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24편 (24/43)

2026-10-08 18:49:05 조회 2
죽기는커녕 제 몸의 피 한 방울만 볼라치면 벌벌! 묻지도 않은 팔대 조상까지 줄줄이 굴비 두름 마냥 게워내는 족속이 바로 저런 놈들이다. 하지만 강산은 더 묻지 않고 그를 보냈다. 더 물을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굳이 보통 폭약을 썼다면 함구할 필요성이 없다. '얼마의 분량을 어디에 매설했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이다. 강산은 사내의 석연찮은 태도를 이미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에 결합하였다. 누구도 도화선이 탈 때 내는 냄새를 맡지도,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일행이 폭발 지점을 벗어나기 바로 직전에 들렸던 슈우우우! 하던 소리... 그것은 분명히 뭔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였다. 거기에 석연찮은 포로의 태도. 그 세 가지를 연결하자 곧 답이 나왔다. 도화선이 필요 없는 폭약! 물론 도화선이 필요 없는 폭약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했다. 산서(山西) 벽력당(霹靂黨)의 진천뢰(震天雷)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위력이다. 반경 오십 장의 초토화! 현존하는 최고의 화기라는 벽력진천뢰(霹靂震天雷) 조차도 그 위력이 반경 십 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었구나!' 강산은 비로소 일의 전모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천궁에선 왜 외인(外人)의 손을 빌렸을까? 첩자는 왜 그냥 두었나? 황금 이백 냥이 거금임엔 틀림없지만 왜 그다지 부귀(富貴)를 탐하지 않는 자들까지 모여들었나? 일의 전모(全貌)가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난 지금, 애초의 모처(某處)의 곳을 급습한다는 계획이 적에게 모두 들통난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유로운 구청연의 모습은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눈앞이 환히 밝아왔다. 봉사가 개안(開眼)을 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나 남김없이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목책은 두 곳에 쌓였다. 공터로 통하는 입구와 십오 장 저편의 모퉁이, 그렇게 두 곳에 쌓였다. 단숨에 뚫리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목책 아래에는 호두알 크기에서 오리알 크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 * * 두 시진이 흘렀다. 그때까지 삼절방의 두 번째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첫 번째 목책과 이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줄줄이 늘어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이 꼭 개미떼 같기도 하였고 신화 속의 악룡(惡龍) 같기도 하였다. 구청연과 이항이 첫 번째 목책을 지키고, 강산과 곽가량은 두 번째 목책을 지켰다. 송자영과 양표는 행여 통로가 없나하여 공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었다. 세상에 비참한 경우는 많았다. 오갈 데 없는 산중에서 비를 만났을 때, 백 냥 벌어 구십 냥을 세금으로 바쳐야 할 때, 길가에 떨어진 만두가 맛있어 보일 때... 등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비참한 경우는 혼자 심심해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곽가량의 경우엔 그랬다. 최소한 한 명쯤은 함께 심심해 해줄 동료가 있어야했다. "으아-!" 곽가량이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그는 괜히 가만있지 못하고 팔을 폈다 오므렸다 자갈을 들었다 놨다하며 방정을 떨던 중이었다. 강산은 벽에 편안히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곽가량은 강산을 곁눈질하며 다시 한번 기지개를 폈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강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곽가량은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깨어나 줄 법도 하건만... 이게 신경이 무딘 건지 약삭빠른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뿔난 망아지는 이처럼 모호한 놈을 좋아하는 것일까?' 일순 송자영을 생각하던 곽가량은 이내 그녀에 대한 생각을 휘휘 떨어버리고 나직이 강산을 불렀다. "강형, 강형, 자오?" 비로소 강산이 눈을 떴다. 그리고 반쯤 뜬 눈으로 곽가량을 직시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정색을 하고 묻자 곽가량은 대답할 말이 궁해졌다. 하긴 정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할지라도 감히 같이 심심해하자고 깨웠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뭐, 그냥, 이야기나 나누자고... ." 웬일인지 강산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럽시다." 의외였다. 팍팍한 성격에 그저 눈이나 감아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별 일도 다 있구나.' 라고 곽가량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 떨어진 강산의 한마디가 더욱 의외였다. "황궁(皇宮)에서 왔소?" 곽가량의 눈동자가 일순 멍청히 풀어졌다. "......?" 하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곽가량의 표정은 이내 굳어졌다. 언제나 실실거리던 곽가량의 표정이 모처럼 진지해졌다. 하지만 모처럼 만의 그 진지한 표정도 연이어진 강산의 한마디에 뱀 본 개구리 마냥 수그러들고 말았다. "폭약 때문에 왔소?" "......?" 곽가량은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강타 당한 듯, 뭐라 말 할 수 없는 황당한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강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덤덤한, 어찌 보면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물끄러미 강산을 바라보던 곽가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소?" 강산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오. 사부와 연결되는 곳은 관(官) 밖에 없으니까." 곽가량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송자영과 양표는 꽤 떨어진 곳에 있었고, 구청연과 이항은 전방에 골몰(汨沒)하고 있었다. 곽가량은 다시 강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폭약은?" "그밖에 달리 또 뭐가 있겠소?" "흠! 과연 그렇구려... ." 곽가량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정리를 마친 듯 손을 내리며 물었다. "보아하니 강형이 아는 바가 적지 않은 듯한데 그 외에 또 무엇을 알고 있소?" 이번 질문에 강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등을 벽에 기댔다. 눈만 감는다면 좀 전의 잠을 자던 자세와 하나 다를 것이 없는 자세였다. 강산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이번 남만행(南蠻行)에 관해 곽형이 숨김없이 이야기를 해준다면 나도 이야기를 해주기로. 어떻소, 공평하지 않소?" 곽가량은 즉시 말했다. "공평하오. 하지만 이미 강형이 알고 있는 사실 외에 난 더 이상 말해 줄 것이 없소." 강산이 눈을 감자 곽가량은 다급히 뇌까렸다. "정말이오. 이미 가장 중요한 점이 들통난 마당에 내가 또 무엇을 숨기겠소?" 강산이 반쯤 눈을 뜨며 말했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오." "부차적인 내용 따위를 무엇에... ." 스르르! 강산의 눈이 다시 감겼다. 곽가량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좋소. 올해 봄, 광서성(廣西省)과 광동성(廣東省)의 접경지역, 곧 삼절방과 무천궁의 인접지역에서 원인 모를 대규모 폭발 사고가 일어났소. 광서 오주(梧州) 땅에서 삼백여 리 떨어진 맥아산(麥峨山)이란 곳에서 일어난 일이오. 당시 현장에 도착한 관리들의 말을 빌자면 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하오. 폭약에 관련된 사안(事案)은 그 규모에 관계없이 무조건 중앙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소. 하물며 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의 사건을 더 말해 무엇하겠소? 사건은 현청(縣廳)을 거쳐 가장 빠른 경로를 통해 중앙에 통보됐소." 곽가량은 말을 끊고 강산을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귀만 열어놓은 채였다. 곽가량은 말을 이었다. "오만 근(五萬斤)...! 봉우리 하나를 날려버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양이오. 사두마차(四頭馬車)로 오십 대 분량이오. 사안이 사안인지라 중앙에서는 밀사대(密司隊)의 고수, 오귀평(吳貴坪)이란 자를 파견하였소. 내사(內査)에 착수한지 오 개월 여,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소. 폭발이 일어난 곳이 관도(官道)가 아닌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는 점과 사고가 일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그 며칠 전까지 어떠한 대규모의 행렬도 맥아산을 지나간 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폭발 이후 그 어느 곳에서도 과거 폭약을 저장해놓았던 듯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점 등등이오." 곽가량은 거기서 다시 말을 끊었다. 강산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부족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곽가량은 별 수 없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했다. "오귀평은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소. 하나는 소지하기에 간편하고 그 위력이 현존(現存)하는 어떤 폭약보다도 뛰어난 새로운 종류의 폭약이 개발됐다는 것이고, 남은 하나는 그 폭약이 운반도중 우연한 사고로 인해 폭발했다는 것이오. 오귀평은 이렇게 결론 지었소. '삼절방에서 최고의 폭약을 개발했다. 그 폭약을 모종의 거사(巨事)에 사용키 위해 은밀히 운반하던 중, 아마도 그 일이란 무천궁을 치는 일이겠지만, 여하튼 그러던 중 폭약을 잘못 다루어 폭발이 일어났다' 라고." 말을 마친 곽가량은 지그시 강산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강산이 자세를 바꿔 앉았다. 겨우 이야기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한 가닥 둔중(鈍重)한 음향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둥-, 둥-! 북소리였다. 제 14 장 화공(火攻). 1 둥-, 둥-, 둥-! 북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다만 북소리가 전부는 아니었다. 비록 북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북소리와 구분되는 다른 소리가 있었다. 저벅저벅! 하는 규칙적인 발자국소리였다. 한데 발자국소리가 괴이했다. 인간의 것 같지 않게 육중하고 요란한 것이다. 그 소리가 강산의 신경을 긁었다. '무슨 소리지?' 강산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개인의 판단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것 같으면 굳이 일진(一陣), 이진(二陣)을 구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였지만 지켜야했다. 강산은 의문을 삼키며 구청연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뛰쳐나가기에 적당한 자세로 앉아 나무 틈새로 적의 동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항 역시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곰방대 대신 자갈이 쥐어져 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송자영과 양표가 오는 모양이었다. 발자국소리가 멈추더니 송자영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강산과 곽가량은 고개를 저었다. "쯧, 답답하기는... ." 송자영이 혀를 차더니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훌쩍 목책을 넘어가버렸다. "어어?" 뒤늦게 손을 내밀던 곽가량은 황당한 표정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강산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곽가량을 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곽가량은 목책을 넘었다. 강산이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두 번째 목책에 남은 이는 양표뿐이었다. 그는 일행의 뒷모습을 야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생각이 많은 자의 표정이었다. * * * 첫 번째 목책에 다가선 강산은 발자국소리의 주인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갑인(鐵鉀人)! 신체 중 드러난 부분이라고는 눈과 손밖에 없는 철갑인들이었다. 그들은 검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갑옷에는 손바닥 크기의 철린(鐵鱗)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이 돋아 있었다. 갑옷의 무게는 일견하기에도 족히 수십 근 이상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일 장에 달하는 구겸창(鉤鎌槍)을 들고 있었다. 구겸창 역시 칙칙한 검은 색이었다. "흑루의에 이젠 검은 쇠귀신들이라는 건가.... 유난히 검은 색을 좋아하는 놈들이로군." 이항이 뇌까리자 송자영이 말을 받았다. "저들은 흑갑마인(黑鉀魔人)이라 불리는 놈들로, 삼원(三院) 중 화도원(火途院) 소속이야. 갑옷의 무게만 해도 백근(百斤)이 넘어가기 때문에 천상 신력(神力)을 타고난 놈들이 아니면 숨쉬기 조차 힘들어." 이항이 자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갑마인이라... 들어본 적이 있어." 구청연이 나무 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흑갑마인도 문제지만 그들의 뒤에 바싹 붙어 오는 강노수(强弩手)들도 문제인데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휙!' 하는 한소리와 함께 곽가량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퓨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퍽! 하고 무언가 두 번째 목책에 박혔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목책에 박힌 무언가를 향해 돌아갔다. 강전(鋼箭)이었다. 살촉은 물론 살대까지 강철로 만들어진 강전이었다. 삐죽이 목책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주시하던 곽가량을 노리고 날아온 듯했다. "이 자식들이." 곽가량은 발끈하여 일어섰다. 어느 틈엔지 그의 손에는 서너 개의 자갈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고개를 처박아야했다. "이크!" 퓨릉, 퓨릉, 퓨르릉-! 미처 자갈을 던질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댓 개나 되는 강전이 날아온 것이다. 엉거주춤, 주저앉지도 그렇다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세를 보이던 곽가량이 머쓱하여 중얼거렸다. "허, 제법 하는 놈이 있는걸." 곽가량의 이야기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목책에 박힌 여러 대의 화살, 그 중 여타의 화살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지는 화살이 한 대 있었다. 다른 화살이 겨우 한두 치 깊이로 박혀 있는데 반해, 그 화살만은 거의 한 뼘 이상 박혀 반대편으로 삐죽 살촉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강산이 나무 틈에서 얼굴을 떼며 말했다. "좌측에서 두 번째 흑갑마인의 뒤에 숨어 있는 녀석이오. 다른 녀석들에 비해 한 자나 더 큰 강노(强弩)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녀석이 강노수들을 지휘하는 모양이오." 곽가량이 목책에 눈을 바싹 붙였다. 그러다가 그 자를 확인했는지 신경질적인 음성을 내뱉었다. "저 자식, 꼭 말(馬) 같이 생겨가지고... ." 아닌게 아니라 그의 용모는 매우 말과 흡사했다. 갈기만 잘 다듬는다면 잘못 태어난 말! 정도는 충분할 듯 싶었다. 송자영이 코웃음을 쳤다. "킁, 말에 밟힌 놈은 어떻고." 곽가량의 안색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흑갑마인들과 일행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애초에는 이십 장에 이르던 거리가 어느새 십여 장으로 좁혀진 것이다. 그때까지 자갈을 만지작거리던 이항이 문득 물었다. "근접전은 불리한데 좋은 방법이 없겠나?" 이항의 시선을 받은 구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항은 계속 중얼거렸다. "놈들의 약점은 손과 눈뿐인데, 겨냥하자면 이쪽이 먼저 꼬치가 될 판이니... .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던져서 해치울 수 있는 상대 같지도 않고." 적잖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뾰쪽한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궁수를 예상하여 만든 자갈과 목책이 무용지물로 화해 버린 이상 별다른 묘책이 없는 것이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일행의 고민은 계속되었고 와중에 거리는 점점 좁혀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산이 입을 열었다. 양 진영의 거리가 채 오 장도 남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봅시다." "어떻게?" 이항이 즉각 반응했다. 강산은 일행의 시선이 모이기를 기다려 말했다. "나무를 이용하는 겁니다." "......?"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강산은 말을 이었다. "먼저 자갈을 던지고 다음에 나무를 던집니다. 자갈은 흑갑마인의 머리를 목표로, 나무는 그들의 머리 위 한 자 정도를 목표로 던집니다." 구청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무에 묻어 가자는 이야기라면 위험부담이 큽니다. 바로 강전이 날아 올 텐데... ." 강산은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입니다. 나무를 던진 후 반 박자를 쉬었다 가는 겁니다." 돌연 중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군!" "좋아, 그러면 되겠어." 때를 같이하여 강산이 구청연을 보면서 말했다. "구형, 어떻습니까?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그러한 강산의 한마디가 의외였던지 구청연은 일순 아무 말을 못했다. 하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거의 동시, 송자영과 이항이 입을 열었다. "나도!" "늙은이도 한번 끼워주지 그래?" 강산은 자갈을 쥐다 말고 두 사람을 보았다. 난감했다! 그가 일부러 구청연을, 그리고 그 혼자만을 청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위험에 빠지면 감춰진 실력을 내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데 거기에 송자영과 이항이 합류하게 되면, 위험은 더 이상 위험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위험의 정도가 형편없이 약해져, 구청연이 굳이 진재실학(眞才實學)을 내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거절할 명분을 찾던 강산은 그대로 자갈을 쥐었다. "좋습니다. 하나 둘 셋을 헤아려 둘에 자갈을, 셋에 나무를 던지는 겁니다." 중인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 * * * 거웅(巨熊) 최고반(崔高盤)! 화도원 소속 용향의 부향주(副香主)이자 흑갑마인의 우두머리인 거웅 최고반, 그의 어린 시절은 지독히도 불행한 것이었다. 남다른 덩치와 쥐꼬리만한 간담(肝膽)은 언제나 또래의 놀림감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그 빌어먹을 놈의 가난 때문이었다. 언제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인내(忍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理想)에 앞서 현실(現實)을 알아버린 아이에게 있어 미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저 그때 그때를 넘겨야하는 벌레의 삶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원이 찾아들었다. "언제나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최고반은 그렇게 말하는 한 낯선 아저씨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동구 밖까지 따라나선 부모의 손에는 반짝이는 은(銀)이 쥐어져 있었다. 그 낯선 아저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쌀과 떡과 고기... 언제나 풍성한 식탁이 그를 반겨주었던 것이다. 비록 새로운 종류의 고통과 슬픔이 수반되었지만, 그러한 아픔들을 감히 배고픔에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세월은 흐르고 그에 따라 점차 고통은 사라져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팔 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어린 최고반은 사라지고 용향의 부향주 거웅 최고반만이 남게되었다. 그는 구겸창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단숨에 쓸어버린다.' 이제 목책과의 거리는 채 삼 장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목책 너머로 흐릿한 물체가 보인다싶더니 무언가가 번뜩였다. 쉬익! 최고반은 감각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막았다. 쩌정, 쩡! 철갑에 와 닿는 감촉과 소리로써 그것이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고반은 미소지었다. '발악을 하는군.' 한데 그 순간, 또 다시 목책 뒤에서 시커먼 물체가 튀어나왔다. 한순간 최고반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깨닫고 구겸창을 그어 올렸다. "어리석은 놈!" 퓻, 퓻! 등뒤에서 강노소리가 요란하더니 구겸창에 앞서 나무를 뚫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집이 된 나무를 구겸창이 훑고 지나갔다. 촤앗! 나무는 정확히 두 토막으로 갈라졌다. 동시에 잎과 잔가지가 허공 가득 흩뿌려졌다. 그 모습이 꼭 내장을 토해내고 쓰러지는 짐승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직 잔가지 뿐, 피가 보이지 않았다. 피와 육편(肉片) 따위의 마땅히 있어야할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속았다.' 최고반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비로소 한 사람이 보였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지면에 바싹 붙어 오는 한 사람, 강산이었다. 강산을 발견한 최고반은 울분(鬱憤)과 동시에 환희를 느꼈다. 울분은 허를 찔렸다는 자책에서 오는 것이었고, 환희는 달랑 칼 한 자루를 들고 접근하는 그의 모습에서 오는 것이었다. '미친 놈!' 칼 한 자루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마 철갑을 자르겠다는 말인가? "크크크...!" 구겸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졌다. * * *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고량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조광영이 보였다. 조광영의 곁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들 역시 조광영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용향의 향주인 구환도(九環刀) 적열(赤熱)과 호향의 향주인 음살장(陰殺掌) 화진악(華眞嶽)이었다. 한참만에...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느껴졌을 때 고량이 입을 열었다. "전멸이라고 했느냐?" 조광영이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사망자는 거웅 최고반 외 서른두 명입니다. 흑갑마인은 전멸했습니다." "놈들의 피해는?" "경미... 합니다. 모두들 상처를 입었지만, 중상자는 없는 듯합니다." "양표는?" "이번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의 문답을 끝으로 고량은 다시 침묵했다. 장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적은 겨울 밤 강변에 몰아치는 북풍처럼 스산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조광영은 깊숙이 숨을 들이켜 조금씩 조금씩 나눠 뱉었다. 죽을 맛이었다. 뼈마디는 쑤시고 다리는 저렸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만... 아무튼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어쩌면 강시( 屍)가 되가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때, 정적이 깨졌다. 조광영이 강시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제가 뚫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