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30편 (30/59)
작은 오라버니하고는 어릴 때부터 사이가 나빴어. 작은 오라버니가 나를 때리면 난 작은 오라버니를 욕했지. 욕하고 나면 속이 좀 풀리잖아. 이제 당신은 내 낭군이니까 날 때리고 욕해도 가만 있을 테야, " 그녀는 또 정화독이 발작하는지 신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낭군님, 난 낭군님을 사랑해. 난 낭군을 위해 죽어도 한이 없어……." 그녀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임자, 왜 이러시오?" 공손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구천척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낭군님, 난 정말 아파서…… 견딜 수가……." 그녀의 얼굴엔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공손지도 가슴이 아팠으나 마음을 독하게 사려먹었다. 구천척이 자기의 몸에서 철장독을 먼저 뽑아 주지 않으면 자기도 구천척에게 절정단을 먹이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구천척이 말했다. "낭군님, 제 품속에 있는 약낭에 단약이 한 알 있어요. 철장방의 해독약인데 먹으면 금방 해독이 될 거예요……." 공손지는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품속에서 해독약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녀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한참 후 공손지는 적이 감격스러운 눈길로 구천척을 바라보며 해독약을 입에 넣고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한 갈래 열기가 단전에서 샘솟아 전신에 퍼지는 듯했다. 해독이 되어가는 것이다. 공손지는 기뻐 침대 옆으로 가서 구천척을 내려다보았다. 구천척은 눈을 내리감고 말없이 누워 있었는데 그 표정이 몹시 슬퍼 보였다. "천척, 왜 그러오?" "낭군님, 난 이제 낭군님의 아내가 되었는데도 낭군님은 밤새도록 이렇게 보고만 있을 건가요?" 구천척은 다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말했다. 공손지는 다시금 정욕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기의 몸이 해독되었으니 구천척의 정화독도 해독시켜 한시 빨리 정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환약 한 알을 입에 물고 구천척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임자, 내게 입을 맞춰 주오. 그럼 이 해독약을 먹여 주지." 공손지의 입에서 절정단이 녹기 시작하는지 벌써 약향기가 방안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구천척은 얼른 공손지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서늘한 기운이 혀끝에 닿으며 점차 온몸으로 퍼졌다. 한동안 잠자코 약기운에 몸을 맡기고 있던 구천척이 눈을 떴다. "낭군님, 고마워." 구천척이 생긋 웃어 보였다. 몸이 거뜬해진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공손지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며 뺨에다가 키스를 퍼부었다. "요 꼬맹이 남편아, 요 마음 좋은 내 낭군.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 오늘 밤 톡톡히 보답해 줄 테야." 그녀는 옷들을 훌훌 벗어 던졌다. 봉긋한 젖가슴, 둥글고 탄력있는 둔부, 그리고 아름다운 허리의 곡선…… 절세미녀의 황홀한 나체가 완벽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공손지 앞에서 춤을 추듯 몸을 한 번 휘 돌리고는 공손지를 덮치듯 끌어안고서 귓속말로 속살거렸다. "날 침대에 안아다 줘. 그럼 내가 어떻게 보답해 줄지 알게 될거야." 공손지는 급히 손을 뻗쳐 구천척의 잘록한 허리를 꽉 껴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그는 발정한 수캐처럼 서둘러 아랫도리를 벗고 구천척을 침대에 쓰러눕혔다. 이때였다. 갑자기 구천척이 공손지의 대혈을 꾹 눌렀다. 공손지는 그만 침대 곁에 목석처럼 우뚝 서 버렸다. 구천척이 몸을 발딱 일으키며 말했다. "공손지, 내가 너 같은 코흘리개한테 순순히 몸을 맡길 줄 알았어? 꿈 같은 생각은 하지도 말아." 그녀는 거칠게 발길질을 하여 공손지를 자기 앞에 꿇어앉혔다. "호호호…… 공손지 씨. 에비애미 앞에서도 이렇게 공손히 꿇어앉겠지?" 공손지는 화가 치밀었으나 묵묵히 구천척을 흘겨볼 뿐이었다. "이봐, 대추만한 것이 색시를 얻겠다구? 너무 이르다는 생각 안 들어?" 구천척은 어린아이 다루듯 공손지의 볼을 톡톡 두들기더니 강제로 입을 벌리게 했다. "어디 좀 보자. 이갈이나 했는가? 열두세 살이 돼야 젖니를 다 간다는데 말이야." 그녀는 그의 턱을 확 밀쳐 버리고는 소리내어 웃으며 옷을 주워 입었다. 공손지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젖히고 구천척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구천척을 쳐다보다가 문득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너무 기대하진 마……." "뭐? 그게 무슨 소리지?" 구천척이 얼른 웃음을 그쳤다. "내가 왜 절정단을 직접 먹게 주지 않고 내 입에 먼저 물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 구천척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려 줄까? 내가 준 건 반 알뿐이야, 알아? 이제 한 달내로 나머지 절정단을 먹지 못하면 그땐 죽을 수밖에 없어." 공손지는 득의양양해서 실실 웃었다. 구천척은 놀란 눈길로 공손지를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누군가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신방의 휘장 위에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네들 같은 인간들이 성혼은 무슨 성혼을 한다고 야단들인가?" 두 사람은 뜻밖의 상환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언제 여기를 들어왔을까?' 공손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행색을 보니 서역 사람 같군." "그렇네. 난 서역 사람일세." 구양봉이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런데 여긴 왜 왔소?" 공손지의 물음에 구양봉은 크게 웃기부터 했다. "공손지, 난 화산의 무예 시합에 참가하러 가는 길이다. 듣자니 네가 음양도란인법인가 뭔가를 가지고 이 절정곡에서 위세를 부린다기에 내가 네 놈을 요절내고 그 음양도란인법을 체득해 가려고 왔다." 그제야 공손지와 구천척은 자기네가 이때까지 티격태격 실없이 다투며 이곳에 오는 동안 그가 뒤 쫓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공손지와 구천척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구천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서역의 노독물 구양봉이시군요." "계집애들까지 내 이름을 그렇듯 익히 아는 것을 보니 이 노독물의 명성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인데?" 구양봉은 히죽 웃었다. 구천척은 강호에서 가장 포악한 자가 서역 대사막의 백타산 산군이라던 둘째 오라버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의도적으로 말했다. "당신을 만나 반가워요. 내 대신 저 공손지를 죽여 주세요. 내가 혈도를 눌러 놓아 꼼짝을 못하니까 가볍게 한 번만 쳐갈기면 숨이 넘어갈 거예요." 그러자 공손지도 외쳤다. "저 년을 죽이시오. 저 년을 죽인다면 내가 음양도란인법을 가르쳐 주겠소." "거 좋은 생각이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구양봉은 얼른 휘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먼저 공손지에게 다가가 손으로 두어 번 밀어 보았다. 과연 몸을 앞뒤로 흔들 뿐 꼼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구천척에게 혈도를 눌린 게 틀림없었다. 그는 구천척을 향해 돌아서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 같은 계집을 죽인다 해도 세웅 사람들에게 욕은 안 먹을 게다. 네 남편이 너를 죽이라고 하였은즉 날 원망하진 말아라!" 구양봉은 구레나룻과 머리칼로 온통 뒤덮인 얼굴을 쳐들고 구천척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내 장 한 번이면 정화독이니 뭐니로 더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지."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구천척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손바닥을 들었다. 그가 막 구천척의 정수리를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생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엄청난 힘이 밀어닥쳤다. 구양봉을 혼자 대처하기에는 힘에 부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구천척이 재빨리 공손지의 혈도를 풀어 주었고 몸의 혈도가 풀린 그가 구양봉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치는 한편 다른 한 손가락으로는 구양봉의 허리를 찔러 왔던 것이다. 구양봉은 얼른 몸을 돌리면서 오른팔을 휘둘러 '위타점저(爲陀點杵)'라는 술수를 썼다. 이때를 틈타 구천척이 잽싸게 두 손바닥으로 구양봉의 아랫배를 쳐갈겨왔다. 구양봉은 순간 충격을 느끼며 합마공을 써 허공돌기를 하며 저만치로 몸을 피했다. 구천척의 장력이 어찌나 센지 그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구천척과 공손지를 건너다보았다. "과연 둘이 배필은 배필인데?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니." 구양봉은 비양거리며 둘을 향해 다가갔다. "천척 낭자, 안 되겠소. 나와 손을 맞춰 저자를 꺼꾸러뜨립시다!" 공손지가 구천척에게 소리쳤다. 구천척은 얼른 두 손에 기를 모아 한 손바닥으로는 면문(面門)을 막고 다른 한 손바닥으로는 가슴을 막았다. 그녀의 무공은 둘째 오라버니인 구천인에게 배운 것으로써 장법이 아주 훌륭했다. 둘을 상대하게 된 구양봉은 사태가 위급함을 직감하였다. 실로 구천척의 장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가슴을 맞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양봉이 가지고 있는 합마공은 워낙 무섭고 특별한 것이라 상대방의 힘이 뻗쳐 오면 체내에 저절로 그 힘을 막는 힘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구천척의 두 손바닥의 공세가 아무리 세다 해도 구양봉을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지는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칼을 나눠 들고 구양봉에게 덮쳐 들었다. 그는 칼로 찍고 검으로 찌르면서 맹공격을 가하였다. 구양봉은 공손지가 칼과 검을 번갈아 쓰며 음양을 바꾸는 것을 눈여겨보며, 속으로 검은 가볍고 칼은 무거우니 칼은 찍는 것을 피하고 검은 찌르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천척은 공손지가 칼과 검을 쓰는 틈을 이용하여 측면으로 구양봉을 협격해 왔다. 구양봉은 50여 합을 싸워도 두 사람을 이길 수가 없게 되자 화가 버럭 났다. '내가 이 둘도 못 이기고서야 어떻게 《구음진경》을 차지할 수가 있겠는가?' 구양봉은 있는 힘을 다해 구천척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구천척은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한쪽 탁자께로 나동그라졌다. 우지끈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공손지!" 구천척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란 공손지는 이를 악물고 검으로 구양봉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힘껏 내리쳤다. 구양봉은 날쌔게 그 검을 피하며 부서진 탁자를 들어 공손지를 향해 내던졌다. 공손지도 얼른 몸을 피했다. 구양봉이 살기등등하여 공손지를 노려보았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구천척은 얼른 품고 있던 암기 몇 개를 꺼내 구양봉을 향해 던졌다. "이걸 받아라!" 암기들은 번개같이 구양봉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구양봉은 얼른 몸을 피했으나 암기 하나가 결국 그의 어깻죽지에 들이박혔다. 구양봉은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미친 듯이 소리쳤다. "구천척, 네 이 년! 너희 두 부부는 오늘 내 손에서 죽는 줄 알아라!" 구양봉은 두꺼비같이 몸을 웅크려 쭈그리고 앉더니 손바닥으로는 땅을 짚고 허리를 구부리며 두꺼비 울음 소리를 세 번 냈다. 거대한 신력이 체내에서 솟구치자 구양봉은 두 손바닥을 펴서 무서운 장력을 뿜어냈다. 순간 그 힘에 떠밀린 공손지가 침대 위로 엎어지며 침대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구천척이 미친 듯이 구양봉에게 달려들었다. 구양봉이 냉큼 몸을 피하자 구천척은 제 힘에 못 이겨 그만 공손지의 몸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구양봉, 죽일 테면 죽여라! 우리 둘을 같이 죽여라!" 구천척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구양봉이 최후의 일장을 날리기 위해 손을 치켜 들었다. 순간 구천척이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엉뚱하게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한테 듣자니 당신은 평생 잊지 못하는 여인이 하나 있다더군요?" 구양봉의 치켜 올려졌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구천척은 물끄러미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일부러 공손지에게 물었다. "눈앞의 여자가 만일 가장 사랑하는 여자라면 정말 즉일 수 있을까?" 구양봉은 자기더러 들으라는 소린 줄 짐작하고 차갑게 웃었다. "사랑하는 여인이라……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렇군요. 좋아요. 이젠 우리 둘을 죽여요. 우린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더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구천척의 말에 구양봉은 문득 낡은 절간에서 모용쟁과 생이별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후로 그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눈물의 나날을 보내 왔다. 구양봉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들어 망연자실 구천척과 공손지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구양봉은 갑자기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다 말고 두 사람을 서글픈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돌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신방 천장을 뚫고 올라가서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구천척과 공손지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갑자기 아주 어색해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지 알 수 없어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구천척이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원수야, 원수. 첫날밤을 그냥 이렇게 흘려 보내고 말 거예요?" "여보!" 공손지는 들고 있던 칼과 검을 획 내던지며 구천척을 와락 끌어 안았다. 구천척은 공손지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며 여전히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어린 사람의 아내가 되다니……. 정말 한심한 팔자로구나……." 제20장 열 여섯 자매들의 수난 미화 공자와 열 여섯 자매는 태호방을 나와 배를 탔다. 아형이 염려되는 미화 공자는 아형을 만나기 위해 호심장에 다시 한 번 가보기로 작정했다. 미화 공자의 심정을 헤아린 열 여섯 자매는 치음 공자가 살아 있다면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삼 죽은 치음 공자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호심장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다르자 멀리 큰 배 한척이 마주 오는 게 바라보였다. 여인들은 대뜸 그 배가 사불과 악귀의 태호 보선임을 알아보았다. 미화는 그들을 피하고자 여인들에게 뱃머리를 돌려 다른 길로 갈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태호 보선은 돛을 높이며 속도를 내어 어느새 미화네 배로 접근해 왔다. 배가 가까워지자 뱃머리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사불과 악귀, 그리고 병묘였다. 순간 미화와 병묘의 머리 속에선 동시에 아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읍을 하였다. "미화 공자께선 어디로 가시기에 이렇게 바쁘십니까?" 사불의 인사말이었다. "태호방에게 항주 삼공자 중 하나인 치음은 죽고 나만 간신히 살아 남았는데, 치음의 이 자매들과 어디로 갈지 딱히 정해진 곳은 없소이다." 미화가 대꾸했다. "그러면 저와 함께 소인을 만나러 가시지 않겠는지요?" 소인의 명성은 들었으나 그가 미녀들을 잡아다가 차녀음공을 수련하고 있음은 알 길 없는 미화 공자는 사불의 말에 순순히 응낙했다.. 두 배는 반나절 가량 달려서 한 수림지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수림 사이를 한동안 돌고 누벼서야 겨우 소인 앞에 이르렀다. "태호의 미화 공자와 병묘 공자, 치음 공자의 하속들이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사불이 읍하였다. 소인은 차가운 낯빛으로 나무 위에 앉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워낙 협착한 곳이라 이 많은 분들을 제대로 환접하기가 불편하니 나무라지는 마시오." 소인의 말에 병묘가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빌려 갔던 진주 두 알을 다시 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럼 그건 원수구퇴에 갖다 놓게." 병묘는 시키는 대로 야명주 두 개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너무 협소한 섬이라 빈객들의 발길이 드물더니 오늘 이렇게 많이들 왔구려. 반갑소. 아무튼 재주껏 대접해 드리리다." 소인은 대뜸 등뒤로 손을 홱 내저었다. 그러자 한 가닥 명주끈 같은 것이 소인 뒤의 호숫물로 뿌려져 들어갔다. 소인이 다시 그 명주끈을 앞으로 홱 잡아채자 이번엔 한 자 남짓한 물고기 한 마리가 미화 공자 앞에 뚝 떨어졌다. 소인은 같은 방법으로 물고기 한 마리를 더 잡아 올려서는 자기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왼손으로 꾹 눌렀다. 물고기는 꼬리를 마구 내저으며 몸부림쳤다. "황량한 작은 섬이라 대접할 건 물고기뿐이외다." 그는 손가락끝으로 물고기 등을 째어 껍질을 벗기더니 살점을 뜯어내어 입에 넣고 맛있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소인은 고기 한 마리를 날것으로 먹고 나서 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손을 내밀며 사람들에게 권했다. "여러분들도 맛 좀 보시오." 미화나 병묘는 태호의 농어를 회쳐 먹어 본 적이 몇 번 있는 터라 소인의 권유에 따라 날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곧 사불과 악귀도 합세하여 먹기 시작하자 여자들 열 여섯은 경악실색하여 서로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소인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언성을 높였다. "왜 먹지 않으시오? 대접이 대접 같지 않단 말씀이오?" 소희아가 절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선배님의 환접은 실로 고마우나 저희들은 날생선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선배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세요. 우리는 불을 지펴 구워 먹었으면 합니다." 희아의 말이 끝나자 열 여섯 자매 중 한 여인이 품에서 부싯돌과 부시를 꺼내 불을 피우려 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은실 같은 것이 번쩍하더니 부시가 온데간데 없어졌다. 소인이 은실로 부시를 낚아채어 태호에 던져 넣었던 것이다. "여기는 불빛을 보여서는 절대 안 되는 곳이야." 소인은 기분 나쁜 얼굴로 쌀쌀하게 말했다. 열 여섯 자매는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소인이 불쑥 물었다. "그래, 치음네 사람들이시라구?" "예, 그래요. 공자님의 태산 같은 은혜를 우린 잊지 않고 있어요. 희아의 대답에 소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치음이 어떤 작자인지 나도 알아. 그런 자를 위해 그렇게 마음을 다 바쳤나?" 희아가 다시 대꾸하려 하자 병묘가 눈짓을 했다. 공연히 소인의 비위를 거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희아는 더 대꾸하지 않고 샐쭉하니 입을 다물었다. "치음네 사람들이라면 그저 밤낮으로 노래나 부르는게 일이겠구만 그래?" 소인이 비양거리듯 말하고는 소리내어 웃었다. "공자님을 모독하지 마세요. 우리한테 베푼 공자님의 은혜는 태산 같아요. 저희들은 비록 공자님의 풍악단에 불과하지만 공자님은 평소 저희들을 몹시 존중해 주셨어요." 다른 여인들도 모두 화가 나서 일제히 소인을 노려보았다. "낭자들 열 여섯이 여기서 나를 도와 천하의 기이한 무공을 수련하게 해주면 낭자들이 죽더라도 내가 영당을 세워 밤낮으로 기도를 드려 주겠네." 소인은 다시 소리내어 너털웃음을 쳤다. "난 자네들을 이용하여 무공을 수련하겠단 말이야. 자네들 열 여섯은 나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해." "우리 열 여섯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인가요?" 희아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 자네하고 저 아가씨, 그리고 저 아가씨 이렇게 셋은 숫처녀가 아니어서 내 수련에 별로 도움되지 않아." 그는 첫눈에 벌써 열 여섯 여인 중 셋은 치음과 동침한 적이 있으나 나머지 열셋은 숫처녀임을 알아보았다. 열 여섯 자매는 졸지에 눈앞이 깜깜해져 옴을 느졌다. 자신들이 어쩌다 저런 사람을 만나 이 같은 수모를 당하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옆에 서 있던 사불이 보기가 딱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여인들은 모두 치음 공자네 사람들인데 선배님께서 사정 좀……." 소인이 사불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저 병묘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해서 내가 치료해 주었고, 게다가 내가 그토록 아끼던 수신주(水神珠)까지 빌려 뒀는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사불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병묘의 일로 도움을 받은 판에 또 무슨 일을 사정한단 말인가? 열 여섯 자매는 이대로 나가다간 큰일나겠다 싶어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일심으로 마음을 모았다. 여인 일곱이 선두가 되어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소인에게 덮쳐 들었다. 비파, 편종, 그리고 악기 두드리는 방망이 두 개가 소인의 머리로 날아들고, 향주(響珠) 세 개와 목탁 하나가 소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으며 비단끈 한 가닥과 젓대 하나는 소인의 다리 아래로 날아들었다. 일곱이 함께 손을 쓰자 마치 회오리바람이 이는 듯 그 위력이 대단했다. 소인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손에 쥔 명주끈을 홱 내뿌렸다. 그러자 달려들던 일곱 여인들은 맥을 못 추고 뿔뿔이 흩어지며 나뒹굴었다. "너희들 열 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난 무섭지 않다." 소인이 거들먹거렸다. "나까지 나서면 어쩔 셈이오?" 미화 공자의 말이었다. 소인은 그 말에 기도 안 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왜 웃으시오?" 소인은 웃음을 멈추고 미화 공자를 내려다보았다. "항주부 삼공자 중에 그래도 자네가 제일이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니나 자넨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그런 미련둥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 내 말이 틀렸나?" "그야 그렇소만……." 미화 공자는 말끝을 흘리며 소인을 바라보았다. 소인이 무공이 대단한데다가 자기는 내상을 입은 몸이니 자칫하다간 소인에게 맞아 죽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불과 악귀는 모두 소인과 가까운 사이로 여차하면 소인을 도와 나설 것이었다. 이리 따져 보고 저리 따져 봐도 이길 가망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화는 팔짱을 지르며 더는 참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