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25편 (25/59)
뜰 밖에는 버드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커다란 대문 앞에는 돌사자 두 마리가 세워져 있었다. 층계 위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오형제를 보고 물었다. "자네들은 그 푸른 면구를 쓴 괴한을 잡았나?" "여기 오지 않았나." 오형제들은 데들 황약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문어귀에 섰던 사람들은 곧 황약사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황약사는 웃음 띤 얼굴로 천천히 뜰 안으로 들어갔다. 뜰에 들어서자 큰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 복판에는 깃대가 경사지게 서 있었는데 깃대에는 '염 ( )'자가 큼지막하게 써진 누런 깃발이 걸려 있었다. 황약사 등 여섯 사람이 객청 (客廳)으로 다가가자 활짝 열려 있던 객청 문으로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한 무리 몰려 나왔다. 염방의 그 몇몇 형제가 사람들을 끌고 나오는 판이었다. 사위를 둘러보던 황약사는 염방 사람들 속에 그 사내애와 계집애가 묶인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건강 오의 중 맏이가 염방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이 이 사람을 찾기에 우리가 찾아왔소이다." 염방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나와 긴장한 낮으로 황약사를 주시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않았다. 맏이가 또 소리를 질렀다. "셋째 나으리, 사람이 왔으니 따질 게 있으면 어서 따지시오!" 그의 말에 염방의 셋째라는 사람은 입이 붙어 버린 듯 잠자코 있었다. 황약사의 면전에서 니마묘 사건의 시비를 캔다는 것은 근본상 되지도 않을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건강 오의의 눈치를 보고 그들 역시 황약사와 싸워 패하였음을 짐작했다. 그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입을 열었다. "네 놈은 우리 염방과 무슨 원수진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와 말썽을 부리려는 거냐? 오늘 우리 염방은 네 놈과 사생결단을 할 테다!" 황약사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복수해 볼 생각이 있거든 덤벼들어라." 그는 경공을 써서 그들에게 바싹 다가갔다. 염방 놈들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놈들사이를 왔다갔다하자 놈들은 낫에 삼대가 잘리듯 픽픽 나가떨어졌다. 염방의 셋째라는 놈이 황약사에게 덮쳐들며 고함을 쳤다. "오늘 무슨 수로든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놈은 왼손으로 기만 동작을 써 가면서 오른손에 든 칼로 황약사를 내리찍으려 했다. 황약사는 가볍게 한 손을 치켜 들더니 놈에게 일장을 갈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놈의 칼날을 튕겨 냈다. '쟁!'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른 칼은 금세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놈은 수중에 칼이 없어지게 되자 주먹으로 황약사의 면상을 겨냥하여 후려갈기려 들었다. 황약사는 대뜸 놈의 주먹을 틀어잡고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놈이 비명을 질러대자 황약사는 사정을 두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에 가볍게 일장을 먹였다. 놈은 눈이 화등잔만해져서는 미끌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건강 오의는 수많은 싸움판을 경험해 보았지만 황약사와 같은 인물은 생전 처음 보았다. 그는 가벼운 동작으로도 사람을 파리 죽이듯 간단히 해치우지 않는가. 그들은 할말을 잃은 채 멍청히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마치 한가롭게 산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염방 놈들은 놀란 소리를 지르며 몇 걸음씩 물러났다. 드디어 황약사는 놈들을 문앞까지 밀어 붙였다. 황약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진현풍과 그 매씨네 계집애를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염방 놈들은 잔뜩 겁에 질려 일제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당장 진현풍과 매약화를 묶은 포승줄을 끊어 버리고 두 사람을 황약사 쪽으로 떠밀어 보냈다. 황약사는 온통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너희들 둘은 나를 따라 이 건강부를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황약사가 물었다. 진현풍은 황약사의 무예에 심히 탄복하고 있던 터에 그가 자기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듣고 더없이 기뻐했다. 그는 한 손으로 황약사의 손을 잡은 채 머리를 돌려 염방 놈들을 바라보며 을러댔다. "내가 훗날 무예를 익혀 가지고 돌아오게 되면 너희들 염방 놈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 버릴 거야!" 염방 놈들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황약사의 손을 잡고 있는 그를 없앨 도리가 없었다. 황약사는 기특하다는 듯 진현풍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한편에 조용히 서 있는 매약화를 내려다보았다. 매약화는 미목이 수려한 게 무척 성숙해 보였다. 황약사는 문득 그녀를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매약화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유난히 붉은 입술이며 새하얀 이빨, 총기 도는 눈동자 등이 어딘가 아형을 닮은 데가 있었다. 그녀를 향해 황약사가 물었다. "날 따라가면 다시는 염방 놈들의 학대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어떠냐?" 매약화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러겠어요. 따라가겠어요." "그럼 가자." 황약사는 두말하지 않고 계집애와 진현풍의 손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잡았다. 세 사람은 나란히 법당 문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약사는 땅바닥에 앉으면서 진현풍과 매약화도 자기 옆에 앉게 했다. 황약사가 진현풍에게 물었다. "네 부친의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 가족들은 없느냐? 진현풍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대답했다. "저의 부친은 진백만이라 부르는데, 건강부에선 첫손에 꼽히는 부자였지요. 염방 놈들한테 살해당하고 집도 불타 버렸어요. 전 영웅이신 당신을 따라가서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스승으로 섬기자면 여간 어렵지 않을 게다. 먼저 일어나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그러나 진현풍은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엎드린 자세로 황약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넌 무예를 배워 뭣 하려느냐?" "사람을 죽이렵니다." 진현풍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황약사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물었다. "사람을 죽인다면 어떤 자들을 죽이려느냐?" "제가 보기에 나쁜 놈 같으면 몽땅 죽여 버리겠습니다." 황약사는 내심 놀란 듯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말 맵시며 행동거지 하나하난가 데려다 제자로 삼아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매약화에게 말했다. "너도 고아가 되었구나. 우리 도화도엔 여인이 없어서 널 섬에 데리고 가긴 무척 곤란할 것 같은데……." 그는 말끝을 흘리며 매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약화는 아주 총명한 아이인지라 황약사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절 도화도에 데리고 가시면 그곳에도 여인이 있게 되는 거죠." 그녀의 말에 황약사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도화도에 가 뭐 하려느냐?" "전 부엌일을 할 줄 알아요. 남자들이 무예를 닦을 때 전 남자들을 위해 밥짓고 반찬을 만들면 안 되나요?" 황약사가 말을 받았다. "도화도엔 불을 때고 밥짓는 사람이 있단다." 매약화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화도엔 여인이 없다면서요?" "도화도엔 여인이 없단다. 나한테 불 때주고 밥을 지어 주는 사람도 사내란다." 매약화가 큰소리로 말했다. "남자도 불 때고 밥을 지을 줄 아나요? 남자가 하는 밥이 오죽 하겠어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황약사는 자꾸만 아형 생각이 났다. '이 앤 솔직하고 총명하지만 아형에게 비하면 아직도 한참 어린애지…….' 그는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졌다. 황약사는 두 애를 데리고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옷을 갈아 입고 밥을 먹은 뒤 황약사의 방에 모여 앉았다. 황약사는 앉은 자세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한 듯 바라보았다. 이경(二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황약사는 갑자기 훌쩍 몸을 일으켰다. "자, 나를 따라오너라!" 세 사람은 객점을 나와 거리에 나섰다. 거리와 골목은 불빛 한 점 없이 온통 깜깜했고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고 불을 끈 채 잠이 든 지 오래였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약화의 손을 양손에 나눠 잡고 경공을 써서 지붕 용마루로 날아올랐다. 그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번에 몇 장씩 용마루와 용마루 사이를 날아 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성벽 위에 당도했다. 이 건강부는 여섯 조대의 도읍지로서 천하에 이름난 돌성이었다. 5대 16국 때 계속하여 돌을 쌓아 올린 탓에 성벽은 매우 두텁고 높아 높이가 5,60장, 두께가 7, 8장에 달했다. 황약사는 아무 말 없이 진현풍과 매약화를 성벽 위에 내려놓고는 성벽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성 밑을 내려다보았다. 성안에서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꼼짝 않고 한곳에 앉아 있는 황약사는 마치 참선을 하고 있는 노승과도 같았다. 이때였다. 성 밑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발자국 소리의 임자가 머리를 들어 성 위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도화도 도주인 황약사요?" "그렇소." 황약사의 대답에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그의 징그러운 웃음 소리에 잔뜩 긴장하여 성 밑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에 장승 같은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풀어헤친 머리칼이 허리까지 드리워져 있었으며 손에는 구리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견주어 볼 때 힘깨나 쓰는 사람 같아 보였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올라오구려." "당신이 내려오구려!" "올라올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황약사의 말에 그가 버럭 성을 내었다. "좋아, 거기서 기다려. 내가 올라갈 테니까!" 사나이는 성 밑까지 와서 투덜댔다. "제기랄! 이 놈의 성은 왜 이리 높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구리몽둥이로 성벽을 뚫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성벽에 석 자나 되게 깊이 박혔다. 그는 그 몽둥이를 잡고 성벽에 기어올랐다. 잠시 후 그는 황약사의 앞에 와서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말이지?" 황약사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황약사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런 것 같지 않아." 황약사가 되물었다. "뭐가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거요?" 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두들 당신을 황 괴물이라 부르면서 사악한 인간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당신을 보니 사악해 보이기보다는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황 괴물이라 할 수 있겠소?" 황약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황 괴물이오. 대호(大號)는 동사요. 오늘을 넘기기만 하면 당신은 이 황 괴물이 얼마나사악한 인물인가를 알게 될 거요." "내가 듣기에 당신은 태호방을 없애 버렸고 염방 사람들도 숱하게 죽였더군. 그래 소문을 듣고 당신과 싸워 보려고 이렇게 찾아 왔는데, 나 참……" 그는 아무래도 신통찮아 뵌다는 듯 입맛을 쩍 다셨다. 그의 눈엔 황약사가 암만해도 서른 남짓한 섬약한 선비로밖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약사가 천천히 일어나며 물었다. "당신이 구리몽둥이로 강남을 정정 울리고 있다는 대력 (大力) 허패 (許覇)가 아니오?" "그래, 이 어른이 허패이시다. 그런데 어쨌단 말이냐?" 허패가 오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금년 봄에 강남에서 세 사람을 죽였는데 그 세 사람은 동해 상어방 사람들이 아니오?" "그래, 이 어른이 그 세 놈을 죽였다. 하지만 그 놈들이 어느 방놈들인지는 몰라. 하긴 그 놈들 몸에 큰 물고기 두 마리가 매달려 있던 기억은 나는군." "당신이 그 세 사람을 죽이게 된 건 무슨 까닭에서요?"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지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지?" "그래도 당신이 사람을 죽인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사나이가 음침해진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 상놈의 자식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이 어른보다 더 빨리 마시지 않겠나? 내가 두 사발 마시는 사이에 세 사발이나 마시더란 말야. 그래 그 놈을 죽여 버리게 된 거지."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워낙 그 사람들은 당신과 술시합을 했었구먼. 술시 합에서 지게 되니까 사람을 죽였다구?" 사나이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천만에, 술시합에서 지게 되면 이후에 기회를 보아 죽여 버리면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사람을 죽이겠나? 그때 술집에서 그 자는 저쪽에 있었고 나는 이쪽에 있었는데 이 어른이 볼라니까 내가 한 사발을 마시면 그 놈이 두 사발 마시더라구. 이 어른이 눈알을 부라리는데도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란 말이야. 그 놈이 나를 보기에 이 어른이 또 한 사발을 마셨지. 술사발을 내려놓고 바라보니 나 참, 그 놈이 또 한 사발 들이마시는 게 아니겠나? 그래 화가 나서 그 놈한테 달려가 그 자리서 모가지를 비틀어 끊어 버린 거지. 그런데 그 옆에 함께 앉아 있던 두 놈이 달아나지 않고 겁없이 덤벼들잖아? 그래 두 놈 다 마저 해치워 버렸지." 그는 술집에서 세 사람을 죽여 버리던 장면을 떠올리자 통쾌한 모양인지 다시금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황약사가 말했다. "내가 자네보다 술을 더 잘 마신다면 자네가 이 황약사의 모가지도 비틀어 꺾어 버릴 텐가?" "이 어른이 비틀고 싶으면 당연히 비트는 거지!" 대력 허패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이때였다. 황약사가 몸 뒤에서 무슨 물건인가를 잡는 것 같더니 대력 허패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건이 대력 허패의 면상을 향해 씽 하고 날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워낙 손놀림이 빠른 자라 얼른 두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아 쥐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술단지였다. 대력 허패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황 괴물, 나와 함께 술을 마실 셈인가?" 황약사는 대답하지 않고 술단지 한 개를 더 꺼내었다. 그는 술단지의 뚜껑을 뜯으며 말했다. "마시자구." 대력 허패는 황약사가 술을 내놓자 몹시 기뻤다. '황약사, 네 놈도 괴짜로구나. 이 허패가 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함께 술을 마시자구 하는구나. 좀 있다가 이 놈을 이겨 모가지를 꺾어 놔야지.' 그는 황약사의 뒤에 앉아 있는 진현풍과 매약화에게 흘낏 눈길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 황약사 자네는 정말 세심한 사람이군. 시체를 수습할 사람까지 데리고 왔으니." 그는 기고만장하여 껄껄 웃어댔다. 황약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술단지를 든 채 그가 술을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대력 허패는 술단지의 뚜껑을 연 다음 한 단지나 되는 술을 꿀꺽 꿀꺽 단숨에 들이켰다. 황약사도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력 허패와는 달리 조금도 소리내지 않고 단지를 비우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윽고 대력 허패가 단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약사, 난 다 마셨네." 그는 아주 득의 양양한 표정이었다. 황약사는 묵묵히 앉아 그를 바라보더니 술단지를 거꾸로 치켜 들어 흔들어 보임으로써 다 마셨음을 알렸다. 순간 황약사의 손에 들려 있던 단지가 갑자기 '팡!'하고 부서져 버렸다. 대력 허패는 기가 죽은 기색으로 황약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넨 나보다 빨리 마시기는 했지만 난 자네보다 더 많이 마실 수 있어." 황약사가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너보다 더 빨리 마셨으니 어디 내 목을 비틀어 끊어 보지 그래?" 대력 허패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황 괴물, 날 건드리지 말어. 날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강남 16부에서 아직 이 대력 허패를 감히 건드리는 놈은 없어!" "네 놈이 손을 쓰지 않겠다면 내가 손끌 쓰마. 네 모가지 하나 비틀어 놓는 정도는 내게 아 아니거든." 대력 허패가 천둥같이 화를 내며 황약사를 향해 구리몽둥이를 휘둘렀다. 구리몽둥이가 '팍!' 하고 황약사의 어깨에 맞았다. 그러자 진현풍과 매약화가 놀란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로 달려왔다. 황약사가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두 아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력 허패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황약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살과 피로 된 황약사의 몸뚱이가 돌벽도 뚫는 구리몽둥이에 맞고서도 이처럼 성할 수가 있단 말인가? 허패는 귀신이라도 본 듯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난 사람을 죽일 때 먼저 상대방이 나에게 죄를 짓게 만든다. 네 놈이 내 한마디에 날 몽둥이로 쳤으니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말아라!" 황약사는 훌쩍 봄을 날려 대력 허패에게로 달려들었다. 황약사가 몸을 날려 재주를 부리기 시작하자 놈은 당황하여 구리몽둥이를 미친 듯이 휘둘러 댔다. 그러나 황약사는 그가 몽둥이를 휘두르는 대로 몽둥이를 따라 그만큼 빨리 몸을 움직였다. 한바탕 몽둥이를 휘두르던 허패는 기진맥진하여 몽둥이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느려 갔다. 어느 결에 황약사의 손이 퍼뜩하더니 허패의 구리몽둥이를 거머쥐었다. 허괘는 몽둥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힘껏 잡아 챘다. 그러나 황약사의 다섯 손가락 끝에 잡힌 몽둥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패는 더욱 힘을 내어 몽둥이를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약사의 손에 잡힌 몽둥이는 자기가 틀어쥐고 있는 부분만 빼놓고 엿가락처럼 휘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황약사는 어느 틈에 대력 허패의 곁에까지 다가왔다. "짐승 같은 놈,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테냐?" 대력 허패는 손을 놓으며 겁에 질린 눈길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좋다. 내가 너한테 진 셈이니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라!" 황약사는 뒷짐을 진 채 한가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네 놈이 졌다는 걸 인정했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대력 허패는 황약사를 쳐다보더니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약사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허패란 놈은 갑자기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황약사의 가슴팍을 냅다 찔렀다. 황약사는 번개같이 손을 놀려 두 손가락으로 비수를 잡았다. 막 가슴팍을 파고들던 비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패는 황약사 앞에서 비수를 틀어된 채 멍하니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약사는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디 계속 덤벼 보시지 그래?" 허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창백해진 낯빛으로 황약사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에 박힌 비수를 빼내며 말했다. "네 놈이 요까짓 칼로 날 죽이겠다구?"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비수는 몇 토막으로 끊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허패는 더는 방법이 없는지라 제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황약사는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 두 개의 돌조각을 날려 보냈다. 그것은 허패의 혈도에 명중하여 그는 아예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오면서 성벽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다시 성벽 위에 앉아 진현풍과 매약화를 불렀다. 그들이 앞에 와 서자 황약사는 다정하게 물었다. "현풍아, 넌 이 놈을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겠느냐?" 진현풍은 황약사를 쳐다보다가 다시 대력 허패를 쳐다보았다. 그는 염방 놈들이 인명을 빼앗는 일을 장난처럼 여기던 일을 생각하고는 이를 갈았다. "죽여야지요! 사부님이 허락하신다면 이 제자가 손을 쓰겠습니다." "황약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매약화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 보아라. 이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죽여야 하겠느냐 죽이지 말아야 하겠느냐?" 매약화는 계집애인지라 그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분의 제자가 되려면 저분의 환심을 사야 해. 그러자면 매사에 저분의 뜻에 따르는 길밖에 없어.' 매약화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죽이든 살리든 어르신 뜻대로 하세요." 황약사가 다시 물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저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매약화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난 지금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들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셨어. 그러한 부모님들께서 염방 놈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 게다가 염방 놈들은 나에게 갖은 수모를 주었어. 졸지에 고아가 되어 놈들의 학대까지 받게 되었지.' 예까지 생각한 매약화는 다시 대답했다. "저 놈은 죄가 크고 나쁜 짓을 많이 한 놈이니 쉽게 죽여선 안돼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만큼만 고통을 줘요." 황약사는 매약화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황 괴물은 오늘 정말로 작은 두 괴물을 만난 셈이로구나. 계집애의 소견으로 어찌 저런 지독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황약사는 갑자기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는 허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네 놈은 사람을 죽이는 일 말고 또 무엇을 할 줄 아느냐?" 허패는 황약사의 느닷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