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20편 (20/59)
저를 도와 동해 도화도에서 건너온 황약사와 도박에 미친 병묘와 미화란 놈만 없애 주십시오. 그럼 전 두 분의 분부라면 무슨 일이든 따르겠습니다." 병묘는 비로소 사불과 악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원래 두 연놈은 태호방의 도적떼와는 한패 였구나. 그러기에 태호 보선이 아무데나 마음놓고 다니고 태호방과 모든 강호의 인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사불과 악귀는 도적 무리들 속에서는 위풍이 당당하구나. 그런데 학영감이 황약사와 나를 없애 달라는데 사불이 과연 그를 도울까? ' 사불이 대답했다. "학 영감, 걱정 말게. 나와 악귀가 그만한 일도 해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이 태호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나? 그 황약사란 놈은 어디 있나? 먼저 그 놈부터 요절낼 테야. 그 다음엔 미화란 놈을 잡아죽이고 마지막으로 그 병묘란 놈을 찾아보자구. 그럼 되겠나?" 학 영감은 아주 마음이 흡족했다. 원래 그의 수하에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와 일흔두 봉의 두령들이 있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연달아 죽고, 상하고, 도망치고 하여 네댓밖에 남지 않았다. 이처럼 풍비박산이 난 태호방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게 어찌 간단한 일이겠는가? 그런 와중에 사불과 악귀가 도와주겠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태호방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은 죄다 한 아가씨 때문입니다. 황약사란 놈이 우리 태호방을 한사코 쳐 없애려 한 것도 역시 그 아가씨 때문이었지요. 두 분께서 저와 함께 응취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다리시면 그 놈이 꼭 찾아올 것입니다." 사불과 악귀는 말없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은 곧장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응취봉으로 향했다. 배는 기우뚱거리면서 태호 일흔두 봉우리 중에서 제일 높은 응취봉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달렸다. 이를 본 병묘는 그들의 뒤를 밟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들이 나를 죽여 버리겠다구?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걸? 네 놈들이 황약사란 사람을 죽이겠다구 장담을 하는데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나로선 아형이 거기에 있다니 그녀를 구해 내는 게 무엇보다도 급선무야.' 오래지 않아 배를 쫓아간 병묘는 응취봉 기슭에 닿았다. 배가 호숫가에 멎자 셋은 일제히 기슭에 내려섰다. 독수리 두 마리도 배에서 날아 내려 학 영감의 뒤를 쫓았다. 병묘는 냉큼 빈 태호 보선에 뛰어올라 몸을 숨기고 셋이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몸뚱이를 낮추게 하고는 독수리 등에 뛰어 올라탔다가 다시 뛰어내리더니 악귀더러 자기처럼 독수리 등에 올라타라고 눈짓했다. 악귀는 호기심이 동해 얼른 올라타고는 좋아라고 웃어댔다. 학 영감은 독수리의 대가리를 슬슬 어루만져 주면서 날으라고 했다. 이윽고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독수리 두 마리는 이렇게 번갈아 세 사람을 태우고 응취 봉을 향해 날아올랐다. 셋이 모두 응취봉 꼭대기에 오르자 병모는 몹시 조급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응취봉에 오를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선실로 들어가 배 안의 물건들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보물들을 넣은 궤짝을 들춘다가 그는 비수 두 자루를 발견했다. 그는 대뜸 이 비수들이 보통 비수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는 양손에 비수 한 자루씩을 쥐고 두 손에 동시에 힘을 주어 칼날을 서로 찍어 보았다. '쨍!'하는 야무진 소리가 나면서 비수 날들이 진동했지만 날이 부러지기는커녕 이 하나 빠지지 않았다. 병묘는 과연 훌륭한 비수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병묘는 수중에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지 않은 터라 이 비수 두 자루를 품속에 찌르고 응취봉을 향해 출발했다. 응취봉에 다다른 그는 비수를 번갈아 암벽에 박으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응취봉 꼭대기에서 아형은 돌절구통 앞에 앉아 물고기를 씻고 있었다. 그러나 반나절이나 씻어도 여전히 비린내가 코를 찔러 먹을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학 영감과 사불 그리고 악귀가 아형 앞에 나타났다. 아형은 악귀를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학영감이 자기의 시중을 들게 하려고 악귀를 붙잡아 온 줄로만 생각했다. 이윽고 사불이 나타나자 아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곱게 생긴 아가씬데? 저 죽일 놈의 늙다리가 어디서 이런 고운 처녀를 붙잡아 왔을까? 저 아가씨를 마누라로 삼을 작정인가 보지? ' 사불이 아형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아가씨가 태호 호심장에 사는 아형 낭잔가?" 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불이 아형의 머리칼과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모두들 아가씨를 선녀같이 아름답다고들 하던데 어찌하여 이처럼 봉두난발이 되고 얼굴도 물고기 껍질처럼 되었지? 아가씨가 도대체 뭐 볼 게 있다구 항주부의 세 공자가 아가씨한테 미쳐 날뛰었다는 게야? 아가씬 누굴 좋아하나? 누구한테 시집갈 생각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 솔직히 털어놔 봐, " 아형은 그녀를 바라보며 심지가 바르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되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치음 공자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낭자가 미화를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두 사람이 성혼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야. 그런데 그 병모란 사람을 좋아한다면 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어. 그래, 아가씨와 그 사람이 함께 죽게 하겠어. 하지만 아가씨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지. 난 그 사람의 생명의 은인이야. 그 사람이 독에 중독된 걸 내가 구해 주었지." 아형은 사불의 말이 믿기질 않았다. 암만 봐도 이 여인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성싶지 않았다. 사불은 아형이 자기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자 장력을 써서 돌절구를 들이쳤다. 돌절구는 당장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절구의 물이 쏟아지자 두 마리의 물고기가 땅바닥에서 고통스레 퍼덕였다. 아형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물고기를 집어 옆에 놓인 다른 돌절구에 넣어 주었다.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미소는 누구라도 반하게 만들 것 같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불은 내심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학 영감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당신의 독수리를 시켜 저 년을 쫓아 버리게 해요. 당장요!" 학 영감은 사불의 말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녀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시키는 대로 했다. 학 영감의 명령에 독수리는 무섭게 아형에게로 달려들었다. 아형은 잠깐 사이에 독수리에 쪼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형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태호에 메아리쳤다. 사불과 악귀는 손뼉을 치며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사불은 사(邪)하고 악귀는 악(惡)하다만 사악한 짓을 많이 하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니야." 갑자기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벼랑께로 꺼먼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제2권에 계속- 제13장 황약사와 구천인의 만남 낭떠러지를 타고 올라온 사람은 바로 항주부 세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박 미치광이 병묘였다. 암석 모서리에 걸린 듯 옷이 온통 찢긴 그는 두 손에 비수 한 자루씩을 갈라 쥐고 있었다. 세 사람은 너무나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천길이나 되는 이런 가파른 절벽으로 사람이 기어 올라오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학영감이 사나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 이 놈 병묘야, 이런 벼랑까지 기어 올라오는 걸 보니 대단하구나. 오늘 네 놈이 또 어디로 도망가나 보자." 학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묵한 돌 위에 앉아 사불과 악귀를 바라보았다. 사불이 병묘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소인한테서 도망쳐 오는 길인가요?" "그렇소." 사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꼬박 열흘을 채웠어야 해요. 그래야 몸에 퍼진 독이 말끔히 가셔요." "알고 있소. 소인 선생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소. 하지만 사정상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떠날수밖에 없었소." "당신 몸에 독이 남아 있으면 조만간 해를 당하고 말 거예요." "소인께서도 내 몸에 독이 남아 있는 한 생명에 지장이 있으며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소. 조금만 마셔도 독이 퍼진다고 말이오." 사불은 그 말을 듣더니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물끄러미 학 영감을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학영감이 나무라듯 말했다. "사불 악귀, 당신들은 나의 태호방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한쪽에 앉아 묵묵히 침묵만 지키던 악귀가 갑자기 학 영감을 노려보며 거칠게 말했다. "닥쳐, 입을 더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 병묘를 바라보던 사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병묘, 당신은 그 비수를 버리고 나와 함께 갑시다." 병묘는 사불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아형을 향해 물었다. "아형, 그간 잘 지냈소?" "병묘 오라버니……." 아형은 병묘를 보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불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병묘, 어떡하시겠어요? 나와 함께 갈 텐가요, 말 텐가요?" 병묘는 코방귀를 뀌면서 중얼거렸다. "사불 악귀들 같으니!" 사불은 평소에 남이 자기를 사불 악귀라고 부르는 것을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누르며 살뜰한 아내가 남편을 염려하는 듯한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난 당신을 돌려보내야겠어요. 소인한테로 돌아가서 몸에 밴 독을 말끔히 없애야만 해요." "필요 없소." 병묘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는 학 영감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네 놈이 아형을 억지로 소유하려 하는데 내 오늘 결판을 내려고 왔다." 학 영감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서서 사불과 악귀를 바라보았다. 마치 병묘와 자기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태도였다. 사불은 유심히 병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 꽂힌 네 개의 나뭇가지가 눈에 띄었다. 사불은 그것이 독이 심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인이 꽃아 놓은 것임을 알았다. 목숨을 내걸고서까지 아형을 구하려는 병묘의 헌신적인 자세에 사불은 더더욱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병묘, 당신은 상처도 낫지 않은데다가 절벽까지 기어 올라왔으니 지쳐서도 나와는 상대가 안 될 거예요.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일랑 버리는 게 좋아요." 병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어깨에서 나뭇가지를 뽑아 내었다. 어깨에서는 피가 흘렀다. 사실 그는 솔직히 사불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형을 구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비수를 꼭 틀어쥐면서 말했다. "어서 덤비시오. 어디 한번 겨뤄 봅시다." 사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천천히 병묘 앞에 다가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당신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양손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자, 날 죽이세요." 병묘는 뜻밖의 상황에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불 쪽에서 먼저 공격해 온다면 또 몰라도 어찌 이런 상황에서 손을 쓸 수 있겠는가? 병묘는 비수를 든 손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칼날의 날카로운 빛이 눈을 찔렀다. 사불이 독촉했다. "뭘 망설이세요? 어서 날 죽이라구요. 지금 내 심정은 당신 손에 죽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사불의 처연한 몇 마디 말에 병묘는 새삼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이 여인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여인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만일 내가 이 여인을 죽인다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가 이처럼 갈등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갑자기 사불이 손을 썼다. 그녀는 번개같이 두 손을 놀려 병묘의 대혈 몇 곳을 눌러 놓았다. 병묘는 즉시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훌륭하오. 과연 사불이로군. 하긴 누가 사불의 재주를 당해 내겠소?" 학영감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학 영감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사불이 병묘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돌아가요. 가서 소인 선생한테 완전히 치료를 받도록 해요. 난 당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내 말대로 해요, 네?" 병묘가 대답했다. "난 아형을 구해야 하오." 사불이 비웃었다. "그 꼴을 해 가지고 남을 구하겠다구요? 정말 웃기는군요." 병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사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새에 손을 써서 나를 옴쭉달싹 못하게 만들다니…….' 그는 생각할수록 사불이 괘씸했다. 이런 그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사불이 학 영감에게 말했다. "당신의 독수리가 필요해요. 난 저 사람을 데리고 여기를 떠나 소인 선생에게 가야겠어요. 이번에 데려가면 다시는 당신을 찾아 오지 못하게 하겠어." 학 영감은 병묘를 힐끔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남이 독수리를 부리려면 반드시 팔의 피를 짜내어 놈한테 먹여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거든." 사불은 망설이지 않고 병묘의 손에 들려 있는 비수를 빼앗아 자기 팔을 찔렀다. 피가 솟아나오자 그녀는 독수리에게 다가가서 서슴없이 팔뚝을 내밀었다. 피를 본 독수리는 흥분하여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곁으로 뛰어와 날카로운 부리로 그 피를 들이마셨다. 한참 후 사불이 병묘 곁으로 다가갔다. "병묘, 당신의 팔도 좀 베어야겠어요. 아프면 소리를 질러도 돼요." 사불은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병묘의 팔을 끌어당겨 칼로 찔렀다. 피가 나오자 이번에는 다른 독수리에게 그 피를 먹였다. 피독수리는 병묘와 사불의 선혈을 마시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온순해졌다. 놈들은 두 사람 앞에 와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날아갈 준비를 했다. 사불은 한 놈의 목덜미를 두드려 몸체를 낮추게 한 후 병묘를 앉히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묘, 날 따라가요. 함께 가서 다시 소인을 만나도록 해요." 그리고는 그녀도 다른 한 놈의 등에 올라앉았다. 학 영감은 그들 두 사람이 기어이 떠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독수리들은 사불의 영에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날개를 펼치고 날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응취봉 봉우리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 산봉우리에는 아형과 학 영감, 악귀만이 남게 되었다. 학 영감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아형에게 눈길을 주고는 악귀를 향해 말했다. "거기 그러구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동굴 속에 들어가 한잠 주무시지요." 악귀가 웃으며 대꾸했다. "거 좋은 생각이군." 그는 냉큼 일어나 동굴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학 영감은 아형에게 말했다. "낭자도 알겠지만 이젠 병묘도 다시는 낭자를 구하러 올 수 없어. 그러니 딴 생각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한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릴 텐데 뭣 땜에 마다하는 건가?" 아형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학 영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심한 듯 아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잽싸게 아형의 적삼을 찢었다. 순간 아형의 자그마한 젖가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학 영감은 아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더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아형은 얼른 한옆으로 비켜섰다.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그 아래는 천길도 넘는 낭떠러지였다. 아형이 소리쳤다. "당신이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난 이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겠어요!" 학 영감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씩씩대며 서 있었다. 이때였다. 아형의 뒤쪽으로 사람 하나가 기어 올라왔다. 그를 발견한 학 영감은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바로 자기의 철천지 원수이자 일심으로 태호 무리를 소탕하려 하는 황약사가 아닌가. 아형 역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가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으며 그가 어떻게 이 산봉우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랍고도 반가운 마음에 황약사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할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황약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통 옷이 찢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아형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학 영감을 노려보다가 다시 아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형 낭자, 아직 살아 있었구려." 아형은 가슴이 뭉클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약사가 살아 돌아오다니 도무지 꿈만 같았다. 황약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홰 돌려 학 영감을 쏘아보았다.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 오늘 내 손에 죽는 줄 알아라!" 그는 신력(神力)을 모아 늙다리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들었다. 학 영감은 몹시 당황했다. 그는 비록 온몸의 내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나 황약사에 대한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황약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악귀! 이봐, 악귀!" 학영감이 갑자기 소리쳤다. "악귀가 아니라 염라대왕을 불러 온다고 해도 네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학 영감은 황약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미친 듯이 소리만 질러 댔다. 황약사는 개의치 않고 공격할 태도를 취했다. 이때였다. 불쑥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웬 소란이야? 이거 원 잠을 잘래야 잘 수가 있나?" 학 영감은 악귀가 나온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악귀, 날 구해 주게. 날 구해 달라구." 악귀가 눈을 비비며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이 놈 말이냐?" 그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약사의 허리에 일격을 가했다. 급작스러운 일격에 황약사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악귀는 황약사가 잠시 비틀대는 틈을 타 방장을 빗발치듯 날리며 연달아 공격해왔다. 아형은 사태가 불리한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황 공자, 조심하세요!" 황약사는 피할 길이 없자 몸을 가로 뻗으면서 두 손의 대력으로 학 영감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학 영감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황약사는 얼른 몸을 세워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품속에서 옥소를 꺼내 들고 소리내어 불기 시작했다. 그가 옥소를 불자 그것은 검이 되어 학 영감 쪽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악귀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듯 절묘한 검법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섣불리 덤벼들었다간 큰코다치겠어. 학영감이 알아서 하도록 난 구경이나 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악귀는 뒷짐을 지고 멀찍이 물러섰다. 악귀의 심사를 눈치챈 학 영감은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둘이 힘을 합치면 황약사 정도는 물리칠 수도 있을 텐데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리는 악귀의 태도가 여간 얄밉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혼자서라도 황약사와 싸울 결심을 하고 결연히 앞으로 나섰다. "황약사, 네 놈이 나의 태호 무리를 해쳤으니 내 오늘 네 놈을 요절내 버리고 말 테다!" 그는 잽싸게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 수법으로 갈고리손을 내밀었다. 황약사의 두 귀를 가격하여 태양혈에 손톱을 걸어 대번에 죽여 버리려는 수작이었다. 황약사는 그 갈고리 손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고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방 무리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이 학 영감의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무예 때문이 아니던가. 학 영감은 첫 공격에서 실패하자 몸을 회전시키더니 되돌아오며 측면공격을 해왔다. 황약사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옥소로 학 영감의 두 손을 가리켰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학 영감은 얼른 두 손을 움츠러뜨렸다. 이 옥소가 학 영감의 손에 있는 소부혈(少府穴)을 적중하기만 하면 더는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학영감이 손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 그 손이 큰 돌멩이에 부딪치며 '팍'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두 쪽으로 갈라져 발치에 떨어졌다. 학 영감은 얼 른 떨어지는 돌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 돌멩이는 황약사 쪽으로 씽 하고 날아왔다. 황약사는 몸을 피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 두 조각의 돌멩이를 받아 쥐었다. 그는 손에 쥔 돌멩이에 힘을 주어 부숴 뜨리더니 학 영감에게로 다시 날려 보냈다. 아홉 조각으로 부숴진 돌멩이들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학 영감 몸에 있는 혈도들을 명중하였다. 학 영감은 더는 꼼짝하지 못하고 못박인 듯 굳어졌다.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미친 듯이 두 손을 허우적대며 악만 바락바락 썼다 악귀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멋지군! 과연 무서운데?" 그는 황약사 쪽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데 학 영감은 상대도 되지 않는군요 황약사는 웃음을 머금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아형에게 다가가 자기가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아형에게 걸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