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28편 (28/43)

2026-10-08 18:49:05 조회 1
"...... ." "일류급이 이백오십에 고수는 또 몇이나 있을지... 거기에 기름과 강노, 폭탄까지... 아무래도 뼈를 묻어야 할 것 같구려." "...... ." "승산이 있다고 보시오? 있다면 몇 할이나?" 죽음을 목전에 두면 말이 많아지는 것일까? 구청연은 유난히 말이 많았다. 본래 과묵한 성격은 아니라지만 정도가 지나쳐 수다스러울 정도다. 그에 비해 강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청연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양표가 사라진 이유와 적들이 이번 공격을 끝으로 물러나야만 하는 까닭,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것은 그 두 가지일 것이다. 과연 몇 번인가 되지도 않을 질문을 던지던 구청연이 이윽고 본색을 드러냈다. "강형은 그다지 생사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구려. 그렇다면 이건 어떻소? 흑지(黑地)와 천구(天球)! 들어본 적이 있소?" 도박을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거래를 하자는 것인가? 강산은 뒤통수에 꽂힌 구청연의 시선을 느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양표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닫고 떠났소.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내 역할이 컸소. 그 몇 가지의 사실 중 하나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것이오." 구청연은 눈을 번쩍 빛내고 한참동안이나 강산을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흑지는 우리가 가야할 곳이오. 적들은 모두 흑지에서 왔소." "흑지, 우리가 가야할 곳이라... ." 강산은 나직이 뇌까린 후 말을 이었다. "뭐, 좋소. 그가 가져간 사실 중 다른 하나는 흑지의 유무에 관계없이 우리가 가야할 장소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오." 일순 구청연의 눈 깊은 곳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아쉽게도 강산은 돌아서 있는지라 볼 수 없었다. "허허, 강형이 거기까지 알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구청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강산은 다시 침묵했다. 이내 그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구청연이 입을 열었다. 일 대 일 거래,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줘야하는 것이다. "천구는 그 흑지에서 제조된 폭탄이오. 그 위력은 이미 보아 알고 있을 것이오." 이 두 번의 거래로 강산이 새로 얻은 사실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굳이 얻었다면 '흑지'와 '천구'라는 두 개의 단어 정도다. 하지만 강산은 만족했다. 그 역시 준 것이 없을 뿐더러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이 막 모습을 보이려하는 것이다. 강산은 구청연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때를 같이하여 건너편에서 퍼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몇 장이야?'하는 신경질적인 송자영의 음성과, '파, 팔 장!'하는 다급한 곽가량의 음성도 들렸다. 강산은 개의치 않고 돌아섰다. 목전에 구청연의 얼굴이 있었다. 약간은 상기됐다지만 언제나처럼 부드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강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알고싶은 것은 한 가지 뿐이오. 아마 구형도 그럴 것이오." "무엇이오? 또 내 의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강산은 대수롭지 않은 듯 툭 한마디를 뱉었다. "공격대!" "......!" "미끼가 아닌 진정한 공격대!" 구청연의 안색이 변했다. 하나 그 변화는 과연 변했나 싶을 정도로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 미미했던 변화마저 사라져버렸다. 평소의 부드러움을 되찾은 구청연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허허, 과연... 허허허!" 강산은 그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구형의 숨겨진 패(牌)요. 미끼를 자처한 이상 반드시 최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패가 있을 터, 구형이 그 정도 준비도 없이 사지(死地)에 뛰어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소." 강산은 말하는 도중 느릿하게 돌아서서 용수를 풀었다. 진기를 주입하자, 칭! 경쾌한 음향을 흘리며 용수가 곧게 섰다. 한순간 서늘한 냉기가 장내를 휩쓸었다. 너무도 차가워 살을 벨 것만 같은 광채가 장내를 휩쓸었다. 강산은 용수를 두 치 가량 밖으로 내밀었다. 칼날에 반사된 적의 모습이 보였다. 흐릿했다. 하지만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곽가량처럼 멍청하게 자갈을 뺨에 맞으면서 얼굴을 내밀지 않아도 적들이 어디까지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오 장!' 선두는 화염수들이었고 다음은 강노수, 다음은 장창수들의 순이었다. 그때까지 구청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강산은 용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이미 속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의 시간 끌기는 무의미하오. 어떻소, 그 패를 지금 사용하는 것이? 지금이 적기(適期)라 생각되오만." 구청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와중에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사 장, 삼 장... 그러다가 급기야 장창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순간, 구청연이 나직이 말했다. "시선을 끌어주시오. 한순간이면 충분하오." 강산은 금강을 허리춤에 꽂았다.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용수가 편했다. "준비하시오." 한마디 후, 강산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자갈 속으로 뛰어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여기저기서 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나왔다." "쏴라!" 그 음성과 더불어 몇 대의 강전과 거대한 불기둥이 강산을 덮쳤다. 놀랍도록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보다는 강산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화염은 헛되이 강산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고, 강전은 그의 잔상(殘像)을 꿰뚫었을 뿐이다. 적의 일격을 무위로 만든 강산은 공터로 신형을 날렸다. 이때 그의 전 신경은 강노수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화염과 자갈이 각각 거리와 위력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는 반면 강전만은 더없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파파팟! 강산이 다시 한 무더기의 강전공격을 피하고 세 번째로 신형을 꺾을 때, 구청연이 튀어나왔다. "또 한 놈 나왔다." "차앗!" 선두의 사내가 세찬 기합을 내지르며 구청연을 향해 화염을 발사했다. 그러나 때는 늦어, 구청연은 사라지고 없었다. 튀어나왔다 싶은 순간 벌써 제자리로 돌아가고 없는 것이다. 그 사이 구청연이 취한 유일한 동작은 팔을 한번 흔드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던지는 동작이었다. '무엇...?' 강산은 의문을 삼키며 네 번째로 신형을 꺾었다.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콰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협곡 전체가 무너질 듯 거세게 요동을 쳤다. 실제로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는 곳도 있었다. 비록 천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위력적인 폭발이었다. 강산은 한 그루 자목련 뒤에 넙죽 엎드려 있었다. '진천뢰(震天雷), 숨겨진 패는 진천뢰였군!' 그는 흔들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흔들리는 배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강산은 가벼이 숨을 들이켜 내부를 안정시킨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옥도(地獄圖)! 눈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너덜너덜 어느 부위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찢겨진 살덩이가 천지에 그득했다. 보이는 게 피요, 보이는 게 주검이요, 보이는 게 고통이었다. 한쪽에서는 요행히 살아남은 자들이 찢겨 없어진 자신의 육신을 허망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강산은 용수를 갈무리했다. 더 이상 용수는 필요하지 않을 듯 싶었다. 우측에서 구청연이 모습을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좌측에 있던 세 사람도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지만 제 자신의 부상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구청연이 강산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소?" 강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부상자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처리합시다." 살아남은 자들은 십여 명뿐이었다. 최하 중상(重傷),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죽음도 보시(布施)가 될 수 있는 법, 강산은 차례차례 그들의 사혈(死穴)을 눌러나갔다. 꼬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한 사람 두 사람... 지면에 몸을 뉘었다. 마침내 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의 상세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하관의 반쪽이 날아가고 두 팔이 끊기고 내장이 허벅지까지 기어 나와 설사 낳아준 어머니라 할지라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노수들의 중앙에서 지휘하던 자, 필시 이번 공격을 주관했던 자가 분명했다. 강산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바로 화진악이었다. 그는 부서진 바위에 몸을 기대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폭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이제 사라져버린 꿈을 좇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가만 놔두어도 그가 일 각을 버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강산은 화진악의 목 뒤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화진악의 목에서 그르륵!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산은 화진악의 눈을 보았다.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사혈에 손이 닿자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강산은 나직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소?" 그르륵! 다시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산은 그의 입이 아닌 눈에서 그가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산은 그의 목으로 손을 가져가 대추혈(大椎穴)에 약간의 진기를 불어넣었다. 부르르! 화진악의 몸이 떨리는가싶더니 목구멍에서 울컥 주먹만한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핏덩어리는 그의 깨진 턱을 타고 흘렀다. 깨진 턱뼈와 이빨 부스러기, 살점, 내장 조각 따위가 뭉쳐진 것이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그의 입술이 옴실거렸다. "푸... 푸-." 한결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는 소리였다. 움찔거리는 어깨와 눈짓으로 짐작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푸?" "푸... 푸우-ㅁ!" "푸움... 품속을 뒤져보라는 것이오?" 화진악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우두마면(牛頭魔面)의 악귀는 저리 가라할 정도로 처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그 표정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화진악의 품속을 뒤지던 강산은 곧 하나의 목갑을 찾아냈다. 주먹이 들어가면 딱 알맞은 크기로 그 크기에 비해 무척 무거운 물건이었다. 강산은 목갑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들었기에...?' 목갑을 본 화진악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도저히 다 죽어가는 자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에게는 무척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여... 러." 이번 이야기는 비교적 알아듣기 쉬웠다. 강산은 목갑을 열었다. 검은 색 비단이 나왔다. 꽤 여러 겹이었다. 아마도 내용물을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넣어둔 것 같았다. 모든 비단을 걷어내자 칙칙한 회색 빛의 주먹만한 구슬이 나왔다. 강산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구!' 비록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더, 더... 저... ." 화진악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그 말이 강산에게 들릴 리 없었다. "더... 더-언... 져... ." "...... ." "던-!" 강산이 정신을 차렸을 때 화진악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외눈을 부릅뜬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강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적정(敵情)을 살피러 간 모양이었다. 강산은 목갑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 * * 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새로운 언덕이 생겼다. 십여 장 높이로, 진천뢰의 폭발로 인해 양쪽 절벽이 무너져 생긴 언덕이었다. 강산은 언덕 아래에 서 있었다. 진천뢰가 이 정도니 만약 천구가 폭발했다면... 단지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다행이라 자위(自慰)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투둑, 와르르! 계속해서 흙과 자갈이 흘러내렸다. 게다가, 쩌저적! 절벽 여기저기에서 금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강산." 문득, 언덕 너머에서 송자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밝고도 활기찬 목소리였다. 강산은 마침내 고량이 물러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2권 끝. > 쾌도강산 제3권 표지 제목: 쾌도강산 제3권 지은이: 운중행 - 차 례 - 제 17 장 흑지(黑地) 제 18 장 함정(陷穽). 제 19 장 암향부(暗香浮). 제 20 장 세 명의 절대고수. 제 21 장 감옥에서. 제 22 장 양패구상(兩敗俱傷). 제 23 장 정욕궁. 제 24 장 흑선분면지주(黑線粉面蜘蛛). 제 25 장 처절한 격전. 제 26 장 제삼(第三)의 칼. 쾌도(快刀) 강산(江山) 이라는 사나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제 17 장 흑지(黑地). 1 위기를 벗어난 일행의 주된 관심사는 탈출이 아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히 강산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이곳을 벗어납시다." 강산은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당초 무천궁에서 우리를 채용했을 때... ." 강산은 허술했던 모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석연치 않았던 구청연의 행동, 양표가 첩자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리고 물과 식량이 떨어져간다는 것을 알고 양표를 이용할 계책을 꾸몄다는 것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일행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돈 받는 것만 남았네." 곽가량은 좋아했고, "이 정도로 끝났으니... ." 이항은 초연한 반응을 보였으며, "흐음, 나를 미끼로 사용하셨다 이거지?" 송자영은 비수를 갈았다. 물론 구청연은 안절부절 눈치 보기에 바빴다. * * * 갈림길이 나왔다. 며칠 전 곽가량이 동전 점을 쳤던 그 갈림길이었다. 왼쪽은 흑지로 가는 길, 오른 쪽은 돌아가는 길이다. 강산은 흑지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가봅시다." 왠지 미적미적 먼길 떠나는 새신랑 마냥 행보가 여의치 못했던 중인들이 강산의 이야기에 기다렸다는 듯 동의를 표했다.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은 해봐야겠지." "난 좋아."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 유일하게 구청연만이 대답하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아 별로 가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로서는 이미 임무를 완수한 이상 가고싶어 할 턱이 없다. 하지만 이어 터진 송자영의 한마디에 그도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너 혼자 가." * * * 일행은 꼬박 두 시진을 허비한 끝에 협곡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뉘엇뉘엇 해가 기울어가는 신시(申時) 말이었다. "저곳이 흑지인가? 과연 흑지라 할만 하군." "흑지보다는 흑봉(黑峯)에 더 어울리겠는데..." 흑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협곡을 빠져 나오자마자 멀리 흑요석(黑曜石)으로 도배를 한 듯 새까만 봉우리 하나가 일행을 반겨주었던 것이다. 마치 버섯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야릇하게 생긴 봉우리였다. 십여 리나 떨어졌을까, 그다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봉우리와의 사이에 별다른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봉우리를 빙 둘러 키 작은 잡목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올라가기가 쉽지 않겠는걸." 잠시 흑지를 응시하던 곽가량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떼자 나란히 서있던 이항이 말을 받았다. "그만한 위력의 폭탄을 허술히 관리할 수는 없는 일이지. 봉우리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을 거야." 구청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위지광(慰遲光)이 관리하는 곳인 만큼 상정(想定)해볼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해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항이 의아한 표정으로 구청연을 바라보았다. "위지광?" "아, 삼절방 소방주의 이름이 위지광입니다. 별호는 북도주인(北道主人)이라 합니다." 이번에는 곽가량이 의문을 표했다. "북도주인?" "객(客)의 시중을 드는 주인이라는 뜻도 되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곽가량이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인유(仁柔)롭다는 말이오? 아니면 매사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말이오? 아니면, 딱히 다른 이유라도?" "제가 아는 것 역시 이름과 별호 정도에 불과합니다." 구청연이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하다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맡은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매우 치밀한 성격일 듯 싶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구청연은 입을 닫았다. 보따리를 좀 더 풀어보는 게 어때? 하는 눈빛으로 송자영이 노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하긴 삼절방주(三絶幇主)인 삼고취홍(三考取紅) 위지한승(慰遲漢昇)의 이름도 근자에 알려졌으니... ." 중인들은 이항의 중얼거림을 귓전에 흘려들으며 멀리 흑지를 응시했다. 석양에 잠겨 검붉게 타오르는 모습이 신화 속의 혈룡(血龍)을 생각케 했다. 북도주인 위지광! 삼고취홍 위지한승! 길을 인도하는 자와 세 번 생각한 후 '홍(紅)'을 취하는 자- 아마도 '홍'이란 피(血)를 일컫는 말일 테지만- 어떤 자들일까?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두려움이 핏빛 석양처럼 전신을 휘어 감았다. * * * 적당한 장소를 찾아 휴식을 취한 일행은 해시(亥時)를 훌쩍 넘겨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뒤덮였을 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진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매복과 함정은 일보일보에 신중(愼重)을 요구했으며, 독충과 빽빽히 들어찬 덩굴, 소음 등은 신중에 신중을 요구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았다.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두 구로,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인(死因)은 반쯤 뜯긴 목이었다. 맹수가 한 입 벤 듯 목뼈와 살점이 통째로 뜯겨나간 것이다. 검을 뽑고자 하는 어떤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당한 것 같았다. 시체에서 악취가 풍겼다. 얼마나 지독한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곽가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독한 놈이네. 뜯어낼 여유가 있다면 그냥 사혈(死穴)을 짚어도 되었을 텐데." 이항은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한 후 시체 앞에 쪼그려 앉은 강산을 보며 물었다. "얼마나 된 것 같나?" "삼 일은 넘은 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강산이 시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뜯긴 목과 퀭한 눈에서 수백 마리의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삼 일이라... ." 이항은 중얼거리며 강산의 곁에 앉았다. 이어 시체의 목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 중 한 마리를 집었다. "읍!" 송자영이 헛구역질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항은 개의치 않고 손톱으로 구더기의 배를 땄다. 그리고 요리조리 살펴보는가 싶더니 이내 버렸다. "이놈은 아니군." 그러더니 다른 구더기를 집었다. "이놈도 아니군." 구더기는 다시 버려졌고, 이내 또 다른 구더기가 이항의 손에 잡혔다. "......?" 중인들은 의문을 꾹 억누른 채 이항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항이 갑자기 노망이 들지는 않았을 터이니 반드시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놈도 아니네. 이 동네에는 없나?" 그렇게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이항의 구더기 배따기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여 마리의 구더기가 발치에 쌓였을 때. "옳지!" 이항은 드디어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 "뭐가 '옳지' 야?" 묻는 소리가 이상해서 돌아보니 송자영이 온갖 인상을 찌푸린 채 코를 쥐고 있었다. 악취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인 모양이었다. 이항은 구더기를 내밀며 말했다. "좁쌀 만한 게 보이지? "좁쌀...?" 송자영은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과연 좁쌀 크기의 길쭉한 물체가 보였다. 작지만 붉은 빛이 선명해 분간하기 쉬웠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게 뭔데?" "낭승(狼蠅)이라는 파리의 알이야." "낭승?" "늑대파리라는 이름답게 그 생김새나 성질이 매우 흉악한 놈이지. 체구도 큰 말벌만 하고." 낭승의 알을 보던 송자영이 눈길을 돌려 이항의 아래위를 훑었다. "그게 어쨌는데?" 이항이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험! 이 낭승은 조금 특이한 습성이 있어. 보는 것처럼 살아 있는 애벌레의 몸 속에 알을 낳는다는 점이야. 그리하여 깨어난 알이 숙주(宿主)의 몸을 먹으며 자라나는 것이지. 그것은 그다지 관계없는 이야기이고, 중요한 것은 이 알이 시간관념이 매우 철저하다는 점이야." "시간관념?" "낭승의 알은 모태(母胎)를 벗어난 후 반드시 열두 시진이 지난 후에 활동을 시작해." 이항은 말을 끊고 중인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어 턱으로 시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서 부패 정도로 볼 때는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실지로는 만 하루가 넘지 않았다... 그런 말이지." 곽가량이 이항의 말을 받았다. "그 말은 지금쯤 흑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는 말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