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37편 (37/59)
아형이 웃으며 하는 말에 주백통은 우쭐해서 말했다. "책이야 물론 좋은 책이지요. 왕중양 형님의 말씀대로라면 그 용처가 무궁무진한 책이지요. 아가씨는 무공을 모르니깐 말씀드려도 모를 거요." "백통이, 우리 안사람은 정말 무공이란 하나도 모르네. 젊은 나이에 호기심이 부쩍 동하여 그러니 한 번 구경이나 시켜 주게. 얼핏 구경하는 정도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난 절대 보지 않을 테니까. 이 황약사 눈길이 그 책에 한 번만 가도 자네한테 내 눈알을 뽑아 주지."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황약사로 말하면 당세에 으뜸가는 무림의 고수인데 설마 거짓말이야 하겠는가? 그러나 주백통은 곧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아니야. 이 책은 극히 중요한 책이다. 황약사 말에 넘어가서는 안 돼…….' 주백통이 한사코 거절하자 황약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의 입장이야 나도 충분히 이해하네만, 내 안사람에게 얼핏 구경만 시켜 줘도 이 황약사가 자네네 전진교파에게 일후 꼭 보답을 할 텐데 정 보여 줄 수 없다면야 하는 수 없지. 오늘은 나와 자네의 우정을 봐서라도 물러서는 수밖엔 없지만 그러나 알아두게. 이제부터 나는 자네 외의 전진교 사람들은 본 적이 없으니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하진 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주백통은 등골이 오싹해 짐을 느꼈다. '동사 황약사는 사악하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황약사의 지금 말은 그 뜻이 분명하다. 나 노완동한테는 손을 쓸 수 없지만 전진교 제자들인 마옥이나 구처기한테는 사정을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약사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다. 이 황약사가 중양궁에 들어가 좌충우돌 때려부수면 마옥이나 구처기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 이쯤 생각이 미친 주백통은 황약사를 달랬다. "황약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나 노완동하고 해결해야지 애매한 우리 사제들을 들먹일 거야 없지 않소?" 아형은 주백통이 자칭 노완동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워 킥킥거렸다. '노완동'이란 말에는 늙은 개구장이란 뜻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다. "스스로 자기를 노완동이라네? 정말 그런 늙은 개구장이라면 우리 한번 애들처럼 장난을 쳐 볼까요? 《구음진경》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말예요." 그리고는 황약사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구음진경》은 그 구양씨라는 사람이 가져간 모양이에요. 주백통 어른께서 내놓지 못하는 걸 봐요. 그러니 체면 없이 자꾸 괴롭히지 마세요." "하긴 그래. 백통이, 나하고 같이 서독 구양봉을 찾아가 볼까? 자네 혼자 힘으로는 구양봉을 당해 내지 못할 테니까."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고지식한 주백통은 솔직히 말했다. "《구음진경》이 나한테 있기는 하오. 아주머니한테만 보이는 건 무방한 일이지만,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는군. 어디 우리 둘 중 누가 센가 한번 겨루어 볼까?" 황약사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노완동과 무공을 겨루다가는 의가 상하기 쉬우니깐 그건 그만둡세. 자네는 노완동, 늙은 개구장이니까 우리 어린애들이 노는 내기나 해 보지." '이 황약사가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걸까? 바닷가에서 사는 친구니까 바다에 관련된 내기를 하면 이 노완동은 영락없이 지고 말거야. ' 주백통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형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둘이서 구슬치기를 하면 어때요?" "구슬치기? 그거 좋겠군. 구슬치기는 이 노완동만큼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테니깐." 주백통은 선뜻 대답했다. 황약사와 시를 한 수 읊는다던가 하는 식의 내기를 하면 꼼짝못하고 지겠지만 그까짓 구슬치기 정도로야 황약사를 못 이기겠나 싶었던 것이다. "백통 어른, 어른께서 지면 《구음진경》을 나한테 보여 주어야 하고…… 그런데 이 양반이 지면 어떻게 할까요?" "아니, 전진교에 보물이 있는데 도화도라고 그만한 보물이 없겠소?" 황약사는 냉큼 보따리를 풀어 검은 빛깔의 고슴도치같이 가시투성이인 의복 하나를 꺼내어 돌 위에 놓았다. "아니 그게 뭐요?" 주백통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이건 도화도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연위갑(軟 甲)이라는 걸세. 날 이기면 가져가게." "아이고, 그만두시오.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다구." 주백통이 손사래를 쳤다. "백통인 무공이 절륜하니 이 호신갑(護身甲)이 소용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후에 여완동(女玩童)을 얻어 소완동(小玩童)을 낳으면 쓸 데가 많을 걸세. 소완동에게 이 호신갑을 입혀 보게,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구슬치기에서 내가 지라는 법은 없지. 도화도의 일등 보물을 그리 쉽게 내줄 수는 없으니까."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이 웃으며 받았다. "그간 여완동이고 뭐고 난 얻지 않을 테니 소완동이라는 것도 생길 리가 없지만 어쨌든 내가 이기면 그건 내 것이 된단 말이지? 무림계에서 그토록 이름난 것이라니 그걸 입고 강호를 다니면서, 이건 내가 도화도 도주 황약사를 이겨 빼앗은 거다, 하고 자랑할만하겠구만. 천하 호걸들이 다 알도록 말이야." "말로만 하지 말고 어서들 겨루어 보세요. 이기고 지는 거야 겨루어 봐야 아는 거죠." 아형이 웃으며 재촉했다. 그들은 각각 구슬 아홉 개씩을 나눠 가지고 구멍 열여덟 개에 튕겨 넣기로 했는데 구슬 아홉 개를 먼저 튕겨 넣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 "구슬은 나한테 많아. 늘 가지고 다니니깐." 주백통이 말했다. 셋은 구슬치기 하기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옮겼다. 주백통은 발로 땅을 뭉개며 한동안 돌아쳤다. 그러자 땅은 풀 한 포기 걸리지 않게 평평해졌다. 자리를 옮겨 오는 동안 주백통은 아형의 걸음걸이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몸놀림과 걸음걸이만 봐도 무공은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형에게 《구음진경》을 구경시키는 건 그다지 위험스런 일은 아닌 것 같아, 무공을 전혀 모르는 여인이니 《구음진경》을 봐도 소경 경 읽기일 테니까, 황약사는 보고 싶어도 절대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 하지만 그 안타까워하는 꼴을 어떻게 보지? 아내는 소경 경 읽듯 하고 남편은 안타까워 속에 불이 일고. 거 제법 재미나겠는데?' 주백통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이 웃었다. "아니 백통이,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미친 놈처럼 혼자 시물시물 웃긴 왜 웃어?" 황약사의 물음에 주백통은 급기야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황약사와 주백통이 구슬치기를 하다니, 개구장이들처럼 구슬치기를 하다니 암만 생각해도 우스워서 그러네." 그러면서 주백통은 어떻게 해야 빨리 이길까 머리를 굴렸다. 황약사는 누구보다도 암기를 쓰는 재주가 비상하고 그중에도 손가락으로 튕기는 재주가 뛰어남을 주백통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슬치기는 암기 튕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는 생각했다. 비슷한 점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구슬치기는 아이들 장난이라 그로서의 묘법이 따로 있는 법인 것이다.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며 구멍 열여덟 개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생김새가 밑이 좁고 위가 넓은 반듯한 종지사발 같았다. 그 안에 구슬을 튕겨 넣으려면 힘이 과해도 안 되고 덜해도 안 되었다. 튕겨 들어간 구슬이 그 안에서 정확히 멈추도록 힘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힘이 덜하면 미치지 못할 것이요, 힘이 과하면 구멍 안에 들어갔던 구슬이 도로 튀어나오게 마련이었다. "자, 어서 먼저 구슬을 골라잡으라구." 주백통은 주머니에서 구슬 열여덟 개를 꺼내 놓았다. 황약사는 웃으면서 아홉 개를 골라 들었다. "우리 동시에 시작하여 먼저 아홉 알을 다 넣은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는 걸세?" 주백통이 다시 조건을 확인했다. "물론이지." 황약사가 대답했다. 구슬치기가 시작되자 둘은 동시에 구슬을 튕겨 넣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연거푸 세 개를 튕겼는데 모두 곧바로 적중되어 구멍 안에 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도로 굴러 나오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황약사 너도 곰처럼 둔하구나. 그 구멍에는 튀어나오는 탄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튕겨 넣기만 하면 만사 대길인 줄 아느냐? ' 그는 쾌재를 부르며 득의양양 연거푸 다섯 알이나 구멍 안에 집어 넣었다. 던져 넣는 족족 적중하는 주백통의 솜씨에 황약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황약사는 이번엔 구멍에 있는 주백통의 구슬 옆을 겨냥하여 구슬 하나를 탁 튕겼다. 그러자 거기에 맞은 주백통의 구슬은 구멍 한편으로 비켜나고 그 반작용으로 황약사의 것이 구멍안에 남게 되었다. 황약사는 연이어 같은 방법으로 구슬 세 개를 튕겨 넣었다. 그 사이 주백통은 또 하나를 넣었다. "황약사, 그런다고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헤헤, 난 벌써 여섯 개가 들어갔네. 이제 세 개만 더 넣으면 내가 이기는 거야. 여태까지 세 개밖에 못 넣었으니 아예 손을 들지 그래?" 주백통이 좋아라 떠들었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는 이번엔 더 힘을 주어 주백통의 구슬을 겨냥했다. "내 구슬을 맞추어 멀리 날려 보낼 셈인가? 그래도 소용이 없네. 자네는 아직 일곱 개나 남았는데 나는 이제 세 개밖에 안 남았다구. 내가 아무리 천천히 튕겨도 이 내기는 내가 이긴 거나 다름없다니깐?" 그런데 황약사가 연이어 튕긴 세 개의 구슬은 주백통의 구슬 세 개를 아예 박살내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황약사의 구슬 세 개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 황약사는 즐거운 낯으로 말했다. "자, 어떤가? 저렇듯 박살이 나 버렸는데 무슨 수로 아홉 개를 채우겠나?" 황약사는 잽싸게 나머지 구슬을 마저 튕겨 넣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젠 졌지, 주백통?" "그 따위로 노는 법이 어디 있어? 자기 구멍에 안 넣고 내 구슬을 가루로 만들다니, 이런 반칙이 어딨냐구?" "어쨌든 우린 분명히 약속했어, 먼저 구슬 아홉 개를 모두 넣는 사람이 이긴다고 했지? 구슬이 가루가 되었든 나한테 빼앗겼든간에 아홉 개를 채워 놓지 못하면 지는 거지,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린가?" 주백통이 생각해 보니 이 황약사가 약은 꾀를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승강이질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하긴 황약사의 그 술수도 재주는 재주였다. 자기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아마 못했을 것이었다. 황약사의 재주에 탄복한 주백통은 아형에게 선선히 말했다. "아주머니, 약속대로 《구음진경》을 보여 드리지요. 그러나 오늘 해지기 전엔 돌려주셔야 하오." 어느덧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주백통은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형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른께서는 별호가 노완동이지만 생각은 역시 어른이시군요. 내가 이 책을 돌려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신 모양이죠? 염라 마세요. 내가 여기 앉은 자리에서 쭉 보고 당장 돌려 드릴게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옆에 앉아 지키세요." 주백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동사 황 약사라면 몰라도 아형이야 농간을 안 부리겠지. 아형 같은 여인에겐 책을 보여줘도 예상 밖의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공연히 여인들한테 좀스럽다는 말을 듣느니 사나이답게 행동해야지.' 주백통은 드디어 품에서 《구음진경》을 꺼내어 아형에게 주었다. 《구음진경》을 받아 든 아형은 더는 말하지 않고 돌 하나를 깔고 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구음진경》을 아형에게 빌려 주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아형이 하는 품을 계속 힐끔거렸다. 이를 눈치챈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린 술이나 한잔 하세, " 황약사가 술을 권하자 주백통은 술잔을 손에 쥐고도 흘깃흘깃 아형을 살폈다. 혹시 어떤 놈이 불쑥 나타나 책을 앗아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엔 이 세상에 자네와 나를 이길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 같은가?" "당신 황약사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만 나를 이길 사람이야 당신까지 포함하여 적어도 네댓은 있겠지." "지나친 과찬이구만. 기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이 넷은 각기 저마다의 장점들이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형편이지. 그런데 구양봉이 자네 사형 왕중양으로 인해 합마공이 여지없이 묵사발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10년 내엔 나를 이기기 어려울 거고, 철장방의 수상표 구천인의 무공도 대단하다고들 하나 어째서인지 이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오지를 않았지. 구천인의 무공이 아무리고 강하다고 해도 짐작컨대 아직까지 정상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쯤 되면 노완동 자네의 무공도 결코 스스로 얕잡아 볼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말한 그 몇을 빼면 자네도 무림의 고수라 이거야. 그러니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천하에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우리 둘만 합치면 무적이고말고." "그렇다면 안절부절못할 게 뭐야? 우리 둘이 여기서 지키는데 어느 놈이 와서 《구음진경》을 앗아 가겠는가?" 황약사의 말에 주백통은 마음이 좀 놓였다. 주백통은 술을 마시며 아형을 바라보았다. 아형은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책장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히 읽어 보는 것 같았다. 주백통은 아형의 모양새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 여인은 뭘 알기나 하고 저렇게 세심히 보는 건가? 《구음진경》에 씌어진 것이 무슨 내용인 줄이나 아나?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정묘한 무공을 적은 것인데 무학지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아녀자가 보면 뭘 안다고 저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 거지?' 그러나 아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주백통은 조급증이 나서 몇 번이나 궁둥이를 들썩였다. 아무튼 해지기 전까지는 돌려 받기로 약속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 번 끝까지 보고 난 아형은 다시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안 되었을 시간이었다. 아형은 드디어 책장을 덮고 주백통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구음진경》을 주백통에게 돌려주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군요. 이건 《구음진경》이 아니에요." "뭐? 《구음진경》이 아니라구? 분명 사형께서 임종시 나에게 준 경서인데 그럴 리가 있나?" 주백통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예삿일이 아닌 성싶군. 백통이 자네, 《구음진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는가?" 주백통은 망연자실 고개를 저었다. "어른께선 속으신 거라니깐요? 표지만 비슷하면 뭘 해요? 내용이 딴판인데. 진짜 《구음진경》은 구양봉이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 이건 팔자소관을 보는 복술(卜術)책이에요." 주백통은 반신반의, 말을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르신, 정말 《구음진경》진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세요?" 아형이 물었다. "《구음진경》이 사형 손에 들어간 다음 누구도 읽어 본 사람이 없어요. 당시 사형은, '내가 이레 낮 이레 밤에 걸쳐 《구음진경》을 독파함은 무림 중의 일대 화액을 방지하고자 함이고 여기에 개인적인 욕심은 절대 없다'고 하셨소. 그리고 전진교 제자들은 누구도 《구음진경》의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주백통의 말에 아형은 감탄하며 말했다. "왕 진인의 인의지심은 실로 세인이 탄복할 바입니다만 결국 그때문에 남에게 빼앗겼군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이 책을 펼쳐 보세요." 주백통은 주춤거렸다. 문득 옛일이 생각났다. 주백통이 왕중양의 제자가 되려고 왕중양을 찾아가 떼를 쓰다시피 사정하였을 때다. 왕중양은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 사이엔 사도(師徒)의 연분도 없거니와 자넨 우리 전진교 계율을 견뎌 내지 못할 사람이네. 하지만 자네는 복이 많은 사람이니 우리 전진교에 와 있으면 우리도 그 복을 받게 될 것이므로 내가 사제로는 삼겠네." "제가 천하 최고의 무공을 지닌 분을 사부님으로 모시려고 도처를 헤매다가 요행히도 이렇게 뵙게 되었는데, 나를 제자가 아니라 사제로 삼겠다니 웬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주백통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내 사제가 되어야 마옥이나 구처기보다 한 급 높아질 테고, 그러면 그들한테서도 존경을 받고 도사질도 안 하고 아침 조과(早課)에 안 나와도 되는데, 좀 좋은가?" "좋기는 합니다만 마옥이나 구처기 무공으로야 날 가르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주님께선 저의 사부님이 안 되겠다고 고집이시니 난 누가 가르친단 말입니까?" 이에 왕중양은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자네야 내가 가르쳐 주지. 장차 전진교에 일이 없으면 자넨 자기 일만 하면 되네만, 일단 전진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도와 나서야 하네." "교주님의 무공이 천하 제일인데 내가 도와 나설 게 뭡니까?" 왕중양은 그저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주백통은 이 순간 왕중양의 말이 귀에 울리는 듯하여 가슴이 미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사형의 유언을 저버릴 수는 없소. 난 《구음진경》을 보지 않을테요." "이건 강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복술책이라는데도 믿질 않으시는군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책이에요. 설령 《구음진경》이라 해도 그래요. 보기만 하고 그 무공을 배우지 않으면 중양진인의 뜻을 어기는 게 아니잖아요?" 아형이 답답한 듯 말했다. 듣고 보니 아형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주백통은 결심을 굳히고 책을 펼쳤다. 몇 장 읽어 나가던 주백통은 기가 막힌 듯 아형을 쳐다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암만 봐도 제반 무공에 대한 수련법과 비결이 적힌 《(구음진경》임에 틀림없는데 이를 보고 복술책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책들은 난 다섯 살 때 벌써 읽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줄 외웠어요. 강남 아이들은 열에 아홉은 다 이런 책들을 외울 줄 알아요. 믿지 못하겠어요? 내가 외워 볼 테니 한번 들어 보실래요?" 아형은 곧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산유수로 외워 내려갔는데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책을 보는 주백통은 등골이 다 서늘했다. 황약사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어디 어른께서 마음대로 아무 갈피나 넘겨서 물어 보세요. 첫 마디만 말해 주면 내가 죽 외워 볼 테니깐요. 원래 어렸을 때 통달한 책은 늙어도 잊지 않는 법이지요." 아형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주백통은 임의로 몇 단락을 짚어 외워 보게 했다. 아형은 정말 얼음판에 썰매 타듯 거침없이 줄줄 외워 내려갔다. 아형이 외우는 것을 듣고 난 황약사는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주백통, 자네는 남한테 속았다니깐?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속았어." 주백통은 그만 화가 솟구쳤다. 그는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더니 책장을 와락 찢어 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책을 찢어 대던 그는 아예 불을 질러 그 조각들을 몽땅 태워 버렸다. 주백통은 아형이 얼마나 놀라운 천재인가를 미처 알지 못했다. 집에 책이 몇 권 없으나 그녀는 이미 아주 많은 책을 독파한 인재였다. 그녀는 책을 한 번만 읽으면 모조리 줄줄 외웠는데 그러면 그 책을 없애 버리곤 했다. 이 《구음진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책을 외운 뒤 주백통에게 복술책이라고 속인 것인데 주백통은 그런 줄은 전혀 모르고 진짜 《구음진경》은 구양봉이 앗아 간 걸로 믿게 된 것이다. 사형이 맡겨 준 《구음진경》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하니 주백통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주백통이 《구음진경》을 찢어 버리리라고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형과 황약사는 찢겨 없어진 책도 아까웠지만 주백통에게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개구장이 같으니라구. 그만 진정하고 이 연위갑이나 가지게." 황약사가 말했다. 여태껏 자기가 황약사의 농간에 우롱당하고 있음은 조금도 모르고 있는 주백통은 황약사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황약사가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선심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연위갑은 도화도의 귀중한 보물인데 내가 왜 공연히 그걸 가지겠나?" 주백통은 고집스레 거절했다. 맥이 빠진 그는 한없이 서글퍼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자. 고향에 가서 아무데도 나다니지 말고 새로운 무공을 대여섯 개 더 수련한 뒤 서역에 가 구양봉으로부터 《구음진경》을 찾아오자, 지금은 구양봉의 상대가 안 되니 가 봤자 소용이 없다. 아, 사형이 그토록 신신당부한 것을 지켜 내지 못했으니 살 가치도 없구나…….' 주백통은 아형과 황약사에게 읍하고는 곧장 길을 떠났다. 황약사와 아형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형이 자책하듯 말했다. "내가 저분을 해쳤어요.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 탓이 아니오. 나쁘기야 이 황약사가 나쁘지. 내가 그렇게 일을 만들었으니깐." 아형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맹세하오. 이 책을 가지게 되었지만 진인 왕중양의 유훈(這訓)은 잊지 않겠소. 이 책의 무공으로 무림 중의 좋은 일을 도모하고 나쁜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소."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슬며시 안기며 말했다. "황 공자님, 모두들 공자님을 동사라고 하지만 난 공자님을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