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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강산 제1권. - 19편 (19/43)

2026-10-08 18:49:05 조회 1
가공할 위력의 경력이 좌전방에서 짓쳐들었기 때문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강산은 재빨리 물러섬과 동시에 용수를 풍차처럼 돌려 상대의 경력을 와해했다. 손끝에 와 닿는 상대의 경력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강산은 즉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강산이 물러서자 곧 한 그루 나무 위에서 흑영(黑影)이 나타났다. 과연 쌍두사(雙頭蛇)를 연상시키는 초겸을 앞세우고 오연히 다가서는 그는 틀림없는 낙광영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없이 강산을 노려보던 낙광영이 뿌드득! 한차례 이를 갈아부치며 입을 열었다. "쥐새끼! 이젠 놓치지 않는다." 낙광영의 눈매가 묘하게 꿈틀거렸다. 먼젓번의 실패로 인한 분노와 다시 잡은 기회로 인한 환희가 뒤범벅된 모습이었다. "푸후후... 어디 또 한번 도망가 보아라." 낙광영의 비아냥거림에 강산은 나직이 냉소하며 용수를 고쳐 잡았다. 파라락! 고쳐 잡은 용수가 꼿꼿이 서는가싶더니 그 끝이 똑바로 낙광영을 가리켰다. 강산의 태도는 명확했다. 일전불사(一戰不辭)! 봉사가 아닌 바에야 모를 수 없는 아주 명쾌한 태도였다. 물론 낙광영은 봉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확실히 전달받았다. 낙광영은 웃음지었다. "크흐흐... 좋지." 그러잖아도 낙광영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던 참이었다. 눈앞의 쥐새끼가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당당히 맞설 테다, 우려를 버려라.' 하고 나오니 그저 웃음만 나올 따름인 것이다. "크크크크...!" 낙광영의 웃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가만 놔두면 족히 몇 시진이라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나 웃는 그의 얼굴표정은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또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바닥은 축축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이제 막 상대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낙광영은 문득 상대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용수를 중단에 겨누고 서 있는 강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 때문이었다. 승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많다. 때와 장소, 상대의 무공수위, 성격, 기후, 병기... 등등 무수하다 할 수 있다. 그 숱한 승패의 요인 중 대표적인 요인으로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가 꼽힌다. 곧, 천시(天時)와 지리(地理) 인물(人物)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천지인 세 가지에 앞서 더욱 중요한 승패의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氣度)다. 마주한 순간 상대가 뿜어내는 기도로써 이미 승패를 예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결투의 당사자가 고수이면 고수일수록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다만 뒤는 확인작업에 불과할 뿐, 굳이 칼을 빼고 손을 맞춰보지 않아도 고하는 이미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기도(氣度)의 패배! 낙광영으로서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단어였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낙광영의 안색이 더욱더 붉어졌다. 홍시 마냥 붉어지는가싶더니 이내 그 수준도 넘어 이제는 마치 다섯 단지의 화주(火酒)를 마신 듯했다. 잠자코 기다리던 강산이 문득 일 보를 전진하며 말했다. 속삭이듯 낮은 음성이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 순간! 낙광영이 사라졌다. 강산의 시야에서 낙광영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물에 빠진 수정(水晶)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본래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니 기도의 패배를 감지한 낙광영 역시 고수일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전이 딸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삶을 구하는..., 사중생(死中生)의 묘리(妙理)라 할 수 있었다. 낙광영은 기다렸고,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상대가 입을 열어 정력(定力)이 흩어지고, 걸음을 옮겨 중심이 흩어진 지금이 바로 유일한 기회였다. 다행히 낙광영은 그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낙광영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것은 강산의 정수리가 똑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겨우 일 장 남짓의 거리..., 그 거리는 낙광영의 팔과 여덟 자에 이르는 대초겸의 길이를 감안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산은 아직도 낙광영을 찾지 못한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쥐새끼!" 낙광영은 싸늘히 일갈하며 팔을 뻗었다.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 듯 강산의 도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것은 상단을 보호하는 평범한 공작전병(孔雀展屛)의 수법일 뿐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힘도, 오묘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다급한 마음에 내지른 투박한 몸짓일 따름이었다. 낙광영은 미소지었다. 그 버들가지처럼 약한 칼로는 절대 자신의 대초겸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한 동작은 마치 손바닥을 들어 하늘을 가리는 것처럼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한데 그때, 낙광영이 '쏟아지는 피와 뇌수를 어떻게 피할까?'를 생각하던 때! 강산의 도초(刀招)가 변했다. 대초겸과 맞부딪치는 순간 꼿꼿했던 형체가 느슨하게 풀어지는가 싶더니, 이어 마치 뱀이 나무를 타듯 초겸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그런 수법의 변화는 낙광영이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뜻 솟아오르는 면에서 만홀조천(萬笏朝天)과 비슷했지만 그보다는 기세가 약했고, 부드럽게 휘감아 오는 면에서는 옥대위요(玉帶圍腰)와 비슷했지만 그보다는 변화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칼로 이러한 변화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수십 년간을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온 낙광영으로서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피... 피해야 한다.' 낙광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피하기는커녕 병기에서 손을 뗄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멍청한 눈으로 쏘아 오는 용수를 주시하는 것뿐이었다. 피잇, 펑! 직후, 각기 다른 두 개의 음향이 울려 퍼졌다. 첫 번째 것은 무언가 부드러운 물체가 날카로운 물체에 잘리는 듯한 소리였고, 두 번째 것은 몽둥이로 나무를 때리듯 둔탁한 소리였다. 그리고 강산이 지면에 내려섰다. 본래의 위치에서 우측으로 일 장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한데 한 가지 괴이한 점이 있었다. 그건 강산의 표정이 평상시와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본래 한 사람이 대적(大敵)을 처치했다면 반드시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표정이 평상시와 같지 않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괴이하다는 건 강산의 얼굴이 기쁨이 아닌 고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짝 일그러진 입매에 찌푸린 얼굴을 기뻐하는 자의 표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강산이 용수로 낙광영의 가슴을 가를 때, 최후의 힘을 짜낸 낙광영이 장(掌)으로 강산의 가슴을 가격했던 것이다. 즉, 두 사람이 격돌했던 순간 들려온 두 개의 음향, 그 중 두 번째의 펑! 하는 소리가 바로 강산의 가슴을 때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위험했다.' 강산은 내려선 후에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렸다. 비록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하마터면 양패구상 당할 뻔 했던 것이다. 낙광영, 지독한 자였다. 가슴을 반 이상 잘린 상태에서 그런 독수(毒手)를 쓸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자였다. 강산은 손으로 몇 차례 가슴을 문질렀다. 그러자 서서히 통증이 사라져갔다. 다행히 내상은 그리 중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한 것 같지도 않았다. 내력을 일주천(一週天) 시켜보면 보다 명확한 걸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가슴 상처를 근심하던 강산은 문득 괴이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진동하는 공기의 흐름이 전신에 느껴졌던 것이다. 강산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구청연도 흑사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비명도, 병장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강산은 서둘러 신형을 날렸다. * * * 전장(戰場)은 한 곳으로 통합되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전투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결전에 꼭 살아 남은 모든 이들이 참가할 필요는 없었다. 중인들은 작은 공터를 사이에 두고 두 패로 갈렸다. 남서쪽엔 삼절방의 무리가 있었고 북동쪽엔 일행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중앙에 네 사람이 있었다. 구청연과 곽가량, 고량과 사마자웅이었다. 구청연은 사마자웅과 대치한 상태였고 곽가량은 고량과 대치한 상태였다. 분위기로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들 네 사람, 두 패의 전투로써 이 지겨운 추적전을 끝막음할 모양이었다. 하긴 남은 이들을 살펴보니 더 이상 뻗댈 기운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강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남은 흑사대원은 채 열다섯이 넘지 않았다. 개중 사지(四肢)가 제대로 붙어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으며, 설사 온전히 갖추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제대로 신형을 가누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한 점은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항은 각각 팔과 다리에 칼을 맞아 질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송자영과 양표는 의복이 너덜너덜 해진 채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서문상과 소귀는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흉신악귀(兇神惡鬼)가 따로 없었다. 일행 중 셋은 앉아 있었고 둘은 누워 있었는데, 그중 누워 있는 두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소귀까지.' 강산은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일행에 다가갔다. 하나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두 눈을 부릅뜬 채 뚫어져라 전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고오오! 주변의 공기가 무섭게 진동했다. 전신을 압박하는 기운에 크게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승부...! 예측할 수 없다.' 강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아야만 했다. 고오오오오-! 공기의 흐름이 점차 급박해져갔다. 그리고... . 뚝! 소음이 그쳤다. 울부짖던 공기의 외침도 쌕쌕! 가쁘게 몰아치던 긴장어린 숨소리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또한 소음이 그침과 동시에 움직임도 멈췄다. 한 치 한 치 상대의 동작에 맞춰 반응하던 고량의 움직임도, 구청연의 움직임도, 곽가량의 움직임도, 사마자웅의 움직임도, 모두 멈췄다. 단지 움직이는 것이라곤 떨어지는 낙엽과, 흐르는 시간뿐이었다. 아니, 굳이 따진다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네 사람의 눈동자였다. 심연(深淵)의 끝에 누워 흔들리듯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눈동자였다. 눈동자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닌 척 무심하지만 끊임없이 상대의 허점과 자신의 허점을 비교 분석하여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마치 무덤에서 찾은 안식처럼 쓸쓸하고 괴괴로운 정적이었다. ...... 그러던 어느 순간! "쿡!" 어디선가 짧은소리가 터져 나왔다. 참을 만큼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지른 듯 잔뜩 억눌려 있는 소리였다. 야릇했지만 기침소리가 분명했다. 기침소리는 짧았다. 그리고 낮았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기침소리의 고저(高低)와 장단(長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새소리나 천둥소리라도 상관없듯 고저장단은 무의미할 뿐인 것이다. 쉭! '쿡!'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사마자웅의 쌍륜이 사라졌으며, 또한 동시에 구청연이 좌측으로 뛰어올랐다. 고량이 삼 보를 전진했으며 곽가량 역시 맞서 삼 보를 뛰어나왔다. 다만 누가 시작인지, 누가 끝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동작은 경세적이었다. 치잉, 파앗, 퍼펑! 하는 격돌음이 들리고 취리릿! 하는 괴이한 음향이 들렸다. 그리고 쿵쿵쿵!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퍽!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고통에 찬 비명은 그 다음이었다. "크아악!" "흐윽!" "흡!" "크-윽!" 사람은 넷, 비명 또한 넷이었다. 다만 하나는 비명이요, 셋은 신음에 가까웠다. 제 11 장 동굴속의 괴인. 1 강산은 내공을 풀었다. 그러자 마치 독오른 뱀처럼 꼿꼿이 서 있던 용수가 스르르! 풀려 본래의 유연한 허리띠로 돌아갔다. 강산은 매서운 눈으로 장내를 쓸어보았다. 거기 일장 격돌의 결과가 명확하게 펼쳐져 있었다. 구청연은 멀리 퉁겨나 한 그루 나무에 신형을 기대고 있었고, 고량은 연속 일곱 걸음을 물러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으며, 곽가량은 일 장여를 밀려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일견하기에 그들의 상세(傷勢)는 비슷해 보였다. 누구의 부상도 약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치명상을 입은 자도 없는 것 같았다. 위중하지만 목숨을 걱정할 단계는 아닌 정도... 그런 정도였다. 다만 남은 한 사람은 달랐다. 신음이 아닌 비명을 지른 사마자웅만은 세 사람과 달랐다. 그는 양팔이 잘린 채 지면에 쓰러져 있었다. 안면을 지면에 박고 가끔씩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게 이미 정신을 잃은 듯 싶었다. 쿨럭쿨럭! 그의 어깨가 들썩거림에 따라 피가 흘러나왔다. 살아나기도 어려울뿐더러 설혹 살아난다 할지라도 다시는 쌍륜을 잡지 못할 것이다. * * * 흑사대가 떠났다. 동료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그저 살아남은 자들만이 떠나갔다. 서로를 의지해 꼬리만 개처럼 떠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한 것이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텐가! 오십이 와서 열다섯이 돌아가고, 우두머리 셋 중 둘이 죽었는데. 거기에 돌아가는 열다섯이라야 깨지고 잘리고 찢긴 반 시체들뿐이데... . 일행은 떠나는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깨끗이 처리하여 후환(後患)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으나,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일행의 처지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묻어줍시다." 양표의 말에 중인들은 피곤한 육신을 추스르며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반 시진 후, 급조된 봉분이 만들어졌다. 일을 마친 일행은 미처 망자의 명복을 빌 겨를도 없이 픽픽! 무덤 주위에 쓰러졌다. 양표는 기력이 다했는지 떨어지자마자 드릉-드릉! 낮게 코를 골았고, 이항은 그 좋아하는 곰방대가 손에서 떨어진 줄도 모른 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강산은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강산은 무덤을 베고 누웠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취할까.' 생각하던 강산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거니와 문득 떠오른 의문 때문이었다. 의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마자웅의 상처에 관한 것이었고, 남은 하나는 흑사대의 매복에 관한 것이었다. '무언가를 소매 속에 감추고 있다.' 강산은 구청연과 사마자웅이 격돌한 순간 한 점 맑은 광채를 볼 수 있었다. 광채는 이슬처럼 맑은 것이었고, 구청연의 소맷자락에서 번뜩였었다. 그 광채가 병기에서 반사된 빛이라는 건 마치 동경 마냥 매끄럽게 잘린 사마자웅의 상처로써 충분히 설명될 수 있었다. 세상에 절옥수(絶玉手)니 마라혈수(魔羅血手)니 하는 금옥(金玉)을 두부처럼 바술 수 있는 무공은 많지만, 인간의 몸을 그처럼 매끄럽게 자를 수 있는 무공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청연의 병기는 무엇일까? 소매속에 감추었으니 중병기(重兵器)는 될 수 없고, 마땅히 검(劍)이나 도(刀) 종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같은 연도(軟刀) 종류일까, 아니면 송자영과 같은 비수 종류일까? 고심하던 강산은 이내 훌훌 의문을 떨쳐버렸다. 검이면 어떻고 칼이면 어떤가? 또 다른 어떤 신비의 기병(奇兵)이면 어떤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마자웅을, 흑사대를 물리쳤으니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말이다. 왠지 개운하진 않았지만 강산은 그렇게 첫 번째 의문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의문은 그처럼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일행의 생사(生死)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장소였나? 흑사대는 왜 하필 이 장소에 매복을 펼쳤을까? 우연히, 소 뒷걸음질 치다보니 쥐가 잡힌 것일까...? 합당한 설명은 한 가지뿐이었다. 첩자! 오직 첩자라는 그 한마디만이 모든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기회가 있었던 자는 양표와 곽가량, 그 두 사람뿐이다. 그렇다면!' 강산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첩자를 색출해낸 것이다. 강산은 누운 채 고개를 틀었다. 첩자의 뻔뻔한 낯짝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양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는 건 비단 양표만이 아니었다. 응당 그쪽에 있을 송자영과 곽가량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괴이하게 여긴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이건 또 웬일인가? 그래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보이지 않는 건 단지 그들만이 아니었다. 일행 전부가... 심지어 방금 전까지 베고 누웠던 무덤과 주변의 숲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저 하얗고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뿌연 안개 같은 기운뿐이었다. "......?" 비로소 강산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귀신에 홀린 것일까? 아니면 꿈...?' 강산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합당하지 않았다. 귀신은 허무맹랑했으며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의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전광처럼 강산의 뇌리를 스치는 한 장면이 있었다. '내가 정말 꿈을 꾸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잠을 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던 순간이었다. 마치 잠을 자듯 가지런히 누워 있는 열 구의 해골! '그렇군...!' 순간 강산은 깨달았다. 비록 까닭을 알 순 없지만 현재 일행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와 같음을! 곧, 일행의 미래가 바로 해골이요, 해골들의 과거가 바로 일행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언젠가 그 해골의 주인들도 자신들처럼 이렇게 죽어갔으리라.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잠자듯 편안하게 죽어갔으리라. 강산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지금껏 그가 실상(實像)이라 느꼈던 모든 것들이 실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었다. 양표를 바라보았던 것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도, 장막처럼 사위를 가로막던 뿌연 안개도 모두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본래의 자리에 누워 있었다. 무덤을 베고 누웠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이대로는 죽고 만다. 어떻게든 깨어나지 않으면... .' 강산은 몸부림쳤다. 자신의 육신을 속박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물을 모르고 헤엄을 칠 수 없듯이, 벽을 모르고 뛰어넘을 수 없듯이, 그의 몸부림은 다만 수중에서 날아오르려는 날벌레의 가소로운 날갯짓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독, 독인가...?' '하지만 어떻게?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것이... 불귀곡의... 정체... .' 어둠이 짙게 깔리며 점차 자신의 존재마저도 유야무야(有耶無耶) 흩어져갔다. * * * 푸드득! 불귀곡 한쪽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땡글땡글한 눈망울과 힘찬 날갯짓이 범상찮아 보이는 놈이었다. 매는 똑바로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천공(天空)에 짙게 깔린 어둠도 으스스한 한기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힘차게 날아갔다. 세 시진 후! 매가 나타난 곳은 어느 깊은 산중이었다. 꽤 먼길을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매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총기(聰氣)가 가득했다. 또한 날갯짓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능히 세상 끝까지라도 날아 갈 것만 같은 기세였다. 얼마나 날았을까? 반짝! 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와 동시에 멀리 희뿌연 새벽 안개 사이로 거대한 봉우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먹칠을 해놓은 듯 온통 새까만 봉우리였다. 봉우리를 발견한 매는 더욱 속도를 빨리 했다. 그런데 봉의 형태가 매우 기괴했다. 마치 버섯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기괴한 건 단지 봉의 형태만이 아니었다. 봉의 위치도 이상했다. 아스라한 평야지대에 우뚝 그 봉만이 존재했다. 마치 넓은 마당에 홀로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를 연상케하는, 쓸쓸하고도 야릇한 모습이었다. 매는 멀리 움터오는 새벽 햇살을 받으며 까만 점으로 화해 봉우리 속으로 사라졌다. * * * 낭하(廊下)를 따라 걷는 백포 중년인의 체구는 장대했다. 마치 관공(關公)의 현신(現身)인 듯,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 정도였다. 그의 등에는 한 자루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오 척 장검이 메어져 있었다. 꼭 주인을 닮은 검이었다. 붉은 수실을 한 자나 늘어뜨리고 검갑(劍匣)에 승천하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게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나는 것이다. 낭하는 꽤 길었다. 그 낭하의 끝에는 백색의 단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꾸밈이 전혀 없어 네모난 상자를 연상케하는 단조로운 건물이었다. 그리고 건물 중앙에 허름한 마의 차림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과 머리가 얼굴을 가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