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44편 (44/59)
매초풍이 마부를 보고 말했다. "내가 은전 열 냥을 줄 테니 땅에 떨어뜨리지 말고 잘 받아라." 이 악랄한 사람들에게 마차삯을 받을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던 마부는 은전을 열 냥이나 주겠다니 뜻밖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은전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위가 너무 캄캄해서 그만 매초풍의 얼굴을 건드리고 말았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지자 깜짝 놀란 마부는 얼른 손을 움츠렸다. 그러자 매초풍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감히 내 얼굴을 만져!" 그녀는 구음백골조를 써서 마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예라곤 전혀 모르는데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마부는 매초풍의 다섯 손가락에 머리를 잡혀 뇌에 구멍이 나 버렸다. 마부는 한마디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축축한 땅에 널브러졌다. 진현풍이 놀라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매초풍이 웃으며 대꾸했다. "저 녀석은 우릴 여기까지 데려다 준 걸 사방에 떠벌리고 다닐 거예요. 후환을 없애야 된다구요." 매초풍은 마부의 시체를 들어 마차에 집어 던지더니 말을 향해 장을 날렸다. 그녀의 장을 맞아 머리가 부서진 말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매초풍은 마차에 불을 질렀다. 마차가 커다란 화톳불처럼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빛을 빌려 주위를 살펴보니 먼 곳에 숲이 보였고, 그 숲 속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반가워하며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참 동안이나 숲을 걸었으나 이상하게도 불빛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불빛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좀더 걸어가면 어느새 등뒤에 가 있는 것이었다. 마치 미로에 빠진 느낌이었다. 진현풍이 입을 열었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군. 보아하니 여기에도 대단한 고수가 살고 있는 모양이야." 그 말에 매초풍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이곳에 괴상한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요. 황약사의 제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수 있어요?" 말을 뱉어 놓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이 도화도를 떠난 후 강호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황약사의 제자로 치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음양 술수며 갖가지 진법, 오행 기문 둥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여섯 제자들 가운데 매초풍이 그 법수들을 가장 많이 터득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총명한 매초풍은 황약사의 이런 법수에 각별히 흥미를 느꼈고, 그래서 이런 법수들을 가장 많이 배웠던 것이다. 매초풍이 진현풍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날 따라와요." 매초풍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 속의 길 찾는 법을 알아냈다. 그녀는 진현풍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드디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앞에 이르렀다. 매초풍이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주인 계십니까? 길을 잘못 든 사람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매초풍이 살펴보니 어지러운 소택지 한복판에 세워진 두 칸짜리 집이었다. 어쨌거나 안에서 대답이 없으니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의 손을 잡고 불빛을 보며 앞으로 세 발자국을 걷고 왼쪽으로 네 발자국을 걸은 다음, 다시 앞으로 세 발자국을 걷고 또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네 발자국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징검다리로 쓰이도록 박아놓은 나무 그루 앞에 당도했다. 나무 그루들은 단단히 박아놓은 것이 아니어서 걸을 때마다 흔들렸고, 어떤 것들은 비뚤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경공이 대단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곧장 백아홉 발자국을 걸으니 집 앞에 이르렀다. 가까이 와 보니 이상하게도 문이 없이 담장만 둘러쳐져 있었다. 매초풍이 말했다. "날 따라 뛰어들어와요. 왼쪽으로 내려서야 해요." 그들이 뛰어내린 곳은 뜨락으로, 왼쪽은 땅이었고 오른쪽은 연못이었다. 두 사람은 뜨락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갔다. 내당도 문은 없고 창문만 있었다. 두 사람은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기름 등잔 일곱 개가 마치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불빛을 받으며 한 여인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궁궐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두 사람을 차례로 쏘아보더니 대뜸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난 절대 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초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인은 냉소하며 계속 지껄였다. "돌아가서 단황 나으리께 알려라.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인연이란 따로 있는 것이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라고 말이다. 나한테 끈질기게 달라붙어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라는 말씀도 전하여라."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전에 사부님한테서 대리라는 소국의 황제가 대단한 무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아마 일양지공이라고 했었지. 그 대리의 단씨가 필시 이 여인과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다면 이 여인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우리를 운남 대리국의 단황 나으리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당신은 운남에서 오셨군요?" 매초풍의 물음에 여인은 말없이 웃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부귀를 누려온 여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가 비쳤다. 진현풍은 이 쌀쌀한 여인에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 채 읍하면서 물었다. "저희가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내일 떠날 테니 오늘 밤 재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여인은 탄식을 하는 듯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묵어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안 된다는 말도 하지 않으므로, 매초풍 부부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긴 탁자 한쪽에 앉아 여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인은 탁자 위에 놓인 일곱 개의 등잔을 주시하면서 수시로 그것들을 움직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천구(天樞)를 벌려 놓았다가 다시 천권(天權)을 천구 가까이 놓아 북두칠성이 더욱 가까워지도록 했다. 매초풍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아니, 틀렸어요." 그녀는 북두칠성으로 다가가 천권과 천구를 바로잡아 놓은 다음 다시 천권을 벌려 놓아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 세 별이 이어지도록 했다. 매초풍이 이렇게 배열해 놓으니 그제야 북두칠성처럼 보였다. "이 칠성 중에선 천권이 중심이지만, 그것은 어두운 별이라서 그다지 밝지 못하지요. 당신이 배열한 건 틀려요."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누구기에 성진(星陣)을 배열할 줄 아느냐?" 그러더니 매초풍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단황 나으리가 보낸 고수임이 분명하구나." 매초풍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어요. 당신은 입만 벌리면 단황 나으리가 어쩌구 하는데, 바로 대리 황제 단지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인은 매초풍이 단황 나으리를 단지흥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매초풍은 가볍게 대답했다. "전 흑풍쌍살 중의 철시 매초풍이에요." 여인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철시, 동시? 너희들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뭘하려는 거지?" 매초풍은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한참 망설였다. 그러자 여인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네 얼굴을 보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상자에서 죽편 한줌을 꺼냈다. 그 죽편은 그녀가 숫자를 계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잽싸게 놀리면서 죽편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매초풍 부부는 구석에 놓인 나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자는 척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가 여인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분부하신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우선 구 방주 일인데요, 그자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사람은 원계의 철장봉 아래서 철장방의 방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예가 대단하므로 주인님께서 친히 나서신다 해도 그를 이긴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수중에 《구음진경》이 있는데, 지금은 도화도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도화도에 찾아갔는데, 도화 도주 황약사가 그를 내보내지 않아서 만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찾는 사람이 도화도에 갇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 "말해 봐. 황약사가 그 사람을 못살게 군다던가?" "그 사람은 황약사 때문에 두 다리가 부러져서 동굴 속에 갇혀 있답니다." "저런,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동굴에 팽개치다니!" 여인이 소리를 지르자 그 사나이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인이 머리를 돌려 한쪽에서 자는 척하고 있는 매초풍과 진현풍을 흘끗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동시와 철시 저 두 사람이 황약사의 제자들이란 걸 알고 있지. 저들이 황약사에게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도 말이다. 귀한 손님이 내게 왔구나." 사나이는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주인님, 저 사람을 길잡이로 쓸 수 있다면 도화도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다. "왜 안 되겠느냐? 저자들을 길잡이로 삼겠다!" 여인이 다가오더니 진현풍을 잡아 일으켰다. "빨리 일어나!" "왜 이러십니까?" "너희들이 날 도화도까지 데려다 줘야겠다. 황약사와 싸울 생각이야." 그 말에 매초풍이 그녀를 보며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유, 우스워라! 당신이 우리 사부님과 싸운다구요?" 진현풍도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소롭다는 듯한 두 사람의 웃음이 그치자 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실컷 웃었느냐?" 그녀는 갑자기 두 장을 날려 진현풍 부부의 안면을 강타했다. 진현풍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대적할 수 있었으나 10합이 지나자 자신이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녀의 법수가 언젠가 한 번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매초풍이 남편에게 말했다. "저 여자의 법수는 섬에 있던 그 사람이 하던 것과 같아요!" 진현풍은 그제야 이 여인이 도화도에 있는 노완동을 찾아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야 해!" 여인의 무예도 대단했지만 매초풍, 진현풍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최심장과 구음백골조의 법수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풍쌍살, 너희들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여인은 뒤로 훌쩍 물러서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밖에서 자그마한 여우 두 마리가 뛰어들어왔다. 여우들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길다란 꼬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매초풍과 진현풍의 어깨에 매달려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너무나 민첩해 미처 피하거나 장을 날릴 틈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여인과 계속 대적해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만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여인은 코웃음치며 외쳤다. "여우한테 물리면 아무도 살아날 수 없다!" 구석에 서서 이들을 지켜 보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들은 잔인하고 악독한 짓을 수없이 저지른 악인들입니다. 살려 두면 반드시 천하의 영웅들을 해칠 것입니다." 그 말에 여인이 대꾸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천하의 영웅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더냐? 내가 도화도에 가는 걸 도와주기만 하면 이들을 살려 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나이도 소리를 지르면서 흑풍쌍살에게 덤벼들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그들 두 사람과 맞붙어 격렬하게 싸웠다.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매초풍이 다급하게 외쳤다. "병신 같으니! 빨리 최심장으로 저들을 없애 버리지 않고 뭐해요?" 진현풍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여인의 무예가 워낙 출중해서 막아내기만도 급급할 지경이었다. 매초풍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여우가 눈앞을 휙 지나가더니 갑자기 머리가 몹시 아파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쓰러지는 것을 본 여인이 손을 멈추고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진현풍은 그제야 아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망할 년 같으니, 이까짓 걸로 쓰러지다니 말이 돼?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구!" 진현풍은 매초풍을 거칠게 흔들었다. "여보, 정신차려!" 하지만 매초풍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진현풍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진현풍을 뚫어지게 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잘못했어요……." 마음속으로 늘 황약사를 그리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매초풍이었다. 그런데 여우 독이 퍼져서 정신이 혼미해지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묻은 말을 한 것이다. "아직도 절 나무라시는군요. 제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사부님 곁에 있게만 해 주신다면……." 그녀를 바라보는 진현풍의 마음은 너무나 쓰라렸다. 그 역시 아내가 여전히 사부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타깝게 매초풍을 불렀으나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화도엔 절대로 가지 않겠어요. 차라리 죽여 주세요." 여인은 진현풍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에겐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는 길밖에 없다. 난 황약사와 승부를 내야 해." 매초풍이 여전히 황약사를 그리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여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동시, 보아하니 너 혼자 저 계집을 좋아한 모양이다. 철시의 마음속엔 너란 사람이 아예 없는 거야." 진현풍은 한참이나 여인을 쏘아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해 주시오. 저 여우한테 물리면 사람이 죽는 거요?" 여인은 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주지. 난 운남의 대리국 왕비다. 이름은 신산자(神算子) 영고(瑛姑)라고 하지. 네가 저 계집을 살리고 싶으면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야만 한다." "아까 당신이 사부님과 싸우던 사람을 구하러 도화도에 갈 것이란 말을 들었소. 하지만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도화도에서 내 사부님과 싸워 이기고 나온 사람은 이제까지 하나도 없었소." "네가 무슨 소릴 하든 난 도화도에 가야 해." "나와 집사람은 당신이 찾는 노완동과 사부님이 싸우는 것을 보고 오는 길이오. 그분 역시 무예가 뛰어나긴 하지만 우리 사부님의 적수가 되진 못했소." 진현풍은 도화도에서 본 것을 영고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영고가 말했다. "그럼 황약사와 싸우지 않고 그 사람을 구해 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오. 싸움이 끝난 후 그 사람이 사부님께, 둘이 싸워서 자기가 이기지 않으면 절대로 동굴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걸 들었소. 자기가 한 맹세를 스스로 저버릴 수 있겠소?" 영고는 진현풍의 말에 장탄식을 했다. "자기 맹세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같은 일도 없었을거야." 이렇게 말하는 영고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진현풍에게 단약 반쪽을 주어 매초풍에게 먹이게 했다. 잠시 후에 매초풍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여인과 진현풍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천천히 물었다. "내가 어떻게 됐던 거죠?" 진현풍은 대답이 없었고, 영고는 차디찬 눈길로 매초풍을 보며 말해 주었다. "너에게 단약 반쪽을 먹였으니 보름 동안은 더 살 수 있다. 내말대로 도화도까지 같이 가주면 해독약을 주겠다." 진현풍은 자기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매초풍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매초풍은 안타까운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매초풍은 기운 없이 말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뜨시고 이제 사부님 혼자 남았어요…….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시겠어요……." 매초풍이 다시 황약사 이야기를 꺼내자 진현풍의 마음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매초풍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린 다신 그곳에 가면 안 돼요……." 진현풍은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 하지만 당신은……." 그는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매초풍은 힘없이 웃었다. "도화도에 가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고, 그러면 당신 혼자 남게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거죠? 그래도 거기엔 갈 수 없어요." 매초풍이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지만 사실은 더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진현풍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물론 그녀가 황약사를 잊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것이다. 진현풍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죽는다면 나혼자 살아 뭣하겠소?" 두 사람을 바라보던 영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과 노완동 역시 이들처럼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비록 오랫동안 함께 지내진 못했지만, 그들의 사랑도 흑풍쌍살 못지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사랑 때문에 어찌 이들의 사랑을 짓밟는단 말인가. 영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들 부부에게 말했다. "어서 떠나게. 도화도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을테니." 두 사람은 뜨락으로 나왔다. 매초풍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영고를 바라보았다. "선배님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영고는 말없이 서서 매초풍의 말을 기다렸다. "도화도에 가시거든 우선 그곳에 있는 기문환진(奇門幻陣)을 공략하셔야 해요. 그 일에 성공한다면 노완동 선배님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대신 기문환진을 공략하지 못하면 노완동 선배님께 커다란 재난을 안겨 줄 거예요." 영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태연히 말했다. "그런들 어떻겠어? 두 사람이 함께 죽으면 그만이지." 매초풍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죽을 수도 없게 될까 봐 그러는 거예요. 두 분 선배님께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어려운 지경에 빠질까 봐요." 영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허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매초풍은 생각에 잠긴 영고를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잠시 후에 영고가 그들을 불러 세우더니 품에서 환약 한 개를 꺼내 주었다. "이 약을 먹으면 병이 재발하지 않을 거야."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녀에게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영고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네들이 천하에 악인이라고들 하지만, 자네들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게 가장 귀중한 거야. 난 자네들의 사랑을 따라가지 못해……." 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매초풍과 진현풍이 소택지를 벗어날 무렵엔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며칠 후, 아침부터 30리를 걸은 두 사람은 길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여우한테 물린 뒤 매초풍은 후유증 때문인지 식욕이 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밥도 몇 술 뜨지 않고 죽도 절반쯤 마시다가 그만두었다. 두 사람이 막 떠나려고 하는데 다섯 사람이 떠들썩하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식당에 들어와서도 계속 떠들어댔다. 그중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주인, 어서 밥을 가져오라구!" 주인이 반찬 몇 접시와 비빔밥을 내오자 그들은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흑풍쌍살이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우리 형제가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연놈을 찾아내서 우리가 힘을 합쳐 죽여 버리자구요." 다른 사람이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말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한참이나 애를 썼지만 "아……아니……."라고 말한 게 고작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슴을 치며 재촉했다. "셋째, 좀 빨리 말하려무나!" 다른 사람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쟤 말이 빨리 나오겠수?"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셋째에게 말했다. "셋째야, 그러지 말고 노래를 부르렴!" 그러자 셋째는 정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흑풍쌍살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네 최심장을 소홀히 여기다간 큰일나고 구음백골조는 머리를 긁히면 뇌수가 흘러 나오지 그들을 발견하면 숨돌릴 틈도 없이 해치워야 한다네……. 나머지 네 사람은 그의 노래를 듣고 한결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매초풍 부부가 보기엔 한없이 멍청한 놈들 같기도 하고 미친놈들 같기도 했다. 성질 같아선 당장 달려들어 깨끗이 처치해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여우한테 물린 매초풍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다섯 사람은 건강 오의란 자들이었다. 최근에 동시, 철시라는 흑풍쌍살이 사람들을 파리 잡아죽이듯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이 기회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 급히 흑풍쌍살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흑풍쌍살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들이 젊은 남녀라는 것밖에 없으면서도 이렇게 무작정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다섯 사람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흑풍쌍살은 황 괴물이 가장 아끼는 제자들이었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