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17편 (17/43)
당연히 송자영 역시 '안돼!' 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송자영은 곽가량의 턱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이렇게 속삭였다. "물이 필요 없게 해줄까?" "......?" 곽가량은 일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소맷춤에서 삐죽 튀어나온 비수를 보고서야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아, 하, 하! 좀, 좀... 참지 뭐." 잠시 후, 곽가량은 강산의 곁에 붙어 있었다. 강산은 순순히 수통을 건넸다. 수통에는 족히 삼분지 일 이상의 물이 들어 있었다. 곽가량은 환호했다. '반반씩 나눠도... 아니, 강산은 참을성이 좋으니까 내가 조금 더 많이 가져가도... 아니야, 강산의 참을성은 초인적이니까 일대 삼 정도면 적당할 거야.'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이다. 애석하게도 곽가량은 생각이 너무 많았다. 나눔이야 어찌됐든 그는 물부터 마시고 봐야했다. "물 마시고 싶어? 글쎄 필요 없게 해준대도." 뒷골을 파고드는 송자영의 한마디에 곽가량은 황급히 수통을 본 주인에게 건넸다. "그, 그냥 어, 얼마나 들었는지 궁금해서... ." 물이 떨어진 사람은 곽가량 뿐이 아니었다. 계곡을 따라 물을 찾던 일행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밤을 맞이했다. 큰 바위틈이나 이끼가 끼어있는 곳, 으슥한 곳 등등 물이 있을만한 곳은 빼놓지 않고 뒤졌으나 결국 물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참고 자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 * "사갈 같은 년! 독하기는 거지보다 더한 년! 둘 사이를 이어준 게 누군데, 은혜도 모르는 년! 제 것이나 챙길 일이지... 백여시!" 한적한 잠자리를 핑계로 송자영에게서 떨어진 곽가량은 마음속에 깊숙히 숨겨놓았던 말을 맘껏 쏟아냈다. 그리고 그는 원활한 설행(舌行)을 위해 말하는 중간중간 목을 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을 남겨놓길 잘했지. 정말 없었다면 어쩔 뻔했어." 곽가량은 몇 모금 들이킨 후 아쉬운 시선으로 수통을 바라보았다. 손에 전혀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겨우 바닥이나 덮고 있을까? 이래서야 한 번이나 더 마실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멍하니 수통을 바라보던 곽가량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수통을 흔들었다. 연후 수통의 무게를 재보고 다시 더 세게 흔들어댔다. 그렇게 흔들고 재보기를 몇 차례, 마침내 곽가량의 안면이 구겨졌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기랄. 이게 그것 같으면 커지는데." 오호라,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수통을 흔들어댄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쉬운 음성이 이어졌다. "커질 뿐만 아니라 없는 물도 만들어내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물은 그것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커지지도 불어나지도 않았다. 일 각 이나 지났을까, 수통 흔들기에도 지친 곽가량은 수통을 입에 물었다. 갈증이 해소됐다고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마셔버리기에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취한 중용지도(中庸之道)의 묘책이었다. 곽가량은 미소지었다. 수통 주둥이를 꽉 막은 혀에 와 닿는 그 시원한 감각이라니, 그는 스스로의 묘책에 흐뭇해하며 잠자리를 꾸며갔다. 한데 그러던 차에 문득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보다 나은 잠자리를 위해 잔가지를 주워 모으던 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게 뭐지?" 방금 뜯어낸 잔가지 사이로 무언가 하얀 물체가 보였다. 크기는 작은 수박만 했고, 강하지는 않았지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물체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곽가량은 수통을 입에 문 채 그쪽으로 걸어갔다. "으힉... 으악!"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낮고도 높은 두 개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처음 것은 비명이라 하기에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었지만 두 번째 것은 확실한 비명이었다. 비명이 곽가량의 것이며, 그가 어느 곳에 있는지 일행이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무엇이 곽가량으로 하여금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비명을 지르게 하였을까? "뭐야, 해골 아냐." 마지막으로 달려온 송자영이 줄줄이 늘어선 십여 개의 해골을 보며 영 실망이라는 듯 뇌까렸다. 하긴 곽가량의 비명을 불귀곡에 연계해 생각했던 그녀에게 해골은 적잖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삼두육비(三頭六臂)에 우두마면(牛頭魔面)은 아닐지라도 불을 뿜는 괴수(怪獸) 쯤은 나와줘야 말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데 겨우 해골 따위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번째 비명, 그 보다 비명다운 비명의 원인이 엎질러진 수통에 있다는 것을 알 길 없는 송자영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송자영은 해골로 다가갔다. 물론 곽가량을 향해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내자식이 새가슴하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해골의 존재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기대에 못 미치긴 했지만 무시해버려도 좋을 물건은 아닌 것이다. 이항이 강산을 보며 반 질문 조로 말했다. "이상한데?" 강산은 시선을 해골에서 떼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방해 받고싶지 않아서였다. 확실히 해골들의 자세는 괴이했다. 칼이나 검 따위 병기를 고스란히 차고서 지면에 반쯤 파묻혀 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 살점만 붙어 있다면 잠을 자고 있다 해도 좋을 정도로 편안해 보였던 것이다. 마치 잠을 자다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자기 집 안방도 아니고 산에서 죽은 시체가 저처럼 반듯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한 구도 아니고 십여 구의 시체가 전부 말이다. 모든 만물에는 인과(因果)가 있는 법, 자라나는 새싹이 있어야 떨어지는 낙엽도 존재하는 법이다. 하물며 이곳이 불귀곡임을 감안한다면 돌멩이 하나도 허술하게 지나칠 수 없음인데, 잠을 자다 죽은 열 구의 시신이라니... . 강산은 신중한 동작으로 해골을 살피고 돌아다녔다. 잠시 후 강산이 상체를 펴자 말할 틈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이항이 물었다. "외상(外傷)이 있나?" 강산은 이미 대부분의 해골을 살펴본 후였다. 해골은 정확히 열 개였다. 강산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상처들은 많은데, 그 흔적으로 보아 죽은 후에 생긴 것 같습니다." 다른 해골을 살펴보던 구청연이 물었다. "동물들에 의한 흔적으로 보이오?" "상처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동물이라면 아주 작은 동물일 것입니다. 하나 아무래도 그보다는 비바람에 쓸렸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비바람이라... ." 강산의 말을 되뇌던 양표가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이제 보니 누구 원숭이나 사슴 본 사람 있소? 다람쥐 한 마리라도?" 양표의 한마디에 장내는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렇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산과 원숭이, 산과 다람쥐, 산과 새소리... .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마치 바람 물 공기처럼 그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산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원숭이나 다람쥐, 심지어는 그 흔한 산새의 모습조차 그들이 불귀곡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불귀곡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숱한 동물들은 다 어디가고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독을 뿜는 악마란 다만 원주민들이 엮어낸 전설이 아니었던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했으나 서늘했다. 뿐만 아니라 오싹하기까지 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문득 이항이 한마디를 던졌다. "달리 눈에 띠는 것이라도 있나?" 곰방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잔잔한 음성이었다.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건 이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으니까요." "혹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건 아닐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거든요. 열 명의 위치나 간격, 누워 있는 자세 등등이 더 이상 자연스러울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열 명이 야영(野營)을 했다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장내를 둘러보던 이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구청연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독(毒)에 당한 것 같지는 않소?" 강산은 설명을 위해 가장 가까이 있는 해골의 갈비뼈 하나를 뜯었다. 갈비는 뚝! 소리 한번 없이 손쉽게 뜯어졌다. 마치 뼈가 아닌 썩은 새끼줄을 뜯어내는 느낌이었다. '이건?' 일순 강산의 눈빛이 달라졌다. '평범한 시체라면 이렇지 않을텐데?' 응당 공기에 노출된 뼈라면 겉에서부터 부서진다. 그건 쇠의 부식(腐蝕)이 밖에서부터 진행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비록 그 차이가 쇠와 같이 현격하진 않지만 그래도 속은 겉보다 단단한 법이다. 한데 이 뼈는 그렇지 못했다. 비슷하지만 오히려 겉이 더 단단한 느낌이다. '무엇 때문에? 독의 흔적은 없는데... .' 강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의문은 태산 같은데 풀리는 건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하나둘 늘어만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늘었다고 해서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뼈의 괴이한 점은 이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며, 그 점은 또한 불귀곡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산의 표정은 이내 정상을 회복했다. 일행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독의 흔적도, 괴로움에 뒤척였던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독살(毒殺)의 가능성은 배제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항이 곰방대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그때와 같군." 그때라는 건 불귀곡 입구에서 동물들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같다는 건 그 동물들의 시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잠자코 강산의 설명에 귀 기울이던 송자영이 갑자기 말했다. "혹시 이들은 잔뜩 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왜 그런 것 있잖아. 백일취(百日醉)니 천일취(千日醉)니 하는 것들 말이야. 취하면 업어가도 모른다잖아." 송자영의 이야기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곧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또한 아니었다. 중인들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심사숙고(深思熟考)해서 내놓은 의견이 여지없이 묵살 당하자 송자영은 기분이 상했다. 짧은 심사숙고 후에 송자영은 다시 새로운 의견을 내놨다. "흥, 흥! 좋아, 그럼 이건 어때? 어떤 자가 이들의 혈도(穴道)를 짚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후 그대로 방치해뒀다는 것은?" 송자영의 두 번째 이야기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 역시 첫 번째 의견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두부가 단단한가 만두가 단단한가 하는 문제일 뿐, 절대적(絶對的) 관점에서의 가능성이란 역시 무(無)에 가까운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육신(肉身)을 하나에서 열까지 완벽하게 속박할 수 있는 혈도란 없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면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고통이 따르기에 하지 않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고통이 두렵다지만 가만히 앉아서 다가오는 죽음을 즐겨 맞을 바보가 있겠는가? 혈도를 짚었다는 그녀의 의견이 공의(公議)를 얻자면 최소한 해골들에게서 죽음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여야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먼 산은 암흑에 잠겨 있었다. 반토막 달이 보였고 몇 개인가의 별도 보였다. '별이 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송자영이 물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흥! 곽가량, 넌 어떻게 생각해?" 곽가량은 억울했다. 왜 자신인가? 다들 별을 보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란 말인가? 하다못해 소귀도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말해야하나 고심하는 순간 재차 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송곳이 바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곽가량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충, 충분히 그럴 수... ." 바로 그때였다! 송자영이 성큼성큼 다가서고 곽가량이 찔끔찔끔 물러설 때. "웬 놈이냐?" 돌연 서문상이 일갈하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중인들은 일순 의아해 서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서문상의 뒤를 따랐다. 뒤따라 숲으로 들어선 중인들의 눈에 보이는 건 멍청히 서 있는 서문상뿐이었다. 서문상이 낭패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분명히 보았는데... ." 송자영이 눈썹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뭘 봤는데?" "번뜩이는 두 개의 빛, 분명히 사람의 눈이었소." 사람의 눈이란 말에 자극 받은 일행은 각기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누구도 별다른 흔적을 찾아내진 못했다. 왠지 뒷골이 서늘해 돌아선 서문상은 자신을 노려보는 송자영을 볼 수 있었다. 서문상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히 웃음지었다. "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분명히 봤는데." 하나 송자영이 잠잠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꼬리가 더욱 올라가는 것 같았다. 서문상은 못내 불안해졌다. '왜, 또...?'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게 그렇게 죽을 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송자영의 경우에는 조금 특이하다 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서문상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곽가량을 발견한 후의 일이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곽형을 닥달할 기회를 앗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곽형을 구해내기 위해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서문상은 세로로 선 송자영의 눈동자를 보며 기쁨과 동시에 공포를 느껴야 했다. 기쁨은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공포는...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억울했지만 소리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새삼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뼈저리게 느낄 따름이었다. 송자영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품을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지혈제가 들려 있었다. "어머, 약 바를 시간이네." 제 10 장 절벽 아래에서. 1 "이것은!" 또 다시 입(入) 자 표식을 발견한 강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행이 경계 순서를 정한 건 반 시진 전이었다. 초번은 강산과 송자영, 중번은 곽가량과 이항, 그리고 마지막은 구청연과 양표였다. 그렇게 송자영과 함께 초번을 서던 강산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그녀의 잔소리에 질려버렸다. 자기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갈 수 없네, 낭군(郞君)은 과묵하면서도 호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결혼을 한다면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오붓하게 살고 싶네, 자식은 많을수록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호호, 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밥을 잘 못하는데 어쩌지? 밥하는 법 좀 가르쳐줄래? 사주(四柱) 는 어떻게 되느냐? ... 별별 쓸데없는 이야기에 심신이 다 노곤해질 지경이었다. 답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다. 급기야 강산은 '느낌이 좋지 않으니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 라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곁을 빠져 나왔다. 다만 느낌이 좋지 않다는 건 핑계만이 아니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무언가 거대한 덫에 갇혀 버린 것도 같았고, 또한 마치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숨어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주변을 살피는 강산의 눈은 보다 예리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발견된 것이 과거 문정인이 남겨 놓았다고 생각했던 예의 그 표식이었다. '문정인은 사라졌는데... 설마 지금껏 추적을 계속해왔다는 말인가? 아니, 아니야. 정체가 탄로난 이상 그런 짓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지금도 일행에...? 그렇군!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 강산은 서둘러 일행을 깨웠다. "추적대가 가까이 왔소."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 깨어났다. 다른 일행에 비해 서문상과 소귀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얼마나 떨어졌나?" 이항의 물음에 강산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항의 눈이 커졌다. '발견하지는 못했는데 근처에 온 것 같다.' 라는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강산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속히 떠나야겠군." 마지막으로 깨어난 서문상이 코를 씰룩이며 물었다. "무슨 냄새지?" 양표가 킁킁! 숨을 들이킨 후 말했다. "무슨 냄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무언가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 "약 냄새겠지. 몸조리나 잘 하라고." "그런가?" 서문상을 다독거린 양표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소귀가 눈에 띠었다. "자네는 또 왜 그래?" 소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잠을 설친 모양입니다."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 정도가 저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걱정마십시오." 구청연이 걱정된 눈빛으로 소귀를 보며 말했다. "조심하라고, 자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눈뜬 장님이 되니까." 소귀가 손을 내리고 실실 웃음지었다. "어르신도 참,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황금 사백 냥이 기다리는데 그걸 놔두고 제가 어딜 간단 말씀입니까? 돌아가서 멋지게 한판 벌여봐야지요." 강산은 이쯤에서 대화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만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저 봉우리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강산은 오후에 보아두었던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 봉우리는 양면(兩面)이 훤히 트이고 암반이 많아 수비에 적절한 곳이었다. 이항이 '역시!'라는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았다. "흠, 양쪽으로는 접근할 수 없으니 오직 정면만 수비하면 되겠군. 자, 떠나자고." "될수록 흔적이 남지 않게 조심해서 이동해주십시오." 일행은 조용히 숲을 빠져나갔다. 물론 강산은 가장 후미에 섰다. 그는 가는 도중 곽가량을 조용히 불렀다. "첩자가 한 명 더 있소." "......?" "표식을 발견했소." 비로소 곽가량은 강산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군. 그래서 추적대가... 그토록 여유가 있었던 거로군. 누군 지는 알아냈소?" 강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곽가량이 문득 눈빛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강산을 불렀다. "강형!" 그 섬뜩한 표정 마냥 그의 음성 역시 묵직했다. 평상시 곽가량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오, 표정이었다. 강산은 '누군가 마음에 두고 있던 자라도?'하는 생각에 바짝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물었다. "누군가...?" 강산이 미처 질문을 마치기 전, 천천히 곽가량의 입술이 열렸다. "물 좀 먹읍시다." * * * 바람은 시원했고 밤은 조용히 흘렀다. 하나둘 밤을 밝혔던 별이 사라져 환히 동녘 하늘이 밝아올 때 소귀는 깨어났다. "괜찮나?" 양표의 물음에 소귀는 마치 바위라도 들어올리는 양 장난스레 팔을 들어 보였다. "가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소귀의 안색은 좋아 보였다. 어젯밤의 그 우중충했던 표정은 얼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행장을 꾸린 일행이 우물우물 육포를 씹고 있을 때 구청연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소귀가 구청연에게 육포를 건네며 물었다. "놈들을 발견했습니까?" 구청연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무런 흔적도 없네." 양표와 소귀가 강산을 바라보았다. 비록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니냐?' 강산이 그들의 뜻을 짐작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하나 강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첩자를 빼놓고선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다. 괜한 두레질로 웅덩이 전체를 흐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늘을 손질하고, 줄을 단단히 옭아매고, 미끼를 뿌리고... 그래서 입질이 올 때 단번에 채야했다. 다행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곤란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너희들 감히 산!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송자영이 나섰다. 그녀가 말한 '산!'이 단순히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 그리고 뒤이어 이항이 나섰다. "상대는 다름아닌 칠대공이란 말이야. 그들에게 후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가? 강호에서 칠대공이 그냥 맥없이 물러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들이 우리를 쫒아오리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단지 문제는 언제 우리들 앞에 나타나느냐 하는 것 뿐이란 말이야." * * * '저 계집이 왜 늙은이한테 붙어서 알랑방귀를 뀌지?' 곽가량은 송자영을 보고 있었다. 보려고 해서 본 게 아니라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송자영은 이항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퍽이나 친근하게 굴 뿐 아니라 그녀답지 않은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어깨 주물러 줘?" "곰방대 줘봐, 내가 담배 재 줄께." 이 순간 친구의 적은 나의 적,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는 고금불변(古今不變)의 진리를 떠올리지 못하는 곽가량에게 송자영의 행위는 다만 의문일 따름이었다. '입맛이 변했나? 풋풋한 호박보다는 잘 익은 오이가 났다는 걸 알아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