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31편 (31/59)
그러자 문득 병묘가 소리쳤다. "나하고 한번 겨뤄 봄이 어떻소?" "병묘, 네가? 넌 벌써 나한테 중독된 몸이다. 너희들 몇이 금방 농어를 먹지 않았나? 그 농어들은 내가 태호에서 잡아다가 저 웅덩이에서 기른 것들인데, 음독이 대단하거든. 그런 걸 먹었으니 필경 내력이 다 흩어졌을 텐데 나하고 싸워 보겠다구?" 소인은 비양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정말……." 병묘가 울컥 치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사불이 재빠르게 병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공연한 짓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병묘와 소인이 싸우면 둘 중에 하나는 상하기 마련인데 어느 쪽이 상해도 사불에게는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때 희아가 불쑥 말했다. "우린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곧장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열다섯 여인들과 미화도 그녀의 뒤를 따라 호숫가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호숫가에 나와 보니 가없는 푸른 물만 보일 뿐 그들이 타고 온 목선은 물론 태호 보선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뒤이어 도착한 병묘와 사불, 악귀도 난색을 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넓은 태호에 배가 없으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였다.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획 나더니 끈 하나가 날아와서 한 여인의 팔을 휘감아 낚아채 갔다.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니 소인은 벌써 그 여자를 자기 앞에 데려다 놓고 손으로 여자의 대혈을 누르고 있었다. 여인은 소인의 품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인을 향해 달려갔다. "게 섰거라. 누구든 한 발짝만 다가서면 이 년을 당장 죽여 버릴테다." 소인이 꽥 소리쳤다. 사람들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못박인 듯 멈춰 섰다. 소인은 나무에 기대 앉아서 알몸뚱이의 여인을 끌어안고 젖가슴을 마음대로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여인들은 격분하여 욕설을 퍼부어 대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저런 죽일 놈! 저 놈을 죽여라!" 격분에 치를 떨던 희아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자 다른 여인들도 칼을 휘두르며 소인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나 소인은 방약무인 계속해서 하던 짓에만 열중했다. "어서 저 놈을 죽여 버리자!" 희아의 외침에 여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소인이 잽싸게 여인의 젖가슴에서 손을 떼며 끈뭉치를 홱 내뿌렸다. 그 끈이 한 여인의 목에 두르르 감기자 소인은 마치 태호의 농어를 낚아채듯 그 끈을 홱 잡아당겼다. 여인은 그대로 나무숲으로 날려가 떨어졌다. 빽빽한 나뭇가지에 걸린 여인은 꼼짝도 못한 채 체념한 듯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소인은 번개같이 손을 써서 어느덧 열네 명의 여인들을 모두 나무숲에 내던져 버려 마지막엔 희아 하나만 남았다. 소인은 발악하듯 덮쳐 드는 희아의 어깨를 한 장 세게 후려 갈겨 저만치 날려 보냈다. "저 계집들이 순순히 내 말을 따랐으면 이런 욕은 안 보지. 소인은 병묘와 미화를 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병묘는 이가 갈렸으나 방법이 없었다. 몸에 내상이 심하여 힘이 무척 줄어든 그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소인은 다시 손을 뻗쳐 가슴에 안긴 여인의 젖가슴을 주무르며 힘을 다해 음력을 빨아들였다. 반나절쯤 지나자 소인은 비로소 몸을 일으키며 목을 젖히고 통쾌한 듯 웃어댔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금 소인의 품에서 벗어난 여인은 기진맥진한 듯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히 앉아 있었는데 가만 보니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까맣게 윤기 돌던 머리가 어느덧 하얗게 세 버리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더니 석류 속같이 희던 치아도 어느새 검게 삭아 부서져 나왔다. 젊디젊던 아가씨가 이렇듯 순식간에 할망구가 돼 버린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소인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머리를 젖히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들 듣거라. 나는 무림을 몽땅 내 손아귀에 넣으련다. 치음이 정성 들여 가꿔 놓은 계집들로 나의 절세신공을 닦으련다! 핫하하……" 소인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열다섯 여인들은 자기들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여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사불도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병묘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병묘는 그녀가 소인과 한패라는 생각에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보기 싫소. 당신도 저 작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소!" 그는 곧장 호숫가로 뛰어가서 물로 첨벙 뛰어들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소인은 미화를 보며 물었다. "임자도 항주부 삼공자 중에 하나인데……" "사세에 맞춰 처사함이 본 공자의 철칙이지요." 미화는 비굴한 웃음을 떠올렸다. 소인은 미화가 담이 콩알만해져서 자기한테 꼼짝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얼굴에 약간 웃음을 떠올렸다. 쓰러져 있는 자매에게 다가가 그녀의 주검을 확인한 소희아는 사무치는 비분에 눈물을 흘렸다. 다른 여인들도 흐느껴 울었다. 어쩌다 사불에게 홀려 와서 소인의 제물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눈앞이 깜깜하고 원통했다. "너희들은 똑똑히 듣거라. 내 명을 거역하기만 하면 모두 한번에 생죽음을 당할 줄 알아라!" 소인이 여인들을 향해 못을 박았다. 그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웃는 낯으로 미화 공자를 불렀다. "미화 공자, 미안하지만 저 계집들을 몽땅 잡아다 혈도를 눌러 놓게." 미화 공자는 잠시 소인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신하더니 여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닥치는 대로 여인들의 혈도를 하나하나 눌러 놓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욕을 퍼부었다. "너 같은 놈이 항주부 삼공자라구?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그래도 명색이 사낸데 제 목숨 하나 지키자고 벌벌 떨면서 소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나약한 아녀자들을 괴롭혀?" 미화 공자는 여인들이 욕설을 퍼부어 대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다섯 여인 모두를 옴쭉달싹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맙네, 미화 공자." 소인이 궁둥이를 털썩거리며 웃자 미화 공자도 따라 웃었다. "어른의 부탁을 제가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제 사불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름이 사불이니 속세의 정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 되거늘 어찌하여 병묘만 보면 이상하게 질정을 못하는가?" 사불은 소인을 흘깃 보고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을 못했다. "그럼 자네들은 가서 보선이나 찾아오게. 멀리 떠내려가진 않았을 게야." 사불과 악귀는 말없이 읍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미화는 불현듯 이곳에 혼자 남는 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았다가 자칫하여 소인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사불 악귀, 같이 갑시다!" 미화는 급히 사불을 따라갔다. "나도 같이 가서 보선 찾는 일을 돕겠소." 미화의 말에 사불은 입을 삐죽했다. "쓸데없는 고생일랑 마시고 여기 남아 계시지요, 왜?"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악귀와 더불어 첨벙 물 속에 뛰어 들었다. 오늘 소인의 심기는 아주 즐거웠다. 평소 같으면 시내에 나가서 2, 3일은 걸려야 겨우 미녀 하나를 잡아올 수 있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한꺼번에 미인을 열 여섯이나,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는 미화를 시켜 이미 죽은 계집은 가져다 버리게 하고는 나무 위에 올라앉은 채 눈을 감고 기를 모아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그는 황약사와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는데, 다행히도 사불과 악귀가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소인이 한동안 태호를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붙박여 지냈던 것도 순전히 그 일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처는 점차 회복기에 접어든데다가 한꺼번에 미인 열 여섯 명을 데리고 차녀음공을 수련하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이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은 매일 해가 지고 달이 뜰 무렵이면 여자 하나씩을 잡아다가 그녀의 젖가슴으로 자기의 차녀음공을 수련하였는데, 이곳은 외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호젓하고 조용한 섬이라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희아는 여전히 미화를 향해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항주부에 너 같은 망나니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삼공자의 얼굴에 똥칠하는 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한심한 놈, 네 놈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나 미화는 희아의 욕설에 입을 봉한 채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그는 소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막듯이 말했다. "선배님처럼 절세의 신공을 지닌 분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겁니다. 저는 앞으로 선배님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선배님, 아무쪼록 이 몸에 박힌 음독을 뽑아 주십시오. 그래야 선배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소인은 한층 더 기분이 좋아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그저 날 위해 일만 잘해라. 그러면 서운하게는 하지 않을테니. 저 뒤에 있는 큰 거북이 껍질 위에 며칠만 누워 있거라. 그럼 거뜬히 회복될 거다." 그는 덧붙여서 그 엄청나게 큰 거북이 껍질의 좋은 점을 알려 주었다. 미화는 당장 거북이 껍질 위로 올라가 앉았다. 원래 이 거북이 껍질은 원수구퇴라는 기이한 물건인데 미화가 거기에 앉아 구사주(驅邪珠)를 보고 있자니 한 가닥 서늘한 기운이 미려혈로부터 앞가슴과 머리로 올라와서 12중루(十二重樓)를 지나고 36주천(三十六周天)을 돌았다. 이렇게 한 번 기가 돌고 나니 몸에 힘이 오르고 독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간 느낌이었다. 그 사이 소인은 벌써 여인을 셋이나 더 음력을 빨아 죽였다. 여인들은 이를 갈며 흐느낄 뿐 속수무책이었다. 희아는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어 대다가 이제는 목이 쉬어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자 혼자말로 탄식했다. "우리 자매 열 여섯은 치음 공자를 따르며 일심으로 화목하게 살았는데 오늘 소인의 마수에 걸려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복수할 방법이 없구나. 우리 열 여섯 자매의 운명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그녀의 넋두리를 듣다 못한 소인이 버럭 성을 냈다. "네 이 년, 넌 내게 쓸모가 없으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당장 꺼져 버려라.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희아는 흐느끼면서 수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자매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난 가요.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여인들은 일제히 통곡을 터뜨렸다. 여자들이란 자고로 자기의 용모를 목숨처럼 중히 여겨 죽더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죽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소인에게 음력을 빨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가 빠진 파파할머니가 되어 죽게 되었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희아를 보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희아야……, 그럼 잘…… 잘가……." 여인들은 이젠 하도 울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서 가 버리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소인이 다시 소리쳤다. 그가 수련하는 데 필요한 것은 숫처녀의 음력이지 이미 남자와 살을 섞어 순결을 잃은 그런 여인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희아는 자매들을 떠나 자기 혼자만 살면 뭐하나 싶어 태호에 뛰어들어 자결할 결심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자기네 자매들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라는 설움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호숫가에 다다랐다. 그녀는 물끄러미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수림 쪽을 바라보았다. 빼곡한 나무에 가려져서 자매들도, 소인이나 미화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이렇게 서두를 건 없지.' 희아는 바위 위에 앉아 태호를 바라보았다. 치음 공자를 생각하고 자기 자매들을 생각하니 다시금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한바탕 흐느껴 울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지쳐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몸에 더운 열기가 닿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선 사람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미화도 아니고 소인도 아니었다. 선이 굵은 얼굴에 선량한 웃음을 가진 사나이였다. "왜 자결이라도 하려고 여길 나왔나?" 사나이의 말에 희아는 눈물이 앞섰다. "울긴 또 왜 우나? 울지 말아요. 나 이 거렁뱅이는 누구든 내 앞에서 우는 건 제일 질색이거든. 가만, 배가 고파 그러나? 배가 너무 고프면 죽고 싶은 생각이 날 수도 있거든. 뭔가 요기 좀 하면 이 거렁뱅이처럼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 사나이는 갑자기 희아를 바위에서 안아 땅에 내려놓고는 자기가 그 바위 위에 올라서서 호수로부터 줄을 한 가라 한 가닥씩 당겨 올렸다. 그 줄들에는 괴상하게 생긴 작은 낚시들이 달려 있었다. 그 낚시들은 강호에서 쓰는 오구검(吳鉤劍)의 모양과 비슷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좀더 가늘고 작고 정교해 보인다는 정이었다. 어떤 낚시는 미끼만 끊은 채 빈 낚시로 올라왔으나 대부분이 농어가 잔뜩 달려 나왔다. 사나이는 그중 두 마리를 손에 쥐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배가 고프면 이 농어를 먹어 봐요. 농어를 먹고 나면 죽고 싶던 마음이 싹 달아날 거요." 희아는 농어를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흘 가량을 아 먹지 못한 그녀였지만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칭 거렁뱅이라 하는 사나이는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작은 손칼 하나를 품에서 꺼내었다. 이 칼은 아주 작고 얇았으나 그 대신 날이 파랗게 선 아주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제 내가 물고기를 얇게 저며 줄 테니깐 어디 먹어 봐요. 천하없는 별미라는 생각이 들거요." 사나이는 품에서 유포로 싼 것을 하나 꺼내더니 조심스레 한 겹 한 겹 풀었다. 약가루였다. 사나이는 물고기를 손에 들고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물고기도 있고 양념도 있으니 이젠 먹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어디 이 거렁뱅이가 오늘 포식 한번 해볼까?" 희아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허기도 잊고 사나이가 날생선을 맛깔스럽게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신 기막힌 솜씨로 물고기를 칼질하여 그 살점을 약가루에 찍어서는 입에 밀어 넣으며 희아를 향해 말했다. "역시 기가 막힌 맛이로군! 태호의 농어가 천하 별미라더니 과연 듣던 대로야. 나 같은 거렁뱅이도 먹을 복은 있어 오늘 태호 농어맛을 실컷 보게 되었구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농어 한 마리를 다 먹어 치워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나이는 얼굴에 아주 만족한 기색을 띠며 叫만 남은 물고기를 호수를 향해 집어 던졌다. 사나이는 계속해서 농어 한 마리를 더 먹고는 조롱박을 꺼내 목을 젖히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실컷 마시고 난 그는 입가를 쓱쓱 문지르며 희아에게 다시 권했다. "별미라니깐, 한번 먹어 보기나 하래두." 희아는 물고기를 먹는 사나이의 솜씨에 내심 감탄했다. 소인의 서툰 솜씨에 비교해 볼 때 이 사나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손놀림으로 손에 피 한 방을 묻히지 않고 물고기를 저며 내는 것이었다. 그가 어찌나 물고기를 맛있게 먹는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 태호 농어는 천하에 이름이 난 고기지. 강 고기건 바다 고기건 태호 농어만큼 맛있는 고기는 없거든. 내 말이 믿기질 않나? 한입만 먹어 보면 태호 농어가 어떤지 대번에 안다니깐?" 사나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다시 한 번 권하였다. 희아는 먹을 자신이 없었지만 군침이 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머뭇머뭇 말했다 "어디 먹……먹어 볼까요……?" "이 거렁뱅이는 절대 거짓말 같은 건 안 해. 한입만 먹어 봐. 그 맛을 평생 두고 잊을 수 없을 테니깐." 희아는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듯 사나이를 건너다보았다. "염려 말고 먹어 봐요. 그렇게 근심스러우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요. 눈을 딱 감고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이야, 내가 지금 산해진미를 먹는다 생각하면서 냉큼 먹어 봐. 입에 물어만 봐도 맛을 안다니까? 얼마나 감칠맛이 나는데?" 희아는 사나이가 시키는 해로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려 얼른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도 구미가 동하였다 "됐어!" 사나이가 반갑게 소리쳤다. 희아는 입 안에 미끌한 감촉이 느껴지더니 이어서 고소하게 녹아 버리는 맛에 눈을 번쩍 떴다. 비리지도 않고 부드러운 게 아주 감칠맛이 있었으며 게다가 입 안에 향기까지 도는 것 같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맛있네요." 그녀가 감탄했다. "그것 봐. 내 말이 틀리지 않지? 그래, 또 먹어 볼 텐가?" 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거렁뱅이는 신이 나서 다시금 고기를 저며 냈다. 이번에는 자기 혼자 먹을 때와는 달리 한 번에 네 점씩 연이어 두 번을 저며 내서는 여덟 점을 칼끝에 찍어 약가루를 묻혀 가지고 희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어떻게 먹느냐고, 미처 말할 새도 없이 그녀의 입에 밀어 넣어진 물고기 살은 눈 깜짝할 새에 녹아 스르륵 목구멍을 넘어가 버렸다. 날생선 맛이 이렇게 기가 막히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희아는 놀라운 얼굴로 사나이를 쳐다 보았다. "좋아, 좋아. 나보다도 맛있게 얼른 먹어 치우는데?" 사나이는 신명이 나서 더욱 빠르게 고기를 저며 냈다. 어느새 그 큰 고기가 또 뼈만 남았다. 희아는 이렇게 농어를 세 마리나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정말 맛이 기막히군요. 더 먹고 싶지만 이젠 그만두어야겠어요. 며칠을 굶은 터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아서요." 희아는 정말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사나이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걱정은 말라구. 방금 찍어 먹은 가루약이 뭔지 아나? 그 약을 찍어 먹으면 얼마든지 먹어도 탈이 나질 않거든!" 그는 다시 생선을 저며 희아에게 건넸다. 희아는 그의 소탈한 태도에 마음을 놓고 다시금 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희아가 배부르게 먹은 것을 보고서야 사나이는 손칼을 넣고 가루약을 싼 유포를 여몄다. 그가 유포 쌈지를 들고 물었다. "금방 먹은 이 약이 무슨 약인 줄 아나? 이 약은 천하사독(天下四毒)이라는 거야." 사나이의 말에 희아는 별생각 없이 포만감에 빙긋이 웃었다.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거기도 이 거렁뱅이처럼 사심이 없는 사람이구만." 그는 이제 조롱박을 집어 희아에게 권했다. 희아는 술을 못하지만 사나이의 성의에 못 이겨 눈을 질끈 감고 두어 모금 마시다가 그만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됐어, 됐어. 그만. 아깝게도 남자가 아니니 우리 개방에 들게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마음에 드는 사람이군." 거렁뱅이는 무척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거기는 대관절 어쩌다가 이런 데를 와 있나?" 그의 말에 희아는 다시금 설움이 복받쳤다. 그녀는 수림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울먹이며 낱낱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거렁뱅이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바위를 바라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글쎄 여기에 왜 이렇게 크고 살진 농어들이 많은가 했더니 그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그러니 여기에 음기가 이렇듯 성하지." 그는 알 만하다는 듯 한바탕 크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놈이 아무리 그렇게 흉악한 놈이라 해도 그 사이에 그 많은 자매들을 전부 죽여 없애지는 못했겠지. 어디 한 번 가 보자. 그 놈이 나를 어쩌나 보게." "가시지 마세요. 항주부의 유명한 삼공자 중 하나인 미화까지도 무서워 설설 기며 그자의 시종 노릇을 쓸꼬 있는 판인걸요? 공연히 가셨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희아가 눈물이 글썽하여 사나이를 말렸다. 사나이는 또 한바탕 앙천대소를 하였다. "걱정 말라구. 내가 가서 농어 고기를 대접해 주겠다는데도 날 해코지할까? 걱정 말고 가자구." 거렁뱅이 사나이는 한 손에 조롱박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희아의 손목을 끌고는 수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 고강하신 분이 내 섬엘 오셨는지 반갑습니다." 수림 속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거렁뱅이 사나이는 수림이 떠나갈 듯 크게 웃어대더니 대답했다. "개방의 홍칠이 농어잡이를 왔소이다."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 얽힌 수림은 나무들이 너무나 빼곡하여 그 밑으로 빠져 나가기가 아주 불편했다. 홍칠은 희아의 손목을 잡고 수림 위로 몸을 솟구쳤다. 희아는 순간 아찔해졌다. 이 수림의 나무들은 육지의 나무들에 비해 키가 엄청나게 커서 웬만한 무림의 고수들도 이 나무 꼭대기를 날아오르기 가 어려웠다. 그런데 한낱 거렁뱅이가 무슨 수로 이 나무를 날아오른단 말인가. 희아는 속으로 여간 염려스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몸이 새털같이 가벼워지며 상상도 못한 큰 힘에 딸려 올라가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발 밑에 구름을 디딘 듯 훌훌 날아올라 나무 위에 내려선 그녀는 너무나 놀라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겉보기엔 한낱 거렁뱅이에 불과한 사람이 어디서 이런 신공을 얻었을까?' 홍칠은 그녀를 끌고 나무 위를 성큼성큼 건너뛰어 한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