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62편 (62/64)
그는 아이를 안은 채 풀썩 꿇어앉더니 무릎걸음으로 모용쟁 앞으로 다가갔다. "큰일을 치렀소. 이제 우리 구양씨도 대를 잇게 됐구려. 그리고 이 애 이름은 구양극, 당연히 구양극이오. 좀 보시오. 당신을 닳기도 하고 나를 닮기도 했소……." 그는 좋아서 연신 웃어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용쟁은 아들을 낳은 기쁨, 어머니가 된 기쁨에 한껏 잠겨 조용히 웃고 있었다. 철장방의 사나이들은 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먼 여인이 흙덩이와 깨진 돌이 나뒹구는 다 무너져 가는 법당 안에 앉아 어떻게 저토록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모용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구양극, 구양극, 구양극이고말고요……." 모용쟁의 기쁨은 샘솟듯 했고 아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차고 넘쳤다. 아이를 낳기 전에 구양봉은 모용쟁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구양극이라 부르고 딸을 낳으면 구양옥이라 부르자고 했었다. 그때 구양봉은 얼마나 우쭐해서 신나게 큰소리를 쳤던가? 만약 아들 구양극이라면 그 애는 반드시 천하를 지배하는 무림의 영웅호걸이 될 것이요, 딸 구양옥이라면 천하의 사내들이 우러러보는 미 인이 될 것이라고. 구양봉은 모용쟁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면서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양극아, 구양극, 너는 우리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다. 너는 이 시각부터 백타산장의 어린 주인이다. 너의 일생은 부귀와 영화로 차 넘칠 것이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구양씨 가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구천인은 수염이 허연 늙은이에게 공손히 음하며 말했다. "필 사조님, 우린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그러자 늙은이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징글맞게 웃었다. "우리는 돌아가겠지만 자네는 돌아갈 수 없을 걸세."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구천인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늙은이는 필성직(畢芦直)이라고 부르는데 철장방에서는 자기밖에 없노라고 거들먹거리는 자였다. 그는 평소에 나이와 자격을 내세워 상관위마저 얕잡아 보았다. 그런데 구천인이 방주가 되었으니,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필성직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필성직이 차디찬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구천인 이 사람아, 철장방 방주는 12대를 이어 왔지만 모두가 명성이 대단하고 쟁쟁한 호걸들이었어! 한데 상관위가 자네 같은 애숭이 녀석을 방주의 자리에 올려 놓을 줄 뉘 알았겠나? 실로 천하의 호걸들이 코웃음을 칠 일이지. 이 자리에 여러 사숙, 사조님들이 다 계시니까 철장을 고분고분 내놓고 썩 꺼져 버리게. 이제부터 자네는 우리 철장방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구천인은 서두르지 않고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숙과 사조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구천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모두 작당을 하여 그를 죽여 버리려고 달려온 것 같았다. 맨 먼저 향로에다 손자국을 찍던 늙은 사숙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천인은 한마디 넌지시 물었다. "요 사숙님, 아마 사숙님도 제가 방주의 자리를 내놓기를 바라시겠지요?" 이 늙은 사숙의 이름은 요약성(蓼若星)인데 세상을 뜬 구천인의 사부 상관위와 막역한 친구간이었다. 그는 비록 몇몇 사내들과 함께 구천인을 죽이러 왔지만 이는 필경 반역인지라 마음 한구석이 찔려 잠자코 서 있었던 것이다. 구천인이 묻자 요약성은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구천인, 방주의 자리를 필 사숙에게 양도하면 좋지 않겠나?" 요약성은 물론 함께 온 자들의 눈이 무서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구천인은 자기가 유일하게 믿던 사숙의 입에서까지 그런 말이 나오자 절망감을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애달프고 서글프게 들렸다. 구천인은 사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하면서 꾸짖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손윗사람들이니 말씀드리기도 거북하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말은 해야겠소. 철장방 방주의 자리는 사부님께서 임종을 앞두고 나에게 물려준 거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왜 사부님 생전에 말씀드리지 못했소? 오늘 사부님께서 임종하여 유체도 식기 전에 방주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나를 협박하다니, 그래 철장방의 역대 호걸들이 이 정도로밖엔 처신할 수 없 단 말이오? 실로 유감 천만이외다!" 필성직이 코웃음을 쳤다. "너의 사부 상관위도 내가 양보한 덕분에 방주 노릇을 해 본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었어. 한데 상관위는 철장방을 망쳐 먹고도 직성이 안 풀려서 너 같은 애숭이를 방주 자리에 올려 놓았단 말야.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구 어떻게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느냐? 방주 노릇 한다는 게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 "그렇다면 왜 사부님 앞에서는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소?" "죽는 사람은 어쨌든 불쌍한 법이야. 잘했든 못했든 상관위도 철장방 방주로 10여 년이나 있지 않았는가? 당장 숨이 떨어질 사람을 놓고 왈가왈부할 여지가 있었는가 말이다." 필성직이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알겠소이다. 이 구천인이 철장을 내놓고 철장방을 떠나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 아니오?" 그 말에 늙은이는 양옆에 늘어선 일행을 둘러보며 음흉한 웃음을 던졌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그럼 어쩔 셈이오?" "너에게 두 갈래 길을 제시하마. 하나는 네 스스로 힘줄을 끊고 폐인이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 허물어진 법당에서 맞아 죽는 길이다. 여기서 죽으면 우리는 너의 시체를 산에 가져다가 역대방주님들의 옆에 묻어 주고 철장방의 제13대 방주로 제사를 지내 주마." 구천인은 갑자기 박장 대소를 하며 허리춤에서 철장을 꺼내 들고 물었다. "그러니까 방주 자리를 정식으로 넘겨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구말구. 자네는 철장방의 제13대 방주일세. 상판위가 자네에게 자리를 물려준 건 그 양반의 특별한 마음이겠고, 자네가 자리를 나에게 내놓는 건 전체 철장방 사람들의 염원이란 말일세. 자네는 방주 노릇도 해 보았고 기분도 내 보았으니 별로 원은 없을 거야." 구천인은 슬프고 원통한 기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어이 구천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설사 철장을 내놓는다 해도 스스로 폐인이 되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국이었다. 구천인은 풀썩 꿇어앉아 사부의 시체에 머리를 조아린 뒤 하늘을 우러러 오열을 터뜨렸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사부님, 사부님, 저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 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는 한참을 울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사조, 사숙님들, 목을 늘이고 칼을 받겠사오니 먼저 사부님의 유체나 매장할 여유를 주십시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귀찮다는 듯이 딴전을 피우는데 요약성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사숙 어른, 소인의 좁은 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 방주의 유체를 먼저 화장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필성직은 눈알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는 어차피 철장방 전임 방주의 시체를 그냥 방치해 둘 수도 없는 일인데다 그 시체 앞에서 구천인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인이 슬그머니 법당에서 나가려 하자 어느새 사숙들이 눈치를 채고 앞을 막았다. 그들이 말 한마디 없이 구천인을 노려보고 있는데 필성직이 너털웃음을 치면서 물었다. "방주는 어디를 가려고 그러는가?" "사부님 유체를 화장하려면 땔나무를 주워 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사내들이 일제히 박장 대소했다. "그만한 일에 방주 어른을 고생시킬 거야 없지. 자, 뭣들 하는가?" 필성직이 한마디 던지자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가 분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물어진 벽에 서 있는 기둥을 와지끈 뽑아 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마를 대로 마른 나무라 불이 잘 붙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나무를 철장으로 하나하나 패어 높이 쌓은 뒤 그 위에 상관위의 시체를 올려 놓았다.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요약성이 느닷없이 구천인에게 다가섰다. "누가 사형의 유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구인천의 머리에 한 가지 꾀가 번개같이 스쳤다. '사부님께서는 늘 나를 보고 지모가 있는 놈이라고 칭찬하셨지. 오늘같이 위험천만인 때에 슬쩍 꾀를 부려 저 놈들을 골탕먹여 줘야겠다.' 구천인은 대뜸 눈물이 글썽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 사숙님께서 잘 보셨습니다. 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부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한데 저 구양봉이란 놈이 사부님과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저 지경으로 만들었답니다. 저 놈의 합마공에 의해 벽이 무너지면서 실로 개죽음을 당한 셈이지요." 요약성은 본디 성미가 급한 사람으로 구천인의 말을 듣자 뿌드득 이를 갈았다. "구양봉? 구양봉이 어떤 놈이기에 우리 철장방을 업신여긴다더냐?"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구양봉 앞으로 몰려갔다. 젊은 사람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몰려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못하던 그들은 시어미 역정에 개 옆구리 차는 격으로 구양봉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들었다. 그들은 구양봉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늙은 사숙이 피씩 웃으며 내뱉었다. "제길헐, 구양봉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우리 방주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우리 방주님을 업신여기는 건 우리 철장방을 업신여기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원수는 갚아야 한다!" 구양봉은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철장방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모용쟁의 앞에 꿇어앉아 아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용쟁도 아기를 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구양봉이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검은 옷 차림의 철장방 사내들 10여 명이 그를 둘러싼 뒤였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봐요, 저리들 비키시오. 그림자 때문에 아이를 볼 수가 없군. 자, 좀 저리로……." 그는 즐거운 낯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구양봉은 사나이들이 비켜서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아이만 들여다보았다. 필성직은 그러한 구양봉을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구양봉이란 놈은 잔악하고 우악스럽기로 이름이 났다지? 그리고 유운장의 신독행한테서 배운 합마신공과 경공에도 당할 자가 없다고 들었다. 저놈은 제 사숙과 사형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사숙의 살점을 베어 먹은 놈이 아닌가?' 사실 사람의 고기를 먹은 것은 제갈정이었다. 그리고 유운장 사람들도 모두 구양봉의 손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떡은 떼고 말은 보탠다고, 구양봉은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의 덤 태기까지 쓰게 되었다. 철장방 사람들은 속으로 별렀다. '이 구양봉이란 놈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니만큼 힘을 모아 혼을 내 줘야 한다. 잘됐어, 철장방의 범 같은 사내들에게 잡혔으니.' 요약성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꾸짖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이 우리 사형을 죽였으니 지금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구양봉은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여전히 기쁨에 잠겨 헤어날 줄을 몰랐다. '내가 그 계집들과 놀 때도 지금처럼 즐겁지는 않았어. 정말 여태껏 자식을 본다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 줄은 몰랐어. 자식을 본다는 것은 한 인간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이젠 내 아들 구양극을 보았으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원이 없다.' 아이는 어느새 엄마인 모용쟁의 품에서 달게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 살포시 감은 눈, 잠이 들어서도 연신 오물거리는 앵두 같은 입술은 얼마나 귀여운가? 또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용쟁의 얼굴은 얼마나 유순하고 부드러운가? 모자간의 사랑, 바로 이를 두고 천륜지락이라 하는가 보다. 이젠 아들을 보았으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그만 해야지. 집에 들어앉아 아들 재롱이나 보자꾸나. 아들 놈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치고 모용쟁과 즐겁게 음 률을 따지고 옛 시나 논하면서 살자. 그게 사람 사는 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구양봉은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이 되어 철장방 사람들을 향해 간곡히 말했다. "이보쇼들, 나를 건드리지 말고 어서 당신네 볼일이나 보시오. 방금 당신네 전 방주 상관위를 실수로 죽이긴 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소. 하지만 그 양반은 다 죽어 가는 사람이었으니 내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지금쯤은 죽었을 거요." 너무나 솔직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철장방 패거리들은 구양봉의 말에 더욱 화가 솟구쳤다. '우리 방주님이 죽든지 말든지 네 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네 놈이 우리 방주님을 죽인 건 철장방을 업신여긴 거고 철장방에 사람이 없다고 깔보고 한 짓이다. 우리 철장방 방주가 네 놈한테 죽었다는 말이 퍼지면 우리 철장방 사람들이 어찌 얼굴을 쳐들고 다닐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네 놈을 죽이지 않고는 순순히 물러날 수가 없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구양봉네를 에워싸고 공격할 태세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양봉이 전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모두들 난감한 기색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놈아, 내 장을 받아라!" 구양봉은 아기를 들여다보는 데만 정신이 팔려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요약성의 드센 일장에 앞으로 콱 꺼꾸러졌다. 그는 무심결에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아기의 다리를 누르고 말았다. 곤히 잠들어 있던 아기가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한 주먹에 구양봉을 쓰러눕힌 일이 스스로도 놀라워서 멍하니 구양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왈칵 피를 토하면서 배가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구양봉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극아, 극아, 내 아들 극아, 이 애비가 너를 다치게 했구나.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구말구……." 그는 아기에게 빌듯이 중얼거렸다. 모자 앞에 꿇어앉은 그의 모습은 마치 죄인과도 같은 태도였다. 모용쟁은 아기를 얼르면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태어날 때 아침 노을 피어났고 첫 걸음마 할 때는 무지개 걸렸다오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둥둥 내 아가야. 구양봉은 부드럽고 달콤한 모용쟁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자기에게 일 장을 안긴 요약성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젠 가 보시지요. 당신의 한 주먹에 죽을 사람도 아니고 또 당신과 티격태격할 겨를도 없으니까." 성미가 칼날 같고 걸핏하면 사람을 치던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참아 낼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약성은 속으로 우쭐한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구양봉이 무예가 뛰어난 자라고 하더니만 정작 만나 보니 그저 그렇구나. 당하고도 가만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내가 무서운 모양이야. 사형을 생각해서라도 저 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야겠어.' 요약성은 다시 앞으로 성큼 나서며 두 손바닥으로 구양봉의 양 어깨를 겨냥했다. 구양봉이 슬그머니 기를 모으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방장에 양 어깨가 여지없이 부서졌을 것이다. 지켜 보고 있던 필성직이 요약성을 흘겨보며 비웃었다. "여보게, 자네는 상관위 어른하고 자별한 사이가 아니었나? 상관위를 위해 복수한다는 사람이 왜 그 따위로 손을 써?" 요약성은 얼굴이 벌개져서 구양봉에게 다시 덮쳐 들었다. "이 놈,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벼락같이 두 장을 동시에 내질렀다. 구양봉은 끝까지 싸우고 싶지 않았으나 요약성이 거푸 공격해 오자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구양봉은 두 손에 기를 모으며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요약성의 두 장이 어깨에 닿는 순간 구양봉은 맞받아 내질렀다. 무서운 힘이었다. 요약성은 허공에 날려 저만치 나가 뒹굴었다. 필성직과 일행이 우르르 달려갔을 때 요약성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의 가슴은 푹 꺼져 내려갔고 눈, 코, 귀, 입 등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철장밖 패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구양봉이 또 눈 깜짝할 새에 사람 하나를 죽인 것이다. 한참 만에야 필성직이 불쑥 나서면서 꾸짖었다. "구양봉 이 놈아, 네 놈은 하루 사이에 우리 철장방 사람을 둘이나 죽였구나. 오늘 우리 철장방 형제들은 네 놈을 기어이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구양봉은 난감해졌다. 오늘만큼은 정말 싸움에 말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철장방 사나이들이 구양봉의 마음을 몰라주고 독 오른 장닭처럼 끊임없이 집적거리는 데는 버터 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악한 사람으로 살기는 쉽지만 어진 사람으로 살기는 어려운 세상인 것 같았다. 구양봉이 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발 집적거리지 말아주시오. 나와 형수님은 아이를 데리고 곱게 물러가겠소." 필성직이 픽 웃으며 빈정거렸다. "구양 장주, 사람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죽이고서 곱게 물러가겠다구? 꿈도 야무지시구만!" "그럼 어쩔 셈이오? 기어이 나를 죽여야 성이 풀리겠소?" 구양봉의 말에 필성직이 앙천대소했다. 철장방 패거리들은 여전히 구양봉을 에워싸고 틈을 노렸으나 구양봉의 신공에 겁을 먹고 감히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구천인과 모용쟁은 한쪽에 비켜선 채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 보고 있었다. 구양봉과 사내들이 한창 맞서서 서로 틈을 노리고 있는데 불현듯 삼장이 한꺼번에 구양봉에게 날아왔다. 하나는 구양봉의 왼팔을, 다른 하나는 그의 종아리를, 마지막 하나는 그의 어깨를 들이쳤다. 구양봉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망할 놈들, 내가 아무리 봐주려 해도 끝까지 물러가지 않는구나. 내가 저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저 놈들이 나를 죽일 판이야. 내가 아무리 마음을 착하게 먹으려 해도 너희 같은 놈들은 살려 둘 수 없다. 내 아들 구양극을 위해서도 나는 쉽게 죽을 수가 없어. 내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어야 네 놈들 직성이 풀리겠단 말이냐? 어림도 없는 수작 말아라!' 구양봉은 천둥같이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아들 때문에 고함도 지를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고함소리만으로도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함소리 대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이때 한 놈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놈의 가슴팍에 일 장을 안겼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가슴은 한 뼘이나 꺼져 들어갔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필성직은 평생 동안 피를 보는 싸움을 무수히 겪었지만 구양봉과 같이 드센 사나이는 보지 못했다. 필성직은 부드득 이를 갈더니 소리를 질렀다. "육합철장진 (六合鐵掌陣)을 펼치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놈들은 즉시 셋씩 짝을 지어 구양봉을 둘러쌌다. 그들은 한 조씩 번갈아 구양봉의 몸에 장을 안기면서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이쪽을 상대하면 저쪽에서 들이치고 저쪽을 맞받아치면 이쪽에서 장이 날아왔다. 구양봉은 빗발처럼 날아드는 장에 맞아 옷이 찢기고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웃옷은 아이에게 덮어 준 터라 이젠 적삼마저도 갈기갈기 찢겨 상반신이 드러났고 하반신도 겨우 앞을 가릴 정도였다. 거의 알몸뚱이가 된 구양봉의 두 눈에서는 불기둥이 일어나는 듯싶었다. 그는 돌연 무섭게 소리쳤다. "빨리 물러가지 못할까? 이제라도 물러가면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지만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이 놈아, 허튼소리 작작 해라. 철장방의 육합대진(六合大陣)은 천하의 명장도 막아내기 어려운 거야. 그러니 네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필성직의 호통에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모용쟁을 돌아보았다. 모용쟁은 이쪽의 싸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자기가 또 사람을 죽여서 모용쟁이 화를 내고 있는게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저 놈들이 날 잡아죽이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데 낸들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소? 그저 내 아들만 잘 길러 주면 나를 미워해도 좋아. 임자 맘대로 하라구.' 필성직은 구양봉의 눈길이 자기의 뒤쪽에 쏠리자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이를 안고 조용히 앉아 있는 모용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왜 저 년을 이용할 생각을 못했지?' 필성직은 모용쟁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모용쟁은 눈은 멀었지만 그만큼 귀는 더 밝았다. '씽―' 바람이 일자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오른팔로 아이를 그러안고 왼손으로 막아 쳤다. 팔꿈치를 이용한 아주 멋들어진 동작이었다. 모용쟁의 머리채를 낚아채려던 필성직은 그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필성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 못 보는 계집의 솜씨가 얼마나 민첩한가? 필성직은 재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툭 털더니 소리 없이 머리를 향해 장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