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16편 (16/43)

2026-10-08 18:49:05 조회 3
일행은 삼십여 명의 흑사대에 에워싸여 있었으나 반원진의 형태가 워낙 튼튼해서 별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지는 않았다. 흑사대 또한 위험을 무릅쓴 무리한 공격은 가하지 않고 있어서 전투의 양상은 다소 소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양자간에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서 피차 그를 먼저 침범하려 하지 않는 형국이었다. 달리 문제는 없을까, 찬찬히 일행을 살피던 강산의 미간에 일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동북쪽 소철지대가 거의 끝나는 곳, 그 일행의 뒤로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키 작은 잡목 숲을 발견한 순간, '후퇴!' 를 이야기한 구청연의 의도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불귀곡을 통과하자는 것인가?' 하나 강산의 미간에 검은 그림자가 머문 시각은 그야 말로 잠시 뿐, 강산은 이내 평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선과 차선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강산이 불귀곡 행에 동의하였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어떻게 일행에 합류할 것인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네 명의 포위망을 뚫어야하고, 다시 일행을 에워싸고 있는 삼십여 명의 포위망을 뚫어야한다. 게다가 문제는 단지 그로써 그치지 않는다. 과연 자신이 그와 같이 움직이려 할 때, 고량이나 낙광영이 그를 뒷짐지고 구경만 할 것인가? "......." 잠시 생각하던 강산은 이내 피식 싱겁게 웃고 말았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마음을 굳힌 강산은 구청연에게 전음을 날렸다. [지금부터 열을 헤아린 후 행동하겠소.] 구청연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강산은 속으로 숫자를 헤아려나갔다. 하나, 둘... . 한데 그 순간, 무슨 낌새라도 챈 것일까? 그때까지 잠자코 장내를 굽어보던 낙광영이 문득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진중(鎭重)한 걸음걸이로 강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다. 셋, 넷... . '눈치를 챘단 말인가?' 강산의 시야에 낙광영이 잡히고, 직후 가슴에 머물러 중단(中段)을 보호하던 강산의 왼손이 스르르 자연스럽게 허리께로 미끄러졌다. 낙광영이 가세한다면 상황은 또 틀려진다. 낙광영은 비록 삼절방의 대리분타의 일개 분타주에 불과했지만 순수한 무공실력으로만 보자면 삼절방 전체에서 능히 십대고수(十大高手)에 뽑힐만한 무서운 실력자였다. 점창오로 따위와는 수준이 틀린 절세고수인 것이다. '용수(龍鬚)를 써야할 때가 온 것인가?' 그러나 강산은 이내 손을 중단으로 돌렸다. '잘못하면 정체가 탄로날 수도 있는 일, 아직까지는...' 다섯, 여섯... . 일 장 일 장 거리를 좁히던 낙광영은 마침내 강산과 삼 장여의 거리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묵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비켜라!" 나직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네 명의 흑사대원을 비켜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네 명의 흑사대원은 강산의 앞을 비켜섰다. 하나 그들은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강산의 후방, 즉 일행에게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강산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이 늙은 염소가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일곱, 여덟... . 강산의 정면에 자리한 낙광영은 힐끗 바닥에 쓰러진 흑사대원의 시체를 일견한 후 강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칼솜씨가 제법이로구나. 아니, 제법 이상이야.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닌 듯 싶은데... 어떠냐, 당당히 명호를 밝히고 감히 나 양수초겸 낙광영과 일전(一戰)을 결(決)해 볼 용기가 있느냐?" 낙광영의 표정은 적잖이 신중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강산은 웃음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했다. 만약 강산이 무림초출의 풋내기였다면 낙광영의 말에 호승심(好勝心)이 불타 그와 한바탕 벌이기 위해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하나 아쉽게도 강산은 그런 풋내기가 아니었다. 일전을 결한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렇게 정당히 결투를 하고 싶다면 애초부터 이런 암습이나 합공은 하지 않았어야 옳지 않겠는가? 낙광영의 의도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강산이 일행에 합류하지 못하게 제지하고, 그의 내력을 알아낸 다음, 그를 쓰러뜨리려는 것이었다. 강산의 마음이야 제 알바 아니라는 듯 낙광영의 표정은 여전히 신중했다. 그런 낙광영을 향해 강산은 대답 대신 반보를 전진했다. 아홉... . 순간 낙광영의 눈썹이 꿈틀 역팔자를 그렸고, 동시에 그의 대초겸이 부웅! 반 바퀴를 회전해 똑바로 강산의 눈을 가리켰다. "놈, 헛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짧은 순간, 시린 광채를 번뜩이는 길이 일곱 자 반의 대초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열! 마침내 마음속으로 열을 헤아린 강산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때를 같이하여 예의 묵직한 낙광영의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고, 그에 화답하듯 대초겸이 울부짖으며 하얀 공간을 갈라갔다. 우우웅-! 일순, 장내는 거대한 폭풍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순식간에 불어난 대초겸의 그림자가 주변 삼 장여의 공간을 점해버린 것이다. 제 일초 팔황개동(八荒開動)에 이은 운승일락(雲昇日落)과 차천개지(遮天開地)... 바로 낙광영의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마겸구식(魔鎌九式) 중 전반부 삼초식(三招式)이 순식간에 펼쳐진 것이다. 우직, 우직! 세찬 경풍에 수십 그루 소철이 뿌리째 뽑혀 오르더니 이니 가루로 변해 흩뿌려졌다. 가히 운남제일인(雲南第一人)이라는 낙광영의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 놀라운 위력이었다. 눈발처럼 사방으로 휘날리는 소철을 보며 낙광영은 미소지었다. '과했군. 일초(一招) 반식(半式)이면 해결될 것을.' 강산은 보이지 않았다. 불쌍하게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모양이었다. 하나 다음 순간, 점점이 떨어지는 소철 부스러기 사이로 흐릿한 물체를 발견한 낙광영은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억...?" 그 흐릿한 물체는 강산이었다. 아니, 강산의 후방을 차단했던 수하들이었다. 아니, 파란 공간을 붉게 물들여가는 그것은 수하들의 죽음이었다. "크아악!" "캐액!" 어이없는, 정말 수하들의 죽음은 어이없다는 말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낫 앞에 선 수수깡처럼 헛되이 무너지는 죽음을 달리 또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십(十) 자로 번뜩이는 강산의 칼 앞에 병기 째 부서지는 그와 같은 죽음을 달리 또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도검불침의 흑루의로 전신을 감싸고 개개인이 막강한 무공을 자랑한다는 흑사대가 강산의 일도(一刀)에 맥없이 양단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충격적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낙광영은 할 말을 잃은 양 멍하니 강산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그는 강산을 뒤쫓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큭!" 마지막 네 번째 수하가 쓰러지고 그를 타 넘어 일행에 합류하는 강산이 보였다. 모종의 약속이 있었는지 그쪽 패거리 역시 강산이 움직이는 순간을 잡아 기습을 감행했고, 그 어수선한 틈을 이용 강산은 너무도 쉽게 일행에 합류했던 것이다. 전원을 규합한 놈들은 눈깜짝할 새 북편 잡목 숲을 통해 장내를 빠져나갔다. 낙광영은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낙광영이 애초에 강산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장내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낙광영은 이를 갈았다. "이, 이놈...!" 언제 다가왔는지 사마자웅이 중얼거렸다. "강산이라... . 흑루의조차 무용지물(無用之物)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인물을 들어본 적도 없다니... 새로운 고수의 탄생이라는 건가?" 사마자웅은 조심스럽게 강산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낙광영에게는 그 애써 자신을 옹호해주는 듯한 사마자웅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낙광영이 단호히 말했다. "추적합시다." 순간, 낙광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더욱 단호한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안됩니다." 일순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낙광영은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로 그 단호한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안... 돼?" 본래 일행 중에서 낙광영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둘 뿐이다. 고량과 사마자웅, 그 둘뿐인 것이다. 한데 이 음성은 두 사람 중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하물며 그 단호함은 두 사람의 위치조차도 넘어설 정도이다. 그 음성의 주인이 마영소임을 깨달은 낙광영은 불타는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안됩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마영소의 입이 열렸다. 처음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음성이었다. 낙광영의 뺨이 씰룩거렸다. "건방진... ." 때맞춰 고량이 등장한 것은 마영소에게는 실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이냐?" 마영소는 고량을 향해 깊숙이 읍을 했다. "소인이 주제넘게 나선 것은 그들이 들어간 곳이 바로 불귀곡이기 때문입니다." 답변은 고량을 향한 것이었지만 응대는 낙광영에게서 나왔다. "말 같잖은 소리, 한낱 짐승의 주검 따위를 두려워한다는 말이냐?" 고량은 침묵했고, 마영소는 그런 고량을 힐끗 일견한 후 다시 낙광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한낱 자벌레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이유는 있기 마련입니다. 불귀곡이란 명칭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초겸을 잡은 낙광영의 손에 툭툭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돋았다. "네가 감히 훈계를 하려들다니." 음성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상시에 비해서도 낮아 보였다. 낙광영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하나 그러한 낙광영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마영소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믿는 구석이란 당연히 고량과 사마자웅이 될 터이다. 낙광영이 아무리 어수룩하다지만 그마저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발작을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개 같은... .' 사마자웅이 가벼이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마영소, 네가 흑지에서 오래 생활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숨기는 게 있느냐?" 마영소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게... 저... ." 그 표정의 변화가 어찌나 확연하던지, 이제는 머리가 단순한 낙광영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이유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영소는 다시 고량을 힐끔거렸다. 사마자웅은 즉각 마영소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해보아라. 책임은 나와 넷째형이 진다." 기다리던 말이 떨어지자 마영소는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다. "소인이 소방주(少幇主)를 모시고 흑지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습니다. 이미 어르신들께서도 알고 계시듯, 실험 결과는 물론 흑지의 모든 생활상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연락매를 통해 방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중 잘못된 것이 몇 건(件) 있습니다." "일부러 숨겼단 말이냐?" "방(幇)에 약간의 위협이라도 된다고 판단되었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 점은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는 지선전(地宣殿) 소속 무사 오십여 명의 사망 원인에 관한 것입니다." 사마자웅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런 내용이 있었지. 사오 년 전의 일이라 기억되는데... 조작 미숙으로 인한 화기 폭발 사고였던가?" "그렇습니다. 폭발 사고로 보고되었습니다. 당시 흑지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소방주께서는 몇 가지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셨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지도(地圖)의 제작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각각 십인(十人)으로 구성된 여덟 조(組)가 팔방으로 흩어졌고, 보름 후 그들은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만 한 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 다." 마영소는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즉시 수색대가 조직되었고, 수색대가 그들의 종적을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사실 역시 당시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수색대 역시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겨우 불귀곡이라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제 삼 차 수색대가 조직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직접 보고가 아닌 연락매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제 낙광영의 안면에 불쾌한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건 사마자웅 역시 마찬가지, 다만 표정의 변화가 없는 이는 고량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수색대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지선전의 부전주(副殿主)이신 신전(神箭) 위무양(葦無樣) 님을 위시로 삼대호위(三大護衛), 팔당(八堂)의 당주 중 셋, 그밖에 일당백을 자랑하는 일급무사 이십여 명... 그렇게 가히 지선전의 삼분지 일을 자랑하는 전력이 수색대로 조직된 것입니다." 마영소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쳤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하였으나 하지 않았고, 중인들은 듣지 않았으나 묻지 않았다. 문득 사마자웅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위부전주, 삼대호위... 확실히 그들 역시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었지." 그의 어투에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낙광영은 사마자웅의 중얼거림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불귀곡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푸른 나무의 숲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저 푸른 숲의 바다에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무엇이 도사리고 있기에 일류고수 오십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인간? 마물(魔物)? 아니면...? 낙광영은 저도 몰래 이마를 훔쳤다. 끓어오르던 피는 이미 식은지 오래였다. 등골 깊숙한 곳에서 뭉클뭉클 솟아나는 한기는 낙광영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한기는 다시 잦아들었고, 그 빈만큼의 공간을 전혀 다른 기운이 파고들었다. 훈훈한 기운, 가슴 한편에서 일어나 단전(丹田)을 덮이고 스멀스멀 사지백해(四肢百骸)로 흘러드는 그 전혀 다른 기운의 정체는 바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무림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것이 용기인지 만용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냉정을 회복한 낙광영은 시선을 돌려 고량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용기가 될 것인가, 만용이 될 것인가 하는 건 입곡(入谷)이냐 회곡(回谷)이냐가 결정된 이후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흐읍-!' 낙광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굳게 잠긴 고량의 입을 주시하며 낙광영은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들이켰을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들었다. 고량이 짤막하나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추적한다!" 2 흑사대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일행은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세(地勢)를 살필만한 여유도, 불귀곡에 대한 까닭 모를 두려움도 마음속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무작정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비록 선두의 곽가량이 갈팡질팡 아무런 기준도 없이 곡(谷)과 봉(峯)을 넘나드는 것 같았지만 일행은 정확히 북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또한 가끔씩 예리한 눈으로 후방을 쓸어보는 구청연의 행동 역시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도주를 시작한지 한 시진여, 일행은 차츰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쉬어 갑시다." 구청연이 후미에서 소리쳤다. 서문상이 기다렸다는 듯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아직은 보이지 않소. 옆구리는 좀 어떻소?" 구청연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서자 서문상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조금 스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 그의 상처가 그의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건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우선은 봅시다." 양표는 괜히 머뭇거리는 서문상을 거의 붙잡다시피 하여 상의를 벗겼다. 상처가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가슴 아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잘도 이런 상처를 가지고... ." 서문상의 부상은 중인들의 생각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상처는 좌측 겨드랑이를 타고 허리까지 거의 한 뼘 가량 이어져 있었다. 만약 상대의 공력이 조금만 깊었다면 심장을 갈랐을 것이고, 또한 그 위치가 조금만 낮았다면 내장을 꺼냈을 것이다. 상처 주위는 지혈제(止血劑)와 피딱지, 그리고 다시 딱지를 뚫고 흐르는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피에 섞여 기묘한 보랏빛을 연출하는 지혈제는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섬뜩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행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서문상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양표가 지혈제를 꺼내며 소리쳤다. "서형, 좀 가만히 있으시오." 머쓱해진 서문상이 잠자코 있자 양표는 이내 상처에 지혈제를 바르기 시작했다. 한데 순간, 누군가 양표를 밀쳤다. "미련하긴... 그렇게 바르면 바르나마나잖아." 송자영이었다. 상대가 송자영임을 확인한 양표는 찍! 한소리도 하지 못한 채 밀려나고 말았다. 송자영은 방금 전 양표의 자리를 차고앉아 자신의 지혈제를 꺼냈다. 갑자기 서문상의 얼굴이 노랗게 변해갔다. "소... 송소저... 무엇 때문에...?" 부상자에게 약을 가지고 다가선 사람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처럼 황당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인들의 마음은 서문상과 다르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만약 그녀가 지혈제가 아닌 칼을 꺼내 접근했더라면 중인들은 이해했을 것이다. '또 서문상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게지.'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확실히 그녀가 빼든 건 칼이 아닌 지혈제였다. 눈을 씻고 봐도 지혈제인 것이다. 이런 질 나쁜 농담이 있을까? 일행은 재차 눈을 비볐다. 다만 일행에 송자영의 지기(知己)는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을 '지기'라 한다면 곽가량, 적어도 그 한 사람만은 송자영의 지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여시! 이젠 점수 따기 위해 별 지랄을 다하는 구나.' 송자영의 곁엔 강산이 있었다. "으흐...!" "가만히 좀 못 있어? 딱지를 다 떼야 약을 바르지." "안 발라도 좋으니까, 살살, 살살... 으헉!" "안 발라도 좋다고? 멍청하긴, 염객 염객하니까 자기가 무슨 진짜 염왕(閻王)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아, 아악!" "염병, 콱 멱을 따버린다." "으아악-!" 꺼이꺼이! 송자영의 치료가 끝난 뒤 서문상은 하염없이 울었다. 당연히 아파서 울었다. 그가 울음을 그친 것은 재차 양표의 치료를 받고 난 후의 일이었다. 눈물에 교훈은 실에 바늘과도 같은 것, 서문상 역시 오늘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부상은 죽음보다 아프다! 똑! 마지막 한 방울이 턱에서 떨어졌다. '으흑! 죽으면 죽었지 부상은 안 당한다.' * * *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선두는 소귀와 곽가량이 맡았고, 후미는 구청연과 강산이 맡았다. 서문상은 어쩔 땐 선두에 붙었고 어쩔 땐 후미에 붙었다. 물론 그의 반대편엔 항상 송자영이 있었다. 일행은 주로 능선을 타고 움직였다. 굳이 '능선을 따라 움직여야한다.' 라는 산행(山行)의 기본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편이 감시와 길 찾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행은 곧 능선을 포기해야만 했다. '젠장!' 곽가량은 쓰린 속을 다스리며 힐끗 하늘을 한 번 보았다. 정말이지 그에게 송자영과 나란히 걷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더더군다나 사정 하고싶은 마음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야했고 그녀에게 사정해야했다. 빌어먹을 놈의 물 때문이었다! 유일한 공급처에서 물을 긷지 못했으니 뻗댈 재주가 없는 것이다. 계곡을 따라 물을 찾아 걷던 중 곽가량은 송자영의 옆에 바짝 붙었다. '뭐야, 이거?' 하는 송자영의 눈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짝 붙었다. "에헤헤, 영매. 물 남았어?" 송자영이 아래위를 흘겨보며 반문했다. "조금, 왜?" "에헤헤, 그게... 저기... 조금만 나눠... 줄래?" 송자영의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시끄러워! 나 마실 것도 없는데. 그러기에 누가 흥청망청 다 마셔버리래? 밀림에서 물 귀한 줄 알아야지." 말을 마친 송자영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지만 그 정도에 물러설 곽가량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반응이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터, 아니 오히려 예상에 비해 약한 감이 있다. 바삐 송자영을 따라 붙은 곽가량은 더욱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내리 감고, 주둥이를 반쯤 내밀고, 코를 훌쩍였다. 그리하여 '거지라도 쪽박을 뒤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자신이 서게되자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흑, 한 모금만이라도... ." 그와 같은 상황하에서 딱 잘라 '안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불리어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