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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36편 (36/59)

2026-09-24 21:27:20 조회 27
"황 도주님, 우린 도화도에 있는 율을 모르고 일편단심 도주님을 사부님으로 모셔 보고자 온 몸들입니다. 더불어 아형 아가씨도 모시고 와서 공자님과 만나게 해드리려는 뜻도 있었구요. 속언에 '부지자부죄(不知者不罪)'라 하였거늘 황 도주님께선 부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미 급한 무천웅도 소리쳤다. "황약사 어른, 우리를 제자로 받기 싫으면 놓아주면 그만이지 해코지할 건 뭐요? 그리고 아형 아가씨도 이 섬에 여인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율을 모르고 온 건데, 나 참, 그 무슨 개떡 같은 율이 다 있소? 여인들의 출입을 막는 율이 있는데 어떻게 제자는 여자를 두었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약사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셋을 바라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가 웃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승룡이, 자네들 셋이 태호 귀운장에서 여기까지 천리 뱃길을 멀다 않고 오로지 나 황약사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왔단 말이지?" 셋은 그 말에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중 눈치가 가장 빠른 곡영소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제자 곡영소 인사 올립니다." 육승룡도 꿇어 엎디었다. 그런데 무천웅은 아직도 눈치를 모르고 투덜댔다. "우리가 싫다는데 자꾸 절은 해서 뭐해?" 곡영소가 얼른 소매를 당겨 그도 무릎 꿇게 했다. "승룡이, 자네들을 제자로 삼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아형 아가씨의 덕일 줄 알게. 그러니 절은 나한테 할 게 아니라 아형 아가씨에게 해야지." 황약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셋은 또 부랴부랴 아형에게 절을 올렸다. 아형은 당황하여 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니깐요." "감사합니다, 아형 아가씨." 셋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가씨가 뭐야?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야지. 사모님 감사합니다, 이래요." 매초풍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황약사는 매초풍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겨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나이가 많지만 내 문하에 늦게 들어왔으니 현풍과 초풍을 사형으로 모셔야 하네. 그리고 자네들 이름도 듣기 좋고 기억하기도 좋게 승풍, 영풍, 천중으로 고치는 게 좋겠네," "당장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셋은 너무나 기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제23장 결혼 천하 무림의 종사(宗師)들인 남제 대리 황제 단지흥, 북개 방주 홍칠,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 서독 백타산군 구양봉, 그리고 종남산 전진교 교주인 왕중양, 이 몇은 약속대로 화산에 모여 무예를 겨루게 되었다. 그 장면과 상황이 정채 절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는데, 모두 《구음진경》을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였으나 결국은 허사가 되고 《구음진경》은 여전히 중신통(中神通) 왕중양이 보관하게 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같이 앙앙불락이었다. "왕중양의 실력을 난 인정할 수 없소. 왕중양은 오로지 《구음진경》의 덕으로 이긴 셈이오. 화산 무예 시합을 다시 한 번 열어 제대로 싸워 봅시다." 서독 구양봉이 약이 올라 발을 굴렀다. 왕중양은 조용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단지흥은 중얼중얼 염불을 하고는 더는 미련을 두지 않고 가볍게 떠나갔다. 그런가 하면 홍칠은 땅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술만 벌컥벌컥 마셔 댔고 동사 황약사는 《구음진경》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을 한탄했다. 이번에 그 신기한 책을 구경도 못했으니 몇십 년 뒤에야 비로소 기회가 오게 될 것이다. 황약사는 생각할수록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들 넷은 확실히 왕중양보다 무공이 부족했다. 과거에 황약사는 왕중양에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최고의 승리자는 《구음진경》을 자기가 가지고, 제2의 승리자는 《구음진경》을 한 달 남짓 빌려 보고, 마지막엔 며칠만이라도 빌려 볼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황약사 생각으로는 설사 자기가 제1의 승리자는 못 되더라도 두 번째는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산 무예 시합에서 왕중양은 상대방 넷을 단번에 일 같지도 않게 꺼꾸러뜨려 버렸으니 황약사는 《구음진경》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할 주제가 못 되었다. 황약사가 비통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조용히 지켜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구음진경》은 잃었지만 그 대신 당신을 얻었으니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소." 황약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아형을 바라보다가 아형의 손목을 잡고 산을 내려왔다. "난 말이오, 마음이 헤퍼서 한 가지 일을 계속 속에 두고 있는 법이 좀처럼 없소. 이번에 왕중양에게 졌는데, 난 내 실력이 부족해서임을 진정으로 자인하고 있소. 어쩌면 《구음진경》을 못 가진 게 차라리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그것을 얻었으면 매일 밤낮 그것만 들여다보느라고 당신과 말할 새도 없을 테니까……." 황약사의 말에 아형은 눈을 곱게 흘기며 웃었다. "내가 그러시도록 가만 놓아둘 것 같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황약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황약사는 아형을 데리고 중원과 북국, 그리고 변강 여러 곳의 명승 고적들을 두루 편답하며 돌아다녔다. 아형과 함께라서인지 피곤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황약사는 《구음진경》에 대해서는 아예 까마득히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화산의 싸움이 있은 지도 어느덧 일년 세월이 흘렀다. 대협객 왕중양은 지난해 《구음진경》을 다투던 싸움에서 승리한 후로 무림의 제일인자라는 명호를 얻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울적하기만 했다. 그는 평소 국사(國事)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밤마다 그는 육방옹(陸放翁)의 〈시아(示兒)〉와 악소보(岳少保)의 〈만강홍(滿江紅)〉을 속으로 외우면서 나라의 운명을 애통해 했다. 자기의 평생의 뜻을 풀어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고 자기와 임조영이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사로 갈라지게 된 것이 서럽기 만 했다. 그의 울적한 심기는 쌓이고 쌓여 끝내는 병이 되어 드러눕게 되었고 결국엔 구 양봉과의 싸움 끝에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임종시 왕중양은 노완동(老項童) 주백통에게 《구음진경》 상·하권을 나누어서 각각 따로 보관할 것을 부탁했다. 그래야 상·하 두권의 《구음진경》이 모두 간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완동은 사형의 유언대로 《구음진경》 상권은 한 곳에 깊숙이 감추어 놓고 하권만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적당한 비밀장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 주백통은 아이들처럼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성미로 종이를 잔뜩 접어 놓고는 제비뽑기를 했다. "사형께서 보우하소서. 좋은 고장이 잡히게 보우하소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제비를 밥아 펼쳤다. 종이쪽지에는 '안탕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백통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 좋아. 안탕산도 좋지. 안탕산은 내가 한 번도 못 가 본 산이거든 듣건대 봉우리마다 서로 형국이 달라 천자만태 경승이라더라. 가 보자, 어서 가 보자. 이럴 때 못 가 보면 평생의 한이 되리." 주백통은 《구음진경》 하권을 품에 깊숙이 간직하고 안탕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때마침 황약사와 아형도 안탕산에 와 머물고 있었다. 그날따라 달이 밝고 바람이 맑아 둘은 산등성이에 올라앉아 안탕산의 밤 경치를 구경했다. 기실 이것은 아형의 의사를 따른 것이었다. 달빛 아래서 안탕산의 풍경을 구경하면 대단히 멋질 것이니 안탕산 야경을 보러 가자고 아형이 졸랐던 것이다. 황약사는 아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안탕산에 오르자 두 사람은 적당한 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주앉았다. 한참 동안 타오르는 모닥불만 바라보던 아형이 입을 열었다. "안탕산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지네요. 푸르른 산봉우리는 암만 세월이 흘러도 저렇듯 변함없이 웅위로운데 인간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을 맺잖아요?" 아형은 말소리는 아주 처량했다. 황약사는 아형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은 마오. 쓸쓸한 생각을 품으면 쉽게 늙는다오. 즐거운 마음으로 기분좋게 살아야지.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황약사를 욕하고 미워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소. 내게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또 없었소. 난 당신을 아내로 삼고 도화도에 돌아가서 이젠 편안한 세월을 보내고 싶소. 이젠 나도 결심했소. 그까짓 《구음진경》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당신과 같이 흥이 나면 시를 읊고 심심하 면 칼춤이나 추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작정이오. 당신 생각은 어떻소?" 아형은 말없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아형의 어깨에 올린 황약사의 손이 긴장한 듯 가볍게 떨렸다. 아형이 자기의 청혼을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황약사를 지배했다. 아형은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어깨에 올려 놓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말했다. "마음 상했다면 용서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바보 같은 소리를……." 아형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비친 해맑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함빡 피어나고 있었다. "바보는 왜 바보예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인데……." 아형이 속살거리듯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겠소. 당신과 앉으면 난 꼭 바보가 돼 버리는 것 같다니깐?" 황약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형은 슬며시 황약사의 두 손을 잡아 쥐었다. "남들이 당신을 무어라고 욕하든 난 개의치 않아요. 동사라고 부르면 어떻고 서사라고 부르면 어때요? 당신 마음이 중요하지. 당신네 무림 종사 다섯이 모두 신통하다고 뭐 중신통(中神通), 남신통, 북신통, 동신통, 서신통, 이렇게 불러 줄 것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죠?" 아형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산천명월도 취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황약사도 아형의 웃음에 취하여 넋을 잃었다.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슬며시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들 당신을 동사라고 하지만 내 보기엔 아직도 사(邪)가 모자라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황약사가 묻자 아형은 문득 수줍은 얼굴이 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도화도에 돌아가서……. 오늘 밤을 그냥 보내면 난 당신과 다시는 같이 안 있겠어요." 그 말에 황약사는 기뻐 튕겨 일어났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소?" 그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말 이 동사 황약사는 바보요. 아형보다도 용기가 없으니 바보 중의 바보지. 그런데도 날보고 황 약사라고?" 황약사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부랴부랴 돌 세 개를 주워다가 앞에 놓고 또 나뭇가지 아홉 개를 꺾어다가 돌 앞에 차례로 꽂았다. 아형은 한편에 서서 황약사의 하는 양을 보며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일이 끝난 황약사는 아형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제 우리 둘이 맞절만 올리면 부부가 되는 거지?" "돌은 하나면 되는데 뭐하러 세 개씩이나 갖다 왔어요?" 아형이 돌 세 개를 보고 입을 싸쥐며 웃었다. "허, 그런 게 아니라네. 왜 꼭 세 개여야 하는가 하면…… 어디 당신이 맞혀 보구려." 황약사는 웃으며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아형은 황약사의 손목을 끌고 돌 앞에 다가가서 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금생(今生)·내세(來世)·재생(再生)! 이런 뜻이桑? 누가 모를 줄 알고?" 황약사는 아형을 와락 껴안았다. "맞소, 맞아! 역시 아형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구려. 이 동사 황약사한텐 이제 아형밖엔 없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물이지." 물같이 부드러운 달빛이 안탕산을 적셨다. "뭇산은 화촉이 되어 경사스러운 이 밤 내 신부를 비춰 주고……." 황약사가 감격한 어조로 시 한 구절을 자작하여 읊조리자 아형도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수목은 빗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내 신랑의 머리를 빗겨 주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백년해로의 깊은 가약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호심장에서 만났을 때 낭군님은 우리에게 이런 연분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셨나요?" 황약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아형을 그리워했는지, 아형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을 태웠는지 그녀는 짐작도 못할 것이었다. "당신네들이 화산에서 살기등등해 싸우고 있을 때 난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요. 내가 당신과 같이 있어야 당신이 그런 싸움을 그만두고 남한테도…… 그래서 그때 난……." 황약사는 아형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말이지 황약사가 아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 사이에 이렇듯 살뜰한 정이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을 베풀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자기를 살뜰하게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의 마음도 그렇듯 다감해 짐을 느꼈다. 그만큼 황약사는 심경이 부드러워지고 즐거워졌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까짓 《구음진경》 같은 건 이젠 생각도 하지 않겠소. 내겐 이제 당신밖에는 아 필요 없소." "그 《구음진경》이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그 야단들인가요?" 아형이 물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깊고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왕중양의 무공은 확실히 대단하오. 우리 몇은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하지. 실제 겨루어 봐도 그렇지만 무공을 담론함에도 우린 그를 따를 수가 없었소. 왕중양의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그 《구음진경》에 의한 것이니, 누군들 그 책을 탐내지 않을 수 있겠소. 《구음진경》과 같은 기이한 책은 세상에 또 없을 거요." "그럼 당신도 한 권 쓰지요, 왜? 활상(黃裳)도 써냈는데 당신은 왜 못 써요? 학식이 그렇게 높은데……." 아형의 말에 황약사는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소?" 아형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세상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자기 낭군이 큰일을 하기를 원하는 법이에요. 나도 그렇죠, 난 당신이 꼭 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럼 나도 써 보지. 나도 써낼 거요. 당신을 위하여 고금에 없는 무학 기서를 내 꼭 써낼 테요. 당신이 보고 놀라게끔." 황약사는 다짐하듯 말했다. 아형은 황약사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당신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이때였다. 누군가가 앵무새처럼 아형의 말을 흉내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둘은 놀라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황약사가 낯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 처의 말을 흉내내는 거냐?" 그러자 목소리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이번에는 황약사의 말을 흉내냈다. 그는 '내 처'라는 부분에서 어색한지 말을 더듬었는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음성이었다. 황약사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노완동이구만! 필시 노완동 주백통이 틀림없어!" "노완동 주백통이라니? 노완동 주백통이 누구요? 난 당신과는 생면부지인데." "생면부지? 노완동 주백통이 나하고 생면부지라고? 장난 그만치고 어서 나오게." 황약사가 웃자 아형도 따라 웃었다. "맞아요. 틀림없는 노완동이에요." 그러자 상대방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까지 쉬며 말했다. "참 답답하군. 내가 노완동 주……주 뭐라던가? 주……주백통이 아니라는데 왜들 저러지? 난 큰 바보 황약사란 사람인데." 그러더니 수림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우거지상을 하고 서 있는 그를 보고 아형은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주백통도 히죽 웃었다. "아형 아가씨, 웃긴 왜 웃소?" "아형 아가씨가 뭔가? 우린 부부야. 그러니 형수님이라고 하든가 그것이 싫으면 아주머니라고 불러. 알겠나?"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주백통은 그 말에 아주 놀라는 척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형을 보더니 낮게 소곤거렸다. "아형 아가씨, 정말 황약사와 성혼을 했수?" 아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백통이 떠들었다. "아이고, 이거 기가 막혀 죽을 일이네. 기막혀 죽을 일이지." "기막혀 죽다니요?" 아형이 묻자 주백통이 대꾸했다. "아니, 이게 기막혀 죽을 일이 아니고 뭐요? 이렇게 총명한 아형 아가씨가 시집을 가다니? 시집은 왜 가요? 시집을 안 가야 아형 아가씨란 말을 들을 건데, 아, 형, 아, 가, 씨! 봐요, 얼마나 듣기 좋은가? 그런데 이젠 아가씨란 말은 다 듣게 되잖았수? 이제부터는 아주머니 소릴 듣게 되었으니 이거야 기막힐 일이 아니우. 아주머니가 뭐요, 아주머니가? 게다가 세상에 하고많은 남정네들 중에 왜 하필 황약사요? 이런 사람이 뭐 좋다고 이 사람의 부인이 된단 말이오? 기가 막혀 죽을 일이지," 노완동 주백통이 너스레를 떨자 황약사와 아형은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주백통은 계속 떠들어댔다. "황약사, 난 당신을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 봤는데 그게 아니구만? 혼인은 왜 한단 말이우? 처자식이 딸리면 공연히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다구? 무공 수련도 전념할 수가 없을 뿐더러 어딜 가든 성가시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그런 골칫거리 혹덩이를 뭣 땜에 만들어?" "노완동, 자네같이 늙은 총각 놈은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만 떠들게. 혼인해서 좋은 점을 자네가 어찌 알겠나?" 황약사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혼인하면 좋은 점이라? 그러니까,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이불 덮어 주는 사람이 있어 좋은 건가?" 그 말에 아형이 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백통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 아내 웃는 태깔이 곱수. 아무튼 아내를 얻으려면 저 아가씨같이 잘 웃는 여자를 얻어야지, 밤낮 얼굴이 고양이 낙태상이 되어 바가지만 긁는 여자를 얻었다간 평생 고생이지. 그랬다간 나 같은건 하루도 못살아. 암, 하루도 못살지." 황약사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아형을 돌아보았다. '아형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할 거야.' 황약사는 주백통을 앉히고서 술을 권했다. "노완동, 이 사람. 안탕산은 왜 왔나?" 황약사가 물었다. "왕중양 형님이 세상을 떴수." 약지 못한 주백통이 곧이곧대로 말하고는 입귀를 비죽거리며 눈물이 글썽해졌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황약사는 너무도 놀라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내가 뭣 땜에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 주백통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황약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황약사의 심경을 헤아린 아형은 말이 없었으나 주백통은 무척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중양이 살아 있을 때는 그와 싸우지 못해서 야단이던 황약사가 왜 왕중양이 저 세상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양이 쥐 생각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왕중양이 갔으니 내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꼬?" 황약사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길게 탄식했다. 노완동 주백통은 황약사의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만 들렸다. '왕중양 형님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이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우리 사형이 뭐 자기 말동무인가? 말동무야 나도 해줄 수 있고 혼인할 저 낭자도 해줄 수 있는 일, 말동무해 줄 사람이야 세상 천지에 쌔고 쌨는데 무슨 걱정이야?' 황약사는 비통한 어조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안탕산 봉우리 봉마다 아름답지만 천하엔 그래도 중양이 제일 높거늘 중양이 없는 날 안탕의 산봉우리도 몇천 길 낮아지네. '정말 황약사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골라 하는군. 우리 왕중양 형님이 없다고 해서 무슨 안탕산이 몇천 길 낮아질까? '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왕중양이 자기에게 베푼 은정들이 떠올라 그만 목이 메어 흑흑 흐느꼈다. "노완동, 형님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세상을 하직하시게 되었나?" 황약사가 묻자 주백통은 또 울음이 북받쳐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만에야 그는 사형 왕중양이 죽은 척하여 구양봉을 속였다가 그를 물리친 과정을 죽 이야기했다. "오라, 그러고 보니 자넨 그 《구음진경》을 감추려고 안탕산에 온 모양이군?" 황약사가 불쑥 내뱉는 말에 주백통은 아차 싶었다. '내가 그만 실언을 했구나.' 그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오. 난 안탕산이 좋다기에 구경을 왔을 뿐이오." 황약사와 아형은 주백통을 보며 조용히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주백통은 속이 켕겼다. "《구음진경》이 나한테 있기는 있지. 하지만 남에게 절대 보이지 말라는 우리 형님의 유언이 있었소." "《구음진경》이란 말은 저도 귀가 닳도록 들었어요. 가지고 계시면 어디 한 번만 좀 보여 줘요. 저도 구경이나 좀 하게." 아형이 주백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주백통은 급히 도리질을 했다. "안 돼요, 안 돼.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황약사와 결혼을 안 했으면 혹시 보여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아가씨가 보면 황 약사라고 모를 리가 있소?" "전 그저 호기심이 나서 한번 구경이나 해 보자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다섯 무림 종사들이 그 책을 갖겠다고 화산 꼭대기 얼음판에서 죽기살기로 싸움질을 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