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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27편 (27/59)

2026-09-24 21:27:20 조회 24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한데 이건 무슨 검법인가?" 황약사가 대답했다. "이건 도화도의 낙영신검이라는 것이다!" 구양봉은 호기심이 동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훌륭하군, 훌륭해! 나도 당신의 이 낙영신검을 배우게 해주게" 황약사가 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양봉, 네 놈이 이따위 벌레들을 가지고 이 도화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 독사는 나의 제자들을 죽이는 데나 쓸 수 있을 따름이야. 네가 저 애들을 죽인 다음 나와 승부를 겨를테냐?"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황약사, 네 놈이 종남산에서 그 세 치도 안 되는 혀를 놀려 화산에서 무예시합을 하자고 왕중양을 부추기더니 이번엔 이 구양봉으로 하여금 너의 제자에게 손을 쓰게 함으로써 나의 이름을 더럽히려는 작정이냐?" 구양봉은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아까에 비해 무척 느렸는데 그 때문인지 잔뜩 기승을 부리던 독사들이 꾸불거리며 흩어져서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톳불 주위에는 이끼 한 마리의 독사도 남지 않았다. 구양봉은 옆구리에서 사장(蛇 )을 뽑아 들었다. 이 사장은 사람의 키만큼 긴 것으로 위에 사람의 머리 같기도 하고 뱀대가리 같기도 한 모양이 부각되어 있어 매우 징그러워 보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병장기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황약사, 난 이 사장의 마흔아홉 가지 법수로 너와 자웅을 겨를테다!" 황약사는 머리를 돌려 진현풍과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탓으로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 진현풍과는 달리 어글어글한 눈매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매초풍의 기색은 꼭 아형과 흡사했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아형이 이 곳에 있다면 얼마나 힘이 날까. 그러면 나는 구양봉과 싸워 반드시 이길 수 있을 텐데…….' 그는 구양봉이 확실히 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싸우게 되면 쉽사리 승부를 가리기 힘들 것이며 까딱 잘못했다간 패배할 가능성도 많았다. 황약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품속에 찔러 넣었던 옥소를 다시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서서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황약사, 네 놈의 낙영검법을 나의 이 독사장에다 시험해 보면 서역의 대사막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될거다!" 구양봉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독사장을 앞세우고 몸을 날려 일직선을 이주며 곧장 황약사에게 날아갔다. 이 진공은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것이었지만 황약사는 가볍게 옥소를 들어 독사장을 겨누었다. 순간 무서운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은 모두 땅 위에 떨어지며 서너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고 막아내기를 반복했으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구양봉의 무예 실력에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구양봉의 무예는 홍칠이나 단지홍보다 전혀 못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감추며 큰소리로 말했다. "구양봉, 독사장을 쓰는 법수가 훌륭하군. 나도 독사장 쓰는 법을 배워야겠는걸?" 두 사람은 다시 한데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번개처럼 몰아치는지 그들의 그림자마저 똑똑히 보이지를 않았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에워싸고 질주하는데 손에 들려 있는 옥소가 천 개가 넘는 소검(簫劍)으로 변하여 개개마다 구양봉의 대혈을 노리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구양봉 역시 독사 장으로 건드리고, 쑤시고, 낚아채고, 찌르는 등 다양한 장법을 써서 한치의 틈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줄창 2백 합 가까이 싸웠으나 도무지 승부가 나질 않았다. 갑자기 구양봉의 독사장과 황약사의 옥소가 부딪치며 요란한 정음을 냈다. 그것은 구양봉의 공격을 황약사가 옥소로 막는 소리였다. 구양봉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황 괴물, 과연 네 놈은 보통 놈이 아니구나!" 황약사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통쾌하군, 통쾌해. 나 역시 일속 대사와 겨루어 본 이래 당신같은 고수는 처음이야, 상대방이 이 정도는 돼야 싸울 맛이 나는 거지." 구양봉도 일찍이 일속을 만나 본 적이 있고 일속과 황약사가 싸운 일을 알고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그는 무예를 모르는 백면서생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황 약사로부터 이 같은 칭찬을 받게 되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황약사, 당신의 재주에 정말 탄복하오. 이 노독물이 당신을 놓아 보낼 테니 저 두 애들을 데리고 가도 좋소."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단풍나무숲이며 강들이 점점 형체를 드러냈다. 황약사는 여전히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구양봉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구양봉, 네 놈이 뱀을 가지고 날 괴롭혀 놓고도 그냥 가려구?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서리라 생각하느냐?" 그러자 구양봉도 냉소하며 대꾸했다. "황약사, 네 놈은 정말 안하무인이로구나. 그래 끝까지 이 노독물과 싸워 보겠단 말이지? 좋다. 내 오늘 네 놈과 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황약사는 대뜸 옥소를 허리춤에 꽂으며 꺼져 가는 화톳불 앞에 가 앉았다. 이를 바라보던 구양봉도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가 다시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식지로 엄지를 감싼 다음 엄지를 힘껏 튕겼다. 그러자 돌연 세찬 바람이 일며 스러져 가던 화톳불이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멋지군, 멋져! 실로 귀신 같은 재주야!" 구양봉은 사뭇 감탄하듯 말하고서 두 손을 쳐들었다가 앉은 자세로 두 장을 수평으로 내밀었다. 그는 다시 두 손바닥을 맞붙였는데 기를 내보내려는 눈치였다. 황약사는 뛰어난 견식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구양봉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갑자기 멍해졌다. '뭐하려는 수작이지? 꼭 개구리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은 것 같구나.' 이때였다. 구양봉은 두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황약사는 소스라쳐 놀랐다. 갑자기 땅속으로부터 꽈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화톳불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던 것이다. 황약사가 급히 물었다. "노독물, 정말 놀랍군! 그건 도대체 무슨 재준가!" 구양봉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견식이 뛰어난 사람인데 아직도 나의 이 합마신공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로군."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중원 사람들한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북강의 구사독옹(丸邪毒翁) 문하에서 나온 법수 아니오? 20년 전 무림계에 한 기인이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노독물 신독행이라고 불렀소. 이 사람이 합마신공에 능하다고 하던데 난 말만 들었을 뿐이지 그 사람을 보지는 못했소. 당신이 그 사람의 계승자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구양봉은 황약사가 처음의 오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정중하게 나오자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는 자기도 황약사와 같은 강호의 으뜸가는 고수가 되었음이 입증되자 몇 년 동안 고생해 온 보람을 새삼 느꼈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황 괴물, 쓸데없는 소릴랑 걷어치우고 두 사람 중 누구의 무예가 높은가 겨루어 보자구!" 구양봉은 두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두꺼비 울음 소리를 세 차례 내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황약사를 향해 덮쳐 들었다. 황약사도 양손을 벌려 들고 구양봉을 향해 거센 장풍을 날려 보냈다. 황약사의 한쪽 손가락은 구양봉의 왼손에 있는 노궁혈(勞宮穴)을 겨냥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손가락은 구양봉의 오른손에 있는 신문(神門)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합마공을 끌어낼래야 끌어낼 수 없게 되었다. 구양봉이 큰소리를 지르며 겨냥해 오는 두 손가락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황약사의 손동작은 더욱 빨라 손목을 약간 돌리기만 하면 그 두 손가락은 여전히 두 개의 혈을 겨냥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동작에 따라 화톳불의 불꽃이 이리저리 휩쓸리며 춤을 추었다. 구양봉은 하는 수 없어 두 손을 앞으로 확 내밀었다. 그러자 불꽃은 두 방향에서 오는 힘을 동시에 받아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하더니 '팍!'하는 소리와 함께 대번에 꺼지고 말았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서로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구양봉이 말했다. "황 괴물, 과연 훌륭한 재주로군. 화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훌쩍 몸을 솟구쳐 순식간에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꺼진 화톳불에 눈길을 던졌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구나." 그는 무림의 인물로는 중원의 왕중양과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 홍칠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서역 백타산의 산군인 구양봉이라는 자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자기 죄를 아느냐?" 진현풍과 매초풍은 구양봉이 가 버리자 시름을 놓다가 뜻하지 않은 사부의 질문에 몹시 당황하여 겁에 질린 낯빛으로 넙죽 엎드렸다. 황약사가 물었다. "진현풍, 난 줄곧 남을 엄하게 대하는 데 습관된 사람이다. 넌 기왕 나의 문하에 들어온 만큼 나의 뜻에 따라야 할 것이다. 네 생각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진현풍은 며칠 동안 황약사를 따라다니며 어느 정도 그의 성미를 알게 된 터라 황약사가 자기를 죽이려 든다면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음을 깨닫고 머리를 들며 말했다. "사부님, 이 제자를 죽일 생각이면 죽이십시오. 저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널 죽이겠느냐? 난 오늘 이 일을 장부에 적어 두고 널 가르치겠다. 네가 다시는 버릇없이 굴지 못하도록 말이다. 일후 강호에 나가서 남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땐 반드시 널 죽여 버릴 테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땅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내더니 앞으로 내던졌다. 장검은 '씽' 하고 날아가 세 그루의 나뭇가지를 한 줄에 째어 놓았다. 진현풍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벌을 주신다면 제자가 무예를 잘 닦고 재주를 잘 키워 절대로 도화도의 수치가 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줄로 알겠사옵니다." 황약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매초풍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의 애비가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 가르친 말은 아주 옳은 말이니 잘 기억해 두거라." "아버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요." 매초풍의 대답에 황약사가 놀라서 물었다. "옳지 않다고? 그건 왜지?" 매초풍은 황약사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저의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세상엔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지만 사부님은 좋은 사람인걸요?" 황약사가 엄하게 꾸짖었다. "매초풍, 내 미리 알려 준다만 네가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나한테 잘 보이려 해도 내가 널 죽일 맘이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매초풍은 황약사의 성미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답했다. "사부님, 언제든 절 죽이고 싶거든 죽이세요. 하지만 사부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점만은 틀림이 없어요." 황약사는 한참이나 매초풍을 쳐다보다가 속으로 탄식했다. '저 계집앤 어쩌면 이다지도 아형을 닮았을까? 저 고집스러운 성미도 꼭 같구나. 하지만 저 앤 아형이 아니야. 아형은 사실 저 애처럼 굳세지는 못했었어. ' 황약사가 알고 있는 아형은 영리하고 깜찍한 여인이었지 이 매초풍처럼 어린 나이에 생사를 대수로워하지 않고 결단성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초풍은 황약사가 오래도록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인 채 다시는 황약사를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날이 이미 밝았는지 라 그들 세 사람은 길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저만큼 앞에 사람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왼손에는 큰 독을 들고 오른손에는 총채를 들고 있었는데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는 듯이 걷고 있었다. 그것을 본 황약사가 깜짝 놀라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걸 좀 보아라. 저 사람이 손에 저렇게 큰 독을 들고서도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나는 듯이 길을 걸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그 사람은 점점 더 빨리 걷는데 멀리서 보니 큰 독으로부터 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황약사는 더욱 놀라서 생각을 더듬었다. '저 사람처럼 손에 큰 독을 들고 나는 듯이 걷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에 물을 가득 채워 들고서 저렇게 빨리 걷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황약사는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상대방의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고 그럴수록 손에 든 구리독이 번들번들 빛을 뿌렸다. 황약사는 그 사람이 이처럼 신력(神力)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이 아닌가 두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천천히 뒤따라 오너라, 난 저 사람을 따라잡아야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듯이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그 사람은 강가에 당도하자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물에 들어서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지에서 걷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경쾌하고 자유스러웠다. 황약사가 강변에 당도하니 그 사람은 벌써 강을 건너 대안의 수림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강변에 다다른 황약사는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방금 구양봉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지만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었는데 이 사람을 보자 삽시에 영웅심이 절반이나 줄어드는 듯했다. '저 사람의 신력은 나뿐만이 아니라 왕중양, 홍칠, 소씨 거렁뱅이, 단지흥이 와도 모두 상대가 되지 못하겠구나. 한데 저 사람은 누구길래 이처럼 대단한 공력을 갖고 있단 말인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구나. ' 제18장 곡절 많은 사랑 구양봉은 황약사와 작별한 뒤 이 단풍나무가 울창한 나루터로 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는 강을 건넌 즉시 시가지에 당도했다. 건강부는 워낙 풍요한 고장으로서 시가지는 아주 번화했다. 구양봉은 시가지에 당도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술과 안주를 청하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술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창 술을 마지면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들이 모두 이 시가지의 사람들이고 대체로 부잣집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하릴없이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고 한담하는 것으로서 소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그들을 관계치 않고 술을 마시는 데만 골몰하였다. 그는 대리로 가는 길에 길도 알아볼 겸 이곳에서 잠시 쉬는 참이었다. 그는 임만을 거쳐 흠주(欽州)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것인가, 아니면 건강으로부터 악주(鄂州)까지 가서 또 형주(街州)를 거쳐 육로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옆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다. "자넨 못 들었나? 그 구부( 府)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주 큰 추문이라던데." 그러자 다른 사람이 다그쳐 물었다. "구부라면 철 장수상표 구 선배님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낚아채듯 말했다. "언성을 좀 낮추게! 그렇게 소리를 높이다간 큰일을 치르는 수 있어." 그는 남들이 들을 수 없게 귓속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그들이 하는 말을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구 선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은근히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짓을 하며 귓속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구 선배라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가 확연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 선배라구? 만일 그 철장방의 새 방주를 두고 한 말이라면 필시 그 철 장수상표 구천인임이 틀림없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을 보고 선배라니?' 그러면서 구양봉은 구천인 역시 인물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절에서 구천인이 향로에 손자국을 내어 철장방 방주의 자리를 차지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로부터 좨 오랜 시일이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이때였다. 그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왔다, 왔어!" 길 복판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손에 커다란 구리독을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니 그는 다름아닌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구리 독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리독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구천인은 태연한 기색으로 천천히 술집에 들어와 곧장 구양봉이 앉아 있는 이층으로 올라왔다. 구양봉은 그가 열여덟 개의 나무층계를 올라오는데도 그 걸음이 온건하고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구천인은 층계를 다 올라온 후 깨끗이 치워 놓은 탁자를 골라 구리독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탁자는 구리독의 무게를 견뎌 내지 못하여 뿌지직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구천인은 자리에 앉자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는데 아마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구양봉은 사두장을 술상 옆에 세워 놓은 채로 무심한 척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구천인이 지난날에 비해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늘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일반적인 강호의 고수는 물론이고 구양봉조차도 미치지 못할 듯싶었다. 한편 구천인은 구천인대로 호복(胡服)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구양봉을 발견하고 그가 중원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이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힐 인물이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대충 스쳐 보았을 뿐으로 그가 구양봉인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술집에 있던 손님들은 구천인의 일을 이러니저러니 이야기하고 있던 터에 그가 불쑥 나타나자 겁이 나서 숨조차 바로 쉬지 못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가끔 구천인의 거동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구천인이 자리에 앉은 채 소리쳤다. "둘째야! 둘째!" 둘째라는 호칭은 술집 심부름꾼들을 하대하여 부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점잖게 부른다면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상례다. 그런데 이 술집에는 심부름꾼이 따로 없는 터라 주인이 직접 술을 날랐는데 그는 둘째라는 호칭으로 불리고도 하는 수 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으리님, 뭘 드시겠습니까?" 구천인이 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나? 맛있는 게 있으면 날라 오란 말이야. 술은 열 단지를 가져와!" 구양봉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나도 두 단지밖에는 마시지 못하는데 저 놈은 열 단지나 마신단 말인가?' 주인은 곧 술을 날라 왔다. 그는 술 열 단지를 구천인의 발치에 놓고 술상에 안주를 가득 차려 놓았다. 만일 탁자 위에 놓인 구리독만 아니었다면 안주를 더 많이 차려 놓았을 것이었다. 구천인이 불쑥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다시 화를 냈다. "이 놈의 젓가락은 왜 이렇게 굵어?" 주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구천인은 손에 들었던 젓가락에 손톱을 박아 넣더니 힘을 주어 쭉 내리그었다. 그는 이렇게 젓가락을 가늘게 몇 가닥으로 갈라 놓고 나서야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젓가락이란 이렇게 가늘어야 음식을 집기가 좋지." 그제야 비로소 구천인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은 구천인의 술 마시는 모양이 남다른 데 대해 무척 놀랐다. 그는 안주를 집어먹고 나서는 젓가락을 술상 위에 박아 세워 놓는 것이었는데, 그 한 쌍의 참대 젓가락은 술상에 꼿꼿이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술단지의 뚜껑을 떼고 단지째 집어 들고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래가 물을 들이켜듯 한 단지의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구양봉은 그가 이처럼 술을 호걸답게 마시는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독한 술을 단지째 들고 단번에 마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층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열 명이 넘는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나이 어린 공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 공자를 바라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키드득 웃었다. 그 공자는 옷차림이 아주 멋졌는데 머리에는 공자소요건(公子消遙巾)을 쓰고 몸에는 소수(蘇辯)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좌우 양쪽에는 각기 깨어진 반쪽짜리 옥반(玉盤)을 매어 드리우고 있었다. 소매에는 한쪽에 각기 열여덟 개씩 진주를 박았는데 하나 하나에 불상 이 새겨져 있었다. 발에는 꽃무늬를 수놓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구양봉이 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차림을 한 자가 생긴 것은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썹이 짝짝이였는데 한쪽 눈썹이 시커멓게 숱이 많은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코는 돼지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한심한 들창코였다. 그자는 단추구멍처럼 살짝 째진 볼품없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구천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