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27편 (27/43)

2026-10-08 18:49:05 조회 1
이항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다. "......?"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강산은 오래지 않아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항의 마혈을 제압한 것에 있었고, 남은 하나는 '난 괜찮으니, 이 선배나 잘 발라주시오.' 했던 이야기에 있었다. 생각해 보라, 송자영이 금창약을 발라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을... 자신도 방금 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서문상의 고통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라고. 한데 현재 그 고통을 고스란히 이항이 받고 있었다. 마혈이 제압 당해 끽!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서 말이다.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잘못하면 물에 빠진 놈 건져주고 맞아 죽을 판이다. 강산은 삐쭉삐쭉 이항에게 다가가 그의 마혈을 풀었다. 이항이 읍조려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맙네!" 빠득, 빠드득! 감사의 마음은 옷을 갈아 입고 조식을 취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 * "궁수(弓手), 앞으로." 화진악은 흐뭇한 마음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이 순간, 그의 심장은 해냈다는 기쁨으로 터질 듯했다. '셋! 셋뿐이다.' 불귀신이 된 이항, 척추병신이 된 강산, 거기에 어젯밤 돌아온 양표, 이제 온전한 적의 수라야 겨우 셋뿐이다. 더욱이 난관이라고 남은 것은 같잖은 목책 하나, 잠시 후면 재로 변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목책 하나다. "발화수(發火手), 앞으로." 연이은 호령에 착착 진영이 갖춰졌다. 사열 횡대로 도열한 강노수들 사이로 발화수들이 자리를 잡고, 그 뒤로 장창 칼 검수 등이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믿음직스러운 모습들이었다. 화진악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직히 음소를 터트렸다. "크크크! 이놈들, 더 이상의 요행은 없다. 일 각... 길어야 이 각이다." 과연 그의 말처럼 강산 일행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어 보였다. 목책이 사라져버린다면 또 무엇이 있어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남은 것은 이백대 오(二百對五)의 힘 겨루기뿐인 것이다. 화진악은 제 흥에 겨워 목청껏 소리쳤다. "뒈질 준비는 마쳤느냐? 크하하하...!" 울렁울렁! 화진악의 웃음소리가 온 협곡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이 각 후에도 화진악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목책 때문이었다. 불길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는 것이다. "......?"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던 화진악은 홀연 그 이유를 깨닫고 노호를 터트렸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 적들이 슬금슬금 땔감을 집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소홍(小虹)!" 화진악의 일갈에 한 사람이 답하고 나섰다. "예." 각진 턱과 구레나룻 수염이 매우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거의 일 장에 달하는 장창을 쥐고 있었다. "불길을 잡아라." "예, 가자!" 소홍이라는 자가 힘있게 답한 후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곧이어 소홍을 선두로 여덟 명의 장창수(長槍手)들이 기세 좋게 달려나갔다. 그러나 좋던 기세는 한순간뿐이었다. 목책에 이 장까지 접근한 순간 그들은 주춤거렸다. 불길이 생각 외로 강맹(剛猛)했기 때문이었다. 빠직, 빠직! 오그라드는 머리카락을 보니 그저 괜히 몸을 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힘들 내라." 소홍이라는 자가 앞서 걸음을 떼며 이야기했다. 작은 무리라지만 한 무리의 우두머리다운 행동이었다. 소홍의 행동에 자극 받은 수하들이 뒤를 따랐다. 구수하면서도 역겨운, 매캐한 살 타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소홍을 시켜야겠군.' 화진악은 소홍의 듬직한 행동에 만족했다. 거웅 최고반이 죽고 없는 지금 그는 확실한 부향주 감이었다. 화진악은 남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수통을 모아 그들의 머리에 뿌려주어라." 급히 수십 개의 수통이 모아졌다. 몇 명의 검수가 수통과 장창수들의 머리를 왕복했다. 덕분에 장창수들은 최대한 불길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와악!" 간신히 불길에 접근한 장창수들이 이리저리 창끝에 걸린 나무를 헤집고 있을 때, 돌연 장창수 중의 한 사람이 뒤로 엎어졌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모가지라도 잡아 챈 것처럼 급작스럽게 엎어졌다. "흐아아아-!" 그는 두 손으로 안면을 감싸쥐고 죽는다고 악을 써댔고, 남은 이들은 그의 기묘한 행위에 어리둥절 데굴데굴 눈알만 굴렸다. "손을 멈추지 말아라. 용삼(龍三), 무슨 일이냐?" 소홍은 돌연한 수하의 행동에 서둘러 다가갔다. 그 순간, 막 걸음을 옮기는 소홍의 뒤통수를 쉬잇! 섬뜩한 기운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도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었다. "이것은...?" 거의 동시에 또 다른 한 명의 수하가 쓰러졌다. "크악!" 아니, 쓰러진 자는 그 한 명만이 아니었다. 채 한 호흡이 지나기 이전 다시 한 명의 수하가, 그리고 다시 한 명의 수하가 쓰러졌다. "우와악!" "커억!" 멍청히 서 있던 소홍의 뇌리에 쩌렁 화진악의 일갈이 울려 퍼졌다. "소홍, 물러서라. 자갈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소홍은 화진악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기 이전에 딱! 관자놀이에 전해지는 통증을 먼저 느껴야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소홍을 지켜보던 화진악은 타오르는 분노에 푸들푸들 전신을 떨었다. "이런 개 같은... 이놈들, 씹어 먹어버린다." 충천하는 화광 너머로 빙그레 웃음짓고 있을 적들을 생각하니 더욱 거대한 분노가 밀려들었다. * * * 화진악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행은 어려운 가운데 차츰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모두 지천에 널린 나무와 자갈 덕분이었다. 다만 전원이 그런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어인 일인지 곽가량만은 죽상을 쓰고 있었다. 원인은 역할분담에 있었다. 아니, 가위바위보에 있었다. 일 각 전, 조식을 취하는 강산과 이항을 제외한 세 사람은 돌아가면서 자갈공격도 하고 나무를 나르기도 하고 하였다. 그러던 차에 문득 곽가량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비능률적으로 일을 할 게 아니라, 차라리 각자의 역할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그 일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의견이었다.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이야기였지만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하게됐다. 승패는 첫 판에 엇갈렸다. 송자영 보, 곽가량 주먹, 구청연 주먹이었다. '빌어먹을, 어떤 자식이 남자는 주먹 이랬어?' 곽가량은 굳이 둘이 나르자는 구청연을 꼬드겨 두 번째 판을 벌렸다. 첫 째판의 실패를 거울 삼아 그는 가위를 냈다. 남자는 주먹이었다! "염병! 빌어먹을 놈의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던가 해야지." 강산은 곽가량의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조식에서 깨어났다. 가뿐했다. 비록 상처야 없어지지 않았지만 몸 상태는 조식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강산은 기지개를 힘껏 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강산을 바라보며 곽가량은 한숨지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제 일거리가 반으로 줄지 않겠는가 말이다. 곽가량은 강산을 불렀다. "강형. 깼으면... ." 한데 강산을 부르는 자는 단지 곽가량만이 아니었다. "강산, 깼으면 이것 좀 도와줘." 송자영 역시 강산을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음성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터져나왔다. 다만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곽가량이 조금 빨랐다. 그 대신 송자영의 음성이 훨씬 컸다. 저 불여시가 왜? 곽가량은 까닭 모를 불안이 엄습함을 느꼈다. 자갈 던지는 일 따위에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일까? 숨죽이고 바라보자니 송자영이 제 발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두보다는 크고 오리알보다는 작은 놈으로 골라 줘." 와르르! 곽가량의 등에서 나무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송자영이 보더니 고리도끼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야, 빨리빨리 못 움직여? 불길이 줄잖아?" * * * 일다경이나 흘렀을까, 이항은 조식에서 깨어났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강산에게 물었다. "이제는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왜 양표가 넘어갔는지, 왜 저들이 이번 공격을 끝으로 돌아간다는 것인지?" 강산이 담담히 대꾸했다. "어차피 이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불필요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차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담담히라고는 했지만 그의 어조는 꽤나 강력한 것이었다. 이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섰다. "원 답답해서... ." 투덜대며 힐끗 구청연을 보니,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것이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히 짚히는 데가 있는 눈치인데... .' 그게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돌아서니 곽가량이 보였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안색이 한 사나흘 굶은 놈 마냥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문을 던지려 할 때, 곽가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울먹울먹 금방이라도 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흑, 선배님. 저 좀 도와주세요." "무얼 도와달라는 말인가?" "나무 나르는 것 좀... ." 이항은 도와주고 싶었다. 장말이지 손과 등에 입은 화상만 아니라면 온 공터의 나무를 몽땅 져주고 싶었다. 이항은 천 조각으로 감싼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미안하네, 물건을 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그러자 곽가량이 울상을 짓는데 그 표정이 너무 가련했다.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무슨 짓을 해서건 도와줘야만 되겠다 라는 마음을 팍팍 샘솟게 하는, 더불어 안 도와주면 원한 사기 딱 좋은... 그런 표정이다. 이항은 난감했다. '이것 참, 잘못 걸렸는데.' 그때 마침, 적절하게도 송자영이 불렀다. "여기, 나 좀 도와줘." 이항은 곽가량에게 정중히 조의의 뜻을 표했다. "미안하네, 내 다음에 상처가 나으면 도와줌세." 그리고 후다닥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늙은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응, 거기 강산이 골라놓은 것 중에서 오리알 만한 것만 따로 빼줘." * * * 밤은 유난히 길었다. 대신에 그를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사라지는 것 또한 매우 빨랐다. 한 점 두 점 빛이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사위가 밝아졌다. 마치 새벽을 건너뛴 느낌이었다. 어둠이 사라지자 전투의 양상은 바뀌었다. 강노수들이 절벽을 타고 올라 활을 쏘아대는 것은 물론, 이쪽의 동정을 빠짐없이 제 무리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 거리는 이십 장이었다. 자갈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리이니 일행은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면 위험까지 느끼지는 않았으리라. 문제가 생겼다! 화진악이 묘책(妙策)을 발견한 것이다. 묘책은 흙과 돌이었다. 절벽을 깨고 땅을 파 불을 제압해 오는 것이다. 덕분에 곽가량은 더욱 바빠졌다. "좋지 않아... ." 이항은 근심스러운 눈길로 목책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이 줄어들었다. 삼 장 높이까지 치솟던 불길이 지금은 채 이 장도 되지 않았다. 뒤늦게 송자영과 구청연이 나무 나르기에 합세했지만 한번 꺾인 기세는 좀처럼 회복될 줄을 몰랐다. 거기에 쏴, 쏴! 흙을 끼얹는 소리는 또 왜 그렇게 신경을 거스르는지. "이렇게는 얼마 못 버티겠는걸... ." 걱정스러운 투로 중얼거리던 이항은 문득 맞은편의 강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쯤 물러가겠나?" 강산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입니다." 같은 어조에 같은 대답, 몇 번이나 말을 돌려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다. 적들은 이번 공격을 끝으로 물러갈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면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낸 자는 다름 아닌 강산이다. 이항은 지금까지 강산이 헛소리를 내뱉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믿어지지는 않았다. 아흔아홉 번 참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백 번째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캐묻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그의 대한 신뢰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힘을 주자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소망인가?' 이항은 힐끗 강산을 한 번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모습과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무미건조한 얼굴에서 이항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물러가게 할 것인가? 이미 모종의 조치를 취해놓은 것도 같은데... 혹시, 양표가 사라진 것과 어떤 연관이...?' 불현듯 떠오른 의문 하나가 이항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슴이 저릿한 느낌,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가만, 가만, 하나씩 정리해보자. 양표는 첩자였다. 그가 어젯밤 돌아갔다. 통상 첩자가 돌아가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 한해서이다. 하나는 정체가 탄로났을 때, 남은 하나는 원하는 임무를 완수했을 때, 또는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 이항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불길은 계속 약해졌다. 이제는 군데군데 까만 숯이 보일 정도다. '그렇다면 양표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게 무엇일까? 필시 강산의 장담과 관계가 있을 터인데... .' 아쉽게도 이항은 거기서 생각을 마쳐야했다. 피잇! 한 자루 강전이 바로 뺨을 스쳐간 것이다. "이크!" 이항은 황급히 고개를 당겼다. 위험했다. 생각에 잠겨 머리가 바깥쪽으로 나간 것도 몰랐다. 만약 궁수가 좀 더 노련한 놈이었다면 하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그 꼴을 보았는지 강산이 한마디를 던진다. "목전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오." 이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산을 한번 째려본 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걱정말아라. 답답해서라도 살아 남는다.' 제 16 장 진천뢰(震天雷) 1 고량은 뚫어져라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채 한 자도 떨어지지 않은 곳, 바로 자신의 손이었다. 그의 손에는 노란 쪽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동그랗게 만 자국이 뚜렷한 것으로 보아 전서구를 통해 온 것 같았다. 쪽지에는 딱 두 자가 적혀 있었다. [급퇴(急退)!] 푸스스! 한 순간, 쪽지는 고량의 손에서 재가 되었다. "누가 전서구를 날렸느냐?" 담담한 음성이 고량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제가 날렸습니다." 대답한 이는 용향의 향주인 구환도 적열이었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곁에 있는 조광영이나 양표에 비하면 당당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지시한 적이 있느냐?" 적열이 고개를 조금 더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흑지를 벗어난 자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보고를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소방주 님께서 직접 하달한 내용으로, 흑지에 있는 자라면 결코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적열의 이야기에 담긴 내용은 완곡한 표현과는 달리 퍽 강렬한 것이었다. 우리는 너의 수하가 아니라 소방주의 수하다! 고량은 물끄러미 적열을 쳐다보았다. 본래 그는 선(線)이 곧은 사람을 좋아했다. 사내란 모름지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한다 라는 게 그의 지론(持論)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더불어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자신이 진리를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작두를 베고 누운 듯 그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침묵이었다. 일 각이나 흘렀을까- 실지로는 그 반의반, 아니 그 반의반도 지나지 않았겠지만- 침묵이 깨졌다. "돌아간다." "......?" 그 말이 의외였을까, 적열이 머리를 발딱 쳐들며 반문한다. "예?" 그러다가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어색하게 뇌까렸다. "아, 예. 그렇다면 화향주를 불러오겠습니다." 고량이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향과 용향은 떠난다. 하지만 호향은 남는다." "그렇지만... ." 순간, 고량의 눈에서 번쩍! 빛이 번뜩였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광채였다. "셋을 세겠다.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하나!" * * * 마침내 불길이 잡혔다. 아직까지 군데군데 불길을 뿜는 곳이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닥불 수준에 불과할 뿐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인 것이다. 그나마 그 마땅찮은 모닥불조차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저지선이 뚫리는 것은 다만 시간 문제일 따름이었다. 일행은 나무 나르기를 중단하고 입구 양편에 나누어 섰다. 왼쪽에는 이항과 곽가량, 송자영이 섰고, 오른쪽에는 강산과 구청연이 섰다. 중인들의 안면은 납빛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이백오십(二百五十) 대 오(五)! 일인당 오십 명을 상대해야 한다. 시시껄렁한 파락호들이 아닌 대삼절방의 정예 오십 인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 고량과 같은 고수는 몇 명이나 끼어 있을까? 요행히 지리적 여건의 우세와 순간적 기지로 여기까지 이르렀지만, 더 이상은 통하지 않았다. 파팟! 곽가량의 면전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자갈 때문이었다. 뒤늦게나마 자갈의 유용성을 깨달았는지 적들도 자갈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갈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날아왔다. 한 번에 수십 개씩 모퉁이에 바싹 붙어 날아왔는데, 그 중 몇 개는 모퉁이를 스치며 지나갔고, 몇 개는 모퉁이를 때려 흙먼지를 일으켰다. 일행으로 하여금 고개를 내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요, 또한 공격 시간이 임박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염병할 놈들, 남의 생각을 도용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쏟아 붓는구나, 쏟아 부어." 곽가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이항이 장단을 맞췄다. "한 놈 남김없이 쓸어버리자고." 하나 그 장단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임에야... 곽가량은 눈을 끔벅이며 이항을 쳐다보았다. "남의 생각이나 도용하는 염치도 수치도 모르는 놈들 아닌가 말일세. 이런 놈들 남겨놓았댔자 세상에 도움될 거 하나 없으니 깨끗이 쓸어버리자 이거지." 곽가량은 그제야 이항이 농담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곽가량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에헤헤, 좋지요." "푸흐흐...!" 이항 역시 기분 좋은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좋은 기분은 채 순간을 넘기지 못했다. "뭐 좋은 일이 있다고 꼭 미친... 밖이나 한번 둘러봐. 얼마나 접근했는지." 송자영이었다. 중간에서 끊긴 말은 미친 놈처럼 실실거려! 쯤 될 것이고, 끊긴 이유는 그래도 나이많은 이항 때문이었을 것이다. 곽가량은 못 들은 척 냉큼 고개를 돌렸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음성이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야, 둘러보라는 말이 안 들려?" 곽가량의 볼따구가 공처럼 부풀어올랐다. "뭘?" "뭐-얼? 이게!" 머리까지 올라갔던 송자영의 주먹이 멈칫하더니 스르르 내려갔다. 기왕지사 죽을 목숨 이왕이면 죽기 전에 악이나 한번 써보자 생각했던 곽가량은 그 미묘한 분위기를 뒷골에 느끼고 괴이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이유를 보았다. 건너편에서 강산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옳다, 때는 왔구나! 곽가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뭘, 뭘 보란 말이야?" 어디선가 끄응-! 구멍 막힌 놈 힘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적이 얼마나 근접했나... ." 와중에도 자갈은 쉴새없이 날아와 퍼퍽! 끊임없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곽가량은 턱으로 그 부옇게 일어나는 흙먼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고개를 내밀어?" 끄으-응! "조심해서 보면 되잖아. 후우-! 게다가 저까짓 잡졸(雜卒)들이 던지는 돌에 힘이 실렸으면 얼마나 실렸겠어? 후우-!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천하제일신공(天下第一神功)인 소림의 대승범천신공(大乘凡天神功)을 익혀서 네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나 다를 바 없다고. 후우우-!" 송자영이 말 중간중간 한숨을 내쉬는데 그 골이 갈수록 깊어간다. '허허, 참!' 곽가량은 어이가 없어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딴에는 유화책(宥和策)을 쓴다고 쓰는 모양인데, 황소 투레질소리에 나찰(羅刹) 뺨치는 얼굴을 해가지고 유화(宥和)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곽가량은 환희에 앞서 연민을 느꼈다. '오죽 참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면...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삐를 늦춰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세상 그따위로 살면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늦춰주기에는 그 동안 받은 설움이 너무 컸다. 패랭이꽃 마냥 가녀린 가슴에 쌓인 한이 너무 많은 것이다. "금강불괴? 내가 언제 그랬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허허, 참. 얘가 사람잡네. 달걀로 눈탱이 안마하는 금강불괴 봤냐? 봤어? 봤냐고-오?" "얘? 얘? 오냐, 너 오늘 얘한테 한 번 죽어봐라." 퍼퍽! 결국, 두 곳에 멍이 들었다. 한 곳은 엉덩이였고, 한 곳은 뺨이었다. 엉덩이는 송자영 때문이었고, 뺨은 자갈 때문이었다. 기분에 치우쳐 강산이 시선을 돌린 것을 깜박한 것이다. "몇 장이야?" "파, 팔 장(八丈)!" 2 "강형께서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