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26편 (26/43)

2026-10-08 18:49:05 조회 1
"잉...?"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강산도 구청연도 이항도 송자영도... . 아니, 적어도 한 사람은 보였다. 송자영이 두 번째 목책 너머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씨팔!" 제 15 장 화방(火防). 1 일행은 나무를 날라야 했다. 이미 서 있는 두 개의 목책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어 새로운 목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목책은 불에 휩싸인지 오래였고, 두 번째 목책은 건재했지만 첫 번째 목책과의 거리가 멀어 효율성이 떨어졌다. 적이 첫 번째 목책이 서 있는 모퉁이를 돌아와 일행과 일직선상에 이를 때 공격하기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새로운 목책은 첫 번째 목책에서 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십 장! 자갈공격을 하기에 최상이라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언제 적이 출현할지 알 수 없는 일,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씨팔!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곽가량은 불만이 많았다. 기껏 후퇴하고 나니까 다시 앞으로 나가자는 것이 불만이었고, 또한 새로운 목책을 세우기 위해 예정에 없던 노동을 해야한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불만은 그 모든 불만을 고스란히 삭여야한다는 점이었다. 뼈다귀 본 개새끼처럼 졸졸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송자영 때문에 감히 불만을 토로(吐露)할 수 없는 것이다. '이놈들,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나무를 나르던 곽가량은 잠시 눈을 돌려 활활 타오르는 첫 번째 목책을 응시했다. 목책은 한창 거센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빠다닥, 빠닥! 불똥 튀는 소리도 요란할뿐더러 은은한 열기가 십 장 밖에까지 뻗쳐 나오고 있었다. '불길이 좀 잠잠해지면 오려나?' 그때였다. 곽가량이 잠시 한눈을 팔 때! "야! 좀 빨리빨리 나르지 못해?" 송자영의 새된 목소리가 곽가량의 등골을 파고들었다. 귀신들은 다 뭐하는지... 저 놈의 빌어먹을 화상은 도대체가 잠시도 쉬는 꼴을 보지 못한다. '염병, 저나 잘하지.' 곽가량은 온 얼굴 가득 불만을 싣고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도 불만은 존재했다. 송자영 역시 나무를 나르고 있었다. 열외(列外)란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곽가량에게 불만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곽가량의 불만은 나무의 분량에 있었다. 곽가량의 짐이 산더미만한 반면 송자영의 짐- 짐? 글쎄 회초리 한 개도 짐이라 할 수 있을지....- 은 쥐꼬리만한 것이다. 가자미 마냥 잔뜩 우로 쏠린 곽가량의 시야에 문득 송자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송자영이 바짝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나한테 불만 있어?" 곽가량은 황급히 눈동자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며 뇌까렸다. "아니야. 불만은 무슨... ." 그리고 소리쳤다. 물론 마음속으로. '있다 뿐이냐?' 송자영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으르렁거렸다. "없기는,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인데... 야, 그러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있다고 이야기를 해.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 이게 불만이야! 이 얼마나 남자답고 좋아? 그렇다고 내가 뭐 맞는 말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곽가량은 하도 기가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뭐? 맞는 말에 수긍을 해...? 누가? 나 원 참!' 그러자 송자영이 배시시 웃음지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잠시 웃던 송자영이 곽가량에게 더욱 붙었다. 그리고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연인의 밀어처럼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때? 뭐가 불만인데?"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에서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하고 말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곽가량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없어." 그러나 곽가량의 냉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송자영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없다고? 에이,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정말 없어?" "정말 없어." "아이, 참.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보라니까." "...... ." "그래, 부담없이 이야기해봐. 호호...!" 끝내 곽가량은 망설이게 되었다. 그만큼 송자영의 태도가 유혹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망설임은 순간에 불과했다. 송자영의 해실거리는 눈망울,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섬뜩한 기대!'를 발견한 순간, 망설임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곽가량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러자 송자영의 태도가 돌변했다. "야, 이 자식아. 동경(銅鏡)이나 한 번 보고 말해. 찌그러진 솥뚜껑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 이게 불만 없는 놈의 꼬락서니냐? 앙? 좋게 말로 할 때 빨리 털어놓지 못해?" 돌변한 송자영의 태도에서 곽가량이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닌 환희였다. 만약 꼬임에 넘어가 불만의 '불'자라도 내뱉었다면...? 으흐흐흐...! 생각만으로도 목이 간질거렸다. * * * 시간이 흘렀다. 무심한... 그래서 더욱 답답한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들었다. 어느 정도 불길이 수그러든 틈을 타 몇 명의 적들이 모퉁이를 돌아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기가 활이 아닌 칼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곧, 최우선 과제가 강노수에 대한 처리였던 까닭이다. 곧바로 댓 명의 사내가 더 튀어나왔고, 그들이 강노수임을 확인한 일행은 지체없이 자갈을 날렸다. 피잇! 자갈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리고 다음 순간, 장내에 기괴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콰직, 빠각! 도저히 자갈에 얻어맞은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섬뜩한 음향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 예닐곱 명의 사내가 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뻗어버렸다. 쓰러진 자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또한 한결같았다. 목이 꺾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부서진 상태, 오직 그 두 종류뿐이었다. 집중적으로 머리를 노린 결과였다. 하나 애초에 불길을 넘어선 십여 명의 상태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운(運)인지 아니면 일행의 실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개중에는 자갈을 다리에 맞은 자도 있었고 복부에 맞은 자도 있었다. 다만 그들이 죽은 자에 비해 운이 좋은가 하면 그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으려 애쓰던 그들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무너진 그들을 안아준 것은 포근한 대지가 아닌 벌겋게 잘 익은 숯덩어리였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캑! 으아아-!" 모골을 송연케하는 비명이 한동안 이어졌다. 강산은 생각 없는 덤덤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까지 덤덤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리는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나올까? 함부로 모퉁이를 돌아설 수 없는 지금 적들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모퉁이를 돌아설 수 없다는 말은 곧 강노수를 전혀 활용할 수 없다는 말이 되고, 또한 그 말은 일행을 공략함에 있어 가장 적절한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방패(防牌)? 폭탄?' 두 가지를 생각해보던 강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방패라면 재료가 없다. 주변에 방패를 만들만한 재료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래부터 준비하지 않은 이상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쓸만한 것은 흑갑마인의 갑옷뿐인데, 그것은 면적이 너무 적어 방패로써 적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너무 무거워 보통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폭탄이라면 더욱 확률이 없다. 폭탄이 있었다면 굳이 이런 구차한 방법을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발 던지는 것으로써 끝, 상황종료다. 물론 그들의 손에 폭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작은 위력의 폭탄이지 산을 날려버릴 정도의 폭탄이 아닌 것이다. 먼저번의 절벽에서 사용했던 그 엄청난 위력의 폭약을 사용하려면 함께 묻힐 각오도 해야할 것이다. 강산이 한참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 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이항이 물었다. 차츰 비명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기습적으로 나오면 대비책이 있나?" 이항의 질문은 강산의 생각과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방패와 폭탄 같은 몇 가지 가능성들이 제외된 지금 남는 것은 오직 기습 뿐인 것이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기습! 강산은 거기에 대해 이렇다할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화섭자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이항이 갑자기 목책을 넘어 앞으로 뛰어나갔다. 강산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늙은 생강의 매운 맛을 한번 보여주도록 하지." "......!" 강산은 어정쩡한 태도로 이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모퉁이에 접근한 이항은 벽호공을 시전하여 조용히 암벽을 탔다. 삼 장쯤 올라갔을까, 단단히 자세를 잡은 이항은 반 바퀴를 회전했다. 매달린 모습이 꼭 박쥐를 연상케 했다. 편복노조라는 별호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가량이 히죽 웃음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노인네가 정력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그러자 곁에 있던 송자영이 냉소를 날렸다. "흥! 정력은커녕 생각조차 없는 멍청이 주제에." 강산과 구청연은 행여 분란에 휩쓸리지나 않을까 싶어 조용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끄응!" 어디선가 꼬리 만 개의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뭐야, 불만 있어?" "끄응!" "이게... ." 송자영이 주먹을 올리는 순간! 피잇, 쉿! 하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음향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피잇! 하는 소리는 기습적으로 튀어 나온 한 사내가 화전을 날리는 소리였고, 쉿! 하는 소리는 강산이 놓치지 않고 자갈을 날리는 소리였다. 사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항은 움직이지 않았다. 좀 더 큰 먹이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큭!"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고, 때를 같이하여 화전이 목책에 박혔다. 구청연이 기다렸다는 듯 나뭇가지를 뽑아 화전이 박힌 곳을 후려쳤다. 하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천에 먹인 기름이 튀어 역효과가 날뿐이었다. 구청연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몸을 기울여 화전이 박힌 나무를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한 사내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줄줄이 십여 명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빠짐없이 화전을 먹인 강노가 들려 있었고, 일행을 겨냥한다싶은 순간 벌써 화전은 발사되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쉬쉬쉿! 채 한 번의 호흡이 이어지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일행 역시 좌시(坐視)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화전이 일행을 덮치기에 한발 앞서 일행의 손을 떠난 자갈이 강노수들을 먼저 덮쳤다. 거기에 매복해 있던 이항이 보조를 맞춰 공격을 시작했다. "크악!" "커억!" 자갈에 세 명의 강노수가 꼬꾸라졌고, 다시 이항의 공격에 두세 명이 더 쓰러졌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어떤 신속한 대응도, 어떤 부수적인 이익도 화전이 발사된 이상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목책에 박힌 열 대의 화전이 지글지글! 그 소리도 요란하게 불을 뿜었다.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일행은 별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곽가량이 소리쳐 이항을 불렀다. "선배, 돌아오시오." 그는 자갈을 손에 쥔 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퇴도 후퇴일뿐더러, 이항이 저쪽에 있는 이상 일행의 가장 중요한 공격 수단인 자갈공격이 봉쇄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뒤늦게나마 그 점을 깨달았을까? 치고, 쓸고, 돌고... 마치 양떼에 뛰어든 한 마리 늑대처럼 신바람을 내던 이항이 삼권오장(三拳五掌)을 연달아 쏟아내더니 훌쩍 신형을 날렸다. 그러한 이항의 동작은 더없이 경쾌한 것이었다. 마치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전술교본(戰術敎本)의 한 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호-, 역시!" 곽가량이 감탄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곽가량의 탄성은 곧바로 터진 강산의 한마디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피해!" 쩌렁!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곽가량은 귀를 막았다. 바로 그 순간, 슝! 묘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고막을 쩌렁 울리는 소리에 곽가량이 귀를 막고, 강산이 전방을 향해 신형을 날리고, 허공 중의 이항이 멈칫 의아한 눈길로 강산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 그리고 중인들이 미처 그 묘한 소리를 헤아려볼 겨를도 없이, 화르륵! 삼 장여에 이르는 거대한 불기둥이 이항을 덮쳤다. "크아악!" 가슴을 후벼내는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휩쓸고, 살 맞은 기러기 마냥 이항의 신형이 뚝 떨어졌다. 강산은 그대로 이항을 지나쳤다. 목표는 전방의 삼십 대 장한, 바로 이항을 향해 화염을 발사한 사내였다. 사내는 떨어지는 이항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그 화섭자 같이 생긴 통이 똑바로 이항을 겨냥한 채 들려 있었다. "엇?" 뒤늦게 강산을 발견한 사내가 황망히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 사내의 행동은 다만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채 사내가 반 보를 이동하기도 전에 금강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서걱! 수급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마치 물에 빠진 사람 마냥 허우적댔고, 그와 동시에 서너 자루의 칼이 강산의 면전에 들이닥쳤다. 강산은 당황하지 않고 그 수급 잃은 사내의 몸뚱이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가가각! 섬뜩한 파육음이 어지러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애꿎은 몸뚱이 하나가 어육으로 변해버렸다. 공중에 몸을 띄운 강산은 차분히 장내를 훑어보았다. 시야에 잡히는 자들은 총 이십여 명으로, 그중 강노수가 다섯이었고, 화섭자 모양의 통을 든 사내가 일곱이었다. 나머지는 칼과 검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곱!' 강산은 우선 통을 든 사내들을 처치하기로 마음먹고 그들의 위치를 살폈다. 그들은 좌측과 우측 그리고 위쪽, 그렇게 세 방향에 골고루 포진하고 있었다. 강산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이마분종을 쓸 것이냐? 삼음전유를 쓸 것이냐?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보다 적합한 초식은 삼음전유였다. 하나 삼음전유를 펼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내력이 딸려 삼음전유를 펼치고 난 후의 움직임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곧, 이항을 구출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적의 추살이 아닌 이항의 구출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이마분종을 선택하자니 역시 그 위력이 딸려 미덥지 못하다. '적합한 것은?'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설임의 골이 깊어갈 때, 문득 환상인 양 강산의 뇌리에 생생한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이것은...!' 그것은 일 초의 도법이었다. 내력의 소모가 과하지 않고, 일시에 세 방향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도법의 도해(圖解)인 것이다. 구살분금(九殺噴金)! 바로 불귀곡에서 가은양에게 배운 잔백구유도법(殘魄九幽刀法), 그 오초의 잔백구유도법 중 제 삼초 구살분금이었다. 구살분금이 뇌리에 떠오른 순간, 강산의 손은 반사적으로 용수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니, 잡아간다 싶은 순간 용수는 벌써 뽑혀 은빛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이잇! 일순, 보다 선명한 일곱 가닥의 광채가 용수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비사(飛蛇)처럼 영활한 곡선을 그리며 밑으로 쏘아갔다. * * * 호향의 향주, 음살장 화진악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공격을 시작한지 어언 반 시진이 흘렀다. 한데 그 동안 진격한 거리라는 게 채 삼십 장이 되지 않았다. 반 시진에 삼십 장, 거북이도 그 보다는 멀리 갔으리라 생각하니 속이 말이 아닌 것이다. "쓸모 없는 것들!" 그는 수하들이 꾀를 피운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아까워 제 할 바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굳은 표정으로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이...?" 그가 처음 본 것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줄 모르는 수하들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본 것은 쌍칼을 쥔 한 사내와, 그에게서 뻗어나와 수하들을 덮쳐가는 예닐곱 가닥의 은빛 사슬이었다. 화진악의 입이 쩍 벌어지며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도... 도강(刀 )!" 그렇다. 그 은빛 사슬처럼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도강이었다. 칼을 잡은 무인이라면 꿈에서라도 바라마지않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경지! 칼을 잡고, 칼에 미쳐, 평생을 칼과 함께 한 연후에야 비로소 한가닥 끈이나마 붙잡을 수 있다는 도강인 것이다. "크악!" "커어억!" 비명과 함께 여기저기서 피가 튀었다. 그 중 몇 방울이 화진악의 뺨에 튀었다. 덕분에 화진악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썩은 짚단처럼 무너지는 수하들이 보였고, 그런 수하들 틈에서 멀어져가는 한 사내가 보였다. 물론 사내는 강산이었다. 강산은 일 도를 날린 후 잽싸게 몸을 틀어 이항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이노-옴!" 화진악은 버럭 노호(怒號)를 터트리며 가장 가까이 있는 수하의 강노를 빼앗았다. 곧바로 그의 노호에 정신을 차린 몇몇 강노수들이 강산을 겨냥해갔다. 그 사이 강산은 이항의 곁에 내려섰다. 이항은 한낱 불덩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강산은 재빨리 그의 마혈(痲穴)을 제압한 후, 그를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쳐라!" 비슷한 시기에 화진악의 일갈이 다시 한번 장내를 뒤흔들었고, 기다렸다는 듯 댓 발의 강전이 발사되었다. 슈슈슉! 강전은 발사됐다싶은 순간 벌써 강산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한 발은 머리를, 두 발은 하체를, 그리고 몇 발은 몸통을 노리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강산이 그 모든 강전을 피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특정부위가 아닌 전신이 표적이요, 디딤판도 없는 허공이요, 더구나 볼 수도 없는 배후라... 피해내기에는 악재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강산은 역시 녹녹치 않았다. 맞았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그는 자유로운 오른손을 이용하여 금강을 휘둘렀다. 세 대의 강전은 강산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고, 하체를 쓸어오던 두 대는 금강에 맞아 떨어졌다. 사태에 대한 예측과 초절한 무공이 잘 어우러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억?" "저, 저것?" 허를 찔린 데서 오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다만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결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 사람, 강산 이외에 적어도 한 사람만은 그와 같은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화진악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강노의 발사를 미루고 있었다. "얄팍한 수작!" 쉿! 나직한 파공성을 동반하고 마지막 강노가 발사됐다. 2 강산은 금강으로 옆구리를 쨌다. 강전을 빼내기 위함이었다. 강전은 강산의 옆구리에 살촉을 박고 있었다. 본래 강노의 위력이라면 관통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호신강기(護身 氣)에 막힌 관계로 제 위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겨우 살촉만을 박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강산에게는 억울한 일이었다. 차라리 관통해버렸다면 살촉을 빼내기 위해 생살을 째는 따위의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강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마지막 순간 호신강기에 부딪친 강전이 미미하나마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강전은 옆구리가 아닌 척추에 박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줄줄 피가 흘렀지만 강산은 개의치 않고 계속 쨌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상처부위가 벌어졌다 싶자 살대를 잡았다. 천천히 힘을 주자 살촉이 따라나왔다. 하나 원활하게 빠져 나오지는 않았다. 핏덩어리와 근육이 엉겨 살촉을 쉬이 놔주지 않는 것이다. 강산은 남은 손으로 살촉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과 힘줄 등을 하나씩 풀었다. "괜찮아?" 송자영이 근심어린 눈초리로 물었다. 강산은 살촉을 완전히 빼내며 대답했다. "괜찮소." 그녀는 구청연과 함께 이항을 돌보는 중이었다. 기름을 말끔히 닦아낸 후, 지금은 금창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신통하게도 이항의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나 눈썹 등은 홀라당 타버렸지만, 그 외 심각한 부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불덩이나 다름없던 상태를 생각해볼 때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도 기름이 피막(皮膜) 구실을 해준 것 같았다. 물론 심각하지 않다는 말이 곧 경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덩이나 다름없던 상태에 비춰볼 때 심각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강산은 금창약을 꺼냈다. 그가 상처부위를 대충 닦아내고 막 약을 바르려할 때, 송자영이 다시 물었다. "내가 발라줄까?" 강산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야 고맙지만 서문상의 고통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았다. "난 괜찮으니, 이 선배나 잘 발라주시오." 그때, 강산은 문득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 어둠에 숨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산은 긴장하여 그 기운의 출처를 찾았다. 출처는 곧 밝혀졌다. 멀리 있지 않았다. 비단 멀리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외의 곳에 있었다. 이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