼 물체가 강산의 안면을 노리고 쏘아왔다. 다름 아닌 괴인의 발이었다. "흡!" 그 순간, 강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후퇴! 강산은 안면을 비틀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거의 동시에 쉬잇! 세찬 기운이 강산의 안면을 스쳤다. 단순히 스쳤을 뿐인데도 그 고통이 골수에 미쳤다. 마치 얼굴가죽이 통째로 뜯겨나간 것만 같았다. 일 장 뒤편에 내려선 강산은 줄줄 눈물을 흘렸다. '대충 부상을 입혀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목숨을 받는다는 각오가 아니면 도리어 내가 당한다.' 때를 같이하여 괴인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그 모습이 뿌연 물막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강산은 용수를 가슴 앞에 곧추세우고 현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초식을 찾았다. 이내 하나의 그림이 뇌리에 그려졌다. '칠절참혼(七絶斬魂)!' 잔백구유도법의 제 사초 칠절참혼이었다. 생각이 일자 몸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따랐다. 우우우웅-! 용수에서 기음(奇音)이 일었다. 순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까? 괴인의 눈빛이 변했다. 동작 역시 변했다. 금강을 앞장세워 둥글게 호선(弧線)을 그리며 날아오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금강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강산의 눈에 비치는 것은 거대한 검은 장막뿐이었다. 우산 마냥 넓게 퍼진 괴인의 머리카락뿐인 것이다. 어둠 속의 화살 마냥, 상하좌우 그 장막 어디에서도 금강은 튀어나올 수 있었다. 위기일발(危機一髮), 그 순간 강산은 장막의 중심을 향해 용수를 뻗었다. 너무나 단조로워 우습기까지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취리리릿! 용수에서 미세한 빛이 번뜩였다. 하나 둘 셋... 언뜻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빛이었다. 빛은 살아 있는 생물 마냥 각기 각도를 달리하여 장막에 부딪쳐갔다. 마침내 용수와 장막이 충돌했다. 피피핏! 작은 음향이 터져나왔다. 고수들의 전력을 기울인 격돌치고는 매우 싱거운 음향이었다. 더불어 한 가닥 묵직한 신음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크으-!" 이어 피화살을 뿜으며 퉁겨나가는 괴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바짝 따라붙는 강산의 모습도 보였다. 용수를 치켜들고 쫓아가는 모습이 끝장을 볼 심산인 듯 싶었다. 이 장여를 퉁겨나간 괴인은 볼썽 사납게 등부터 지면에 떨어졌다. "커-억!" 주먹만한 응혈(凝血)을 토해내는 괴인의 눈으로 빠르게 달려드는 강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미 피할만한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괴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금강을 휘둘렀다. '이런!' 운횡진령(雲橫秦嶺)의 식으로 괴인의 멱을 찍어가던 강산은 비로소 금강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대로라면 괴인의 목숨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되면 금강과 용수의 충돌은 면할 길이 없게된다. 결코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강산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비밀이었다. 강산은 황급히 용수를 회수했다. 아니, 회수하려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용수와 금강은 벌써 부딪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최후의 순간, 강산은 손목을 틀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해보고자 함이었다. 창-! 다행히 상황은 강산의 생각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강산은 괴인의 전력이 담긴 한 수를 손목과 가슴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흐으!" 용수는 퉁겨 날아갔고, 강산은 가슴이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주춤주춤 오 보를 물러섰다. 강산의 입술에 한 점 피가 맺혔다. 피는 곧 턱을 타고 흘렀다. 기실 강산 역시 좀 전의 격돌로 약하지 않은 내상을 입고 있던 터였다. 그것을 꾹 참고 기회다 싶어 마무리를 지려던 참에 또다시 내상을 입게 되었으니, 그 정도가 심히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상황은 다시 역전이었다. "크크크...!" 괴인은 재빠르게 일어나 일보일보 강산을 향해 다가왔다. 강산은 괴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용수를 찾았다. 용수는 이 장여 좌측에 떨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괴인과의 거리는 채 일 장이 되지 않았다. '때가 아니다.' 강산은 잠시 기다려보기로 마음먹었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가는 용수를 취하기도 전에 수급이 날아갈 터, 기회를 노려야했다. 기회는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정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용을 부릴 수 있는 기회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클클클...!" 괴인의 웃음소리가 높아갔다. 꽤나 즐거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도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강산은 그 점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왜 거두어들였는지 알고 싶나?" 괴인의 눈에 반짝 이채가 어렸다. "클클, 그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 괴인이 잠시 사이를 띄었다가 말을 이었다. "단지 억울할 뿐이다." "......?" 무엇이 억울하다는 것일까? 설마 용수로 제 목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억울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비꼬아 이쪽의 틈을 노리려는 술책일까? 아쉽게도 강산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더욱 아쉬운 것은 의문에 허비할 시간 따위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괴인이 허리를 굽혔다. 바로 도약하기 직전의 자세였다. 순간, 강산은 용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아무래도 늦겠지만,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일 장, 아홉 자... 다섯 자, 넉 자... . 그때까지 강산의 목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용수가 손에 들어올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쿵! 무언가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막 강산이 용수를 잡았을 때의 일이었다. 신속하게 돌아섰던 강산은 멍청히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건, 또...?" 그는 비로소 괴인의 '원통할 뿐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괴인은 지면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었다. 기실 그의 부상은 강산에 비해 훨씬 심각했던 것이다. 제 19 장 암향부(暗香浮). 1 "클클... 정이 많은 놈이로구나." 정신을 차린 괴인이 맨 처음 지껄인 소리는 그런 것이었다. 깨어나니 내상(內傷)이 어느 정도 치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채 두어 시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필경 치료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음이 틀림없었다. 강산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몇 가지 의문이 있을 뿐이다." "클클... 거기에 겸손하기까지!" 강산의 눈썹이 꿈틀!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못 믿겠다면 시험해봐도 무방하다." "클클, 내 나이쯤 되면 굳이 세상 모든 것을 시험해 볼 필요가 없는 법이지." 강산은 괴인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은 당해보지 않고서는 영원히 알 수 없어." "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틀렸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일도 많은 법이다." 강산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죽어보지 못한 자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괴인은 다가오는 강산을 보며 모호하게 웃음지었다. "프흐흐... 좋지, 좋아." "무엇이 좋단 말이냐?" "뭐, 그딴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지나 말아라." "네 대답에 달렸다." 강산의 전신에서, 그리고 손에 쥔 금강에서 살벌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살기였다. 괴인은 자신의 발치를 힐끗 본 후, 느긋하게 뒤쪽의 튀어나온 공간에 몸을 기댔다. "간(肝)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젊은이는 많지. 하지만 늙은이는 결코 그런 법이 없어. 뿐만 아니라 형편없이 쪼그라들어서 젓가락으로 뒤져보지 않으면 찾아내기조차 힘들어. 뭘 그렇게 멍청히 보나? 설마 의문까지 헤아려 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괴인의 이야기는 명확한 것이었다. 먼저 물어라, 그러면 대답해주겠다. 강산은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금강도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괴인을 보았다. 사람이 변했다. 지금의 이 털털한 자를- 너무 털털하여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조금 전의 그 악귀처럼 달려들던 괴물과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미친 사람일까? 아니면,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일까? 강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려했던 이유는?" 괴인은 냉큼 대답했다. "뭐, 그다지 이유라 할만한 것은 없어. 그저 살의(殺意)가 치솟았을 뿐이야." '그저 죽이고 싶었을 뿐이다' 라...! 지극히 불성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만족했다.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산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언제였을까? 십수 년 전이라고 기억된다. 고달팠던 오년 여의 체력단련 과정을 모두 마치고 무상삼도를 전수받아 거기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할 때, 웬일인지 진도(進度)를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진척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답답하고 암울했던 기간이 무려 일 년여에 달했다. 그리하여 제 자신의 능력에 회의가 들 무렵, 강산은 사부를 따라 어느 기이한 곳에 도착했다. 지하 깊숙이 위치한 석실이었다. 육 개월 분의 물과 육 개월 분의 벽곡단( 穀丹), 그리고 "반 년 후에 보자."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부는 유일한 통로를 닫았다. 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의 생활, 물과 벽곡단만이 유일하게 생을 조망(眺望)해주던 그 시절, 강산은 인내(忍耐)와 의지(意志)를 배웠다. 그러나 인내와 의지를 담고 살던 기간은 단지 며칠뿐이었다. 강산은 이내 죽음을 배웠다. 또한 허무(虛無)를 배웠다. 그리하여 삼 개월이 지났을 무렵 강산에게 남은 것은 온통 세상에 대한 저주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후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어느 날 깨어나니 머리맡에 앉아 있는 사부가 보였다. 어디서 부상을 입었는지 여기저기에 간단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의아해 물었지만 사부는 빙긋이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 어떻게 된 일인지 강산은 무상삼도의 제 일 초 이마분종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당신뿐인가?" "클, 어쩌다 한둘 너 같은 놈이 떨어지기는 한다만 곧 뒈져버리니 나 뿐이라고 할 수 있지." "이곳은 지상인가, 지하인가?" "크커커-! 멍청한 놈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너 같으면 이십 년 이상을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고 싶겠느냐?" 강산은 마음속으로 그의 한마디를 곱씹었다. '이십 년!' 이어 가장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당신의 이름과 명호는?" 일순, 괴인의 눈에서 노란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크크크-! 이름이라... . 한때는 그런 것이 있었지." 강산은 흠칫하여 자신도 몰래 금강에 손을 가져갔다. 그만큼 괴인의 눈빛이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하나 강산의 걱정은 우려일 다름이었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괴인이 눈을 돌려 강산을 보았다. "현인정... 단황수사(蛋黃秀士) 현인정(玄仁情)이라고 들어보았느냐?" 강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마음은 절대로 그의 외양처럼 담담할 수가 없었다. 단황수사 현인정! 삼절방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칠대공, 그 칠대공 중의 제일인자이며 대공(大公)인 지공(地公) 단황수사 현인정이 바로 그인 것이다. * * * "본래 삼절방은 나와 나의 두 아우인 금비(金肥)와 유옥연(柳玉蓮), 그렇게 셋이서 창설한 문파야. 삼절방의 삼절(三絶)이라 함은 나의 경공술(輕功術)과 금비의 금사신공(金伺晨功), 그리고 유옥연의 암기술(暗器術), 그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지." 금비는 바로 칠대공의 둘째, 수공(水公) 금사신조(金伺晨鳥) 금비(金肥)를 가리키는 것일 테고, 유옥연은 셋째, 화공(火公) 구환쌍비(九環雙匕) 유옥연(柳玉蓮)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삼절방의 내력으로써 서두를 꺼낸 현인정은 숨겨졌던 삼절방의 비사(秘史)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삼십오륙 년 전, 금비가 한 명의 제자를 데려왔다. 위지한승, 현 삼절방의 방주인 삼고취홍 위지한승이 바로 그였다. 무(武)에 대한 위지한승의 재능은 가히 경세(驚世)적인 것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열을 가르치면 천을 깨우치는... 문일지십(聞一知十),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라는 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현인정은 깊이 탄복하여 그를 세 사람의 공동제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십여 년이 흘렀을 때, 세 사람은 더 이상 그에게 가르칠 게 없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위지한승은 세 사람의 모든 것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이제 위지한승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과 내공(內功)뿐이었다. 현인정은 위지한승을 대동하고 여행을 떠났다.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 중원 십삼개 성은 물론 북해(北海)의 오지(奧地), 청해(靑海)의 허허벌판까지 두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여행을 떠난지 오 년여, 두 사람은 마침내 최후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남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현인정은 괴이한 장소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