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쾌도강산 제1권. - 12편 (12/43)

2026-10-08 18:49:05 조회 6
강산은 지그시 문정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문정인 역시 지지 않고 강산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문정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있었다. 무언가 일을 저지르고 싶은, 피를 보고 싶은 자의 눈빛이었다. 강산의 표정이 점차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문정인이 일부러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비는 필시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나 하는 불안에서 야기되었을 것이다. 문정인으로서는 무언가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고른 셈이었다. 강산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시비를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순 장내에 섬뜩한 핏빛 기운이 감돌았다. 사사족의 존재를 깨끗이 지워버릴 정도의 강한 기운이었다. 서로간의 거리라야 채 석 자가 넘지 않았으니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기운을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할 턱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순간, 구청연이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강형, 문형, 갑자기 왜 이러시오? 목전에 적을 놔두고." 그래도 그들이 물러설 기미가 없자 이항이 다시 중재를 맡고 나섰다. "일단은 이 귀찮은 곳을 벗어나고 보자고. 이후야 깨지건 말건 상관 안할 테니까."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이제 문정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다 못해 파란 광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강산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하나 그의 눈빛은 어느 사이에 싸늘하게 굳어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풍기는 기세나 분위기는 하나의 예리한 칼날을 보는 듯 했다. 일단 그의 몸이 움직인다면 단순간에 두 사람의 생사(生死)가 갈릴 게 뻔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함성이 그쳤다. 천지를 뒤흔들던 함성이 순식간에 그친 것이다. "......?"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우두머리의 면전에 한 사내가 나와 있었다. 그는 우두머리를 향해 꽤 격양된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었는데, 한손에 도끼를 들고 그 도끼와 일행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사내가 이야기하는 내용 중에 함성이 그치게 된 원인이 있을 것 같은데, 일행으로서는 그 사연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멍청히 바라볼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곽가량이 힐끗 강산과 문정인을 일견한 후 소귀를 향해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해석 좀 해봐." 소귀가 머리를 긁었다. "에-, 그러니까... 뭔가... 열심히... 소리치고는 있는데... ." 송자영이 중얼거렸다. "혹시 방금 전의 살기로 우리가 무서운 사람들이란 걸 알아차린 건 아닐까? 그래서 고기나 좀 먹여서 조용히 보내도록 하자. 뭐, 그런 정도의 이야기 아닐까?" 그녀의 음식에 대한 집착은 집요할 정도였다. 다만 공교롭게도 그녀의 해석은 대충 맞는 것이었다. 이때 우두머리의 앞에 나와 떠드는 자는 일행과 안면이 있는 자였다. 곡정의 시장에서 뱀을 팔던 두 명의 사사족,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행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와는 그 행색부터 틀릴 뿐더러 일행의 눈에 비친 사사족의 생김새가 워낙에 비슷비슷한 때문이다. 본래 외인의 눈에 비친 타 종족의 모습이란 게 시장통 좌판에 놓인 참외 마냥 이놈이 그놈 같고 그놈이 이놈 같은 것 아니겠는가? 같은 이유로 사내가 일행을 알아보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내는 긴가민가 하던 중 송자영의 소맷속에서 번뜩이는 비수를 보고 '바로 그놈들이로구나!'하고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일행을 확인한 사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황망히 우두머리에게 다가가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가를 고하는 일이었다. 사내의 보고를 접한 우두머리는 일순 고민에 빠졌다. 살아온 세월이 녹녹치 않은지라 무림인 중에 무서운 자들이 있어 원숭이보다 빠르게 절벽을 오르고, 일권(一拳)에 집채만한 바위를 박살낸다는 등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다. 이걸 믿어야할 지 말아야할 지? 수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니 위세가 깎일 판이요, 안 믿자니 잘못하면 부족이 떼몰살을 당할 판이다. 고심하던 우두머리는 이내 적당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한 번 시범을 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저들이 정말 무서운 자들로 신기(神技)를 보여준다면 자신의 위세가 깎일 일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때 가서 처치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우두머리는 그 사내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가 가서 시범을 보여달라고 해라." 우두머리의 분부를 받은 사내는 '어떻게?'라는 대꾸도 못한 채 조심조심 일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한 놈이 다가오는데? 일 대 일로 해보자는 것인가?" 곽가량이 뇌까리자 소귀가 말을 받았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잔뜩 겁먹은 눈치인데요." "하긴... 그렇다면 도끼는 왜 빼들고 오지?" 일행이 의문에 쌓여있을 때 주춤거리며 다가오던 사내가 삼 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도끼를 힘차게 땅에 박았다. 그런데 그 도끼를 박는 자세가 자못 이상했다. 날이 아닌 자루를 지면에 박아 마치 외다리 괴인처럼 야릇한 모습을 하고있는 것이다. "저것도 의식인가?" 곽가량의 물음에 소귀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사내는 지면에 박힌 도끼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이어 송자영을 손짓하며 '바가, 바가!' 소리쳤다. 곽가량이 송자영을 보며 말했다. "빠가? 저거 욕 같은데." "네 귀에도 그렇게 들리지? 내 이자식을 그냥." 송자영이 발끈 뛰쳐나가려는 순간 이항이 그를 제지했다. "송소저, 저 사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소?" "내가 저런 놈을 어디서... 가만?" 그제야 송자영도 사내의 낯이 익음을 깨달았다. 낯이 익다기보다는 주변 상황에서, 도끼와 사내의 몸짓에서 어렴풋이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된 것이었다. 전기가 마련되자 남은 의문들은 절로 풀려나갔다. "빠가? 박아? 박아! 그날처럼 비수를 박아보라는 말인가?" "그런 모양인데." 그러나 의문이 풀렸다고 해서 기분까지 풀리지는 않는다. "이 자식이 지금 나보고 광대짓을 하라는 거야?" 순간, 소귀가 다시 그녀를 제지했다. "송소저, 잠깐만!" 거푸 두 번이나 제지 당한 그녀는 눈알을 부라렸다. "뭐야?" "아무래도 요구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놈들이 무언가 기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 저 자가 그날 본 송소저의 무서움을 우두머리에게 고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이겠지요. 덧붙여 말하자면 사사족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구이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용사(勇士)'를 뜻하는 말이지요." "구이나?" "그렇습니다. 잘만하면 술과 고기가 거저 생길 판입니다." 과연 소귀는 일류 노름꾼에 걸맞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있었다. '술과 고기라!' 맥점을 정확히 짚힌 송자영은 더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꿀꺽! 목젖이 꿈틀대는가 싶더니 쉬잇! 날카로운 파공성이 뒤를 이었다. 파파팟! 송자영이 발출한 비수는 모두 세 자루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품(品)자를 형성한 채 도끼날에 틀어박혔다. 의도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수가 박힌 충격에 제자리를 벗어난 도끼는 데굴데굴 우두머리의 앞에까지 굴러갔다. ...... 우두머리의 눈이 커졌다. 군중들의 눈도 커졌다. 입도 함께 벌어졌다. 혀를 내미는 자도, 질질 침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탄성은 곧 환호로 바뀌었고 점차 산악을 쓸어낼 듯 거세게 밀려들었다. "우와아...!" "구이나, 구이나!" "구이나-!" * * * 결국 송자영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작은 사슴으로 속을 채우고 흙을 발라 통째로 구운 멧돼지, 역시 내장을 들어내고 대신 온갖 향기로운 과실로 속을 채운 사람만큼이나 큰 메기, 갖가지 열대과일과 산채, 시금털털한... 하지만 매우 달콤한 과실주 등등, 그밖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산해진미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쫘악! 귀밑까지 찢어진 송자영의 입은 이후 한시도 놀지 않았다. 그녀는 구이나, 구이나를 연발하는 사사족에 둘러싸여 배가 터지도록, 꼭지가 돌아가도록 먹고 마시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나 와중에도 송자영은 중앙에 설치된 무쇠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술판이 시작될 때부터 설치된 무쇠솥, 거기에는 일행이 들고 온 거망이 끓고 있었다. 사천(四川)지방의 음식은 예로부터 맵기로 유명했다. 구이에서 전골, 무침에 이르기까지 사천의 특산품인 작은 고추가 빠지는 법이 없다. 이열치열이라, 식문화(食文化) 역시 남다른 더위를 이기고자 발달된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사천은 또한 뱀요리가 발달되었다. 그중 유명한 것이 삼사계사갱(三蛇鷄絲羹), 뱀과 닭을 넣고 갖가지 양념으로 맛을 낸 전골요리였다. 비록 그 성분은 조금 달랐지만 무쇠솥에서 끓고 있는 요리는 틀림없는 삼사계사갱이었다. 송자영은 언젠가 먹어본 삼사계사갱의 맛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다만 송자영의 기다림은 단순히 삼사계사갱에 있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이 사사족의 요리는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큰 동물은 반드시 그 속을 파내고 대신 다른 작은 짐승이나 과일 따위로 빈속을 채우는 것이다. 멧돼지 속에 사슴이 있고 메기 속에 과일이 있는 것처럼. 보기와는 달리 그 내용물의 맛이 기가 막혔다. 마치 삼사계사갱을 처음 접했던 순간 마냥. 흐물흐물 혀에 닿자마자 목구멍을 넘어가는 게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천상(天上)의 맛이었다. '이번엔 또 무엇이 들어있을까?' 송자영의 기다림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대여섯 명의 사내가 무쇠솥으로 다가가더니 삽같은 기구를 사용하여 조심조심 거망을 꺼내 미리 준비된 수십 장의 야자 잎 위에 올려놓았다. 푹 익은 거망은 볼품없이 쫄아 있었다. 삼 장에 이르던 덩치가 채 반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부분만은 두툼한 게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올챙이를 연상케 하는 우스운 모습이었다. 송자영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얼핏 주위를 보니 일행 역시 기대에 찬 표정들이었다. 더욱이 사사족들의 표정은 어느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기대를 넘어 탐욕으로 이글거린다고나 할까. 송자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윽고 사내중 한 명이 도끼를 꺼내 거망의 배에 댔다. "후-!" 어딘선가 한숨 섞인 탄성이 터져 나오고, 사내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거망의 배를 갈랐다. 스르르!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가늘고 긴 짐승의 내장과도 같은 물체가 한데 뒤엉켜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꾸물꾸물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수백, 수천 마리의 장지뱀이었다. "흐으-!" 모으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쉬운 법이다. 송자영이 무려 두 시진에 걸쳐 모은 재산을 모두 게워내는데는 채 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웩, 우웩! 끄윽... 우웩!" 속이 메슥거리는 것은 곽가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묘하게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의 작은 고통쯤은 상대의 큰 아픔에 견주어 씻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곽가량이요, 그 상대가 송자영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곽가량은 웃었다. "푸흐흐...!" 장기는 깨져서 가지고 있던 은전을 몽땅 털리고, 복수를 위해 어렵게 구한 악어 알은 곯아버려 되는 일이 없던 곽가량에게는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십년 가뭄에 만난 단비가 이보다 더 반가울까? "푸흐흐... 헐헐헐...!" 곽가량이 웃자 일행도 참지 못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리고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사사족들도 따라 웃었다. "하하하!" "클클!" 장내는 곧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곽가량의 웃음소리가 가장 컸다. "크카카카카...!" 한번 벌어진 술판은 밤이 깊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일행 중 누구도 이 모처럼만의 흥을 깨려하지 않았다. 그저 술에, 분위기에 흠뻑 젖어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러한 즐거움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모른 채. 바로 세 시진 전 천지에 메아리쳤던 사사족의 함성을! 그 정도 함성이라면 제아무리 드넓고 울창한 밀림이라 할지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절정의 실력을 지닌 무림 고수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스스스! 수십 개의 검은 인영이 사사족 마을로 스며들었다. 아무 기척도 없이 그림자 마냥 조용하게. 제 7 장 옥룡대산(玉龍大山). 1 봉사가 아닌 다음에야 넓은 광장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백여 명의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행을 발견한 검은 그림자들은 곧 광장이 환히 보이는 곳에 위치를 잡았다. 흐릿하나마 하나씩 괴인영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낯익은 얼굴들, 몇 명의 중년대한과 일지삼공 고격, 현천검 조한영... 바로 점창의 추적대였다. "놈들이 맞느냐?" 일지삼공 고격의 물음에 중년대한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과거 태을장 구영소를 따라 강산과 송자영을 습격했던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맞습니다. 한데 그때는 두 명이었는데... ." "어떻게 두 놈이냐?" "중앙의 칼을 찬 젊은 놈과 그 옆에 있는 계집, 그렇게 두 명입니다." 고격은 이내 고개를 돌려 다른 대한에게 물었다. "저들중에 네가 본 놈들도 있느냐?" "그렇습니다. 맨 좌측의 장한과 그 옆의 덩치가 좋은 삼십 대 장한, 그리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늙은이입니다." 대답을 한 자는 곽가량 등이 원주민 마을로 물품을 구입하러 갔을 때 시비를 걸다 혼쭐이 난 자였다. "흠, 역시 같은 놈들이었단 말이지." 고격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광장(廣場)은 촘촘히 건물에 둘러싸인 남북이 긴 타원형으로, 짧은 쪽이 이십여 장 긴 쪽이 삼십여 장에 달했다. 이때 강산 일행이 있는 곳은 북쪽 모퉁이로, 가장 가까운 집과는 오 장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고격은 그쪽을 공격지점으로 잡았다. "모두 저 집 뒤로 이동한다. 창휴(昌畦), 넌 다섯 명을 이끌고 주위에 잠복해 있다가 도망가는 자들을 척살(刺殺)해라. 나머지는 두 패로 나눠 좌우에서 협공한다." "예." 창휴란 중년인의 답을 받은 고격은 이어 조한영을 향해 말했다. "사제가 한 패를 맡아 좌측을 공격하게. 난 우측을... ." 말을 하던 고격은 문득 조한영이 자신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걸 깨달았다. 조한영은 자못 신중한 기색으로 어느 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격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강산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뭘 보는 겐가?" 조한영이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사형, 재고해봐야 겠습니다." 고격은 자신의 사제가 너무 감상(感傷)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술에 취한 놈들을 상대하는 게 안됐다는 말인가? 하지만 놈들은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일세. 막내가 당했지 않나? 강호도의 따위 생각하다가는 오히려 이편이 당할 수도 있네." 조한영이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은 척살 계획 자체를 재고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고격은 조한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한영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고격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빠짝 굳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조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의 긴장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사형, 곰방대를 물고 있는 자를 잘 보십시오. 누군가 생각나는 인물이 없습니까?" 여전히 까닭을 모르면서도 사제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서 무언가 불안을 느낀 고격은 이항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뻐끔뻐끔 연신 곰방대를 빨아대는 조는 듯한 인상의 육순노인. 그저 그런 얼굴에 그저 그런 분위기, 어느 마을에 가도 일 각 이내에 열 수레 이상은 채울 듯 싶은 흔한 인상의 노인일 뿐이었다. 고격이 막 입을 열어 모르겠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낌새를 챘는지 조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자는 편복노조 이항입니다." "뭣이?" "십여 년 전 양양(襄陽)에서 본 기억이 있소이다. 그리고 우측의 단봉(短棒)과 창(槍)인지 도(刀)인지 애매한 무기를 메고 있는 자, 그 자의 무기를 주목해 보십시오. 세 갈래로 갈라져 호미처럼 휘어진 양 날을." 문정인을 바라보던 고격이 끝내 눈살을 찌푸리자 조한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단봉과 저 창인지 도인지 모를 물건은 본래 둘이 아닙니다." 순간 고격의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삼첨양인도!" "그렇습니다. 저 자가 바로 초자도 문정인입니다. 더우기 막내를 해친 자는 저 둘이 아닙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저 아홉 중 만만히 볼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사형과 제가 둘셋을 처리할 순 있겠지만, 수하들에게 남은 여섯을 맡으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놈들이... 무엇 때문에...?"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상대의 전력(戰力)에 고격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멍청히 술판을 응시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일 각, 일 각... . 공격을 하자니 결과가 너무 빤했다. 그렇다고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무언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생각해 보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어찌해보기엔 전력의 차가 너무 컸다. 고격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물러설 수밖에.' 억울했지만 삮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고격이 막 입을 열어 후퇴를 지시하려할 때, 믿을 수 없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저 놈!' 고격은 급히 고개를 돌려 조한영을 보았다. 조한영 역시 그를 보았는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한영의 고개가 끄덕이고 두 사람은 환히 웃음지었다. "이동한다." * * * 강산은 술기운이 오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고 떠드는데 정신이 팔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흥겨운 판을 깨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원래 이러한 소란스러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였다. 조금 더 있다가는 술에 완전히 취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강산은 조용히 장내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난 강산은 작은 공터에 이르렀다. 반경 삼장여의 공터로, 좁지만 아득해 보이는 곳이었다. 강산은 한 그루 나무에 기대앉았다. 알딸딸한 취기에 아득한 공간, 편한 자세가 어우러져 더없이 편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스르르! 절로 눈이 감기고 포근함이 가슴에 내려 앉았다. 지끈지끈 마음 가득했던 의문들은 사라지고 즐거웠던 옛시절이 밀려들었다. '진범(眞凡), 재무(財無), 상춘(常春), 영우(靈愚)... .' 그들과 어울려 날이 새도록 산과 들을 쏘다녔던 기억, 가재를 잡고 멱을 감던 기억, 사부를 만나 석류를 받았던 기억, 고달팠던 체력단련 과정, 그리고 오년 여에 걸친 훈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처음으로 무상삼도(無上三刀)를 전수 받던 날의 흥분..., 그 모든 기억들이 바로 어제인 양 생생히 떠올랐다. 강산은 빙그레! 웃음지며 모처럼 만의 휴식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식은 오래가질 못했다. 폐부를 찔러오는 감각에 강산은 깨어났다. '살기(殺氣)!' 어두운 숲 사이로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그는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 윤곽이 뚜렷해졌다. 문정인이었다. '입막음을 하자는 것인가?' 애써 살기를 감추지 않는 점에서 문정인의 단호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과연 가까이 다가선 문정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삭막한 것이었다. 문정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요즘 강형께선 제게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강산이 대꾸를 않자 문정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가 있소? 있다면 들어보고 싶소만." 강산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형이 짐작하는 것에서 과히 틀리지 않을 거요." 문정인의 눈에서 번쩍! 광채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이 야릇하게 변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구려." "문형이 그렇게 미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소." 멈칫했던 문정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칭찬이라면 과분하오." "칭찬일 리가... 그건 욕이오." 일순 문정인의 안색이 벌겋게 변했다. 강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당신답지 않은 일이오. 그렇지 않소?" 아무 말 없이 강산을 노려보던 문정인이 고개를 끄덕끄덕 천천히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좋지, 좋아.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는지 궁금했다구." 어느 새 문정인의 오른손에는 양인도가, 왼손에는 단봉이 쥐어졌다. 강산은 잠시 묵묵히 문정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결합하지 않을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