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15편 (15/43)

2026-10-08 18:49:05 조회 1
일행이 그 달라진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건 길가에 널브러진 몇 개의 뼛조각을 발견하면서부터 였다. 뼈는 아주 오래된 듯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스러져있었다. "뭐지? 근처에 늑대라도 사나?" 곽가량이 툭 한마디 던지자 소귀가 말을 받았다. "늑대는 뼈까지 씹어 먹습니다. 머리카락 빼고는 다 먹어치우지요." "그럼, 호랑이인가?" 다시 소귀가 말했다. "호랑이는 먹이를 잡으면 일단 제 소굴로 가져갑니다. 놈은 주로 바위틈에 집을 짓지요." 곽가량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그럼 뭐야?" "저도 모릅니다. 단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시작? 뭐가 시작이라는 거야?" 되묻는 곽가량을 위시로 일행의 눈길이 소귀에게 집중되었다. 소귀는 대답 대신 전방을 손짓했다. "십 장만 걸어가 보십시오. 무엇이 시작인지 알 수 있을 테니." 찰나, 소귀의 이야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강산의 옆에 바짝 붙어 걷던 송자영이 성큼 앞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그 한마디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십 장이란 말이지? 십일 장, 아니 십 장 한 치만 됐단봐라."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리더니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소귀는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장님이 아닌 이상 시작의 의미를 모를 리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송자영의 창창한 오기 또한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오기도 통하지 않는다. 오기를 쓰자면 먼저 스스로의 둔함을 시인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상황은 소귀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장여를 걸어가던 송자영이 주춤 멈춰서는 것이었다. 시작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몸짓이었다. 그녀는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사방에 뼛조각이 널려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뭐야?" 툭 내뱉는 송자영의 한마디에 소귀는 냉큼 대답했다.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불귀곡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 눈앞의 얕은 언덕을 넘어서면 그곳이 바로 불귀곡입니다." 뼛조각은 갈수록 많아져 발에 채일 정도였고, 개중엔 대충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 형태로 보아 사슴 종류로 보였다. 하나 사슴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 치나 되는 송곳니를 가진 동물의 뼈가 있었고, 큰 부리의 독수리 뼈도 있었다. 거기에 다람쥐, 오소리, 산돼지, 뱀... 없는 동물이 없었다. 마치 뭇 짐승들의 공동묘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소귀가 큼지막한 송곳니를 발로 차며 말했다. "아무튼 육식동물의 행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드물지만 호랑이, 표범, 독수리 따위도 볼 수 있으니까요." 일행은 저마다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언덕이 가까워짐에 따라 차츰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시체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대여섯 마리의 독수리가 보였다. 독수리들은 한 마리 산돼지 시체에 들러붙어 몇 점 남지 않은 살점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행이 다가가자 독수리들은 물러섰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다. 겨우 몇 발자국 물러서 충혈된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일전(一戰)이라도 불사할 듯 했다. 일행은 그대로 독수리들을 지나쳤다. 이윽고 언덕을 넘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키 작은 소철(蘇鐵)이 넓게 군락을 이룬 곳으로, 예외없이 많은 동물들의 시체가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불귀곡입니다. 물은 중앙에 있습니다." 일행은 동물 시체를 힐끗거리며 물이 있다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던 중 문득 강산이 한 마리 사슴시체로 다가갔다. 사슴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내장과 몸통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숱한 시체 중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강산은 쪼그려 앉아 시체를 살폈다.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강산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같이 쪼그려 앉아 시체를 살피던 이항이 물었다. "뭐가 보이나?" 강산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 하지만 소귀의 말대로 육식동물의 습격을 받아 죽은 것 같지는 않군요. 육식동물이라면 흔히 목과 머리를 공격하는데, 이놈에게는 전혀 그런 상처가 없거든요." 이항이 갈라진 배를 눈짓하며 물었다. "내장은 역시 독수리들의 짓이겠지?" "자잘하게 찢긴 흔적으로 보아 그런 것 같습니다." "독일까? 장독( 毒) 따위... ." 이번 이항의 질문은 송자영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소귀가 말하기를 불귀곡 안에 독을 뿜는 악마가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렇지는 않은 듯 싶습니다. 독이라면 뼈나 사체(死體)에 응당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독을 뿜는 악마의 존재를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흔적이 남지 않은 독 또한 전혀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요." 강산은 대답하는 와중에 고개를 들어 저편 불귀곡을 응시했다. 십여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온갖 사이(邪異)한 기운을 뿜어내는 숲이 거기 있었다. 과연 독을 뿜는 악마가 살고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침한 곳이었다. 은연중 송자영을 보니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 표정으로 보아 소귀의 행위가 그저 막연한 반발에서 비롯되진 않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깨달았을 성 싶었다. 강산은 송자영을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불귀곡을 질러가기엔 께름칙한 마음이 드는데, 송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쩝, 에헤헤!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자자, 어서 물을 길러 가자고. 뭐해? 빨리 앞장서지 않고." 공연한 큰소리에 소귀는 화들짝 놀랐다. 하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잽싸게 발을 놀렸다. "예예, 바로 이 앞입니다." 서문상과 양표가 소귀의 뒤를 따르고, 야릇한 눈빛으로 송자영과 강산을 번갈아 보던 이항이 객쩍은 소리를 지껄이며 그 뒤를 따른다. "어허-, 봄이로구나. 봄!" "영감탱이, 뭐가 봄이라는 거야?" 다시 그 뒤를 송자영이 따르고, 강산은 피식 웃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순간, 무언지 까닭 모를 이상함이 강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서늘하면서도 불길한 느낌. 무어랄까, 작은 것에 가려 정작 중요한 부분을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불귀곡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데?' 강산은 엉거주춤 일어서다 말고 사슴시체로 눈을 돌렸다. 작은 뿔과, 퀭한 눈, 찢겨진 가죽, 파헤쳐진 무덤 마냥 쩍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복부, 그 사이로 보이는 시뻘건 살점과 뜯겨진 갈빗대.... 머리부터 꼬리까지 샅샅이 살폈건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슴시체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한데...' 눈살을 찌푸리던 강산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시체를 살폈다. 하나 여전히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산은 방법을 바꿔 이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슴시체, 육식동물, 독수리, 독, 장독, 뼈, 흔적... .' 골치만 아팠다. 가슴이 아린 것으로 보아 무언가 원인에 접근한 것은 틀림없는데, 생각날 듯 생각날 듯 종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강산은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벌써 오장 저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산이 원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막 걸음을 떼던 때, 빠직! 무엇인가 그의 발밑에서 으스러졌다. 발을 치우자 형편없이 부서진 두개골이 나왔다. 뾰쪽한 부리, 독수리의 두개골이었다. 순간 강산의 마음 깊은 곳에 거센 충격이 일었다. '독수리!' 우연찮게도 지금껏 마음을 괴롭히던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 원인은 독수리였다. 언덕을 넘기 전 일행은 몇 마리의 독수리를 보았다. 놈들은 고기 몇 점에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엔? 이처럼 풍성한 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삼십여장 저편 소철지대가 끝나는 곳 나무 위에 몇 마리가 보였다. 일행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그저 몇 걸음 물러서는 것에 불과했던 독수리들이 삼십여장 멀리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일행 때문은 아니었다. 일행이 오기 전부터 이 시체들 주위로는 독수리가 전혀 접근하지 않았던게 분명했다. 당연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보다 무서운 것은? 늑대? 호랑이? 거망? 순간, 강산은 한가지 뇌리를 스치는 단어에 흠칫 몸을 떨었다. 오싹한 전율이 등줄기를 훑는다. 순간 강산은 다급히 소리쳤다. "모두 조심하시오. 주위에 무언가가 있소." 강산의 외침이 쩌렁!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채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어디선가 음험한 한소리가 터져 나왔다. "쳐라!" 이어 미처 일행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기저기서 검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2 "억?" "뭐야?" 검은 그림자들의 움직임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튀어나왔다 싶은 순간 벌써 일행의 면전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스스! 마치 유령인 양 부드럽고도 쾌속한 몸놀림. 만약 불귀곡에 대한 경각심과 한발 앞선 강산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떼몰살을 당했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움직임은 위력적이었다. "추적대!" "삼절방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그림자들의 정체가 밝혀졌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쉬잇, 가각! 십수 개의 한광(寒光)이 번뜩였다. "흐윽!" 서문상이 옆구리를 쥐고 물러섰다. 강산은 그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독을 뿜는 악마라도 나타날 줄 알았는데 왠 추적대가...? 하지만 답을 생각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급박했다. 앞뒤로 두 개의 흑영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그중 정면의 흑영은 이미 석 자 이내로 접근해 있었다. 의문을 털어버린 강산은 먼저 정면에서 짓쳐드는 흑영을 향해 천지분광(天地分光)의 일초를 쳐냈다. 쾌애액! 병기와 몸뚱이를 한꺼번에 가를 듯 무시무시한 경풍이 상대를 맞아가고, 곧이어 손 끝에 뭉특한 느낌이 와닿았다. 강산은 그것을 느끼자마자 반회전하여 다시 배후의 적을 향해 일도(一刀)를 날렸다. 한데 그 순간! 천지분광에 이은 옥대위요(玉帶圍腰)의 일초로 두 번째 상대의 허리를 쓸어가던 순간, 강산은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칼을 쥔 손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이 달랐던 것이다. 뼈와 살을 가르는 시원한 느낌이 아닌 무언가 부드러운 물체에 비껴나는 느낌인 것이다. 그건 곧 첫 번째 상대를 향한 자신의 일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수다!' 그러나 깨달았다 한들 이제와서는 달리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흑영의 기세가 등뒤로 느껴지자 강산은 황급히 상체를 숙였다. 피잇! 싸늘한 쇠붙이의 감촉이 뒤통수를 훑고 지나간다. 저릿저릿한 아픔이 싸하니 밀려들었다. 피해냈다고는 하나 완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강산에게는 아픔을 느낄 시간도, 일격을 피해냈다는 안도감에 여유를 잡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연이어 두 번째 흑영의 칼이 목덜미를 노리고 들이닥친 것이다. 위기일발! 자세가 무너진 강산은 더욱 신형을 낮추며 비스듬히 금강도를 밀어 올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대응이었다. 한데 이어 벌어진 상황이 의외였다. 휘익! 칼이 맞닿는가 싶더니 상대의 칼이 한 자나 퉁겨나 버린 것이다. 쏘아오는 기세에 비해 그 실린 힘은 대단치 않았던 게 분명했다. 덕분에 상대의 가슴은 훤히 노출되었다. '틈!' 강산은 그대로 금강도를 밀어 상대의 가슴을 갈라갔다. 한편, 이항 역시 두 명의 흑영에 둘러싸여 일장 악투(惡鬪)를 벌이고 있었다. 하나 그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일행의 중앙에 끼어있던 관계로 최초의 습격은 면했기 때문이었다. 일초 이초, 공세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며 상대를 살피던 이항은 이내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흑사대(黑死隊)!' 검은 두건에 검은 외투, 심지어 들고 있는 병기 조차 검은색인 이들의 정체는 삼절방이 자랑하는 최고의 정예, 바로 살귀(殺鬼)들의 집합체인 흑사대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얼핏 저편에 강산이 보였다. 강산은 한 흑영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하여 막 그의 가슴을 갈라가는 중이었다. 평상시라면 끝장이 났다해도 좋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흑사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항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이 놈들은 흑사대다. 놈들의 외투는 보의(寶衣)나 마찬가지니 도검(刀劍)이 통하지 않는다." 비록 일행이 저마다 목전의 전투에 전 신경을 기울이고있다고는 하나 발작하듯 소리치는 이항의 이야기를 못 들을 리는 없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강산은 비로소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어찌하여 첫 번째 흑영이 자신의 일격에 무사할 수 있었는지, 그 비껴나듯 하던 괴이한 감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문을 풀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신의 칼은 여전히 두 번째 흑영의 가슴을 갈라가고 있었고, 그 흑영은 음충맞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강산의 칼이 자신의 가슴을 격중하는 순간에 강산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빛이 역력했다. '도검이 통하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단 말이지.' 강산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칼은 조금전 보다도 더욱 빠르게 흑영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한 강산의 행동이 발악으로 보였던지 맞닿을 듯 마주한 흑영의 눈에 가소로움이 내비쳤다. 그와 함께 쭉 찢어진 흑영의 입가의 미소는 그 골이 더욱 깊어갔다. '클클!' 결과를 확신하는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팟! 마침내 강산의 금강도는 흑영의 앞가슴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강산의 칼을 가슴에 받으며 그대로 강산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찔러오던 흑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이내 고통과 경악, 공포에 가득찬 빛으로 변해 버렸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동시에 흑영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 이장 여 바닥에 쳐박혔다. 쿵! 바닥에 나뒹구는 흑영의 가슴은 쩌억 갈라져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놀랍게도 도검이 불침(不侵)한다는 흑루의(黑縷衣)로 만들었다는 흑영의 옷이 강산의 칼에 종잇장처럼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제 9 장 해골지대. 1 "어, 어떻게...?" 어디선가 서툰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잇새로 새는 듯 낮고도 불분명한 음성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리의 임자는 강산을 협공했던 두 명의 흑사대원 중 살아남은 한 명이었다. 인간의 소리... 피와 살인만이 전부인 듯 미쳐 날뛰던 살귀(殺鬼)의 입에서 비로소 인간임을 증명하는 한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미 어육으로 변해버린 동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육을 감싸고 있는 천 조각, 흑루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멍난 자리를 메우듯 다른 세 명의 흑사대원이 강산의 주위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섣불리 덤벼들지는 않았다. 흑루의는 천축(天竺)에서만 나는 천잠사(天蠶絲)로 만들어져서 도검(刀劍)은 물론이고 수화(水火)마저 불침(不侵)한다는 기보(奇寶)중의 기보였다. 흑사대와 칠대공의 명성이 팔황구주(八荒九州)를 진동하게 된 것에는 이 흑루의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런 흑루의를 입은 흑사대원이 너무도 간단하게 베어 넘어지는 광경을 직접 보았으니 그들이 선뜻 덤벼들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저 매서운 눈초리를 던지며 강산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노리는 뱀의 모습과도 같았고, 또한 어찌 보면 강산으로 하여금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잡아두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급할 건 없지.' 강산은 금강을 가슴 앞에 비스듬히 곧추세우고는 천천히 장내를 둘러 보았다. 일행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건 세 명의 흑사대원에 둘러싸여 주춤주춤 연신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서문상이었다. 두 자루 옥구의 진퇴가 원활하지 못하고 수비에 급급하는 게, 아무래도 기습에 당한 옆구리의 부상이 작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상의는 벌겋게 물들어 옆구리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서문상이 수세에 몰려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세한 차이일 뿐이었고, 승패(勝敗)를 결정짓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십 초는 가야한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강산은 눈을 돌렸다. 다음으로 보이는 건 물웅덩이 주변의 이항이었다. 그 역시 서문상과 마찬가지로 세 명의 흑사대원에 둘러싸여 후퇴하고 있었다. 그의 처지는 언뜻 보기에 합공(合攻)을 받는다는 점이나 주춤주춤 물러난다는 점에서 서문상에 비해 별로 나아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둘 사이에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항의 후퇴가 지극히 의도적이라는 점이다. 엄밀하기 그지없는 수비형태를 갖추고 일정한 법도에 따라 물러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워 보였다. 게다가 그가 물러서는 곳에는 송자영과 양표가 있었다. 강산은 힐끗 보는 것 만으로도 이항이 일부러 송자영과 양표에게 합세하기 위해서 그들 쪽으로 물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자영과 양표는 서로 등을 맞대고 대여섯 명의 흑사대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서로를 응원함과 동시에 사각(死角)의 범위를 최소화하는 매우 적절한 수비형태였다. 아마도 이항이 합류한다면 공세는 더욱 여유로워질 것이다. '이쪽은 충분하군.' 강산은 계속해서 남은 일행을 찾았다. 그가 막 한 패를 이루고 있는 곽가량과 소귀, 구청연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응...?' 강산은 문득 등뒤로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느낌, 폐부를 찔러오는 그 오싹한 한기의 정체는 바로 살기(殺氣)였다. 살기는 순간적이나마 호흡에 곤란을 느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고수!' 흐읍 낮게 숨을 고른 강산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언제나타났는지 그에게서 오장여 떨어진 곳에 네 사람이 보였다. 삼십 대 후반의 애꾸눈 사내와 부리부리한 눈매의 매우 건장한 오십 대 노인, 그리고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운 얼굴선이 온화한 인상을 주는 중년인과 제 얼굴이 아닌 듯 딱딱한 표정이 걸치고 있는 칙칙한 회포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는 사순 중년인. 강산은 그들을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들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수뇌부들의 등장이라는 건가.' 강산은 이내 그 중 한 사람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의 오십대 노인은 한 손에 아주 특이한 병기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낫과 비슷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긴 기이한 병기였다. 그는 양수초겸 낙광영이 확실할 것이다. 초겸(硝鎌), 소위 명문고수라 불리는 자들이 낫을 병기로 쓰는 일도 드물 뿐더러, 더구나 한 길이 훌쩍 넘어가는 대초겸을 쓰는 일이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눈에 띠는 건 단지 낙광영만이 아니었다. 그의 우측 옆에 서 있는 두 사람 또한 간과하기에는 그 특징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어깨에 한 마리 매가 앉아 있는 저 무표정한 회포 중년인은 바로 칠대공의 넷째인 풍공 신응 고량일 것이고, 반짝이는 이슬만큼이나 맑은 은빛 륜의 주인공은 칠대공 중 그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근공 쌍륜 사마자웅임이 분명해 보였다. 애꾸의 기도 또한 범상치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세 사람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있었다. '칠대공 중의 두 사람과 낙광영이라... 그리 좋지는 않군.' 강산이 내심 서로의 전력을 저울질 하고 있을 때, 그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들은 양수초겸 낙광영과 신응 고량, 쌍륜 사마자웅이야.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속히 피해야 돼.] 전음은 송자영의 것으로, 음성에는 다급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음이 미처 끝을 맺기 전, 또 다른 하나의 전음이 들려왔다. [강형, 합류하시오. 후퇴해야겠소.] 두 번째 전음의 주인공은 구청연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음을 날려온 것이다. '역시 맞부딪치기엔 조금 껄끄러운 상대들이지. 가만... 합류?' 후퇴를 생각하던 강산은 문득 구청연의 이야기 중 '합류'라는 단어에 생각이 미쳤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한데 뭉쳐 있는 일행이 눈에 띠었다. 이항은 물론 구청연, 소귀, 서문상까지 자신을 제외한 일행 전체가 한 패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산은 내심 일행의 신속한 행동에 감탄했다. 기습에 말려 제 한 몸 방어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느 틈에 포위망을 돌파했는지 모두 한 곳에 모여 둥그런 반원진(半圓陣)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편복노조, 반선불, 상문신, 염객, 화왕비 등 그 명성에 걸맞는 능력을 갖추고있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