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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49편 (49/59)

2026-09-24 21:27:20 조회 21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저 악랄한 여자를 살려두란 말이오?" 황약사가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병묘는 여전히 두 번 깜박거리고는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옆에 있던 사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황약사 님은 사파의 인물이라 예의 범절도 없고 정도 없다고 하던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군요." 황약사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날 두고 하는 말이오?" "그래요." "당신이 감히 내 험담을 하는 거요, 지금?" "네, 그랬어요. 어쩌시겠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황약사는 대뜸 두 손가락을 뻗어 사불의 두 눈을 찌르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는 얼른 손가락을 거두었다.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어도 날 헐뜯는 소릴 지껄이고 다니겠소?" "그럴 거 없이 절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황약사는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엄청난 웃음 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래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아형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가 호탕하게 말했다. "여보, 세상에 나만큼 잔인하고 삭막한 놈이 없는 줄 알았더니 여기 나보다 더 악랄하고 불쌍한 여자가 있구려!" 그는 뒤로 돌아서더니 번쩍이는 눈으로 사불을 바라보았다. "목주 아가씨, 내가 주례를 서겠소." 사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병묘를 부축해 황약사 앞에 앉았다. 그녀는 황약사가 시키는 대로 아형의 영전에 세 번 절을 하고 나서 병묘를 부축해 절하는 걸 도왔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맞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슬픔에 젖도록 하는 애달픈 눈물이었다. 혼례가 끝나자 사불과 사내아이는 병묘의 의자를 끌고 영당 밖으로 나가 배에 올랐다. 서둘러 출항 준비를 마친 배는 닻을 올리고 도화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떠나는 배를 보면서 황용은 남녀간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독약을 먹여 병신을 만든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홧김에 그랬다면 해독제를 먹여 낫게 해주면 될 일이지 병신이 된 사람한테 자청해서 시집을 가다니, 그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물어 보려 했으나 어머니의 영당에 들어간 아버지는 어머니의 초상화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에 가서 먹을 것을 챙겨 들고 동굴로 갔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서 소리쳤다. "노완동 할아버지, 뭐하세요?" 안에서 노완동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얘,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 난 지금 절기(絶技) 한 가지를 수련하고 있는데 이건 비밀이거든." "할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우리 아버질 이기진 못해요." 황용의 말에 화가 난 노완동이 벌개진 얼굴로 달려 나왔다. "뭐, 네 아버질 못 이긴다고? 그 황 괴물이 빌어먹을 도깨비 같은 술수를 써서 그렇지, 진짜로 한 번 겨뤄 봐라. 우리 사형 왕중양이 살았을 때 황 괴물은 그에게 꼼짝도 못했다구. 왕중양만 보면 설설 기었지. 정말이야." 그러나 황용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할아버지 입으로 우리 아버지한테 다리를 분질렸대면서요? 할아버지 무예가 그 정도면 사형 무예는 오죽하겠어요? 뻔한 거짓말을 왜 하세요?" 황용의 말을 들은 노완동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황용은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왜 또 우세요?" "나 같은 거야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지만 우리 사형까지 비웃음을 당하다니……, 세상에……." 황용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유, 시끄러워 죽겠네!" "난 다른 건 다 참아도 눈물은 못 참는단 말이야. 네가 우리 사형 왕중양이 천하의 최고 고수라는 걸 인정하면 모를까, 그전에는 못 그친다, 아이고!" 그러면서 노완동은 더욱 시끄럽게 울어댔다. 사실 황용도 아버지에게 들어서 왕중양이 화산의 무예 시합에서 승리한 천하의 최고 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천하의 고수라는 건 저도 알아요. 이제 됐어요?" 노완동은 눈물을 뚝 그치고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왜 몰라요? 황약사 딸인데." "맞아, 그럼 됐다. 하여간 네 아버진 고작해야 세 번째가 될까말까 한다구." "왕중양이란 사람이 죽었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최고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도대체 누가 최고예요?"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 아버진 아니야." 노완동은 왕중양의 자리가 황약사나 구양봉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을 옛날부터 깔보고 있는 형편이었고, 황약사는 자기를 16년 동안이나 섬에 가둬 두고 있는 자이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진 영웅의 재목이 아니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한테 큰 빚이나 진 것처럼 항상 얼굴을 상추잎처럼 시퍼렇게 하고 다니는데, 난 빚진 게 없다구. 흥, 허구헌 날 도깨비 수작이나 부리는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겠니? 넌 네 아버질 닮으면 안 된다. 알았지?" 그는 황용이 가지고 온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혼자 계속 떠들었다. "지금 천하에는 남제, 북개, 동사, 서독 이렇게 네 명의 고수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북개 홍칠공이 그중 나은 것 같아. 생각해 봐라. 남제처럼 황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림의 최고 고수가 되겠니? 잔머리만 굴리는 네 아버지도 안 되고, 구양봉처럼 사악한 자는 더 말할 것도 없어……." 한창 신나게 지껄이다가 문득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든 노완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약사가 황용의 등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황용에게 말했다. "황용야, 이제 집에 가거라." 그러나 황용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아버지도 맨날 저한테 집에만 있으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전 답답해 죽을 것 같아요." 노완동은 그런 황용을 바라보며 낄낄낄 웃기만 했다. 황용은 등뒤에서 들려 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영감, 내가 지금 잔머리만 굴려서 영웅의 재목이 못 된다고 말했소?" 노완동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웠다. "흥, 귀도 밝네그려." "그래, 당신이 보기엔 흥칠공이 영웅이란 말씀이오?" 황약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묻자 그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소. 그 사람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은 천하에 드문 무예인데다 그를 따르는 수하의 무리가 수십만에 이른단 말이오. 홍칠공은 당신처럼 손바닥만한 섬에서 벙어리 노복 몇이나 거느리는 그런 째째한 사나이가 아니오." 말을 마친 노완동은 황약사에게 한 방 얻어맞을까 봐 얼른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동굴 안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황약사를 약올렸다. "당신이 16년 동안이나 중원 출입을 하지 않는 것도 홍칠공이 무서워 그러는 줄 내가 모르는지 알아? 그의 타구봉에 맞으면 박살이 나니까." 황약사는 머리가 허연 영감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놀리고 도망가는 것이 우스워 허허 웃고 말았다. 그러나 노완동은 분풀이를 하려는 것인지 그를 계속 놀려 댔다. "하긴 무서운 게 어디 홍칠공뿐인가? 구양봉도 무섭고 남제도 겁날 거야. 당신이 날 이 섬에 가둔 건 나한테 《구음진경》을 빼앗아서 좀더 실력을 기른 다음에 그들과 대적하려는 계산 때문이었어.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알아?" "어린애 앞에서 그만하시오, 영감." 황약사가 점잖게 나무랐으나 노완동은 손뼉을 치면서 혼자 웃고 떠들어댔다. "황용아, 네 아버진 말이다, 자나깨나 《구음진경》을 훔칠 궁리만 하고 있단다. 하하하!" 결국 약이 오른 황약사는 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용아, 어서 집에 가지 않고 뭘 하는 게냐? 다시 한 번 이 노인에게 음식을 날라 줬다간 네 다리가 성치 못할 줄 알아라! 음식이 남으면 개나 줘!"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황용은 설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갔다. 황용이 달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노완동은 혀를 끌끌 찼다. "화풀이할 데가 없어 저렇게 예쁘고 착한 딸한테 화풀이를 하나 그래?" "영감, 그러지 말고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봅시다." "흥, 어림없는 소리. 실력을 보자면서 날 한 방 먹일려고? 그렇게 겨루고 싶으면 맹세를 어기고 이 동굴로 들어오시지!" 황약사는 슬그머니 웃으며 노완동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마 이 장난꾸러기 노인이 없었다면 아형을 잃은 황약사는 이보다 훨씬 삭막하게 살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황용은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이럴 때 어머니 가슴에 안겨 실컷 울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의 설움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한마디의 위안이, 어머니의 손길이 너무나 그리워 황용은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거면 왜 날 낳으셨어요? 아버지는 매일 엄마 초상화만 보시고 내게는 관심도 없으세요.' 울다 지친 황용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밤이 이슥해서 황약사는 딸의 방으로 가 보았다. 눈가에 눈물자국을 남긴 채 곤히 자고 있는 딸을 보니 그의 마음도 쓰라렸다. 그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의 얼굴에 묻은 눈물자국을 닦아 주고 한참 동안 딸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용은 커 갈수록 제 어머니를 닮아 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딸의 방에서 살그머니 나왔다. 문득 잠에서 깬 황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고, 별빛을 받은 바다가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불쑥 도화도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원으로 가서 어머니가 계시던 호심장으로 가자. 거긴 아주 멋질 거야.' 어린 황용은 자기가 떠나 버리면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실 것인가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떠나겠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급해져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짐을 꾸린 황용은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서재로 살금살금 가 보았다. 그곳의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잠든 게 분명했다. 캄캄한 바닷가로 달려 나간 황용은 기슭에 있는 작은 배 하나를 풀어 힘겹게 밀어낸 다음 바다로 나아갔다. 그녀는 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육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날이 밝아 오자 불그레한 햇빛을 받은 바닷물의 수많은 물살이 비늘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에 검붉은 육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황용은 더욱 힘을 내어 노를 저었다. 한 시간쯤 지나 육지에 닿은 황용은 배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걸어갔다. 이른 새벽에 바닷가에 앉아 있던 사내 네 명이 바다 쪽에서 걸어오는 황용을 발견했다. 한 사내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어이, 초대각. 저기 좀 봐. 바다에서 선녀가 올라오네그려." 그 말에 초대각이란 자가 고개를 돌려 멀리서 다가오는 황용을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게 생긴 계집인데……." 한 사내가 공연히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봐, 자네에게 시집을 마음이 있는지 한 번 떠봐. 그렇게만 되면 자넨 복이 넝쿨째 들어오는 거라구." 밤새 배를 저어 오느라 지치고 배고픈 황용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보세요, 먹을 것 좀 주세요." 그녀가 인사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사내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먹을 것 좀 달라는데 왜 웃는 거예요?" 황용이 깜찍하게 말하자 사내 한 명이 음탕한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같이 예쁜 사람이 먹을 게 없어 걱정이라니, 말이 되나? 우리 초대각 형님에게 시집만 오면 그까짓 먹을 게 문제겠어? 매일 횐 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여 줄텐데." 젊은 아가씨가 동행도 없이 혼자 바닷길을 걸어 오자 황용을 얕잡아 본 사내들은 그녀에게 거침없이 음탕한 눈길을 던졌다. 그들의 응큼한 속내를 눈치챈 황용은 우선 배를 채울 요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짐짓 새침하게 굴었다. "아이 참, 누구한테 시집을 가라는 거예요?"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사내들을 살짝 흘겨보았다. 한창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환하고 어여쁜 황용이 교태를 부리자 촌놈들은 그만 혼이 다 달아나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그……그러니까 말이야……, 저 대각 형님이……." 그들이 바보처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황용이 얼른 말머리를 낚아챘다. "그건 그렇고, 난 배고파 죽겠단 말이에요. 일단은 허기를 풀어야 다른 생각을 하죠." 초대각이란 사내는 황용이 벌써 제 계집이 된 것처럼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고, 공연히 그에게 선심을 썼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내들은 후회막급한 표정을 지었다. 제 뺨이라도 찰싹찰싹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용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들에게 재촉했다. "아, 얼른 먹을 것 가져오지 않고 뭐해요? 이러다 굶어 죽겠네." 사내들은 부리나케 자기의 오두막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챙겨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을 보니 튀긴 생선 한 접시에다 불고기 한 접시, 그리고 고기국과 술이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황용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 했다. 그러나 황용은 손을 내저었다. "이러지 말아요.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당신들과 한상에서 밥을 먹어요?" 그러자 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음식은 별로 맛이 없었으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황용은 그것들을 게눈 감추듯 재빨리 먹어 치웠다. 배불리 먹고 난 황용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참, 그러고 보니 은자가 없네. 혹시 은자 가진 거 있어요?" 초대각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은자? 은자는 뭐하게?" "아이 참, 옷을 해 입어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과 내가 한 벌씩 해 입고 이 사람들도 한 벌씩 입어야죠." "쟤들은 왜 옷을 해 입히지?" 초대각이 이상한 표정으로 묻자 황용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저렇게 꾀죄죄한 옷을 입고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란 말이에요? 창피해서 어떻게 결혼식을 해요?" 초대각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사내들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은자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 황용은 그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많이 필요하니까 있는 대로 다 가져와요!" 그러나 초대각이 가져온 은자는 겨우 2, 30냥밖에 안 되었다. 황용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유, 겨우 이것밖에 안 돼요? 당신은 이걸로 나한테 장가들 생각이었어요?" 급한 김에 초대각은 다른 사람에게 은자를 빌리려고 했지만 다들 없다고 잡아떼었다.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생각했다. '초대각을 싫다 한다면 저 계집은 내 차지다!' "이것들 보세요. 나는 은자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시집갈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들 가서 은자를 가져와 보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들은 엉덩이를 들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황용 앞에 은자가 네 무더기나 놓여졌다. 네 명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황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황용은 은자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들 걸 전부 다 합쳐도 이것밖에 안 되는군요." 네 사람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얼마나 더 있어야 되는데?" "없으면 관둬요." 그녀는 초대각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그 걸레조각 같은 옷을 벗어요. 정나미 떨어진다구요." 속옷을 입지 않은 초대각이 옷을 벗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사정을 짐작한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 한집안 식구 같은 사람들인데 어때요?" 황용의 달콤한 목소리와 꽃 같은 미소에 얼이 빠진 초대각은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는 용기를 내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은 활랑활랑 뛰고 있었다. 그는 얼른 옷을 벗어 황용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황용은 초대각의 옷에 은자를 척척 싸서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그녀가 열 발자국쯤 멀어지자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년이 내 돈을 훔쳐 간다!" 그들은 황용을 잡으려고 앞을 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년 잡아라!" 사실 황용이 아무 짓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를 곱게 보낼 위인들이 아니었지만, 깜찍하게 속여서 돈까지 뜯어 가자 기가 막히고 창피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뒤를 돌아본 황용은 사나운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쫓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녀를 쫓아오던 사내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우릴 가만두지 않겠다구? 그래, 이불 속에서라면 가만두지 않아도 되고말고!" 그들은 킬킬거리며 황용에게로 다가들었다. 순간 그녀가 손을 내밀자 제일 앞에 있던 초대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더니 그대로 쿵 쓰러졌다. 나머지 사내들이 놀라 쓰러진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초대각! 정신차리게!" 입으로 피를 토한 초대각은 다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 명의 사내는 깜짝 놀라서 황용을 쳐다보았다. "저, 저 년이 사람을 죽였다!" 황용은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이 놈들, 너희들도 초대각의 저승길을 따라가겠느냐?" 그들은 황용의 눈치를 보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32장 우가촌의 혈투 임안성 부근에 황폐하고 고요한 우가촌(牛家村)이 있었다. 때는 한창 추수철인 팔월이라 사람들은 모두 곡식을 걷으러 들판으로 나가서 인지 마을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한산했다. 그러나 가까운 전당강에선 힘찬 물소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들려 왔고, 강 기슭의 단풍 든 나무들은 머리에 붉은 불을 이고 있는 듯했다. 몇몇 초가집 굴뚝에서 흰 연기가 가냘프게 피어 오르더니 맑고 푸른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이 고요한 마을에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을 탄 세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오다가 작은 주점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말고삐를 비끄러맸다. 그들 모두 똑같은 무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버릇처럼 입가에 비웃음을 달고 있는 마른 체구의 사나이는 특별한 무기를 감추고 있는지 허리 부분이 유난히 불룩했다. 큰 키에 퉁방울눈을 한 사나이는 허리에 패도 하나를 차고 있었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마지막 사나이는 손에 한 쌍의 판관필(判 官筆)을 쥐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주점 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 주인이 어딜 갔나?" "문을 두드려 봅시다. 이쯤에서 요기를 하고 가야 하니까." 그때 뒤에서 히히히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산발한 여자아이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얘, 여기가 주점이냐?" 여자아이는 똑같이 되물었다. "여기가 주점이냐?" 키 큰 사나이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여기서 술과 음식을 파느냐 말이야!" 바보 같은 아이가 대답도 없이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사나이들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애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연신 히히거리며 바가지에 삶은 고기를 담아 가져오고 술도 한 단지 내왔다. 그녀는 사나이들이 앉아 있는 탁자에 와서 입을 헤 벌린 채 그들을 보고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뭐라고 물어도 아이는 바보처럼 웃기만 할 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키 큰 사나이가 주방으로 들어가 젓가락과 그릇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사나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여자애는 여전히 그 옆에 서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들의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놈이 마음을 바꿔 먹은 게 분명하다니까. 그러니까 임안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거 아니겠소?" 키 큰 사나이의 말에 마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림없는 소리.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어젯밤에도 황궁의 그림 한 폭이 없어졌다네. 놈이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다른 사나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이 부근에 있다가 밤이 되면 황궁으로 기어들 거요. 한데 놈의 안목이 대단한 모양이오. 웬만한 건 손도 안 대고 금은으로 된 그릇이나 오래 된 그림만 훔쳐 가는 걸 보면 말이오. 상서방 이태감의 말을 들으니 놈이 폐하의 문진(文鎭)과 옥척(玉尺)까지 가져갔다 하오." "어쨌든 이번엔 기필코 놈을 잡아야 해. 이번에도 놓치면 위에 계시는 나으리들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 사람 모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들은 황궁의 시위(侍衛)들이었는데, 대력응조(大力鷹爪) 국경(鞠敬)과 철장(鐵掌) 수평(隋平), 괴도(槐刀) 팽명(彭明)이었다. 그들이 울적한 심사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는데 주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발소리가 얼마나 가벼운지 그가 들어설 때까지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쩔뚝쩔뚝 걸어 들어오다가 술을 먹는 세 사람을 보고 잠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금방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머리를 조아렸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얼른 안주 몇 가지를 올릴테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괴도 팽명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큰소리를 쳤다. "아니, 무슨 주점이 대낮에도 텅 비어 있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