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강산 제1권. - 14편 (14/43)
그러다가... 스르르... 그의 몸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가슴에는 세 개의 핏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강산은 비록 가슴이 뚫리는 것은 면했지만, 열양지의 지공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조한영의 막강한 장력을 뚫고 그들을 쓰러뜨린 후 상세를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계속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내상(內傷)이 크게 발작했던 것이다. 그때 그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상을 치유했다면 별 일이 없었겠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하여 그는 쉴 사이도 없이 계속 몸을 움직여 이십사연환쇄진을 격파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는 도법은 그 위력 만큼이나 내공(內功)의 극심한 소모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강산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내상을 억누르며 적들을 쓰러뜨렸지만, 그들이 모두 도망가 버리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강산은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때 누군가의 얼굴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사부!' 웃음짓는 사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런데 사부의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다른 얼굴 하나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낯익은 얼굴, 송자영이었다. 왜 이런 순간에 그녀가 생각났는지 강산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아무튼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소리칠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야, 이 개자식들아!" 강산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이런 순간에 생각나는 게 욕을 하는 모습이라니... 하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에게 보고 들은 게 그것 뿐인데 다른 모습이 생각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환상이라 그런 것일까? 욕을 하는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상시의 그 표독스런 표정이 아닌 매우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전혀 송자영답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강산은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나 그는 할 수가 없었다. 가물가물 의식이 멀어져갔다. 2 송자영이 속삭였다. "서방님, 아!" 한 손에 죽사발을 들고 남은 한 손엔 숟가락을 든 모습이었다. "아-!" 강산은 고개를 쭉 내밀어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스치더니 이어 달콤한 물체가 혓바닥을 자극했다. 그리고 미쳐 오물거릴 사이도 없이 스르르! 목구멍을 넘어가 버렸다. 꿀인들 이보다 달콤할까... 강산은 아쉬웠다. 정말 너무도 아쉬웠다. 그렇지만 계속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아!" 강산은 다시 제비새끼가 되었다. 그렇게 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사이 죽사발은 깨끗이 비워졌다. 그러자 사발을 내려놓은 송자영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밥상 치울까?" 강산은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무뚝뚝한 사람은 조금 우둔해 보인다. 그러나 정말 무뚝뚝한 사람이 우둔하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보일 뿐, 둘 사이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단지 간혹 그런 사람도 있기는 했다. "치워야지." 강산은 대충 응대하고 보다만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호랑이 대 사자의 대결' 이라는 책으로,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흥미 만점의 내용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송자영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밥상 치울까?" 좀전의 이야기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다만 그 어조는 이상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에는 '호랑이 대 사자의 대결'이 너무 재미있었다.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순간, 휘잉! 홀로 구석으로 날아간 밥상이 와장창! 박살이 났다. 놀라 바라보는 강산의 가슴팍으로 송자영의 주먹이 쑤셔 박혔다. "헉!" 강산은 앞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깨어났다. 낮은 천장이 보였다. 낯선 곳이었다. '여긴...?' 두리번거리던 강산의 눈에 창문이 들어왔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어 그곳으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눈에 익은 집과 나무들, 사사족의 마을이었다. '그렇군, 집안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골똘히 생각하던 강산은 이내 대충이나마 당시 상황을 그려낼 수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순간 일행이 달려왔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송자영의 모습이 그저 환상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한데 무언가가 옆구리에 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송자영이었다. 그녀는 침상에 턱을 박고 자신의 옆구리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발치에 낯익은 물체가 보였다. 죽사발과 숟가락. 물론 사발은 깨끗이 비워진 채였다. '그래서 그런 악몽(惡夢)을... .' 강산은 가만히 누워 찬찬히 송자영을 관찰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오똑한 코, 작고 도톰한 입술... 아름다운 모습이다. 제 말마따나 용모 뛰어나고 싸움 잘하니 무인(武人)의 아내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놈의 성격만 고친다면 과분할 정도인데, 맞으면 고쳐질려나...? 부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력을 사용해서 기혈(氣血)이 역류했던 것이 문제일 뿐, 다행히 열양지의 지력은 급소를 비껴 나 있었다. 문정인과의 일은 한 번의 설명으로 해결되었다. 첩자의 징후를 발견했을 때부터 일전의 순간까지 그는 담담하게 설명을 했고, 그의 설명을 모두들 수긍했다. 왠지 더 이상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구청연의 설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구청연은 그 뒤로 문정인이 사라졌다고 했다. 하루만에 정신을 차린 강산은 다시 하루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일행은 사사족의 마을을 떠났다. * * * 멀리 북쪽 하늘에 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점은 빠르게 다가들더니 이내 하나의 익숙한 형체를 형성했다. 매(鷹)였다. 매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허투루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이 곧장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날았을까? 문득 매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무엇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매는 날개를 접고 쏜살같이 내려꽂혔다. "넷째형, 무어라고 쓰여 있습니까?" 고량은 아무 말없이 쪽지를 건네주었다. 매는 고량의 어깨에 앉아있었다. 쪽지를 받은 사마자웅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무언데 그러시오?" 쪽지는 곧 낙광영에게로 넘어갔고, 다시 마영소에게로 넘어갔다. [살(殺)!] 쪽지에는 그렇게 단 한 자가 쓰여 있었다. 일행이 쪽지를 다 읽기를 기다려 고량이 물었다. "마영소, 어디가 좋겠느냐?" 마영소는 잠시 생각한 후 이야기했다. "감람패를 벗어나면 옥룡대산의 초입에 불귀곡(不歸谷)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좋겠습니다." 낙광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마영소를 응시했다. "불귀곡이라면 나도 대충 위치를 아는데, 그곳은 흑지로 가는 길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흑지로 가는 길과 불귀곡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불귀곡을 거쳐야합니다. 제 말은 불귀곡을 통과한다는 게 아니라 불귀곡 입구에 그들이 원하는 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것이라니?" "일단 감람패에 도착하면 물과는 안녕입니다. 난창강과는 방향이 틀리고 감람패 내에는 먹을만한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람패를 통과하는데 대략 이틀이 소요됩니다. 자연히 옥룡대산에 도착할 즈음 식수(食水)는 바닥이 날 테고, 부근에 물이 있는 곳은 불귀곡 입구가 유일합니다." "흠, 그렇겠군. 한데 매복을 서자면 놈들을 질러가야 할텐데, 지름길이 있느냐?" "문제없습니다. 그들 중에 부상자가 있으니 당연히 행보는 느려질 것이고, 더구나 간자(間者)를 추려냈다고 생각해서 경계심 또한 많이 누그러진 상태일 겁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시간은 충분합니다." 마영소는 설명 중에 힐끗 사마자웅을 바라보았다. 사마자웅은 조금 전부터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급조된 듯한 작은 봉분 하나가 있었다. 사마자웅은 그 봉분을 내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정인, 네 빚은 필히 받아주마." * * * 삼 일이 흘렀다. 추적대와 여러가지 문제로 어수선했던 지난 날들에 비해 한껏 여유로운 삼 일이었다. 그 사이 강산은 거의 회복단계로 접어들었다. 좋은 약과 뛰어난 체력, 그리고 송자영의 지속적인 간호 덕분이었다. 틈만 나면 금창약(金瘡藥)을 발라준다 붕대를 갈아준다 하면서 귀찮을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송자영을 대하는 강산의 태도 역시 많이 바뀌어 있었다. 무뚝뚝한 천성이야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질문이라도 나오면 성심성의껏 답하는 기색이 뚜렷하고, 가끔이지만 먼저 질문을 던질 때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질문이란 게 '힘들진 않소?', '목마르지 않소?'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묻는 말에나 마지 못해 답하던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일행은 야영하기에 적당한 공간을 발견하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뒤척뒤척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양표가 기어코 볼멘 소리를 토해냈다. "젠장,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도대체 언제쯤 가야 이 지겨운 밀림을 벗어날는지... ." 옆에 누워있던 소귀가 이야기했다. "밀림이야 기약할 수 없지만, 내일쯤이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서문상이 그 말을 받았다. "어떻게 나아진단 말인가?" "그저께 난창강을 떠날 때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감람패를 통과한다고. 그리고 그 뒤에는 옥룡대산이 버티고 있다고." "그런데?" 소귀는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서문상을 바라보았다. "산이 뭡니까? 높아서 산 아닙니까? 옥룡대산에만 들어서면 더위도 한풀 꺾이고 바람도 좀 불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 양표와 서문상의 표정이 한껏 밝아지는 순간 저편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왜 아직 보이지 않지?" 이런 썅, 귀찮아 인상이라도 쓰려던 소귀는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송자영임을 깨닫고 황급히 안면근육을 풀었다. "정말 좋은 질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누워있는 이 지면에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평한 듯 하지만 사실은 저쪽이 약간 높은 경사로입니다. 이와 같은 경사로가 꽤 길게 이어져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장담하건데 늦어도 내일 오전 중으로 옥룡대산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고마워." "예.... ?? 예?" "왜? 뭐, 잘못 됐어?" "아아아, 아닙니다." 소귀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이럴 수가? 그녀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녀가 말한 '고마워'가 정말 고맙다는 뜻일까? 혹시 세상이 변해 고맙다라는 단어의 뜻도 변한 건 아닐까? 아니면 그녀가 말한 '고마워'에는 전혀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혹시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가 그녀에게 시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소귀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살아 생전 그토록 지루하고 불안한 밤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소귀의 말에 힘을 얻은 일행은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두 시진쯤 걸었을까, 왠지 발끝에 닿는 지면의 감촉이 색다르다 싶더니 이윽고 숲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거기 과연 산(山)이 있었다. 계단 마냥 차곡차곡 높아져 저 아스라한 곳에 하얀 구름이 일렁이는 산이 있었다. "호-!" "카, 좋다!" 일행의 반가움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덕지덕지 엉겨 붙던 폭염이 껍질 째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황홀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송자영이 문득 소귀에게 물었다. "설마 저 산을 넘는 건 아니겠지?" 꾸벅꾸벅 선 채로 방아를 찧던 소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송자영을 바라보더니 푸르르! 투레질을 했다. "어젯밤에 잠 안자고 뭐했어?" 송자영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 "잠자리가 낯설다 보니... ." "절대로 불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야." 서문상과 양표, 곽가량이었다. '뭐야, 이자식들은?' 송자영이 의아해 데굴데굴 눈을 굴리자 소귀가 냉큼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계속 파고들면 소귀 역시 재미 좋을 리가 없다. "저기 움푹 들어간 곳이 보이시죠?" 송자영은 소귀의 손을 쫒았다. 두 개의 봉우리가 맞닿아 그 가운데 낮은 구릉지가 보였다. "그쪽으로 대여섯 개의 봉우리만 넘으면 되는데, 아마 이틀이면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결코 옥룡대산을 통째로 넘자는 게 아닙니다." 의문을 해결한 송자영이 힐끗 서문상을 바라보았다. 이어 양표와 곽가량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한 가지 의문은 풀렸지만 여전히 '이자식들'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소귀가 서둘러 출발을 알렸다. "자자, 출발입니다. 출발! 편편한 바위에 누워 산바람 맞으며 정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보자고요." * * * 편편한 바위도 없었고, 시원한 산바람도 없었다. 하지만 산에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휴식은 즐거웠다. 쉬는 중간 소귀는 남은 여정에 대해 설명했고,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곽가량이 물었다. "그러니까, 불귀곡이란 곳을 들러야한단 말이지?" "예, 근방에 물이 있는 곳은 불귀곡이 유일합니다. 원주민들 말로는 '짐승의 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십여 리 정도." 곽가량이 재차 물었다. "불귀곡, '짐승의 길'...? 왠지 으시시한데, 달리 내력이 있나?" 소귀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그 안에 독을 뿜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 곽가량이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독을 뿜는 악마? 흥! 뿔은 안 달렸다던가?" 소귀가 정색을 하고 이야기했다. "그저 장난으로 받아 들일만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불귀곡에 들어간 사람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저도 입구까지는 몇 번 가봤는데, 그 음산하고도 사이(邪異)한 분위기란... 후-!" 소귀는 당시의 정경을 생각하고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 모습에 곽가량은 찜찜하여 더 묻지 않았다. "그래, 그 정도라면야." 그러나 불귀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곽가량 혼자만이 아니었다. "목적지가 그 불귀곡 너머에 있다고 했지?" 끼어든 자는 송자영이었다. "예, 그렇... ." 생각없이 대답하던 소귀는 문득 그 질문에 담긴 뜻을 깨닫고 기겁을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생,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뭘 그래? 그래봤자 같은 밀림일 뿐인데. 있다면 영금(靈禽)이나 괴수(怪獸) 정도겠지. 아니면 꼬리 아홉 달린 여우거나." 소귀는 다급하여 양손을 휘휘! 저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그쪽이 지름길이라며?" "안됩니다." 뜻밖에 완강한 벽에 부딪친 송자영은 작전을 바꿔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이봐, 잘하면 전설의 주역이 될 수도 있잖아. 생각해봐, 신화의 땅 불귀곡을 최초로 통과한 우리의 영웅 소귀대협(小鬼大俠). 소귀대협? 대협은 좀 심했나? 그럼 소귀공(小鬼公), 공(公)? 공도 조금... 소귀자(小鬼子), 소귀장군(小鬼將軍), 험! 아무튼 그렇게 쓰여 전국 방방곡곡에 나붙을 방(傍)을 생각해봐. 근사하잖아?" 하지만 소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잘못하면요?" 찰나 송자영의 볼따구가 씰룩씰룩, 눈꼬리가 상큼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기어코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 자식이 정말... 흥! 잘봐, 네 눈에는 지금 내가 협상하는 걸로 보이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귀가 벌렁 나자빠지는 것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찮을 판에 사지(四肢)를 발라당 벌리고 넙죽 누워버린 것이다. "아이고, 맘대로 하세요. 난 생각 없으니, 정 가겠다면 전 이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느긋하게 소귀와 송자영의 대화를 즐기던 일행은 순간 일제히 굳어버렸다. 벌통을 쑤셔도 정도가 있고, 호랑이 수염을 뽑아도 한계가 있지 이건 그 정도와 한계를 초월한 것이 아닌가? 모두들 두 눈을 끔뻑끔뻑 그저 소귀를 바라볼 뿐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건 당사자인 송자영이었다. 언감생심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말이다. 송자영은 물끄러미 소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쿵쿵쿵쿵! 어디선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차 급박하게 돌아갈 때, 이윽고 송자영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동시에 심장 소리도 멈췄다. "그으래-! 돌아가시겠다고-. 좋아, 그렇게 해주지." 한 발 한 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송자영을 보며 소귀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이고.. 어쩌자고 내가 이런 일을 저질러버렸단 말인가?' 불귀곡에 대한 두려움이 제아무리 크다한들 목전(目前)의 사신(死神)에 비길 바는 아닌데... . 아무래도 잠시 정신이 나가버렸던게 분명했다. '아이고!' 곡소리가 목구멍까지 밀려나왔다. 하나 소귀는 곡소리를 꾹 참아 삼켰다. '에라 이미 엎질러진 물, 될대로 되라. 설마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마귀보다 더 무서운 송자영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소귀의 심장은 다시금 달음박질쳤다. 쿵쿵쿵! 그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직접 확인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어찌됐든 불귀곡 입구까지는 가야하니까 말이오." 누가 끼여들었는가 하는 건 그 음성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 굳이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송자영은 돌아섰다. 느릿하게, 약간의 표정 변화를 보이면서. 강산을 향해 완전히 돌아선 송자영은 언제 자신이 살기등등한 마귀와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쌩긋 웃고 있었다. "음, 그게 좋겠어." '저럴 수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행의 뇌리에 불현듯 시중의 뒷골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이비 교주의 주절거림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 악마(惡魔)를 믿으세요. 천사(天使)와 악마는 본래 한 몸입니다. 악마를.... '사실이었구나!' < 1 권 끝 > 쾌도강산 제2권 표지 제목: 쾌도강산 제2권 지은이: 운중행 - 차 례 - 제 8 장 불귀곡(不歸谷). 제 9 장 해골지대. 제 10 장 절벽 아래에서. 제 11 장 동굴속의 괴인. 제 12 장 잔백구유도법. 제 13 장 협곡안으로. 제 14 장 화공(火攻). 제 15 장 화방(火防). 제 16 장 진천뢰(震天雷) 제 8 장 불귀곡(不歸谷). 1 세상에는 불귀곡처럼 으시시한 이름이 붙은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흑수림(黑水林), 적풍애(赤風崖), 한단곡(恨壇谷), 절명곡(絶命谷)... 등등. 그와 같은 장소의 공통점을 들라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천연적인 형태의 기괴함으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곧 천장단애, 만장절벽, 늪,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그밖의 모든 자연적인 어려움들이 한데 어우러져 도저히 두 발 가진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분위기다. 독사와 풀뱀이 그 눈빛부터 다르듯, 험지라면 마땅히 그 이름에 걸맞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불귀곡으로 가는 길은 여느 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경사가 느껴질 정도의 낮은 언덕길로 좌측에는 높이 삼장여의 비스듬한 언덕이 펼쳐져 있고, 우측에는 무릎 높이의 풀밭이 넓게 펼쳐지다가 잡목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 일행의 앞을 가로지르는 다람쥐나 작은 들짐승, 부지런히 열매를 쪼는 노란부리앵무새 등은 마치 고향 뒷산을 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흔한 풍경, 한가롭고 여유로운 정경이다.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불귀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와 같은 마음에 바짝 긴장했던 일행이었지만 잔잔한 풍광이 계속되자 애초의 긴장은 봄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양표가 소귀를 향해 중얼거렸다. "별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지는 않은데?" 소귀는 힐끗 뒤편의 송자영을 일견한 후 말했다. "여긴 불귀곡이 아닙니다." 송자영은 소귀를 째려보고 있었다. 꼬투리만 잡혀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막상 강산 때문에 후퇴야 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걸죽하게 몸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적잖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소귀는 공연히 뒤가 간지러워서 벅벅! 뒤통수를 긁었다. 양표가 거듭 물었다. "거의 다 왔다면서? 틀리면 얼마나 틀리려고."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소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입니다." 순간, "흥!" 송자영의 코방귀 소리가 요란했다. 찔끔한 소귀는 잠자코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통수의 가려움이 더해가고 있었다. 그녀가 엄청 째려보는 모양이었다. 과연 조금 더 들어가자 분위기가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