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20편 (20/43)

2026-10-08 18:49:05 조회 3
그는 허한 눈길을 하늘에 두고 있었다. 이윽고 마의인의 면전에 이른 백포 중년인은 입을 열었다. 명령조의 짧은 말이 튀어나왔다. "열어라." 그의 덩치에 어울리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마의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개야 짖어라 나는 잔다, 라는 듯한 태도였다. 백포 중년인의 눈꼬리가 불끈 치솟는가 싶더니 재차 같은 한 마디가 떨어졌다. "왕인수(王忍睡)다. 열어라." 그러나 마의인의 반응은 변함이 없었다.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백포 중년인, 스스로를 왕인수라 밝힌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마의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으득! 이빨을 갈아부친 후 품속에 손을 넣었다. 품을 빠져나온 그의 손에는 손아귀에 꼭 들어가는 적당한 크기의 옥패(玉牌)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옥패에는 호랑이와 학과 용, 그렇게 세 마리의 짐승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제야 마의인이 움직였다. 다만 움직임이라야 발이 조금 이동한 것에 불과했다. 그르릉! 건물 한쪽이 열렸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백포 중년인, 왕인수의 모습은 이내 그 공간으로 사라졌다. 여운(餘韻)인 양 서늘한 한 마디가 뒤에 남았다. "양평(良平), 오래 살아야한다." 왕인수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어느 작은 방이었다. 방안의 풍경은 매우 황량했다.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그리고 의자 하나, 그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침대만 없었다면 창고라 해도 좋을 법한 곳이었다. 방안에는 왕인수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삼십 중반쯤 되어 보이는 자로, 일견 툭 불거진 광대뼈와 한 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이 매우 독선적(獨善的)인 느낌을 주는 자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왕인수는 그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문득 그가 손에 쥔 첩지를 탁자에 놓으며 물었다. "이항, 서문상, 곽가량..., 그들이 그렇게 뛰어난 자들이오?" 왕인수는 힐끗 첩지를 일견한 후 대답했다. "뛰어나긴 하지만 넷째형과 막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첩지에는 단 두 줄의 글이 쓰여 있었다. <추적 실패(失敗), 놈들은 불귀곡을 가로질러 가고 있음. 대비(對備) 요망.> 첩지 하단에는 서명 대신 날개를 활짝 펼친 한 마리 매가 그려져 있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면 구청연이라는 자가 문제요?" 왕인수의 고개가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소방주(小幇主)! 속하가 무능하여 지금까지 그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공공(空公)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소. 끌어들여 정보를 캐내자는 건 내 의견이었으니. 애초부터... 운남에 들어서기 전에 처리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죄송합니다." 거듭 고개를 숙이던 왕인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속하가 불귀곡으로 가보겠습니다." 순간, 소방주라는 자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하지만 왕인수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변화의 정도가 너무 미약했을 뿐더러, 또한 그 시간도 짧았기 때문이다. 소방주라는 자가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굳이 공공이 나설 필요는 없소. 놈들에 대해서는 내 따로 조치할 것인즉, 공공은 불귀곡 주변에 사람을 풀어 풍공의 흔적을 찾도록 하시오. 불귀곡 내로는 진입하지 말고, 알겠소?" "불귀곡 내로는 진입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왕인수는 의아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소방주가 알려줄 것 같았으면 벌써 알려줬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소. 왜 놈은 합류하지 않은 것이오? 놈이 내부에서 손을 썼다면 한두 명 정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왕인수는 다시 고개를 숙여야했다. "속하도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넷째형과 막내, 그리고 놈이 내부에서 힘을 합했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 생각컨데 무슨 변고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자세한 내막은 넷째형이 돌아와봐야 알겠습니다." 소방주라는 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돌아온다면 말이지... ." 왕인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이곳에 온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과거 불귀곡에서 일어났던 변고에 대해 듣지 못한 까닭이었다. "예?" "아무 것도 아니오. 한데 연구는 어찌 되가오?" "순조롭습니다. 먹이의 질(質)을 높여 보다 나은 원료를 얻어내고 있으며, 갈수록 숙련자들이 많아져 허투루 버리는 양 또한 줄었습니다. 때문에 위력은 일 년 전에 비해 두 배로 커졌고, 휴대는 더욱 간편해졌습니다." 왕인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방주의 안색을 살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는 호두알만한 크기로 반경 십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여전히 충격에는 약한지라, 요즘은 그 점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두 달 내에 좋은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 알겠소. 그만 가보시오. 참, 나가면서 양평을 불러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왕인수는 깊숙이 부복하고 돌아섰다. 왕인수가 나가자 방은 예의 황량한 정적에 휩싸였다. 소방주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정적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씁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분은 왜 손을 쓰지 않는 거지? 비록 격이 틀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수하가 아닌가? 무슨 이유로...?" 2 똑...! 칙칙한 어둠이 보였다. 똑...! 어둠 사이로 몇 가닥 하얀 선 같은 것도 보였다. 선은 반듯하지 못하고 구불구불한 게 마치 지렁이가 지나간 자국 같았다. 똑...! 이마에 작은 느낌이 왔다. 스치는 바람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주 미세한 느낌이었다. 하얀 선에 물방울이 맺혔다. 물방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것이었다. 똑...! 보다 분명한 느낌이 왔다. 시원한 느낌이었다. 물방울은 조금 커졌고, 커졌다싶은 순간 조금 더 커졌다. 그리고 웬만큼 커지자 하얀 선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 선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똑...! 짜릿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훤히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 짜릿한 느낌은 이마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하체로 퍼져갔다. 물방울은 더욱 커졌다. 선을 따라 흐르며 주변의 작은 물방울들까지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물방울은 공룡처럼 비대해졌다. 흔들흔들 매달린 모습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물방울은 떨어지고 말았다. 반짝! 강산은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았다. 물방울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각도로 보아 이마 부근에 떨어질 것 같았다. 강산이 '이것이었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물방울은 정확히 그의 미간에 떨어졌다. 똑...! 강산은 눈을 감았다. 시원한 감각을 음미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더 이상 시원하지 않았다. 짜릿하지도 않았다. 무슨 연유에선지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이다. "......?" 덤덤한 순간이 지나고 색다른 감각이 찾아들었다. "큭!" 그것은 고통이었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평생 처음이다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미간에서 시작된 고통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애초의 쾌감이 무의식적인 상황하에서 찾아들었듯, 고통 또한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들었다. 고통은 빠르고 그리고 강하게 퍼져나갔다. "어-으!"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허리가 들썩였다. 마치 뭍에 오른 물고기 마냥 전신이 튀어올랐다. "크으으...!" 강산은 이를 악물었다. 울부짖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통을 억누르는 건 이미 그의 본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그렇지 못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그의 육신은 꼬이고 꺾이고 몸부림쳤다. "흐으...!" 강산은 점점 새우를 닮아갔다. 등이 휘고 관절이 뒤틀린 새우를 닮아갔다. 하지만 악다문 입술은 벌어질 줄 몰랐다. 그렇듯 괴이한 광경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칙칙한 동굴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흠!"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듣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제멋대로 뒤틀리던 강산의 육신이 겨우 제 모습을 찾아갈 때에 들려온 소리였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던 강산은 머리를 들어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무언가가 있었다! 그 음성 마냥 불확실한 무언가가 어둠 저편에 존재하고 있었다. 튀어나온 돌 같기도 했고 나무 같기도 했고 사람 같기도 했다. 강산은 힘껏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흐릿한 형체가 보다 분명히 보였다.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퍽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강산은 그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외관에서 풍겨나는 느긋한 분위기에서... 아니, 어쩌면 칙칙한 동굴 속의 분위기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그가 언제 왔든 그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발작을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 적(敵)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니, 최소한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걸 뜻한다. 달리 꿍꿍이가 있는가 하는 점 역시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 파고들 여유는 없다. 강산은 차분히 일어나 앉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아직도 머리 한쪽이 지근거렸지만 대단한 건 아니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산은 그 괴인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현출원관소식로(現出元關消息路)... .' 원관이 나타나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열리고, '휴망백맥법륜행(休忘百脈法輪行)... .' 백맥을 잊으면 진리의 수레바퀴는 저절로 돈다. '상교화양장생굴(常敎火養長生窟)... .' 장생굴을 한결같이 따뜻이 기르고, '검점명주불사관(檢點明珠不死關)... .' 죽지 않음으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밝은 구슬을 찾아라...> 조식을 취하는 강산의 자세는 늠름했다. 꼿꼿이 편 허리와 지면에 뿌리를 내린 듯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하체는 마치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천년고목을 연상케하는 당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의 자세와 같지 않았다. 이맛살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고, 뺨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뿐이랴, 이마에 방울방울 땀이 맺히는가 싶더니 급기야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였다. 본래 운기조식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조식 중에는 외압(外壓)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게 그 한 이유요, 무리한 공력의 운행으로 자칫 폐인(廢人)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다른 한 이유이다. 곧, 조식중인 자가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의 주먹을 감당하지 못하며, 어느 정도 기본적인 공력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는 조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때문에 무인(武人)이라면 철저한 안전이 선행되지 않는 한 조식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무리한 공력의 운행을 자제하게 된다. 물론 위의 두 가지 사항은 기본에 해당된다. 숱하게 널려 있어 그 중 한두 가지를 어긴다 할지라도 별다른 결과의 변화가 없는 그런 기본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기본을 무시한 결과는 때때로 비참하게 나타난다. 어이없는 죽음과 주화입마(走火入魔)... 등등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흘러내린 땀으로 인해 강산의 전신이 축축이 젖어들 때, 괴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는 강산에게 다가갔다. 급할 게 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들던 괴인영은 강산과 일 장 거리를 남기고 멈춰 섰다. 그리고 눈빛을 반짝이며 강산을 살폈다. 그때 강산의 모습은 최악이었다. 고통에 뒤틀린 안면은 흉신악귀(兇神惡鬼)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고, 땀에 젖은 의복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잠자코 강산을 바라보던 괴인영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 전진하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한데 그 순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 줄기 희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것이다. "......?" 아지랑이는 강산의 단전(丹田) 부근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몹시도 가냘프고 여려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지랑이는 곧 세력을 넓혀갔다. 한 줄기 두 줄기 단전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가슴으로 세력을 넓히더니, 이내 강산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것이다. 괴인영은 들어올렸던 손을 내렸다. 아지랑이의 정체는 수증기였다. 곧, 강산이 내뿜는 체열(體熱)로 인해 땀이 수증기로 변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강산이 더 이상 잘못 된 조식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산은 부족한 공력으로 인해 야기된 위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낸 것이다. 강산은 점차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잠시 강산을 주시하던 괴인영은 이윽고 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흠!" 예의 기묘한 탄성만이 빈 공간에 남아 있었다. * * * "후-욱!" 강산은 긴 한숨과 더불어 조식에서 깨어났다. 심신이 상쾌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공력의 팔구 할은 회복된 것 같았다. 강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괴인영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괴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칙칙한 어둠에 싸인 벽과 천장뿐이었다. 벽은 반듯반듯하지 않고 구불구불했다. 그리고 약간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어 매끄러웠고 또한 매우 단단했다. 일견하기에도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적인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굴!' 그제야 강산은 이곳이 동굴임을 깨달았다. 동굴은 좌우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산은 좌측으로 걸어나갔다. 같은 암흑이라고는 하지만 그쪽이 조금 더 밝았기 때문이다. 강산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괴인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어떤 자일까? 상황으로 보아 그가 자신을 구해준 모양인데, 왜 그랬을까? 남은 일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혹, 자신처럼 괴인영의 도움을 받았을까...? 몇 가지 의문이 연달아 떠올랐다. 하지만 의문들은 떠오른 순간 바로바로 지워졌다. 생각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까닭이었다. '만나면 알 수 있겠지.' 강산은 오래지 않아 출구(出口)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 점점이 반짝이는 숱한 점들이 동굴의 끝을 의미했다. 별(星)... 밤인 모양이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걸음을 빨리 한 강산은 이내 칙칙했던 동굴을 벗어났다. 그리고 출구를 나섬과 동시에 적어도 한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일행이 거기 있었다! 한 그루 거대한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구청연, 곽가량, 이항, 송자영, 양표, 전원이 마치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다만 푸줏간의 고기와 틀린 점은 그들이 갈고리가 아닌 밧줄에 매달려 있다라는 점이었고, 또한 미약하나마 숨을 쉬고 있다라는 점이었다. 강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금강도를 들었다. 그 순간! 강산이 금강으로 일행을 매단 밧줄을 끊으려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가만 놔두는 게 좋아." "...... ." 강산의 가슴으로 섬뜩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가 '만약 적이었다면?' 라는 생각에 오한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 자신을 해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살기(殺氣) 따위의 어떠한 위험도 감지하지 못한 자신의 신체가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뒤집어 말해 살기가 있었다면 이처럼 무력하게 배후를 빼앗기는 경우 또한 없었겠지만. 강산은 천천히 돌아섰다. 출구 좌측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강산은 직감적으로 그가 동굴 속에서 본 괴인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동굴 속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괴인은 덤덤한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았고, 강산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괴인은 외팔이였다. 그건 거의 벌거숭이와 다름없는 그의 모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강산이 그의 외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왼팔이 없는 외팔이라는 점, 그 한 가지로 끝이었다. 용모는? 나이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산발해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와 온 얼굴 가득 송송 돋아난 수염 덕분이었다. 반인반수(半人半獸),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떨어져 수십 년을 혼자 생활한사람! 괴인영, 아니 괴인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상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괴인과 강산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적이 차츰 지루해진다 싶을 때, 강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육(陸)형은 잘 있느냐?" 괴인은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강산의 말을 되뇌었다. "원하는 것이라...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퍽이나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강산은 그처럼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괴인의 한마디가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육형! 세상에 육(陸)씨 성(姓)을 가진 사람은 많다. 당연히 육형이라 불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하지만 강산이 아는 한 육씨 성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육만월(陸滿月)! 바로 자신의 사부(師父)뿐인 것이다. 강산은 멍한 눈으로 괴인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괴인이 말한 '육형'이 바로 자신의 사부 육만월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강산의 눈빛은 차츰 정상을 회복해갔다. 그리고 완전히 정상을 회복했다싶을 때, 입술이 벌어지며 예의 덤덤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뉘시오?" "......?" 괴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강산의 태도가 의외인 모양이었다. 하긴, 목숨을 구해주고 사부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처럼 뻣뻣하게 구는 녀석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부와 안면이 있는 자인데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마땅히 그 두 가지 사실로써 친구나 동문(同門) 등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괴인은 웃었다. "허허허! 누구냐 라... 좋군, 좋아. 육형은 듬직한 녀석을 얻었구나. 허허허...!" 강산은 괴인의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다시 물었다. "뉘시오?" 그의 질문은 여전히 단순했고 태도는 여전히 뻣뻣했다. 또한 괴인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허허허...!" 한데 그러던 어느 순간, 괴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용수(龍鬚)!" 강산은 또 한번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용수라니? 이 자가 어떻게 용수를 알고 있단 말인가...? 와중에 강산의 손은 그의 생각과 관계없이 허리춤의 용수를 풀고 있었다. 강산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용수가 괴인의 손으로 넘어간 후의 일이었다. 괴인은 물끄러미 용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내색은 없었지만 벌어질 듯 말 듯, 벌어질 듯 말 듯 옴실거리는 그의 입술에서 그의 감회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용수에서 눈을 뗀 괴인이 전에 없이 삭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느냐?" 하지만 그 급격한 변화는 강산에게 다만 잘못을 숨기려는 어린아이의 어설픈 몸짓으로밖에 비춰지질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아직도 용수를 바라볼 때의 그 따뜻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렇소." "난 이미 이름을 버린 사람이다. 하지만 네가 정히 알고싶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무엇이오?" 문득 괴인이 미소지었다. 한데 그 미소는 지금껏 그가 보여주었던 미소와 같지 않았다. 강산을 바라볼 때의, 용수를 바라볼 때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악마의 미소라고나 할까! "클클...! 내기를 하는 것이지." 그 섬뜩한 미소는 강산이 지금까지 괴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품어왔던 몇 가지 생각들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바뀌었다.' 강산은 새삼 자신이 괴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쌓아올렸다고 믿었던 서로간의 신뢰가 간 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강산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내기요?" "간단하다. 내가 문제를 내고 네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네겐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을 것이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한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하나의 질문을 받는다. 시간은 문제 당 여섯 시진. 어떠냐?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않느냐?" 강산은 괴인을 직시하며 물었다. "당신의 이득은?" 괴인의 수염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시뻘건 이가 드러났다. "클클, 너의 목!" 하나 둘 셋...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강산이 물었다. "이유가 있소?" 괴인은 자신의 왼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팔이 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느냐? 원수의 제자라면 충분하겠지?" 강산은 잠시 괴인을 바라보았다. 괴인의 눈은 원독(怨毒)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