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30편 (30/43)

2026-10-08 18:49:05 조회 3
"자네, 도라지가 삼(蔘) 됐다는 소리 들어봤나? 영감이 애 낳았다는 소리 들어봤나? 경험이 많아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네." "그렇지만... ." 곽가량의 야광주 타령은 동굴이 셋으로 갈리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갈림길에 선 일행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샅샅이 살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없었다. 단지 한 가지, 남은 두 곳에 비해 우측 통로에 대한 왕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만을 밝혀냈을 뿐이었다. "왼쪽과 중앙, 두 곳 중 한 곳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이 선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구청연이 이항을 보며 물었다. "글쎄... ." 이항은 곤란한 표정으로 강산을 보았다. 하나 강산 역시 마땅한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항이 받은 것은 강산의 무심한 눈빛뿐이었다. "누군가 보이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이건 보이느니 시체뿐이니. 휴우-!" 답답한 마음에 한숨질 때, 불쑥 곽가량이 나섰다. "제가 알아보죠." 그렇게 당당하게 나서더니 품을 뒤져 뭔가를 꺼내는데, 바로 가문의 비전 어쩌고 했던 그 찌그러진 동전이다. "날아라." 누가 말리는 게 두려웠을까, 빨리도 던져버렸다. 때를 놓친 중인들은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땡그렁! 이윽고, 동전이 떨어졌다. 언젠가처럼 뒷면을 보이고 있었다. "음! 뒷면이군. 왼쪽입니다." 중인들은 귀를 후비며 가운데 길로 들어섰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이심전심이라, 누구도 그렇게 하자고 말을 꺼낸 사람은 없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었다. "어어-? 왼쪽, 왼쪽이라니까?" 곽가량이 양손을 휘휘 저으며 쫓아왔다. 중인들은 송자영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그녀만 있었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 곽가량이 동전을 꺼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일 각여 후, 답답했던 일정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변화는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가능해졌다. 시체는 몸에 꽉 끼는 흑의에 왼손에는 철갑구(鐵甲鉤)를 착용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살수(殺手)의 복장이요, 불청객의 복장이었다. 아마 오른손에도 뭔가를 들고 있었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그가 무천궁에서 파견된 진정한 공격조의 일 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일행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구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개개인의 왕래가 있을 정도로 무천궁은 그렇게 작은 조직이 아닙니다." 이항이 작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그의 이름이나 나이 따위를 알고싶어하는 것이 아니네. 중매를 서자는 게 아니질 않는가? 개략적(槪略的)인 소속, 알고 싶은 것은 그 정도일세. 내 듣기로 총단(總壇)에 소삭연혼대(燒 燕魂隊)라는 별도의 조직이 있어 침투와 진압 따위의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어떤가?" 구청연이 떨떠름하니 대답했다. "그런 조직이 있기야 합니다만, 딱히 이 자를 그 곳 소속이라 단정짓기는... ." "무리가 있다 이런 말인가?" 이항은 구청연의 말을 가로챈 뒤 성큼성큼 시체를 향해 걸어갔다. 이어 시체가 입고 있는 흑의의 뒷깃을 잡더니 쫙! 그 소리도 시원하게 찢어버렸다. "이래도 무리라 할 텐가?" 이항이 시체의 목덜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항이 가리키는 곳, 드러난 시체의 목덜미에는 자그마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한 자루 칼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제비를 새긴 문신이었다. 소삭연혼대! 태워 녹여버리는 제비의 혼을 가진 조직!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구청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비록 눈썹 끝이 꿈틀대는 것 같은 작은 변화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던 그의 평상시 행동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변화는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구청연은 이내 평소의 부드러움을 되찾았다. "허허, 정말 이 선배께서는 아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이항이 매몰차게 대꾸했다. "난 허례(虛禮)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네." 하지만 구청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좋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이 이상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이어 구청연은 강산을 힐끗 일견한 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강산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선배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자는 소삭연혼대 소속이 틀림없습니다. 소삭연혼대는 총단 산하의 특수조직으로써, 삼십육 명이 한 조(組)를 이루어 움직입니다. 총 십이조(十二組)가 존재하며, 그들을 움직이는 두 가지 율법(律法)은 충성(忠誠)과 말살(抹殺)입니다. 그들 중 몇 개 조나 왔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흠, 충성과 말살이라... ." 그 두 단어가 마음에 드는지 곽가량이 나직이 읊조렸다. 이항은 개의치 않고 거듭 물었다. "지휘자는 누군가?"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는 자들입니다. 이름만 들어 알고 있을 뿐 한번도 만나 본 적은 없습니다." "십이지신?" 이항은 그 한마디를 되뇌며 구청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구청연이 속을 알겠다는 듯 씨익 웃음지며 말했다.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일단 입밖으로 내뱉은 이상 거짓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잠시 구청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이항은 비로소 수긍하고 시선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항이 막 고개를 돌릴 때, 어디선가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치잉-! 잘못 듣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병기음이었다.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신형을 날렸다. * * * 동굴은 길었다. 그리고 많았다. 웬놈의 동굴이 그렇게 많은지 십여 장쯤 전진하다보면 어김없이 갈림길이 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필경 침입자를 대비해 미로(迷路)를 만들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일행은 미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통로가 갈라질 때마다 벽에 표시를 했다. 그리하여 꼬박 반 시진을 허비한 끝에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한 면의 길이가 사 장쯤 되는 장방형(長方形)의 매우 넓은 석실이었다. 석실에는 두 개의 철문이 달려 있었는데, 일행이 들어온 곳은 반쯤 열려 있는 반면 반대편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뭐지? 이 묘한 기운은?" 곽가량이 마지막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석실 내에 흐르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을 느낀 때문이었다. 그 순간 중인들의 마음 또한 곽가량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곽가량이 느낀 것과 같은 묘한 기운을 석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묘한 기운의 정체는 심장을 얼릴 것만 같은 차디찬 냉기(冷氣)였다. 다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기(殺氣)나 악의(惡意) 따위의, 결코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이 좋... 엇?" 곽가량이 막 후퇴를 이야기할 때, 육중한 음향을 흘리며 철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릉-! 곽가량이 뛰어가 봤지만 허사였다. 때는 이미 늦어 철문이 거의 닫혀버린 것이다. 마지막 남은 틈새로 손을 넣고 힘을 쓰던 곽가량은 그 철문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손을 빼고 말았다. 쿵! "이런!" 곽가량은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눈에 보이는 일행의 표정 역시 자신과 다를 게 없었다. "이거 암기 세례라도 받는 날이면 꼼짝없는데." 이항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면서 가장자리로 붙었다. 순간, 구청연이 다급히 소리쳤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됩니다." 이항은 흠칫하여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장내에 일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사방은 바늘 하나 빠져나갈 틈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었고, 철문의 두께는 한 자에 이르렀다. 이래서야 금성철벽(金城鐵壁)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에, 어떤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빌어먹을...!" 곽가량의 입에서 쌍소리가 터져나왔다. 비로소 무신경했던 행동에 저주를 퍼부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어 원님 떠난 뒤에 나팔 부는 격밖에 되지 않는다. 목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한 불안한 심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중되었다. 그리고 닫혀 있던 안쪽의 철문이 열리면서 극대화되었다. 그그그그그--! 중인들은 주춤거리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조심하시오."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전 신경을 기울여 안쪽의 철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 자, 한 자... 철문이 열렸다. 그 열린 틈새로 무엇인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과연 무엇이 나타나려는가? 독, 암기, 괴물, 아니면...? 한 자, 한 자... 철문이 열림에 따라 그만큼의 깊이로 중인들의 마음 역시 타 들어갔다. 그르릉-! 순식간에 일 겁(劫)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철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런데 드러난 광경이 의외였다. 뜻밖에도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보이는 것은 그저 길다란 통로 뿐. 독도, 암기도, 괴물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중인들은 허탈해 했다. 너무 허탈해 우롱 당한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뭐야? 이 자식들이 장난치나?" 곽가량이 못마땅한 어조로 뇌까렸다. 하지만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다만 기쁨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응? 저것은...?" "피? 피다!" 통로 한편에서 피가 발견된 것이다. 더욱이 발견된 것은 피만이 아니었다. 짓이겨지고 썰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점들... 비록 그 모양새로써 본모습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본래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 * 한 시진이 흘렀다. 중인들은 그때까지 석실에 갇혀 있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철문은 여전히 닫힌 채였고, 안쪽 철문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그리고 통로에 흩뿌려진 피와 육편 역시 그대로였다. 일견하기에 변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 변화가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중인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여기저기를 살펴보기도 하였으며 이것저것을 통로에 던져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인들은 그 한 시진 동안에 세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석실 자체에는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상대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통로가 지극히 무서운 죽음의 함정이라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그 죽음의 함정이 접촉이라는 열쇠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곧, 통로의 바닥이나 천장 벽 등에 어떤 물체가 닿으면 기관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물체라는 조건 중에 중량의 차(差)나 면적의 차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전, 옷가지, 수통... 기관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반응했다. 일단 기관이 작동되면 그 위력은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번쩍! 빛이 번뜩이고 쏴아아! 마치 벌떼가 날아오르는 듯한 음향과 함께 수천 수만 개의 강전(鋼箭)과 비도(匕刀)가 일제히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것이다. 십여 장에 달하는 긴 통로에 안전지대는 없었다. 파리 한 마리 비껴갈 틈도 없어 보였다. "염병할,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만들었는지... 정말, 빌어 처먹게도 잘 만들었네. 개 같은 자식!" 곽가량이 부아가 치미는지 연신 욕을 해댔다. 확실히 기관을 설계한 자의 솜씨는 놀라운 것이었다. 제아무리 가벼운 물체일지라도 반응하는 그 정묘함에서, 암기를 쏘고, 그 쏘아진 암기를 받아들이는 구멍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암기를 받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까지 하는 그 신묘한 장치를 과연 뉘라서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정녕 인간의 솜씨가 아닌 것이다. 곽가량은 생각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누군가 이인(異人)이 나타나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다. 아무도 안 나타나면... 굶어 죽는다. 정말 철문에 폭약이 장착되어 있는지 한번 부숴본다. 정말 장착되었으면... 장렬히 폭사(爆死)한다. 통로를 건드리지 않고 십 장을 날아간다. 가다가 떨어지면... 제 복이다. 다른 방법은, 그 외 다른 방법은 없는가? 뾰족한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와중에도 시간은 쉼없이 흘러갔다. "씨팔!" 간간이 곽가량의 욕설만이 메아리쳤다. "어떤 자식인지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어휴!" * * * 다시 일다경이나 흘렀을까, 문득 강산이 입을 열었다. "제가 통로를 건너겠습니다." 중인들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십 장에 달하는 거리를 날아가겠다니, 혹시 그에게는 감춰둔 날개라도 있는 것일까? 본래 십 장이라는 거리가 뛰기에 전혀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다. 경신술에 남다른 재간이 있는 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이 아예 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통로의 높이가 채 여덟 자가 되지 못해 도무지 뛰기에 적당한 각도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실패했을 경우 안게 되는 부담은 동전 몇 푼 따위가 아니었다. 이래서야 십 장을 뛰던 사람도 채 오 장을 뛰지 못할게 뻔했다. 이항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십 장을... 건널 수 있겠나?" 강산은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물론 그냥은 안됩니다. 약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라면, 어떤?" 강산은 이항의 허리께를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도약하여 힘이 떨어질 때 그것을 발치에 던져주는 것입니다." 이항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허리를 보았다. 수통이 보였다. 이항은 비로소 강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너무 위험한데."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강산은 잘라 말하고 자신의 수통을 풀어 곽가량에게 건넸다. 곽가량은 엉겁결에 수통을 받았다. 순간, 구청연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강형의 방법에는 결점이 있는 것 같소이다. 설령 일이 잘 풀려 한 사람씩 무사히 건넜다 해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남게되오.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이항과 곽가량이 놀란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필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나?" "흠!" 하나 그들의 의문은 이어 떨어진 강산의 대답에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한 사람만 건너면 충분하오. 건너편 벽 어딘가에 기관에 연결되는 선 따위가 묻혀 있을 것인데, 그것만 잘라버리면 되오. 벽에까지 폭약을 묻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오." 와중에 통로에서 멀찍이 물러난 강산이 짧게 물었다. "이 선배, 곽형, 준비됐소?" "됐네. 내가 왼쪽을 맡지." "그러면 나는 오른쪽." "하나 둘 셋에 던져주시오. 목표는 용천혈(湧泉穴)이오." 강산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른 후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팟! 강산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천장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붙어 날아가는 자세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나-!" 이항은 수를 셌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수통이 짜부라졌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곽가량이 그 말을 받았다. "둘-!" 이제 강산의 신형은 통로의 반을 지나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발바닥이 좁쌀만큼이나 작게 보였다. "셋!" 두 사람의 입에서 셋! 소리가 터져나오고, 때를 같이하여 날카로운 파공성을 동반하며 두 개의 수통이 일직선으로 날았다. 거리는 칠 장에 목표는 발바닥! 본래 이항같은 고수에게 있어 그 정도의 거리에, 그 정도의 과녁이라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칠 장 거리에 있는 호박 만한 목표를 맞추지 못한대서야 일류는커녕, 이류의 자격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이항은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수통이 짜부라졌다는 사실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 점을 깨달은 것은 한 자나 엇나가 날아가는 수통을 발견한 후의 일이었다. "헉!" 힘이 다한 강산은 허리를 잔뜩 굽히고 하체를 가슴까지 끌어당겼다. 때를 맞춰 수통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적절하군!' 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헉! 하는 이항의 비명소리였다. "......?" 까닭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잘못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다행이라면 곽가량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한 다행이라면 그 급박한 상황하에서도 강산이 '내가 왼쪽을 맡지.' 하는 이항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강산은 그 즉시 왼쪽을 포기하고 오른발에 전 신경을 집중시켰다. 남은 거리는 삼 장, 자신할 수 없는 거리였지만 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오른발에 미세한 압력이 느껴졌다. 강산은 온 힘을 기울여 오른발을 뻗었다. "차앗!" 산이라도 쪼갤 듯 거센 기합소리와 함께 떨어질 듯 위태롭던 강산의 신형이 훌쩍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역시 한 개의 수통만으로는 무리였다. 마지막 일 장을 남겨둔 시점에서 강산의 신형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불어 위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제 이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수통이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지면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 저것...!" "위험해!" 강산은 마지막 남은 여력을 쥐어 짜내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뽑아들었는지 금강이 쥐어져 있었다. 땡그랑! 수통이 지면에 떨어졌다. 동시에 금강을 통로가 끝나는 부분에 박은 강산은 금강을 축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번쩍-, 쏴아아! 발치를 훑는 쇠붙이의 감촉이 모골을 송연케 했다. "후우-!" 강산은 한숨을 터트렸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끝났다는 마음에 아무 생각도 없던 그 순간, 덜컹! 지면이 푹 꺼졌다. 2 '실로 교묘하구나.'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을 무렵, 강산은 벌써 십 장 이상을 추락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강산은 위급한 가운데 사지를 활짝 펼쳐 대붕전시(大鵬展翅)의 수법을 펼쳤다. 그리고 안력을 집중하여 아래를 살폈다. 하지만 사위(四圍)는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죽는다!'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고는 하지만,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피와 살로 된 육신이 수십, 어쩌면 수백 장이 될지도 모르는 높이를 견뎌낼 리 만무한 것이다. '대책이... .' 대책을 강구하던 강산의 눈에 오른손의 금강이 보였다. 강산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부지불식간에도 금강만은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운 한편, 그러한 행동이 현재의 상황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 강산의 얼굴에서 고소(苦笑)는 사라졌다. 그 대신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금강에서 대책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강산은 금강을 힘껏 아래로 던졌다. '하나, 둘, 셋.' 막 셋을 셀 때, 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삼십 장!' 대충 거리를 헤아린 강산은 호신강기를 일으켜 충격에 대비하는 한편 전 공력을 두 손에 집중시켰다. 이십오, 이십, 십오... 십! 마음으로 십 장을 헤아릴 때, 어렴풋이 지면이 보였다. 순간, 강산은 전력을 기울여 일 장을 펼쳐냈다. 무상삼도의 제 이 초 삼유전유(三陰轉幽)를 장(掌)으로 변환한 것이었다. 펑! 양팔이 자르르! 울리는가싶더니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이어 통증은 순식간에 가슴을 휩쓸고 머리로 올라갔다. 쩡! 강산은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에 빠지며 정신을 잃었다. * * * "으으...!" 소리가 들렸다. 매우 처절한 신음소리였다. 육신의 일부를 잃은 사람이나, 그에 준하는 고통을 받는 자만이 지를 수 있는 소리였다. 신음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용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크으으...!" "......!" 언제부터인가, 한가닥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강산은 그 처연한 신음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답답한 마음에 크게 숨을 내쉬는 순간, 그 때까지도 계속되는 신음소리를 듣게된 순간, 그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절묘한 함정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 순간, 눈이 뜨였다. 강산이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암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빛이었다. 빛은 희미했다. 암흑에 비한다면 초라할 정도였다. 빛의 주체는 아마도 야광주 종류일 듯 싶은데, 그 빛이 형편없이 약한 것으로 보아 질이 낮던지 아니면 크기가 작은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강산은 한 가닥 의문을 품었다. '지상(地上)...?' 원래 일행은 흑지에 들어선 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번갈아 만났다. 그 고저의 확실한 차이는 알 수 없지만, 내리막길이 더 많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거기에 자신은 최소한 오십 장 이상을 떨어졌다. 당연히 지상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만큼 주변이 넓기 때문이었다. 어둠 때문에 자세한 거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희미하게 비추는 빛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 넓이가 최소한 수백 장 이상인 것만은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