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29편 (29/43)
이항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자들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렸지." "설마 미끼보다 약하지는 않겠지요." 말을 하는 곽가량의 시선은 구청연을 향해 있었다. 아니, 구청연을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 순간 중인들의 모든 시선은 구청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누가 왔는지 넌 알고 있지 않느냐?' 하는 뜻이었다. 구청연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어떤 자들을 보냈는지는 모릅니다." 송자영이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코방귀를 날렸다. "흥! 모른다는... 읍!" 그러나 그녀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깜박 코를 놓아 악취가 진동했던 것이다. 송자영은 훌쩍 뛰어 장내를 벗어났다. 그렇게 삼 장여를 벗어난 송자영은 비로소 돌아서서 소리쳤다. "뭐해, 안 갈 거야?" 한데 그 말이 의외였다. 필시 구청연을 닦달할 줄 알았는데, 구청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일정만 재촉하는 것이다. 꼴을 보아하니 그 잠깐 사이에 구청연에게 하고싶었던 말을 까먹어버린 모양이다. '새 대가리!' 곽가량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예상대로 계속해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대부분 두 구씩 짝을 이룬 채였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대여섯 구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사인은 제각각이었다. 검(劍)에 의한 자상(刺傷)이 있는가 하면, 도(刀)에 의한 열상(裂傷)이 있었고, 장(掌)과 지(指)에 의한 상처, 그리고 처음 발견됐던 시체처럼 완력에 의해 찢긴 상처도 있었다. 다만 다양한 살인의 수단에 관계없이 그 모든 시체에는 뚜렷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무천궁에서 누구를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실로 대단한 자들이 왔음에 틀림없었다. 하나, 둘... 열... 스물... 시체의 수가 오륙 십을 헤아릴 때, 마침내 숲이 끝났다. "엄청나군!" 곽가량의 입에서 한숨인 양 탄성이 터져나왔다. 새삼 흑지의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흑지의 규모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 높이는 이백여 장을 넘어 천공(天空) 아득히 솟아 달을 가를 정도였고, 넓이는 사백 장에 달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정도였다. 그저 크다는 막연한 단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규모인 것이다. 제비새끼 마냥 목을 쭉 빼고 높이를 가늠하던 곽가량이 송자영을 향해 물었다. "이백 장은 넘겠지?" 당연히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겨우 이백 장을 가지고, 간댕이 하고는... ." 면박을 받은 곽가량은 마음속으로 '새 대가리!'를 외쳤다. 일행과 흑지 사이에는 이십 여장의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원활한 감시를 위해 잡목 등을 말끔히 베어낸 곳으로, 성(城)으로 치면 해자(垓字) 구실을 하는 곳이었다. 일행은 한동안 숲이 끝나는 곳에 몸을 숨기고 전방을 주시했다. 어디에서도 위험의 징후(徵候)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일행은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자 비로소 신형을 날렸다. 접근은 한 사람씩 빠르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맨 처음 흑지에 접근한 강산은 절벽을 살폈다. 절벽은 대부분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석(烏石) 종류의 매우 단단한 암석이었다. 이백 장이라는 높이도 높이려니와 그 암석의 재질을 보니 일견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족히 이삼 일 이상이 소요될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도 아무 문제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뒤에서 구청연의 음성이 들렸다. "별 수 없이 통로를 찾아야겠습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강산은 일행이 다 모이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보는 바와 같이 위로 침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통로를 찾아야겠습니다. 다른 의견 있습니까?" 다른 의견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럼 패를 나누겠습니다." 강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곽가량이 말했다. "내가 강형과 같이 가겠소." 연이어 송자영이 손을 들었다. "나도." 그러자 곽가량이 다시 말했다. "험! 그럼 난 이 선배와 같이 가도록 하지." 일행은 두 패로 갈렸다. 강산과 송자영이 한 패를 이뤘고, 이항과 구청연, 곽가량이 다른 한 패를 이뤘다. 중인들은 한 시진 후를 기약하고 좌우로 흩어졌다. 2 "이게 뭐지?" 송자영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은 꼬박 반 시진을 허비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앞서가던 강산은 돌아섰다. 송자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작은 흔적들이 잔뜩 있었다. 무언가에 패인 흔적으로, 주먹 만한 것에서부터 손가락 만한 것까지 그 크기가 다양했다. 잔뜩이라고는 하지만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위치가 불쑥 튀어나온 암반(巖盤)의 바로 아래였기 때문이다. 선뜻 눈길이 가는 곳이 아닌 것이다. 강산 역시 무심코 지나쳐버 렸지 않았는가 말이다. '세심함은... 역시 여인인가!' 강산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러자 송자영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미소를 곡해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강산은 그 묘한 흔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놀이터로 폐가(廢家)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히 폐가가 아닌 폐성(廢城)일 때는 더욱 그러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인지라 옛 성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있었고, 개중에는 이름만이 아닌 과거의 영화(榮華)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어린 시절, 강산의 주위에도 그런 곳이 존재했다. 때문에 강산은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폐성에서 놀았다. 다만 폐성이 아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욱 자주 폐성을 방문하는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군사들이었다. 공성전(攻城戰)을 훈련하기에 폐성 이상 가는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군사들은 훈련에 앞서 주위에 삼엄한 경계망을 쳤다. 하나 산맥 마냥 너른 성터를 전부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숨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는 일은 아이들의 주요 일과 중의 하나이다. 아이들은 몰래 숨어 훈련을 구경하고는 했다. 산만큼이나 거대한 충차(衝車), 성벽을 타넘기위한 분온차( 車)와 운제(雲梯), 그리고 수성(守城)하는 측에서 준비한 새문도차(塞門刀車)와 낭아박(狼牙拍)... 그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꿈이요, 환상이었다. 아이들은 훈련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자신이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를, 또 얼마나 자세히 보았는가를 침을 튀기며 자랑하였다. 당시 성벽 아래에서 발견됐던 숱한 패인 흔적들을 강산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은 낭아박(狼牙拍)이라는 수성(守城) 무기의 흔적이오." 송자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낭아박?"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여운지라 강산은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뻔했다. 강산은 시선을 위로 돌리며 낭아박에 대해 설명했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막기 위해 위에서 줄에 메달아 떨어뜨리는 물건인데, 필시 본 적이 있을 것이오. 큰 것은 통나무처럼 생겼고, 작은 것은... ." 강산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 송자영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그 유성추(流星錘)처럼 생긴 것?" "그렇소. 작은 것은 딱 유성추를 닮았소." 맞췄다는 기쁨에 함빡 웃음짓던 송자영이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왜 낭아박이라는 물건이 필요하지? 설마 이런 곳을 기어올라 침투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보는 걸까?" 기다리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강산은 마냥 시선을 위에 주고 있을 뿐이다. 잠시 기다려보던 송자영은 그래도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재차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했다. "왜...?" 그 순간, 강산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소. 저기를 보시오. 십여 장 위쪽이오." 송자영은 강산의 손길을 따라 위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무튀튀한 바위와 조금 덜 거무튀튀한 바위, 그리고 불그죽죽한 바위만이 보일 뿐이다. "바위밖에 안 보이는데?" 한데 이어 터진 강산의 한마디가 의외였다. "맞았소." "......?" "쉽지 않은데 용케 보았구려." "응? 아! 오호호... 뭘, 그 정도야 기본이지. 호호호... 한데 바위가 왜?" "저기까지 올라가 봅시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빠를 것이오." 말을 마친 강산은 훌쩍 뛰어올랐다. 한 번의 도약으로 사 장여에 이른 강산은 그곳에 금강을 꽂았다. 뒤를 이어 송자영이 도약했다. 잠시 후, 강산이 지적한 장소에 도착한 송자영은 나직이 탄성을 터트렸다. "호, 이런 곳이 있었네." 공간이 있었다. 비록 넓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밑에서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각도 때문이었다. 주변이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조금만 각도가 어긋나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공간 한편에 강산이 말한 낭아박이 있었다. 낭아박이라기 보다는 긴 쇠사슬에 더욱 어울릴법한 물건으로, 그 끝이 바위에 박힌 철심(鐵心)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보였다. 철문(鐵門)! 바위와 같은 보호색으로 위장된 철문이 거기 있었다. 송자영은 이내 강산이 말한 그 다른 용도 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문이 있으니 이곳은 틀림없는 통로가 될 것이고, 통로까지 매번 비수를 박아가며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낭아박은 바로 사다리 대용이 될 것이다. "사다리였구나!" 기뻐 소리치는 송자영에게 강산은 미소를 보냈다. "맞았소." "헤헤헤...!" 그러자 송자영이 해실해실 웃음지며 마주 보았다. 착한 일을 했으니 상을 달라는 아이의 웃음이요, 점창산에서의 한나절을 생각나게 하는 웃음이었다. 강산은 괜히 머쓱하여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눈앞에 철문이 있었다. 철문은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단단해 보였다. 흔한 막철이 아닌 정련된 강철을 사용했음에 틀림없었다. 강산은 철문에 손을 대었다. 뼈를 시리게 하는 냉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결코 얇은 쇳조각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냉기였다. 이어 강산은 문을 두드려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역시 철문이 매우 두껍다는 증거였다. 최소한 한 자 이상은 될 듯 싶었다. 강산은 힐끗 허리께의 금강을 보았다. '한 자 이상이라... .'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할 수는 없었다. 강산이 금강을 쥔 손에 잔뜩 힘을 모을 때, 송자영이 강산을 불렀다. 웬일인지 목소리에 다급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잠깐!" 강산은 의아하여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 마냥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송자영이 보였다. "왜 그러시오?" 송자영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더니 금강을 손짓하며 물었다. "그걸로 내리치려고?" "그렇소만." 송자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안돼!" 꽤나 단호한 어조였다. 강산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안된다는... ." 하나 그 말마저 허리를 뚝 잘리고 말았다. "생각해봐. 일개 하찮은 장원의 곡물창고에도 이중 삼중의 자물쇠가 달려 있는 법이야. 하물며 이곳은 대 삼절방의 비밀장소란 말이야.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밀을 취급하는 곳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그곳의 정문을, 그것이 설령 열 자에 이르는 만년한철(萬年寒鐵)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힘으로 해결할 수 있게끔 어리숙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홀연 우중충했던 강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니까, 송소저의 이야기는..." 송자영의 표정 역시 밝아졌다. "그래. 나라면 반드시 그 안에 어떤 장치를 해놓았을 거야. 힘으로 해결하려는 무식한... 분들을 위해서. 분? 아니, 참, 오호호... 이를테면 폭약 같은 것 말이지. 폭약!" 송자영이 유난히 폭약! 두 글자에 힘을 줬다. 그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쓴 입맛은 어쩔 수 없다. '무식한 놈이라... 하긴, 그런 말을 들어도 싸지.' 강산은 금강을 허리에 꽂고 낭아박을 내렸다. 그러자 송자영이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묻는다. "왜, 왜 그래?" 강산은 될수록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일행을 데려오겠소." "난 또. 알았어. 빨리 와." 강산은 눈으로 대답한 후 낭아박을 탔다. 어디선가 훈훈한 바람이 불어와 가슴을 스쳤다. 일 각이나 지났을까, 강산은 남은 일행을 데리고 철문에 도착했다. 어찌된 일인지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송자영은 보이지 않았다. 제 18 장 함정(陷穽). 1 철문은 누가 열었을까? 그녀가 연 것일까? 아니면 제삼자(第三者)가? 또한 그녀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당한 것일까...? 끌려간 것일까...? 온갖 불길한 그림들이 강산의 뇌리에 그려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항이 묻자, 강산은 대답 대신 금강을 잡았다. 이어 성큼성큼 철문을 향했다. "이, 이봐, 강산!" 중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강산의 뒤를 따랐다. 철문 안쪽은 동굴이었다. 군데군데 인간의 흔적이 보이는, 천연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곳이었다. 동굴은 매우 어두웠다. 일 각여나 들어갔을까, 희미하게나마 비춰주던 달빛도 뚝 끊어져 사위는 그야말로 칠흑을 방불케 했다. 안력을 집중해보았지만 분간할 수 있는 거리는 채 일 장이 되지 않았다. "화섭자 가진 분 없습니까?" 구청연이 물었다. 하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두의 강산은 성큼성큼 황소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락없이 자기 집 안뜰을 걷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덩달아 다른 이들의 걸음 역시 빨라졌다. 보조를 맞추자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순간, 강산을 보는 시각은 모두들 같았다. 좋지 않다! 이러다가 기습이라도 받게된다면, 그 피해가 막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그렇다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는 게 낫지 않겠소?', '별일 없을 것이오.'하는 틀에 박힌 소리는 지껄일 수 없었다. 자칫 역효과가 나기 십상인 것이다. 막을 수도, 놔둘 수도 없는 상황에 중인들은 고심했다. 하지만 묘책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느는 건 잔주름뿐이었다. 끄응-!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곽가량이 소리쳤다. "피다!" 강산은 흠칫하여 돌아섰다. 곧바로 이항의 음성이 들렸다. "말랐어. 오래된 것이야. 게다가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니야." "그렇습니까? 휴-! 다행이군요." 곽가량이 과장된 동작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강산은 빤히 곽가량을 바라보았다. 이때 강산의 눈빛은 지극히 싸늘했다. 냉기가 풀풀 흐르는 게 단순히 그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강산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곽가량의 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흘린 피인지, 하루 전의 피인지는 무지렁이 촌놈이라 할지라도 구분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은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산은 느릿하게 돌아섰다. * * * 시체가 발견되었다. 동굴에 들어선 이후 처음 발견된 시체였다. 시체는 모두 네 구였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번째 철문이 있었다. 그로 미루어 아마도 시체는 철문을 지키던 자들인 듯 싶었다. 문을 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열쇠라 짐작되어지는 물건이 발치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먹 크기의 물건으로, 잡기 좋게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다. 돌려보니 반대편에는 십(十)자 모양의 문양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철문에도 비슷한 모양의 홈이 패여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딱 들어맞을 것 같았다. 강산은 열쇠를 홈에 맞춰 서서히 돌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그르르르! 하는 기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열린 틈새로 빛이 흘러들었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중인들에게는 태양빛처럼 강렬한 것이었다. 빛이 흘러들어 옴과 동시에 중인들은 바싹 긴장하여 석벽 좌우로 붙었다. 이와 같이 시야가 가려졌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숱한 경험으로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어느 모임을 가나 똥오줌 못 가리는 자들이 꼭 한 명씩은 끼어 있게 마련이다. 강산, 이항, 구청연, 곽가량, 일행의 면면을 살펴볼 때 그에 어울리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물론 곽가량이었다. 오직 그만은 굳건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 그렇지, 만약 강전(鋼箭)이라도 쏟아졌다면 그는 영락없이 꼬치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 중앙에 버티고 서서 멀뚱멀뚱 중인들을 바라보던 곽가량의 눈에 문득 이채가 어렸다. 비로소 저간(這間)의 사정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순간, 곽가량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하...! 저는 천하제일신공(天下第一神功)인 소림의 대승범천신공(大乘凡天神功)을 익혀서 전신이 금강불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잡스런 암기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하하하!" 곽가량은 일장 연설을 토해낸 뒤 서둘러 철문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세 사람은 어젯밤 이루어졌던 그와 송자영 사이의 대화를 떠올렸다.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천하제일신공인 소림의 대승범천신공을 익혀서 네 몸은 금강불괴나 다를 바 없다고." "금강불괴-에? 내가 언제 그랬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허허, 참. 얘가 사람잡네. 달걀로 눈탱이 안마하는 금강불괴 봤냐? 봤어? 봤냐고?"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가량의 뒤를 따랐다. 빛의 출처는 야광주(夜光珠)였다. 주먹만한 야광주가 천장에 박혀 환한 빛을 뿜고 있는 것이다. 야광주는 거의 십여 장에 하나씩 박혀 있었다. "돈이 많기는 많은 놈들이군. 천금(千金)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는 야광주를 고작 횃불 대신으로 사용하다니." 이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곽가량이 이항을 향해 물었다. "하나에... 얼마씩이나 갈까요?" 그는 야광주가 발견된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꼴깍꼴깍! 자꾸 침을 삼키는 게 영락없이 떡을 본 아귀(餓鬼)꼴이었다. "글쎄, 거래를 해본적이 없어 확실히는 알 수 없는데... 최소한 황금 오천 냥 정도는 나가지 않을까?" "오... 오천...!" 곽가량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갑자기 제 목숨 값, 황금 사백 냥이라는 거액이 애들 사탕 값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저... 저... 저마이니까?" '정말입니까?' 라는 소리이리라. 이항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허튼 소리를 하겠나. 그리고 입 좀 다물고 말하게." "아, 예." "침도 좀 닦고." "아, 예." 곽가량은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질펀한 게 많이도 흘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곽가량은 좋았다. '한 개에 오천이면, 열 개면 오만. 크카카! 백 개면 오십만. 크카카카! 천 개면? 설마 천 개는 없겠지! 아니야, 천 개쯤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천 개면 오백만. 크카카카카...! 가만... 혹시, 만 개쯤 있을지도... .' 무럭무럭 꿈이 커갔다. '열 개쯤 털어서 그림 같은 성(城)을 짓고, 또 한 열 개쯤 털어서 세상의 온갖 미녀란 미녀는 모두 데려다놓고 밤마다 그 짓을... 크카카카! 참, 혹시 정력(精力)이 딸릴지도 모르니 영약(靈藥)이란 영약은 몽땅 구비해놔야지.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짓도 재미가 없어질 때 여행을 떠나는 거야. 야광주 한 천 개쯤 차고.' 마침내 꿈은 자라 열매를 맺었다. '배고프면 음식점에 들어가 요리를 시키는 거야. 맛없어도 제일 비싼 것으로. 은 댓 냥쯤 나오겠지. 그러면 황금 열 냥쯤 줘버리는 거야. 왜? 돈 많으니까. 크카카카! 또한 십 리 갈 일 있으면, 마차 대절시켜서 일부러 백 리쯤 돌아가는 거야. 왜? 돈 많으니까. 크카카카카...!' 그러나 열매는 채 익기도 전에 떨어지고 말았다. "야광주는 손대지 마시오. 폭약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강산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꿈이 시커멓게 시들어갔다. 하지만 곽가량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굴하기는커녕 코방귀를 뀌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살아보려 애쓰는 착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못된 놈이 있는 법이었다. '킁! 어림없는 수작. 저 혼자 독식(獨食)하려고? 그 검은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런데 못된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곧바로 이항이 강산의 이야기를 받았다. "그렇지. 그래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거군. 아니면 남아나질 않았겠지." "......!" 이번만은 곽가량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합당한 반발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참으로 빌어먹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될 모양이다. '어떻게 한 개라도....' * * * "이 선배, 어떻게 폭약을 건드리지 않고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걸 알면 내가 빼지 왜 자네를 가르쳐주나?" "그 동안 쌓인 정을 생각해서... ." "허, 참! 딱하기는. 모른다는 말일세." "그렇지만 이 선배야 경험이 많으니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셨을 게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