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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63편 (63/64)

2026-09-24 21:22:51 조회 27
소리를 듣지 못한 모용쟁은 덮어놓고 한 손을 머리 위로 휘둘러 필성직의 장을 맞받아 쳤다. 하지만 필성직의 다른 한 장이 모용쟁의 가슴에 닿았다. 모용쟁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구양봉!" 한창 싸움에 열중해 있던 구양봉은 뜻하지 않은 모용쟁의 부르짖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모용쟁이 떠밀려 날아가고 있었다. 필성직이 다시 승냥이처럼 모용쟁에게 덮치려 하자 구양봉은 다급히 벽력 같은 고함을 쳤다. "이 놈아!" 그의 고함 소리는 온 법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바람에 아기가 놀라 자지러지게 울어 댔다. 구양봉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자기를 둘러선 놈들을 물리치고 모용쟁이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필성직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모용쟁을 노리고 있었다. 필성직은 아픔에 신음하는 모용쟁의 얼굴을 쏘아보며 잠깐 망설였다. '이 눈먼 계집은 죽여도 아깝지 않은데 이 밸밸 우는 애새끼는 어떻게 한다?' 바로 이때였다. 구양봉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이 돌연 필성직의 앞을 막아 섰다. 구양봉은 다짜고짜 전신의 기력을 다해 필성직을 떼밀었다. 필성직은 맥없이 곤두박질치며 저만치 날려 가 벽에 쿵 박혔다. 구양봉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잽싸게 달려가 필성직의 멱살을 거머쥐고 가슴팍에 수십 차례 된 주먹을 안겼다. 필성직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지고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필성직은 결국 한 덩어리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구양봉의 가슴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부글부글 피가 들끓었다. '사람은 선량해야 하고 너그러워야 한다구? 내가 선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양보해도 저 놈들은 날 죽이려고 했어. 이젠 앞뒤를 생각할 것 없다. 몽땅 죽여 버려야 해!' 구양봉은 홱 돌아서서 철장방의 사내들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눈에서는 활활 불이 일었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늘 칼부림을 하면서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자들인지라 두셋쯤 피투성이가 되거나 죽는 것쯤 예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구양봉이 식은 죽 먹기로 연달아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도망칠 구멍만 찾고 있었다. 구양봉이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놈들아, 공연히 이 어른이 손대게 하지 말고 스스로들 자결해라!" 사내들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더니 생각을 고쳐 먹었다. '네 놈이 아무리 날고 뛴다 해도 우리의 육합진은 당해 내지 못 할 거다! ' 그들은 제각기 도망을 치다가는 다 죽을지도 모르니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재수가 좋으면 구양봉을 일거에 요절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열다섯 사나이들은 육합진을 치고 다시 굶주린 짐승처럼 구양봉을 에워쌌다. 구양봉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적들을 노려보았다. 부릅뜬 두 눈에서는 뜨거운 불똥이 튀었다. 구양봉이 돌아서면 놈들도 원을 그리며 돌고, 구양봉이 성큼 나서면 놈들은 주춤 물러섰으며 구양봉이 움직이지 않으면 놈들도 까딱하지 않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전혀 틈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애타게 구양봉을 불러 대는 모용쟁의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 왔다. '상처가 얼마나 아프면 나를 부를까? 방금 몸을 푼 사람이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큰일이구나…….' 구양봉은 철장방 사내들이 裂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망할 놈들, 오늘 기어이 네 놈들을 죽여 버리고 내 아들을 위해, 모용쟁을 위해 복수하고야 말테다!' 구양봉은 마치 철창에 갇힌 야수처럼 사내들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자기들의 철장 대진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구양봉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저 놈은 아까 요약성이 내지른 장력에 어깨를 되게 맞았지. 중상을 입었을 거야. 그건 그만두고라도 우리가 계속 에워싸고 돌면 지쳐서도 쓰러지고 말 거다.' 구양봉의 가슴은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듯했다. 날이 밝으려는지 닭 울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만약 여기가 백타산장이라면 아들을 안고 어르면서 모용쟁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모용쟁도 맺혔던 응어리를 풀고 다시 구양봉에게 마음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놈들이 지금 구양봉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주린 이리 떼처럼 둘러싸고 있지 않는가? 이 짐승 같은 놈들을 깡그리 죽여 없애지 않고는 모용쟁과 함께 여기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구양봉, 구양봉……." 모용쟁은 계속해서 구양봉을 찾았다. 의식을 잃어 가는지 목소리는 점점 가냘프게 들렸다. 구양봉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으나 섣불리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놈들 중에서 서넛이 갈라져 나가 모용쟁 쪽을 덮친다면 모자는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다. 모용쟁은 까무러칠 듯 말 듯하면서 구양봉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대관절 어디 있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는가? 또 백타산장의 그 계집들에게로 가 버린 거나 아닐까……." 구양봉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쳤다. "이 놈들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당장 물러들 가거라. 물러가지 않는다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까!" 철장방 사내들은 격노한 구양봉을 훔쳐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상처를 입고도 저렇게 용맹한데 만약 후일 다시 만나면 우린 꼼짝없이 죽게 될 거다. 저 놈이 상처를 입고 기진맥진했을 때 죽여 버리지 않으면 큰 화근을 남겨 두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한 사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저마다 손바닥을 치켜 세우며 호시탐탐 구양봉의 허점을 노렸다. 기어이 구양봉을 꺼꾸러뜨릴 심산이었다. 제36장 영원한 사랑 날이 뿌옇게 밝아 왔다. 구양봉의 두 눈은 충혈되었고 두 손은 피로 얼룩졌다. 그는 철장방 사내들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사내들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좋다. 자네들이 바라는 대로 해 주지."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혼신의 힘을 다해 일장을 갈겼다. '쿵!'소리와 함께 앞에 섰던 세 사나이가 저만치 밀려 나가 고꾸라졌다. 한 놈이 벽에 박혔다가 떨어지면서 소리쳤다. "구양봉 이 놈! 네 놈을 죽여 버릴 테다!" 그는 비척거리며 달려들려 했으나 그 자리에서 꺼꾸러져 죽고 말았다. 다른 한 놈은 땅에 넘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났는데 가슴이 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을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지옥에 가서라도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맥없이 중얼거리더니 스스로 자기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 피가 터지면서 그의 몸은 보기 좋게 뒤로 넘어갔다. 세 번째 놈은 구양봉의 장에 맞아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사형과 사숙들을 쳐다보며 발광하듯 소리쳤다. "저 놈을 죽여 줘요. 저 놈을 죽여 주지 않으면 난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점점 속이 탔다. 모용쟁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밑에 깔린 아이까지 둘 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아이가 깔려 죽었다면 세상에 이렇게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이 이쯤 이르자 구양봉은 무서운 비통과 분노를 씹어 삼키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네 놈들이야말로 천하에 드문 악인들이다. 네 놈들을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이 사무치는 분노를 풀 길이 없을 것이다! ' 그는 모용쟁과 아들이 죽었다고 단정짓고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울부짖음은 마치 산속의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고 큰 호수에서 용이 우는 것 같았다. 그 울부짖음에 놈들은 그만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봉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구양봉은 자기를 에워싼 사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무시무시한 눈매로 구양봉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열두 놈이었다. 열두 놈은 모두 내력을 운행시켜 가면서 열두 쌍의 손을 담벽처럼 세우고 있었다. 서로 내력을 겨루는 본격적인 싸움이었다. 한 놈씩 달려든다면 쉽사리 거꾸러뜨릴 수 있었지만 열두 놈이 뭉쳐서 동시에 내력을 내뿜는다면 제아무리 구양봉이라 해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구양봉이 꺼꾸러질 판이었다. 구양봉도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두 손으로 앞에 선 자를 밀치면서 내력을 뿜었다. 놈은 왈칵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놈들이 등을 받쳐 주면서 한 동아리가 되어 내력을 운행시켜 구양봉의 내력을 막아냈다. 내력의 겨룸이란 잔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 있는 기력으로 하는 것인만큼 여섯 사람의 기력이 모이니 자연 엄청난 힘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를 가까스로 막아내면서 속으로 '여기서 죽겠구나'하고 탄식했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철장방 놈팽이들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원통한 일이었다. 구양봉은 다시 군음을 다잡아 죽을 힘을 다해 여섯 놈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섯 놈 중에서 두 놈이 참아 내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놈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빨리 죽여 버려야 해!"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다른 여섯은 속이 조마조마했다. '혼자의 내력으로 범 같은 여섯 사내들의 뭉쳐진 내력을 당해 내다니!' 그들은 합세하여 구양봉을 쓰러뜨릴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 예닐곱이 구양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여 자기들까지 가세한다면 그 얘기가 뭇호걸들의 귀에 들어갈 겅우 철장방의 큰 망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여섯 사내의 내력이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구양봉의 내력은 더욱 커지는 것만 같았다. 손에 땀을 쥐며 지켜 철장방 패거리들 중 한 늙은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지금 어느 때라고 뻗대고 서 있기만 하는 거냐? 빨리 손을 쓰지 못할까!" 그제야 여섯 사내는 제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뻗대고 서 있다가는 구양봉의 내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맥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겁에 질려 서로 바라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 놈, 우리 장을 받아랏!" 여섯 놈이 동시에 구양봉의 등허리를 번개같이 내쳤다. 구양봉은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다 썼고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60년 공력도 다 써 버린 상태였다. 구양봉은 '나는 이젠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합마공으로 저 놈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더라면 지금 이 지경에 처하지는 많았을 텐데……. 철장방의 놈들은 천하에 없이 비열하고 졸렬한 놈들이다. 내력을 겨루다가 감쪽같이 손을 쓰다니! ……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저 놈들의 손에 곱게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네 놈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무려 열둘이나 달려들어 한 사람을 죽이 려 하다니 그런 망신스런 일이 어디 있느냐?' 여섯 쌍의 거무칙칙한 손바닥이 다시 구양봉의 등판에 겨누어졌다. "손을 멈춰라!" 이때 웬 사나이의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법당 안을 울렸다. "철장방 사람들이 이게 무슨 짓인가? 여럿이 한 사람을 치다니?" 그 사나이는 훌쩍 날아오더니 동에 번쩍 서에 뻔적 하면서 여섯 사내를 몽땅 물리쳤다. 바로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이었다. 철장방의 한 사내가 말을 건넸다. "구천인, 우리 말을 들어 보게. 자네가 우리 철장방의 원수인 저 구양봉 놈을 죽여 버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네를 방주로 추대할 걸세." 구천인이 정색하고 꾸짖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선배들인 데 어쩌면 이 지경으로 후안무치할 수 있소? 열들이 하나를 에워싸고 싸웠으니 철장방의 명성은 말 그대로 일락천장이 된 셈이오! 실로 강호의 영웅들이 비웃을 일이오!" "허이 참,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공연한 근심이 아닌가? 방주로 추대할 테니 어서 손이나 쓰라구."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구천인, 우린 모두 철장방 사람들일세. 필 사숙은 죽었고 우리들 중 방주가 되고픈 사람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자네가 우리를 도와만 준다면 틀림없이 방주로 추대할 걸세. 사내 대장부는 꼭 약속을 지키는 법이니까." 구천인은 슬그머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구양봉과 철장방 패들을 번갈아 보면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이때 느닷없이 한 여인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여인은 키드득 웃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봐, 저 사내는 왜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할까? 우리도 저 사내들과 한 집안 사람인가 뭐? 정말 우스워 죽겠네, 호호호……" 맞장구를 치는 다른 여인의 소리도 들려 왔다. "그래도 여기에 우리 집안 사람이 있네요. 저봐요, 구양 장주님을요. 몹시 지친 것 같으니 우리 함께 도와줍시다!" 여인들이 주절대는 소리를 듣고 철장방의 사내가 소리쳤다. "누구얏? 냉큼 나오지 못할까?" "이 참, 우리더러 나오라네? 같이 나갈까?" 한 여인의 말에 다른 여인이 대답했다. "나가고말고. 우리가 나가지 않으면 저 사내들은 우리를 볼 수 없잖아!" 이때 또 한 여인이 캐들캐들 웃으며 쑥덕거렸다. "너는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이지만 이 애는 장주님께 꼭 보여야 해. 장주님을 못 보면 빌빌 우는 애니깐." 그 바람에 왁자그르 웃음이 터졌다. 왈가닥스러운 여자들의 경망스러운 웃음 소리였다. 아마 여남은 명은 족히 될 듯싶었다. 철장방의 사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구양봉을 죽이려고 했는데 난데없는 여인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난처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저 여인들이 떠들고 다니는 날에는 철장방의 큰 수치가 아닌가? 철장방의 사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누구얏? 어서 나오지 못할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한 명의 여인들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대체 웬 여인들일까? 철장방 사내들은 강호에서 몇십 년 간을 떠돌아다니면서도 한번에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생김새는 조금씩 달라도 모두 그림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늘씬한 몸매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들은 미끄러지듯 걸어와 사내들 앞에 섰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거위털 같은 횐 치마를 입었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들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모란꽃을 방불케 했다. 어떤 여인은 교태를 머금었고 어떤 여인은 살짝 볼우물을 만들며 추파를 던지는 듯싶고 또 어떤 여인은 공연히 키득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녀들을 보자 속으로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이 여인들은 모두 무공을 갖추고 있었다. 그네들은 밤에 사내를 다루는 재주도 재주지만 무공에도 막힘이 없었으므로 한다 하는 사내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청루의 기녀였거나 떠돌아다니는 여인들이었는데, 보고 겪은 것이 많다 보니 남성들의 세계도 손금 보듯 했다. 그녀들의 두목은 허청청이라는 자그마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철장방 사내들은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한 여인들을 보고 은근히 코웃음을 쳤다. '흥, 한 떼의 용사들이 들이닥치는가 했더니 치마를 두른 계집년들이구나. 계집년들이 야 사내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몸을 파는 재주가 있을지는 몰라도 주먹질에야 무슨 재주가 있을라구. 저 애호박처럼 애리애리한 계집들이 무슨 싸움을 한다고 그래? 좌우간 구양봉이란 놈을 잡아죽이고 나서 저 년들까지 말끔히 잡아 족쳐야지.' 사내들 중 하나가 으름장을 놓았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썩 꺼져 버려. 여기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청청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세요?" 철장방사내들은 청청의 요염한 자태에 현기증 나는 유혹을 느꼈다. 한 사내가 시치미를 뚝 떼며 소리쳤다. "네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여길 나가라!" 그러자 청청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 드릴까요? 나는 강남의 명기 허청청이에요. 강남의 이름난 술집이나 기생집에서는 내 명성이 쩌르르해서 사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죠. 어떤 사내들이 찾아왔는지 알아요?" 철장방의 사내가 고개를 흔들자 청청이 말을 이었다. "참 둔하시네요. 이름난 왕공 귀족이 아니면 큰 장사치와 강호의 호걸들이었죠. 그 어른들이 찾아오면 내가 뭘 부탁하는지 아세요?" 철장방 사내들은 점점 오리무중에 빠져 눈만 껌뻑거렸다. 허청청이 깔깔 웃더니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른들이 오면 우선 맘껏 놀게 하지요. 그러고 나면 자연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마련이지요……." 사내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청청이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속살거렸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다 말하지요, 뭐. 그 양반들은 자리를 뜰 때마다 무예 한 가지씩을 가르쳐 줬거든요." 허청청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손을 쭉 뻗쳐 사나이의 등허리를 움켜쥐었다. 사나이의 등허리에 있는 세 개의 혈은 그녀의 향긋한 손에 잡히고 말았다. "장주님, 이 놈을 어떻게 할까요?" 허청청이 묻자 그녀의 솜씨를 잘 알고 있는 구양봉이 대답했다. "죽여라!" 허청청이 내력을 발하니 철장방 사나이는 두 눈을 흡뜬 채 피를 왈칵왈칵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모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임일천에게 잡혀 들어와 백타산의 '금옥'에 갇힌 뒤 날마다 할 일이 없는 터라 무예를 익히는 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녀들은 매일 틈만 나면 새장 같은 다락방에서 무예를 닦았는데 서로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다. 언제든 반드시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오늘 구양 장주가 밤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자 하녀 가노에게 물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데, 드디어 그 동안 닦아 온 무예를 써먹게 된 셈이다. 가노는 구양봉이 부인을 쫓아갔다고 했다. 여인들은 모용쟁이 구양봉의 형수인 줄만 알았지 둘 사이의 말 못할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남자가 여자를 쫓아갔다니 무슨 구경거리나 있을까 하여 희희낙락 찾아 나섰던 것이다. 여인들이 나타나 곤경에 빠진 구양봉을 구하자 구천인은 구양봉의 편을 들기로 작심했다. "저 놈들이 당신네 장주의 형수와 아기를 죽였는데 죽여 버리지 않고 가만 놓아둘 참이오?" 구천인의 말을 듣고 철장방 패거리들은 분해서 펄펄 뛰었다. 그들은 구천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반역자 운운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에 구천인도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너희들은 뭐냐? 네 놈들은 한 동아리가 돼서 날 죽이려고 날뛰지 않았느냐? 내 오늘 네 놈들과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범같이 달려나가 세 사숙과 맞붙었다. 청청은 측은한 눈길로 구양봉을 보면서 물었다. "장주님 , 괜찮으신지요?"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몽땅 죽여 버려! 죽여 버려!" 여인들의 마음이란 더 지독한 법이다. 이 열한 명의 여인들은 오랫동안 백타산장에 갇혀 있던 터라 팔다리가 근질근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여인들은 좋은 기회를 만난 듯이 제법 폼을 잡으며 사내들에게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칼이 번쩍이고 장이 번개같이 오갔다. 여인들의 자그마한 주먹에 맞은 사내들이 '어이쿠, 어이쿠'연신 비명을 질러 댔다. 한쪽에 서 있던 다섯 명의 사내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구양봉을 대적하던 여섯 명의 사내들 중 한 명이라도 죽는 날이면 육합전이 흐트러져 더는 구양봉의 신공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다급해진 그들은 얼른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열한 명의 여인들은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면서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녀들은 강호의 사나이들과의 싸움은 처음이고 또 그녀들 중에서 피를 보는 혈전을 겪어 본 것은 청청과 뚱보 여인 둘 뿐이었다. 두 여인은 대장이라도 된 듯이 "쳐라, 죽여라!"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여인들을 지휘했다. 여인들은 사내들에게 악착스럽게 달려들어 주먹을 안기면서도 키득키득 웃으면서 까불어댔 다. 여인들이 허점을 보여 뒤로 몰릴 때면 허청청과 뚱보 여인이 번개같이 뛰쳐나가 달려드는 사내들을 물리치곤 했다. 싸움은 도무지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한쪽에 물러서서 싸움을 구경하던 구천인은 혼자 생각을 굴렸다. '철장방 쪽에서 저 극악스러운 여인들을 당해 낼 성싶지가 않군. 저 사숙이나 사숙조란 작자들이 나를 못살게 굴었으니 점잔 뺄 것 없이 이 기회에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자. 그러면 내가 철장방 방주가 되는 일에 감히 막아 나설 자가 어디 있겠는가.' 구천인은 결단을 내리자 벼락같이 손을 써서 한 사내의 등판에 늘씬하도록 강타를 안겼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왈칵 피를 토하더니 구천인을 돌아보며 간신히 내뱉었다. "구천인, 이, 이 놈아…… 참 지독하구나……." 사내는 말을 맺지 못하고 고목나무 쓰러지듯 뒤로 벌렁 자빠졌다. 청청은 구천인이 장승 같은 사내를 일 장에 쓰러눕히는 것을 보고 좋아서 깡충 뛰었다. "호호, 참 멋들어지네요!" 청청이 구천인을 보고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