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21편 (21/43)
왜 구해준 것이오?" 괴인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통쾌한 복수!" "언제까지?" "그만 할 때까지." "내게 아무런 의문도 없다면?" "편안히 죽을 수 있지." 제 12 장 잔백구유도법. 1 괴인이 제시한 문제는 도법(刀法)이었다. 곧, 괴인이 매회 일초(一招)의 도법을 펼치면 강산은 거기에 대한 파해법(破解法)을 여섯 시진 내에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물론, 도법은 강산이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단히 빠르고 대단히 변화가 많으며 또한 대단히 악랄한 도법이었다. 강산은 매회 가진 밑천을 전부 쏟아 붓고서야 겨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 동안 강산은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받았다. "당신의 정체는?" "칠절마도(七絶魔刀) 가은양(柯隱洋)." "당신의 팔은 누가 잘랐나?" "육만월(陸滿月)." "내가 그분의 제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네가 낙광영을 죽일 때 쓴 초식, 그것은 무상삼도(無上三刀)의 제 일초 이마분종(二魔分踪)의 변형된 초식이지." * * * 만 하루가 흘렀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중인들은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있었으며 강산은 여전히 파해법에 고심했다. 그저 달라진 것이라고는 몇 가지 의문을 해결했다는 점, 그뿐이었다.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이글이글 한창 열기를 뿜어낼 무렵! 강산은 동굴 입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잔백구유도법(殘魄九幽刀法)...! 이것은 분명 그의 독문절기(獨門絶技)인 잔백구유도법이 확실하다. 잔백구유도법은 모두 오 초로 구성되어 있다 했으니 이제 이 초가 남은 셈인데... 과연 아직까지도 마도 최강(魔道最强)이라 불리는 도법을 내가 파해할 수 있을까?" 강산은 나뭇가지로 지면에 뭔가를 열심히 긁적이고 있었다. 수 많은 점(點)과 선(線)... 그것은 언뜻 보아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선과 점들의 집합체일 따름이었다. 그 숱한 점과 선은 멋대로 얽혀 때로는 삼각형을 만들어내기도 하였고, 때로는 사각형과 오각형을, 때로는 원을, 때로는 정체불명의 기이한 도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문득 뚫어져라 지면을 응시하던 강산의 입술이 벌어지며 답답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 모르겠군, 모르겠어... ." 난관에라도 봉착한 듯 그의 표정은 더없이 암울했다. 하나 한탄조의 말이나 암울한 표정과는 달리 그의 손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 역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이 난제를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강산은 나뭇가지를 팽개치며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씹어뱉듯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한동안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던 강산이 입술을 달싹였다. 네 사람의 이름과 명호가 흘러나왔다. "칠절마도(七絶魔刀) 가은양(柯隱洋), 구주진천뇌룡장(九州震天雷龍掌) 조령(曺逞), 서래독안(西來獨眼), 홍화옥소(虹華玉簫) 반철영(盤澈鈴)." 그것은 한때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이름들이었다. 대내제일고수(大內第一高手)였던 육만월, 그 육만월과 더불어 오신(五神)이라 불리웠던 이름들이었다. 삼절방과 무천궁이라는 거대세력이 생겨나기 이전, 현재 그들이 가졌을 모든 것을 어쩌면 과거 단신으로 소유하였을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이름들인 것이다. '사부... .' 강산은 눈을 감고 뇌리에 사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오른다리가 없는 불구에 구부정한 허리, 하얗게 샌 머리에 반이나 빠져버린 치아... . 부족했다. 비록 옛 시절의 기상과 명예는 여전하다지만 가은양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마주친다면...? 결과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강산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시 나뭇가지도 주웠다. '여기서 해결한다.' 가은양이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설혹 그러한 행동이 지극히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은인! 하지만 강산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사부의 문제도 해결한다.' * * * "일행은 언제 깨어나는가?" "빠르면 지금, 늦으면 영원히." 네 번째 문제를 겨우 시간 내에 해결한 강산은 한참 다섯 번째 초식의 파해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쌀가마 만한 바위의 앞이었다. 그는 뚫어져라 바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위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수십 개나 나 있었다. 마치 벌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강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삼십육 개!" 바위를 빙 둘러 난 구멍은 정확히 삼십육 개였다. 다만 조금씩이라고는 하지만 깊이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한 푼의 깊이로 어떤 것은 세 푼의 깊이로 패어 있었다. "일 초에 삼십육 방(方)을 점할 수 있는 도법이라... . 사월삼성(斜月三星)의 오의(奧義)를 깨닫기 전에는... ." 강산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사월삼성은 무상삼도의 최후 초식이었다. 무상삼도는 강산이 알고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과거 육만월을 대내제일고수임과 동시에 오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로 그 무공인 것이다. 무상삼도는 모두 세 초식으로 구성된 도법이었다. 일초, 이마분종(二魔分踪)! 이초, 삼음전유(三陰轉幽)! 삼초, 사월삼성(斜月三星)! 아쉽게도 강산이 펼칠 수 있는 것은 이초 삼음전유까지 뿐이었다. 무심히 시간이 흘렀다. 그리하여 약속된 유시(酉時)가 채 반 시진도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흐음!" 강산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잔백구유도법의 허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사월삼성의 오의는 전혀 깨우칠 수 없었다. 초조한 가운데 계속 시간은 흘러갔다. ...... 그리고 약속된 유시가 되었다. "클클클...!" 언제 나타났는지 가은양이 뒤에서 웃고 있었다. 사악함에 앞서 확신이 배어 있는 웃음소리였다. 바위를 주시하던 강산은 느릿하게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고, 가은양이 실실 미소지으며 물었다. "파해법은?" 강산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기다리던 가은양이 다시 물었다. "파해법은?" 순간, 강산은 대답 대신 불쑥 손을 내밀었다. 가은양이 의아한 눈으로 그 손을 보았다. 이어 다시 강산의 눈을 보았다. 강산이 짧게 한마디했다. "용수!" 비로소 손의 의미를 깨달은 가은양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용수는 거기 있었다. 어제 빌린 후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이 제 물건을 달라는 데야 돌려주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 "푸흐흐흐...!" 갑자기 가은양이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음은 작게 시작되었다가 점차 크게, 그리고 통쾌하게 변해갔다. "크하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깨를 들썩들썩 좀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던 가은양이 비릿한 미소와 더불어 입을 열었다. "크크크! 파해법을 찾지 못했으니 일전을 불사한다... 생각해낸 계책이라는 게 겨우 그것이냐?" 가은양은 강산이 손에 쥔 금강도를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 칼과 용수! 두 자루라면 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으냐? 크흐흐..., 쓸모 없는 놈." 강산은 내민 손을 치우지 않은 채 가은양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시인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클클, 소원이라면." 가은양은 용수를 던졌다. 강산은 용수를 잡았다. 이제 그의 양손에는 각기 금강과 용수가 쥐어져 있었다. 비로소 강산이 입을 열었다. "이번 문제는 도저히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오." 가은양이 피식 미소지었다. "그래서?" 강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곧 막아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니오." "난 파해법을 찾으라고 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파해법이오. 비록 다른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당신 한 사람에게만은 확실히 통하는 파해법이오." "......?" "남은 한 팔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또 무엇으로 잔백구유도법을 펼쳐내겠소?" 강산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네가 이 초식을 펼쳐온다면 난 파해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네 한 팔은 앗아갈 수 있다! 가은양의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강산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처럼 분위기 역시 이상하리 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보겠다." 강산은 가은양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왼발을 한 자 가량 내딛었다. "다섯 번째 초식은 순간에 삼십육 방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었오. 전후좌우로 각기 일곱, 그리고 위로 여덟." 이어 강산은 금강도를 쭉 내밀어 상단을 보호했다. "이마분종은 일순간 네 개의 각기 다른 목표를 처리하기에 손색이 없소. 여기에 분화불류(分花拂柳)를 혼합한다면 위로 오는 여덟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오." 가은양이 나직이 뇌까렸다. "충분하다." 강산은 연이어 오른손에 쥔 용수를 들어 좌에서 우로 가볍게 쓸어보였다. 파라락! 용수에서 작은 음향이 일며 강산의 몸통 주위로 엷은 막이 형성되었다. "무상삼도의 이초 삼음전유는 본래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수법이오. 이로써 전방과 좌우로 오는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오." 가은양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되물었다. "인정한다. 하나 뒤로 오는 일곱은 어떻게 하지?" "내 이미 말했지 않소? 능력 밖이라고." 가은양이 거듭 질문을 던졌다. "능력 밖이라... 하면 무엇으로 내 팔을 자르겠느냐? 설마 내 스스로 팔을 잘라 바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강산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잘못 해석했소. 막아낼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막고 자를 능력이 없다는 것이오."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 참이오. 당신의 이 다섯 번째 도법에는 하나의 허점이 있소." "무엇이냐?" "그것은 삼십육 방위에 실린 힘이 균등하지 않다는 점이오. 곧, 상부와 배후로 오는 열다섯 번의 공격에 실린 힘이 여타 공격에 실린 힘에 비해 오 푼 이상 떨어진다는 것이오. 상부의 힘이 약한 것은 인간의 신체가 위로부터 오는 타격에 약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줄인 결과일 것이며, 배후의 힘이 약한 것은 가장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소멸된 것이라 생각하오." 가은양은 계속하라는 듯 가만히 강산을 응시했다. 강산은 상단을 보호하던 금강도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따라서 상단을 보호한 이 손에는 아직 여력이 있소. 위에서 오는 여덟 번의 공격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오." "일리가 있다." "여기서 당신은 한 가지 의문을 느낄 것이오. 이마분종에 분화불류를 혼합한 것은 당연히 보다 적절한 수비를 하기 위함인데, 굳이 힘이 남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가은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분화불류를 펼치는 그 진정한 목적은 당신의 이목을 속이기 위함이오." 길게 이어지던 강산의 설명은 거기서 끝을 맺었다. "......!" 가은양은 더 묻지 않았다. 마땅히 모든 의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은양의 뇌리에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자신과 강산의 격돌장면이 현실처럼 생생히 그려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강산의 설명 그대로였다. 분화불류의 난잡한 변화는 머리를 보호하는 가장 적절한 초식이기에 자신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의 팔의 위치는 강산의 가슴 정도가 된다. 이목은 중단에 있는 용수에 쏠려 있을 것이고. 그때 만약 강산의 왼손에 힘이 남았다면...! "허허허!" 가은양은 웃었다. 그는 강산을 만난 후 늘 다른 웃음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강산이 깨어났을 때는 할애비가 손자를 어르듯 편안한 웃음을, 두 번째 용수를 보았을 때는 지기(知己)를 만난 듯 반가운 웃음을, 세 번째 내기를 하자했을 때는 한서린 악마의 웃음을, 그리고 네 번째 강산이 용수를 달라했을 땐 통쾌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웃음 역시 달랐다. 다섯 번째의 웃음에는 감탄이 있었다. 강산과 그를 키워낸 육만월에 대한 감탄이었다. '훌륭하다! 하지만... .' 갑자기 가은양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씻은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예의 덤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마지막 문제를 내겠다." 일순 무심했던 강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잔백구유도법은 모두 오 초로 구성된 도법이라 들었소. 달리 숨겨진 육 초라도 있다는 말이오?" "마지막 문제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번에는 말장난이 아닌 실전(實戰)이다. 파해하든 해결하든 그것은 네 마음이다." 가은양의 이야기는 분명한 것이었다. 몸으로 막아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가은양의 전신에서는 줄기줄기 섬뜩한 기운이 뻗쳐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대기가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강산은 냉정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약정(約定)에 없는 것이오." "클클, 먼저 깬 것은 네놈이다. 난 파해법을 제시하라고 했지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하진 않았다." 우우우웅- 우르릉! 대기가 더욱 거세게 울부짖었다. 이윽고, 강산은 할 수 없다는 듯 금강을 중단으로 내렸다. 그리고 뜻밖에도 용수를 던져버렸다. "......?" 용수는 빙글 한 바퀴를 회전해 가은양의 발치에 꽂혔다. "무슨 뜻이냐?" 이제 강산의 전신에서도 묵직한 기운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별 뜻은 없소. 당신 칼이니 당신 맘대로 하라는 것뿐이오." "내 칼이라고?" "아니오?" "클클클...!" 고오오오오-! 파라라락! 낙엽과 잔가지가 섞여 올랐다. 하늘로 오르는가 싶더니 일정 높이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 일정 공간에 모인 낙엽과 잔가지는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반구(半球)를 형성하게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고오오오-! 반구는 점점 세력을 넓혀갔고, 그러던 어느 순간! 번쩍! 한 가닥 틈을 비집고 빛이 새어나왔다. * * * "용수가 내 칼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그것보다는 먼저 당신과 사부의 관계를 듣고 싶습니다." "내 팔을 자른 원수지." 강산은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사부의 다리를 자른 것도 당신이겠지요?" 가은양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클클...! 과거 오신이라 불리웠던 다섯 사람 중 유일하게 활동무대가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지. 물론 네 사부야. 그는 거의 황궁(皇宮)을 벗어난 적이 없어. 때문에 별호조차 없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일 뿐, 기실 네 사부의 강호활동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았어." 가은양의 이야기는 차분히 진행되었다. 당시 육만월은 비밀리에 한 가지 작업을 행하고 있었다. 작업은 쓰레기 수거! 라는 것이었다. 곧, 숱한 죄(罪)를 저지르고도 돈과 권력에 영합하여 그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쓰레기들에 대한 처단이었다. 한 사람이 어느 한 계통의 정점(頂點)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알게 모르게 많은 죄업을 쌓아야하는 법이다. 따라서 오신의 남은 네 사람 역시 육만월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육만월과 가은양은 만났다. 두 사람의 격돌은 삼일 밤 삼일 낮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렇게 지리한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기이한 감정이 움트게되었다. 그것은 감탄이었고, 그것은 애린(愛 )이었다. 모든 허물을 지워버리기에 충분한 애틋한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 내력(內力)을 회수했다. 조금 전에 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력을 회수하는 게 전부였어. 누구에게도 펼친 초식을 완벽하게 회수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이런 결과가 생겼지. 클클!" 가은양은 뿌리밖에 남지 않은 왼팔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강산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래서 용수를 두고 가신 겁니까?" "그때는 줄 것이 그것 밖에 없었거든. 참, 어떻게 용수가 내 칼인 줄 알았느냐?" "예전부터 용수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상삼도는 쾌(快)를 위주로 하는 무공으로, 연도(軟刀)에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용수에 어울리는 도법이라면 아마 변(變)을 위주로 하는 도법이 되겠지요. 그러다가 이곳에서 잔백구유도법을 배우고, 또한 당신이... 용수를 바라볼 때의 눈을 보고 알았습니다." 가은양은 수염을 어루만졌다. "흠, '배웠다'라... 내가 네게 잔백구유도법을 가르쳐줬다 생각하느냐?" "아닙니까?" "푸흐흐...!" 가은양은 미친 놈처럼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주로 가은양이 주도했다. 그는 의문이 많았다. 육만월의 근황, 강산이 이곳에 온 까닭, 강호 정세... 등등. 물론 강산의 의문 역시 그에 비해 적지 않았다. 이처럼 먼 곳에 은거한 까닭은 무엇이며, 일행을 거꾸로 매달아둔 이유는 무엇이고, 불귀곡의 정체는 무엇인가?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가은양은 대단히 흡족해했다. 질문을 던지고 받는 것에 상관없이 기뻐하였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이제 막 말을 깨우쳐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 머나먼 남만 땅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불귀곡에 은거한 까닭을 묻는 강산에게 가은양은 이렇게 말했다. "이유? 그런 건 없어. 그저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뿐이야." 확실히 불귀곡은 '인적이 없다!' 라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곳이었다. 어쩌면 유일무이한 장소가 될지도 몰랐다. "거꾸로 매단 이유는 병(病) 때문... 병? 병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야. 까닭은 나도 알 수 없지만, 저렇게 통풍이 잘되는 곳에 거꾸로 세워놓으면 훨씬 빨리 깨어나거든." "저는 왜 따로 두셨습니까?" "더욱 신속한 치유를 위해서지. 고통은 훨씬 더하지만." "그 병이라는 것은 역시 독입니까?"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이야." "......?" "나쁜 공기라면 알아듣겠느냐?" "나쁜 공기... 라고요...?" "자, 간단한 실험으로 보여주마." 가은양은 불을 피웠다. 그리고 불이 웬만큼 타오른다 싶을 때 불을 껐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에 얼굴을 대고 숨을 쉬어보거라." 강산은 연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했다. 하지만 몇 번 들이키기도 전에 캑캑거리며 물러났다. 눈물을 찔끔거리는 강산에게 가은양이 물었다. "어떠냐? 숨을 쉴 수가 없지?" 그 너무도 당연한 증명에 강산은 화가 치밀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화를 낼 수 없는 상대였기에 더욱 화가 났다. "예." "그런 것이다. 네가 정신을 잃은 것은 그 연기 같은 것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지 공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은양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숯은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지. 같은 것이야." "하지만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지 않습니까?" "모르지, 모두가 잠든 사이에 내려올지도." "하지만 저잣거리의 누구도... ." "여건(與件)의 문제지. 바람이 없는 곳, 낙엽이 쌓이기 좋은 곳, 무더운 곳... 그런 곳에 장독( 毒)이 생겨나듯, 이 나쁜 공기 역시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조건이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 "잠깐!" 문득 가은양이 강산의 말을 끊었다. 비로소 계속되는 강산의 '하지만 타령!' 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강산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가은양은 이내 '하지만 타령!' 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은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강산을 째리며 물었다. "너는 조금 전의 연기를 마신 것 때문에 심통이 났느냐?" 강산이 코방귀를 날렸다. "킁, 그까짓 일로 누가 심통을 낸다고 그러십니까?" "정말 그까짓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 "킁!"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가은양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때를 같이하여 강산의 입술 역시 조금 벌어졌다. 가은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크크크, 너 혹시 밴댕이 소갈머리라고 들어보았느냐?" 그리고 강산이 따라 입을 열었다. "푸흐흐, 그거 혹시 벽에 처바를 때까지 산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입니까?" ...... "크크크...!" "푸흐흐...!" "크하하하-!" "푸하하-!" 통쾌한... 지극히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이렇게 웃어보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강산에게는 실로 오랜만이랄 수 있는 통쾌한 웃음이었다. 멀리 동녘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 * * 잔백구유도법은 모두 오 초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일 초. 사실환허(似實還虛)! 제 이 초. 지참혼옥(地慘魂獄)! 제 삼 초. 구살분금(九殺噴金)! 제 사 초. 칠절참혼(七絶斬魂)! 제 오 초. 칠절마해(七絶魔解)! 2 "후욱, 후욱!" 한 사내가 숲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냥꾼에게 쫓기는 맹수처럼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