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25편 (25/43)
말을 꺼낸 자는 음살장 화진악이었다. 고량이 미덥잖다는 어조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화공(火攻)을 위해 준비된 기름과 면(綿)이 있습니다." 고량이 천천히 돌아섰다. 비로소 흥미가 생긴 듯했다. "화공을 해보겠다... . 자신 있느냐?" 화진악이 힐끗 조광영과 적열을 바라본 후 대답했다. "조향주와 적향주가 도와준다면 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화진악을 응시하던 고량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에는 천구를 사용한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고량의 등을 통해 흘러나왔다. 조광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웬일인지 이 임시 상관은 유난히 천구를 좋아했다. 협곡의 구조도, 이편의 안전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천구의 사용을 종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량의 모습은 위험한 물건을 손에 쥔 아이를 연상케하는 것이었다. 뻔한 결과를 외면한 채 그저 과정에 목말라하는 아이 말이다. 물론 동료를 모두 잃고 혼자 살아 남은 그 비참한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동료의 목숨을 보상받고 싶을 것이다. 하나 어디까지나 마음은 마음으로 다스려야하는 법이다. 결코 행동 따위가 결합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못할 시엔 불행만 가중될 뿐이다. '입구만 확보할 수 있다면.' 조광영은 공터로 통하는 협곡의 입구를 확보함으로써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터의 지름이 백이삼십 장, 최소한의 안전 거리는 확보되는 것이다. * * * '이대로라면 사흘을 버틸 수 없다.' 강산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고민은 물과 식량이 떨어져간다는 것이었다. 물은 겨우 삼분지 일 정도가 남았고, 육포는 손가락 만한 것이 십여 개 남아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사정이 이러하니 남은 이들의 사정이 훨씬 급박할 것은 뻔한 일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물과 식량을 확보하든지 아니면, 협곡을 벗어나야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이런 사실이 적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때는 최악이었다. 자칫 앉아서 죽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강산은 남는 시간에 공터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물과 식량은 발견되지 않았다. 작은 짐승은커녕 먹을 수 있는 식물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자목련뿐이었다. 아무래도 자급(自給)의 길은 포기해야할 듯 싶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뿐이다! 강산은 탈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을까? 어둠을 이용하여? 양표를 인질로? 공터로 끌어들여 어수선한 틈을 노린다?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지만 언제나 결론은 같았다. 불가능(不可能)!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삼백 명이 여섯 명을 뚫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섯 명이 삼백 명을 뚫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게다가 양표의 목은 그다지 많은 값이 나갈 것 같지 않았다. "휴우-!" 저절로 팍팍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강산은 힐끗 입구에 있는 양표를 한번 보았다. 비록 외견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는 편안히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다. 최선책은 이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우선 양표를 처리하고... 응?' 한데 그러던 차에 문득 번갯불처럼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강산의 뇌리를 스쳤다. '가만... 그렇게 하면...?'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막 다른 길에 몰리면 자연 살길이 생겨나는 법이런가. 그것은 새로운 방법이었다. 굳이 물과 식량을 확보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의 포위망을 뚫지 않아도 되는... 그러면서 안전할 수 있는 제 삼의 방법인 것이다. '위위구조(圍魏救趙), 반간계(反間計)!'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 첩자를 역이용한다. 방법은 그것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방법의 실천에 앞서 반드시 선결(先決)되어야할 몇 가지 조건이 있는 것이다. [양표와 함께여야한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공간이 있어야한다. 약간의 시간이 있어야한다.] 조건은 그렇게 세 가지였다. 쉬운 문제였다. 코앞의 백 장이 넘어가는 공터, 보이는 곳 어디나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양표를 불러낼 때 따라 올 일행의 귀찮은 시선 정도였다. 하나 그렇게 쉬운 문제는 또한 아니었다. 양표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성사시켜야하기 때문이다. 불러낸다든지 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쓰게되면, 아무래도 눈치 채일 염려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이 풀리려고 그러는지 그 세 가지 조건에 명확히 부합되는 경우가 있었다. '경계(警戒)!' 경계를 설 때였다. 초번은 이항과 송자영이었고 중번은 자신과 양표, 그리고 말번은 구청연과 곽가량이었다. 2 스멀스멀 멀리서 어둠이 다가온다 싶더니 이내 온 천지를 삼켜버렸다. 그리하여 적막과 함께 밤을 양분했다. 밤은 깊어갔고 그에 따라 어둠과 적막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어두운 밤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자시(子時) 초, 경계는 강산과 양표의 몫이 되었다. 경계를 시작한지 일다경 정도나 지났을까, 강산이 돌연 한마디를 던졌다. "양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양표가 눈을 떴다. 그는 그때까지 두 눈을 꼭 감은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무슨 말이오?" 되묻고는 있다지만 그의 어조에는 한 푼의 성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지못해 응대하는 투였다. 강산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우리가 미끼로 이용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말이오." "미끼? 그게 무슨...?" 강산은 일부러 눈살을 조금 찌푸려 보였다. "왜 이러시오.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삼절방의 눈을 가리기 위한 미끼로 이용되었다는 것 정도는 양형도 벌써 알고 있지 않소?" "......?" 갑자기 양표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고개가 끄덕였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자니 자연 몸짓이 어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그야 당연히... ." 물론 강산은 양표의 표정이 어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본래 이런 이야기는 다시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처럼 험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구청연이 저토록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아니겠소? 이미 미끼로서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것 아니겠냐는 말이외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목적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소." 양표의 미간(眉間)이 잔뜩 좁혀졌다. 문제가 풀릴 듯 풀릴 듯 풀리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가, 가만, 그러니까 강형의 이야기는...?" 강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양형도 알다시피 우리는 그저 삼절방의 시선을 묶어두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소. 우리의 생사에 관계없이, 지금쯤 목적지는 진정한 공격대에 의해 쑥밭이 되고 있을 것이오." 양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비로소 가닥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미끼! 진정한...! 그, 그러니까 강형의 말인즉 우리는 눈가림이고 따로... ." 강산은 더욱 상을 찌푸렸다. "어허-! 양형, 정말 왜 이러시오. 뻔한 내용을." 양표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다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나게 되자 그 표정을 감추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싶었던지 양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당혹과 의문이 남아 있었다. "무, 물론 이 양(揚)모의 생각 역시 강형과 같소이다. 한데 굳이 조심했던 것은 심증(心證)만 가지 물증이 없기 때문이오. 혹, 강형에게는 물증이 있소?" 강산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 "흥, 증거라면 이 열 손가락에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쌓여 있소." 그러한 강산의 몸짓과 태도는 평상시와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다른 것이었다. 아쉬운 것은 현재의 양표에게 그 점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다는 점이다. "호-, 역시! 내 강형의 지혜에는 벌써부터 깊이 탄복하고 있던 바이오." 강산은 어줍잖은 양표의 아부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먼저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구청연이 여정을 재촉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에 관해서." 강산은 잠시 시간을 띄었다가 물었다. "어떻소? 있소?" 양표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던 것 같소." "단언하건대 단 한 번도 없었소. 정면대결이냐? 아니면 피해 가느냐? 또는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는 언제나 가장 시일이 오래 걸리는 쪽을 선택했소. 또한 사사족의 경우처럼, 예정에 없던 일이 발생하여 일정이 늘어나게 되더라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소.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건은 하나둘이 아니오. 사 람, 돈, 시간, 장소... 등등. 그 중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겠소?" 양표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완전히 승복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시간! 정도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물론 강산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시간 하나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채용되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양형 역시 별다른 문제없이 채용되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맞소." "그 점에 대해 양형은 의문을 느끼지 않았소? 강호를 양분하고 있다는 무천궁이, 그 무천궁에서 주관한다는 일이 이토록 허술한가 하는 의문 말이오." 양표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험! 그, 그야... ." 강산은 양표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첩자가 끼어들 여지는 충분했고, 결과적으로 첩자는 끼어있었소." 양표가 기겁하여 물었다. "그, 그게 누구요?" 강산은 야릇한 눈빛으로 양표의 위아래를 훑으며 말했다. "문정인이 있었지 않소?" "휴-! 그렇구려." 강산은 양표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랬겠소?" "......?" "당연하게도 첩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오. 곧, 이쪽의 사정을 낱낱이 보고하여 삼절방의 이목을 온통 이곳에 집중시켜 줄 조력자가 필요했던 것이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최상(最上)의 조력자가!" "아-!" 양표가 불현 듯 탄성을 내질렀다. 비로소 완전히 승복하는 눈치였다. "증거는 단지 그것만이 아니오. 왜 그처럼 막강한 무천궁에서 굳이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같은 낭인들을 고용했겠소? 일류 고수만 수백을 헤아리는 무천궁에서... .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사석(捨石)! 버림돌이기 때문이오. 게다가... ." 강산이 그밖의 사소한 증거들을 나열하려 할 때, 양표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강형의 지혜에 새삼 감탄했소이다. 한데 한 가지 의문이 있소." "무엇이오?" "구청연은 어찌되는 것이오? 우리가 사석이라면 그 역시 사석 꼴을 면치 못할 텐데. 그가 내막을 몰랐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소만." 양표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바닥 깊숙이 숨어 있는 맥점(脈點)을 끄집어내다니... 양표라는 인물 또한 녹녹치 않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강산은 만족했다. 직접적인 방법을 썼다면 자칫 속내를 들킬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강산은 굳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나도 그 점이 궁금하오. 다만 그의 여유 있는 태도로 보아 반드시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오." * * * "갔군!" 강산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는 조금 전 뒤가 급하다며 양표의 양해를 구했다. 양표는 쾌히 승낙했고, 강산은 엉덩이를 감싸쥐고 공터로 달려갔다. 돌아온 강산의 눈에 띤 것은 텅 빈 목책이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양표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강산은 어둠 속을 짧게 노려본 후 제자리에 앉았다. "잘 해주어야 할 텐데." 고량을 만나 참새처럼 지저귀고 있을 양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반신반의(半信半疑), 고민하고 있을 고량의 모습 또한 뚜렷이 보이는 듯하다. 하나 고량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양표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고민의 폭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미끼, 시간, 첩자, 낭인, 사석...! 강산이 전한 내용 중에 잘못된 구석은 없었다. 이유는 그 모든 내용이 진실인 까닭이었다. '성을 지키느냐 아니면, 토끼 몰이를 계속할 것이냐?' 선택은 고량의 몫이겠지만 그 결과를 추론해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퇴!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장수(將帥)로써 취할 마땅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퇴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강산은 느긋이 누워 팔베개를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드르릉, 드르릉! 간간이 곽가량의 코고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조용히 가지는 않겠지!' 필시 고량은 그냥 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의 공격이든 한 번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공격이 있다면 아마도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질 것이다. "밤이 될까, 새벽이 될까...?" 강산은 눈을 감았다. 반 시진이 후딱 지나갔다.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냄새가 그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솔 향기처럼 은은한 가운데 톡! 쏘는 구석이 있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야릇한 냄새였다. '뭐지...?' 기억을 짚어 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냄새의 정체에 관계없이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토끼 몰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강산은 일행을 깨웠다. "이게 무슨 냄새지?" 마지막으로 깨어난 곽가량이 코를 씰룩이며 다가왔다. 때문에 이항은 방금 전 다른 일행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해야했다. "기름일세." "기름? 기름...? 아, 그 불에 탄다는 검은 물 말입니까?" "그렇다네." 곽가량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그의 어조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허-! 그 자식들, 별걸 다 가지고 있네." 곽가량이 앉을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 옆에 있던 구청연이 물었다. 그는 목책에 기대 어둠 저편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양형은 어디 갔습니까?" 강산이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 일행에게 돌아갔소." "돌아가다니 어디를...!" 의아한 듯 반문하던 구청연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비로소 '제 일행!' 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구청연의 눈 깊은 곳에서 시퍼런 귀광(鬼光)이 번뜩였다. 며칠 전 불귀곡에서 삼절방의 매복에 걸렸을 때 선 보인 적이 있던, 바로 그 녹광(綠光)이었다. 녹광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착각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평시의 눈빛을 되찾은 구청연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기 발치를 두리번거리며 '어디? 안 보이는데?' 중얼거리는 곽가량이 보였고, 그 뒤쪽에서 덤덤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강산이 보였다. 구청연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강형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소만." 그러자 강산이 눈짓으로 목책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달리 더 갈 곳이 있겠소?" 구청연이 뒤쪽을 손짓하며 물었다. "그가 저쪽으로 넘어갔다는 말이오?" 강산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리지 않았소." "설마 정탐(偵探)을 하러 갔다는 이야기는 아닌 듯 한데... 무슨 말인지, 좀 쉽게 풀어줄 수는 없겠소?" 강산은 대답 대신 피식 웃음지었다. 그때쯤 남은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산과 구청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의문이 많았다. 양표의 행방은? 그가 사라진 이유는? 강산이 보여준 웃음의 의미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구청연의 태도는? 답답했다. 게다가 더욱 답답한 것은 의문을 대놓고 묻지 못한다는 점이다. 끼여들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너무 야릇한 것이다. 뭐라 할까? 어떻게 보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친구처럼도 보이고, 또한 어떻게 보면 가슴에 칼을 품고 기회를 노리는 원수처럼도 보이는 것이... 여하튼 잘못 끼여들었다가는 맞아 죽기 딱 좋은 그런 분위기였다. '젠장, 무슨 속인지...?' 답답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한 사람은 기다릴 수 없었다. 아니,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앙? 정말, 사람 답답하게 할거야?" 당연히 그 한 사람은 송자영이었다.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곽가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쑤, 잘 한다!' 꿩 잡는 게 매(鷹)요, 쥐약에 똥물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송자영 이상이 없는 것이다. 강산이 선선히 입을 열었다. "양표는 첩자였소!" "그렇군! 그가 첩자... 였기... 때문........ 잉?" "그래서 돌아갔다는 말을... ???" 무의식적으로 강산의 말을 되뇌던 곽가량과 이항 등은 갑자기 뻣뻣이 굳어버렸다.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굳어버렸다. 일행의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양표는 첩자였다!] 어찌 그 두 마디에 담긴 내용을 양(量)으로써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 강산은 잘못 제조된, 불량강시(不良 屍)처럼 뻣뻣이 굳어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중인들을 향해 보다 분명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양표는 첩자였소. 그래서 돌아간 것이오." 겨우 정신을 차린 곽가량이 더듬더듬 물었다. "하지만... 문정인이... 이미...?" "첩자가 꼭 한 명이란 법은 없지 않겠소?" 이항과 송자영이 동시에 의문을 토했다. "왜, 하필 지금...?" "먼젓번의 폭발로 그도 죽을 뻔하지 않았나?" 강산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목책 너머를 가리켰다.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우선은 저들을 막아야합니다." 중인들은 일제히 강산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십오륙 장이나 떨어졌을까? 빨간빛이 보였다. 화톳불이었다! 애초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강산의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놈들... 언제 피웠지?" 환한 불빛 사이로 사열종대로 끝도 없이 늘어선 사내들이 보였다. 선두를 이루고 있는 자들은 석 자가 넘어가는 강노로 무장한 강노수들이었고, 다음은 화섭자(火攝子) 크기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통을 든 사내들이었다. 곽가량이 송자영에게 물었다. "화전(火箭)으로 공격할까?" 송자영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선은 그렇겠지." "다음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음-! 그렇다면 화전을 어떻게 피하지?" "니 맘대로." "저 통은 뭘까?" "쓰팔, 내가 어떻게 알아-아!" 그때! 송자영의 눈에 쌍심지가 켜지고, 곽가량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 때, 강산이 끼여들었다. "아마 이번 공격을 끝으로 저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급전(急戰)을 피해 시간을 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유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번 질문은 구청연이 던진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조용히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참이었다.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진 것은 강산의 이야기에서 뭔가 불온(不穩)한 기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강산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것도 나중에 알려주겠소." 이어 강산은 툭 목책을 건드리며 말했다. "저들은 반드시 화전으로 공격의 돌파구를 열 것입니다. 따라서 목책은 더 이상 방어막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저들도 우리의 자갈 공격이 두려워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해야 되겠소?" 곽가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금 전에 송자영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 순간! 쉬잇! 날카로운 소성을 일으키며 노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그리고 퍽! 순식간에 목책에 박히는가 싶더니 뚝뚝 작은 불똥을 떨어뜨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곽가량이 강전을 뽑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크!" 쉬잇, 쉿, 다다닥! 미처 강전에 손이 닿기도 전에 댓 발의 불덩이가 날아든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곽가량은 홧김에 자갈을 집어들었다. 이어 대충 전면의 강노수를 겨냥하여 힘껏 던졌다. 씽! 그 소리도 경쾌하게 자갈이 날았다. 가냘픈 인간의 육신 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릴 수 있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하지만... 자갈의 기세는 약해졌다. 십 장을 넘어서자 위력이 반감되었고, 이십 장을 넘어서자 다시 그 위력이 반감되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강노수의 앞에 다다른 자갈은 환갑(還甲) 지난 노인네 오줌발처럼 피그르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제에미 씨... 헉!" 게다가 악재(惡材)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미처 입 속의 욕을 다 토해내기도 전에 자갈에 대한 보답이 날아든 것이다. 다다다다닥! 기절초풍, 곽가량은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강형, 대비책이 뭐요?" 한데 뜻밖에도 강산이 아닌 송자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야! 너 혼자 뭐해?" 게다가 그녀의 음성은 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 혼자...?" 곽가량은 의아하여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