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46편 (46/59)
그때 누군가 문 밖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여인의 목소리였다. "단황 나으리, 문을 열어 주세요!" 네 호위병은 구양봉이 남제에게 손을 쓸까 봐 그의 등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들여놓으면 자기들한테 유리할 듯 싶어 농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온 사람은 황비 영고였다. "황비 마마시군요!" 농부가 그녀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내가 주백통을 구해 내지 못하면 그는 도화도에서 죽을 거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암만 생각해 보아도 자기가 도화도에 가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남편인 남제와 함께 가면 황약사도 할말이 없을 것이었다. 그녀가 주백통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운남 대리사에서 황비로 있을 때였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에게 그런 도움을 청하자니,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이 워낙 화급하므로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집 안에 들어서고 보니 눈앞에 엉뚱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구양봉이 계속 남제를 다그쳤다. "남제, 끝까지 응하지 않을 셈이오?" 남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영고는 매초풍과 진현풍, 그리고 남제와 구양봉을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구양봉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노독물이신가요?" 구양봉이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영고가 살짝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이 노독물 구양봉일 리가 없어요. 구양봉이라면 이처럼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비신사적이란 말이오?" "제 남편인 단황이 말하길 왕중양의 선천공과 노독물의 합마공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하다더군요. 대리 단씨의 무예인 일양지공, 도화도 황약사의 탄지신공, 개방 방주 흥칠공의 강룡십팔장도 합마공을 따라가지는 못한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고명한 인물이 어떻게 상대방이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타서 공격하겠어요? 이 소식이 알려지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지요." 구양봉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바로 남제를 싫어한 황비였군. 정말 대단한 여인이오. 여인의 몸으로 감히 단황을 거절하다니……. 하하하! 그런데 이처럼 알뜰하게 남제를 생각하면서도 싫어한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래. 아마 그게 헛소문인가 보오. 하하하!" 이때 단지흥 덕분에 여우독을 말끔히 씻어 낸 매초풍과 진현풍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진현풍이 구양봉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독, 우선 나와 겨뤄 봅시다!" 구양봉은 비웃는 투로 말을 뱉었다. "네 놈이 감히 나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매초풍과 진현풍이 구양봉과 한판 붙으려 할 때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어부! 이 폭포에 금으로 만든 어린애가 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 목소리를 들은 구양봉의 정신이 산란해졌다. 그는 구양봉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일 큰 골칫거리인 사람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둥에 조롱박을 잔뜩 짊어진 개방의 방주 홍칠공이었다. 그는 손에 옥죽봉을 들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집 안에 들어선 홍칠공은 구양봉이 남제의 어깨에 장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구양통,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 해치는 짓을 계속할 작정이냐?" 흥칠이 덤벼들자 구양봉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그를 멈춰 세웠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오면 남제의 목숨은 없을 것이다!" 흥칠공은 흠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구양봉이 의기양양하여 소리질렀다. "이 거지야, 남제를 없앤 다음 너와 자웅을 겨루겠다!" 흥칠공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남제의 호위병들에게 물었다. "이보게, 자네들 혹시 가지고 있는 암기가 없나?" 어부와 나무꾼은 즉시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는데, 두 사람의 소매 속에 아주 가는 죽통을 몇 개 감추어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것으로 구양봉을 겨누었다. 홍칠공이 물었다. "그게 뭔가?" 어부가 대답했다. "운남의 독벌렙니다. 만일 서독이 우리 단황 나으리한테 손을 대면 우린 이 벌레를 쏠 것입니다. 맛이나 보라지요." 흥칠공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내가 소리를 지르면 그걸 쏘게. 구양봉이 장력을 휘두르는 순간 자네들도 그걸 쏘는 거야." 홍칠공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거야. 노독물이 심보가 사납긴 하지만 이 거지가 여기 있는 한 함부로 손을 쓰진 못할 테니까." 구양봉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이 거지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홍칠공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 놈은 내가 잘 안다. 여긴 영고도 있고 나도 있고 대리의 사대 고수도 있다. 네가 남제에게 손을 대면 그 순간 넌 죽은 목숨이야. 그러니 마음대로 해 봐라." 구양봉은 잠시 머리 속을 굴렸다. '남제처럼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법수가 잘 안 통하니 단번에 죽지 않을지도 몰라. 게다가 흥칠의 말대로 남제를 죽여 버리면 이자들이 필시 내게 덤벼들텐데……. 내 목숨까지 걸고 남제를 없앨 수야 없지. 하긴, 서두를 필요 있나?' 홍칠은 구양봉이 잠시 주저하는 듯싶자 겁을 먹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놈이 황약사의 두 제자를 죽이면 내가 황약사에게 찾아가 다 일러바칠 거야. 나와 황약사가 힘을 합치면 너도 문제가 심각해질걸!" 그 말을 들은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홍칠 하나 때문에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남제를 살려 줘야 자기 체면이 서는 것 같았다. 그는 남제의 둥에서 손을 떼며 능청맞게 웃었다. "저 거지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구양봉은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사람들 모두 그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옷깃이 날리는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소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홍칠공은 천하의 다섯 고수 가운데 남제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는 남제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그러나 매초풍과 진현풍을 보자 그의 얼굴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들은 정말 한심한 것들이구나! 이 《구음진경》은 사마왜도(邪魔歪道)가 아니라 양생(養生)을 위한 거야. 어찌하여 그런 잔인한 무예로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느냐?" 홍칠의 불 같은 기세에 눌려 두 사람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남제가 온화하게 물었다. "매초풍, 이리 와서 말해 보아라.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지독한 법수를 익혔느냐? 열 손가락으로 사람의 머리를 깨뜨리다니……." 매초풍과 진현풍은 《구음잔경》하권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쫓기듯 그 무공을 익힌 까닭을 말했다. 《구음진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부서진다. 적의 우두머리[首腦]를 깨뜨리면 썩은 흙처럼 구멍이 뚫리리라.> 적의 우두머리를 깨뜨리라는 말은 적의 요해처를 공격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을 다섯 손가락으로 적의 머리를 부수뜨리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무예를 연마할 때 꼭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남제가 탄식하며 말했다. "중양진인이 그 《구음진경》을 없애 버리려고 했을 때 난 이렇게 말했었네. '그 책이 훌륭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들한테 약이 될 테지만 그것이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에 화근이 될 것이오.'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고 사람마다 자기 길을 가는 것일세. 자네들은 앞으로 선업을 쌓아 죄과를 뉘우치게." 홍칠공은 매초풍 부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물러가거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죽여 버리겠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홍칠과 남제에게 예를 올리고는 돌아서서 길을 떠났다. 남제는 홍칠공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일 자기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홍칠공은 흑풍쌍살을 죽여 천하의 화근을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홍칠공에게 읍하며 말했다. "그대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소이다." 남제는 아내인 영 고에게도 예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오랜만이구료. 할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남편에게 노완동을 구하러 도화도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러 온 영고는 그가 흑풍쌍살을 구해 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두 사람에게 읍을 하고 물러 나왔다. 남제 역시 떠나는 영고를 붙잡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록 점잖게 말을 주고받았지만 심기는 퍽 불편했으므로 남제는 영고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강호를 주름잡기엔 자신들의 무예가 턱없이 무르고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칠공이나 구양봉같은 고수를 만나면 법수도 써 보지 못하고 잡힐 것이 뻔했다. 그들은 심산 속에 은거하며 8년이고 10년이고 무예를 잘 익힌 다음에 그들과 다시금 겨루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들이 한참 걸어 울창한 숲에 이르렀다. 멀리 숲 속에 여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들은 하얀 소복을 입고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두 사람을 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인들이 앉아 있는 나무 밑을 지나야 길을 갈 수 있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낀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저들을 상관하지 말고 얼른 지나갑시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여인들이에요." 그러나 진현풍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여인들이 고수도 아닐 텐데 뭘 그리 걱정하는 거요?" 진현풍은 그 여인들에게로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여인들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현풍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서 길을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그 순간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여인들 뒤에서 몇몇 사내들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계속 휘파람을 불자 수많은 뱀들이 기어 나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싼 뱀들이 그들에게 기어들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황급히 긴 채찍을 꺼내 마구 휘둘렀다. 채찍에 맞은 뱀들은 몸뚱이가 동강난 채 피비린내를 풍기며 픽픽 널브러졌다. 그러나 다른 뱀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두 사람의 몸으로 기어올랐다. 진현풍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 었다.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를 익힌 후 그들은 병장기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이때는 워낙 많은 독사들이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통에 병장기를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10여 마리의 독사들을 물리치지 못하자 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오지 않고 뭘 해요!" 진현풍이 번개같이 달려와 10여 마리의 살모사들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독사들의 몸뚱이에서 뿜어 나온 피가 두 사람의 옷에 마구 튀었다. 매초풍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희들은 웬 놈들이냐!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떳떳하게 나서지 않고 이따위 뱀들을 앞세우다니, 수치스럽지도 않느냐!" 그러자 누군가 소름 끼치는 소리로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 웃음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노독물 구양봉의 웃음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숲 속에서 구양봉이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뱀몰이꾼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뱀몰이꾼들이 피리를 불자 독사들이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이 매초풍을 쏘아보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화가 난 매초풍은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 같은 고수가 비겁하게 뱀무리를 앞세우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빌어먹을 서독 같으니!" 구양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 연놈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죽였을 것이다." 진현풍도 부아가 치밀었지만 매초풍의 손을 잡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구양봉 같은 고수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구양봉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게 아쟁이 있는데 한 곡 연주할 테니 들어 보아라." 그리고는 또 징그럽게 웃었다. 음률에 밝은 매초풍은 구양봉이 아쟁을 연주하겠다는 말에, 이처럼 거친 남자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양봉이 나무 밑에 앉자 두 여인이 옥으로 된 자그마한 탁자를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또 한 여인은 그에게 옥그릇을 갖다 주었는데 그 옥그릇에 깨끗한 물이 담겨 있었다. 구양봉은 옥그릇의 물에 손을 씻은 다음 여인의 앞섶에 손을 닦았다. 횐옷을 입은 다른 여인이 아쟁을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았다. 진현풍은 그것을 지켜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부님의 <벽해조생곡>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탄복하는 곡이지만 그분은 너처럼 이렇게 요란을 떨지는 않는다. 저렇게 허세를 부리는 걸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신통할 리가 없어.' 그러나 매초풍은 진현풍과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구양봉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지켜 보다가 그가 이처럼 진지하게 연주 준비를 하자 은근히 겁이 났다. 그녀는 구양봉을 처음 만났지만 언행이 거칠고 싸움을 할 때도 인정사정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아쟁 연주에 저토록 정성을 들이는 것은 필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구양봉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둥기당당 아쟁을 타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손끝에서 아쟁은 구슬프면서도 박력 있게 울려 퍼져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아쟁의 음이 높아지면 마음도 그와 더불어 부풀어올랐고, 리듬이 빨라지리면 빨라진 만큼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구양봉이 계속 빠른 리듬으로 아쟁을 연주하자 매초풍과 진현풍의 맥박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매초풍은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풀에 지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떨어뜨리고 진현풍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서로의 몸에 기를 보내 그 아쟁 소리를 막아내려고 애썼다. 한편 구양봉의 아쟁 소리는 더욱 격렬해져서 마치 천군만마가 내달리고 징과 북이 일제히 울리는 듯했다. 두 사람은 머리에 거대한 압력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 밑의 태양혈로부터 가슴과 오장육부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압력을 받아 견디기 어려웠다. 아쟁 소리가 극에 달했을 때 가슴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진현풍은 매초풍을 밀어젖히며 소리질렀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그는 비틀거리며 구양봉한테 달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외쳤다. "난 당신이 싫어요! 우리 집은 건강부에서 으뜸가는 부호이고, 부친은 진백만이란 어른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글을 배워 예절을 압니다.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자로 하여금 그렇게 당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사매에겐 또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이 음심을 품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당신을 좋아할 수 있었겠어요? 사부님과 제자 사이에 이런 추문이 생겨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진현풍은 혼미한 정신으로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말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가 이제까지 사부 황약사와 매초풍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진현풍은 구양봉에게 한 장을 먹이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구양봉이 갑자기 느린 곡을 타기 시작했다. 그 곡은 남녀가 이불 속에서 듣기 안성맞춤인 음탕하고 질퍽한 것이었다. 진현풍은 갑자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얼굴을 푸들푸들 떨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물론 사부님에 비하면 난 별볼일없는 놈이야. 하지만 세상에 사부님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분은 외모도 빼어나고 재능도 출중해. 못하는 게 없으시지……. 사매가 그분을 사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하지만 그분은 절대로 사매를 좋아하지 않아. 사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라구……."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진현풍은 구양봉의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통곡을 하였다. 매초풍도 아득한 표정으로 일어나 구양봉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광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구양봉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바둑을 배우는 제자가 하늘에 나는 기러기를 활로 쏴서 잡을 궁리만 하면 바둑을 배울 수 없다고 하셨죠? 저도 바둑을 배우는 그 제자처럼 마음속엔 온통 사부님 생각뿐인데 가르침이 어떻게 귀에 들어오겠어요?" 매초풍은 구양봉에게 걸어 가면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사부님, 전 《구음진경》에 적혀 있는 무예를 닦은 후에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처음엔 사부님께 져 드리겠어요. 두 번째는…….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제가 정말로 사부님을 이기지 못하면 절…… 용서해 주시겠어요?" 매초풍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께선 아마 절 받아 주지 않으시겠죠? 그럼 전……, 사부님 손에 죽겠어요." 아쟁 소리에 정신을 잃은 진현풍과 매초풍은 마음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구양봉의 아쟁 소리는 갈수록 음탕해졌다. 횐옷을 입은 여인 몇이 나타나 진현풍의 음심을 자극하는 요사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현풍을 유혹하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이런 광경을 보는 진현풍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본 매초풍이 꽥 소리쳤다. "어서 눈을 감아요! 눈을 감으란 말이에요!" 그러나 진현풍은 그녀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음 소리까지 내면서 여인들을 응시했다. 아쟁 소리는 더욱 기세가 더해졌다. 삼월의 누각에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노곤한 미녀들이 향기로운 육체를 드러내고 백옥 같은 팔을 뻗어 사내들을 끌어안는, 그런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음률이었다. 매초풍은 사부님이 섬 기슭에 서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매초풍에게 다가왔는데, 그의 눈빛에는 다정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의 부인 아형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매초풍은 가벼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사부님을 바라보자 그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매초풍은 가슴이 몹시 뛰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두렵지 않으세요? 사부님이 자기 제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부님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가? 천하의 황약사가 아닌가? 누가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겠느냐?" 사부님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도화도로 걸어갔다. 때는 바로 봄철이어서 온 섬에 복승아꽃이 만발해 있었다. 갑자기 아쟁 소리가 멎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진현풍은 온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매초풍도 여전히 구양봉을 쳐다보면서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이 코웃음을 쳤다. "도화도 사람들의 마음속엔 온통 복숭아꽃뿐이로군. 이 제자들의 꼴을 황 괴물에게 보여 주면 아마 기절할걸." 구양봉은 매초풍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대 정도의 미인이라면 나한테 제일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지. 무예를 배우고 싶다면 내 밑으로 오라구. 날 사부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낮에는 내게 무예를 배우고 밤에는 사랑을 배우는 거야." 구양봉은 이렇게 말하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정신을 차린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를 보았으나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저 쏘아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구양봉에게 아혈을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매초풍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노독물, 우릴 죽여라! 우리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네 놈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구양봉은 매초풍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진현풍에게 말했다. "진현풍, 날 따라가서 백타산장 사람이 되어라. 천하 절색의 계집도 다 가질 수가 있다. 이 사나운 계집을 따라다니며 수모를 받을 필요가 없다. 아까 보니까 내 계집들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더군." 진현풍은 그 말에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양봉은 부하들에게 명하여 그들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뱀을 부리는 부하들도 뱀을 거두어 수레에 실었다. 이윽고 일곱 개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30장 인간중의 강자 어느덧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도화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황약사는 가끔 노완동을 찾아가 입씨름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었다. 도화도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곤 이제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 딸 황용과 노완동뿐이었던 것이다. 잔꾀라고는 부릴 줄 모르고 오로지 보고 들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고지식한 노완동이 황약사에겐 하나밖에 없는 말동무인 셈이었다. 그러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깊은 밤이면 황약사는 남자로서의 고독을 피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