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59편 (59/64)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모용쟁이 이토록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인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터벅터벅 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이 정실에서 모용쟁을 구해 주었었다. 백타산의 주인 임일천이 모용쟁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정실에 뛰어들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때만 해 도 구양봉은 힘깨나 쓰고 의협심은 강했지만 무예는 볼 게 없었다. 그때 무작정 정실에 뛰어들던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섬뜩해졌다. '정말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때 만약 임일천이 진짜 노해서 손을 쳤더라면, 또 형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서 황천객이 되고 말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의 구양봉은 더는 한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맹자의 말을 떠올렸다.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맡겨 준 큰일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닦고 뜻을 키우고 힘과 지혜를 키워야 한다'고 했다. 구양봉은 이제 정에 매이고 의리에 사는 풋내기 서생이 아니었다. 합마공을 더욱 철저히 익혀서 화산에 가서 황약사, 단지흥, 홍칠, 왕중양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몸이었다. 구양봉은 언젠가 종남산에 있는 중양궁 뒤에서 왕중양과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가 싸우는 광경을 엿보던 일이 생각났다. 쌍방이 어우러져 죽어라 싸우는데, 과연 천하에 으뜸가는 호걸 남아들의 치열한 대결이었다. 그때 구양봉은 얼마나 가슴을 조였고 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가! 구양봉은 두 가지 재주를 익혀야 했다. 바로 철쟁과 사두장이었다. 철쟁을 타면서 내력주신공(內力奏神功)을 익히면 합마공을 음악으로 화하게 할 수 있고 따라서 무형의 힘으로 상대방을 꺼꾸러뜨릴 수 있다. 또 한사두장을 다루면서 봉황력 경공을 익히면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산벼랑도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재주만 익혀 두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화산에서의 싸움에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천하에 구양봉의 명성을 떨치고 말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구양봉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징을 울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 왔다. 잇달아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외쳤다. "도적 놈이 도망간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도적을 잡으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구양봉이 흠칫 놀라 가만히 동정을 살피니 웬 사람이 획 몸을 날려 지붕을 넘는다. 당세에 드문 경공을 쓰는 것으로 보아 무예가 출중한 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은 내심 놀라서 가볍게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올라섰다. 달빛을 빌어 살펴보니 그 그림자가 슬금슬금 모용쟁의 거실 쪽으로 가고 있지 않는가! 구양봉은 모용쟁과 다시 말다툼하기도 싫었고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구양봉과 살을 섞은 사이였고 명색이 그의 형수인데다, 더구나 구양씨 가문의 천금 같은 후손을 잉태하고 있는 여인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이런 상황에서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멀찌감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사나이는 모용쟁의 방 밖에서 어슬렁대는 듯싶더니 어느 틈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꽤나 날쌘 놈이었다. 구양봉은 혹시라도 모용쟁에게 화가 미치면 큰일이다 싶어 그녀에 대한 감정 따윈 까마득히 잊고 훌쩍 몸을 날려 뜰에 내려섰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었다. 벌써 모용쟁의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구양봉은 방을 끼고 돌아 창 밑으로 다가갔다. 창으 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양봉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나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구양봉은 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방금 전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큰소리 친 그가 아닌가? 구양봉은 난감하고도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이때였다. 방안에서 모용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싶었다. "당신은 누구지요?" 모용쟁이 묻는 말이었다. 모용쟁 자신도 상대방을 모르는 눈치였다. 구양봉은 더욱 의심이 들었다. 사나이가 자기의 이름을 대는 것 같았으나 소리가 하도 낮아서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모용쟁이 말하자 사나이는 또 뭐라고 대꾸했다. 구양봉에게는 역시 들리지 않았다. 구양봉은 불끈 화가 치밀었다 '제기랄! 그래, 내가 못 듣게 할 셈이냐? 어림도 없지. 나는 천하에 없는 신공을 익힌 어른이다!' 구양봉은 마침내 합마신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서 천리 밖에 떠도는 신기를 몸에 끌어들여 정신을 집중하니 멀리서 종잇장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놈인 것 같았다. "방주님께서는 저더러 아가씨를 모셔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십시다. 방주님께서는 또 아가씨의 몸이 불편하니까 잘 모시고 오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방주님의 병환이 그렇게까지 위급한가요?" 떨리는 음성으로 모용쟁이 물었다. "괜히 아가씨에게 말씀드렸군요. 하지만 방내(幇內)의 대사를 다 배치했으니까 근심 없이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겁니다." 모용쟁은 한식경이나 말이 없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찾아가서 방주님의 임종을 지켜야 사람 된 도리이지만 저의 몸이 무거워서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찾아뵙지 못하는 저의 안타까움을 전해 주세요." 구양봉은 너무나 의아했다. 이 젊은 사내가 야밤에 모용쟁을 데리고 누구를 보러 가려는 것일까? '방주님, 방주님' 하는데 대관절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사내의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방주님께서는 임종을 앞두고 아가씨만 보고 싶다고 하시니 어떡하겠습니까? 아가씨, 저희들의 낯을 봐서라도 한 번만 움직여 주십시오." 사내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싶었다. "좋아요. 같이 가 보지요." 모용쟁은 결심한 듯 조용히 말했다. 사내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서둘러 문을 열고 나섰다. 모용쟁은 그의 뒤를 따르며 시녀에게 일렀다. "장주님께 내가 떠났다고 전해 주렴. 그리고 이 달 보름날에 강녀묘(姜女廟)에 아이를 데리러 오시라고 해. 사람을 시켜 아이를 보낼 테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곧장 문을 나섰다. 젊은이와 모용쟁은 뜰 밖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구양봉은 불쑥 길을 막아 서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 방주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며칠이고 집 안에만 붙박혀 지내던 모용쟁이 저렇게 선뜻 따라나서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두 사람을 뒤쫓기 시작했다. 마을 밖에 있는 수림 속에는 검은 옷을 입은 대여섯 명의 사나이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사내가 모용쟁을 데리고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죽 둘러싸고 환성을 질렀다. 사내들은 말을 끌어다 모용쟁을 앉히고 자리를 떴다. 훤칠한 키에 비수처럼 번뜩이는 눈매로 보아 분명 강호의 호걸들이었다. 게다가 모용쟁이 탄 말은 물론이요, 사내들이 탄 말도 다리가 미끈한 준마들 이었다. 그들은 채찍으로 말을 재촉하여 쏜살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구양봉은 바삐 경공을 써서 바짝 뒤쫓아갔다. 두어 마장 달렸을까? 그들은 검푸른 솔밭 앞에 멈춰 서더니 말에서 내렸다. 젊은 사내가 모용쟁을 부축해 내리자 모두들 말고삐를 놓고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구양봉도 획 몸을 날려 수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누구얏? 거기 서라!" 난데없는 소리에 구양봉이 흠칫 놀라는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서 세찬 바람이 일었다. 구양봉을 겨누고 몰아붙인 장력이 빗나간 것이었다. 솔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구양봉은 일장을 후려 치면서 홱 돌아서는 동시에 강하게 다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휘익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구양봉의 무서운 장력이 상대의 가슴에 닿았다. 놈은 '어이쿠! '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놈은 아름드 리나무 앞에 서 있었는데 손을 내밀고 있는 품이 계속 덤벼 볼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은 버티고 서 있기만 할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구양봉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구양봉은 웃음을 참으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갔다. 몇 군데 비밀 보초막을 돌아가니 옛 절이 나타났다. 찌그러진 방앗간처럼 누추한 절 주위에는 쑥대가 일렁이고 묘비와 무덤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구양봉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큰 향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웬 초췌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임종이 가까운 듯한 남자의 둘레에 몇몇 사내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까 보았던 젊은 사내가 모용쟁과 함께 향로 앞으로 다가가서 여쭈었다. "방주님께 아룁니다. 부하 구천인이 모용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모용쟁은 조용히 서 있다가 젊은 사내의 말이 끝나자 조심조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향로를 만지더니 엉거주춤 꿇어앉아 향로 옆에 있는 사람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뭐라고 말씀해 보세요." 비스듬히 누워 있던 늙은이는 가쁜 숨을 내쉬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도리대로 말하면 아가씨는 진작 나를 알았어야 해. 내가 첫번째로 아가씨를 구해 줬을 땐 나를 알아볼 리 없었고, 두 번째로 구해 줬을 땐 아쉽게도 앞을 보지 못했지……. 모용 낭자, 잘…… 잘…… 지내시오……." 모용쟁은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투를 틀어 올린 노인의 머리엔 골비녀가 엉성하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노인의 쭈글쭈글한 이마며 눈, 볼, 콧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저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앞으로 어르신을 다시 만나면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이고 얼굴을 어루만져 보아도 알 거예요." 노인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를 불러 온 건 다름아니라 아가씨의 몸이 근심스러웠기 때문이오. 나는 곧 죽을 사람인데 언제 다시 만나겠소?" 모용쟁은 온갖 시련을 겪어 본 터라 죽음에 대해서도 별반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노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르신뿐만 아니라 저도 죽을 거예요. 하지만 얼마 후 우린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노인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모용 낭자, 그게 무슨 농담이시오? 나야 천수를 다 누린 늙은이고 또 몸에 병까지 들었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만…… 아가씨야 새파랗게 젊은데 죽긴 왜 죽는단 말이오?" 그는 말하는 동안 연신 기침을 해대더니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왈칵 피를 토했다. 모용쟁이 그의 얼굴을 더듬으며 안타까워하자 노인이 쓸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아무러면 어떤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데려올 땐 어르신을 돌보아 드리라고 데려온 것 아니겠어요? 불편한 데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돌봐 드릴게요." 모용쟁이 안타깝게 말하자 노인은 더욱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철장방도 무려 방주가 열 번이나 바뀌었구만. 역대의 방주들 모두가 쟁쟁한 무림의 호걸들이였지. 하지만 이 상관위 대에 와서는 원수도 갚지 못하고 뜻도 펴지 못하고 남들의 업신여김만 당했구려. 실로 원통하기 짝이 없소." "어르신은 당당한 영웅이세요. 의롭고 착한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 줬으니까요." 모용쟁은 노인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노인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구양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 죽어 가는 늙은이와 앞 못 보는 여인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 모용쟁은 구양봉을 대할 때의 쌀쌀한 태도와는 달리 죽어 가는 늙은이를 붙잡고 극진하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치 명랑하고 영리했던 사막에서의 모용쟁으로 되돌아간 듯싶었다. 구양봉은 생각했다. '저 다 죽어 가는 늙은이는 철장방의 방주 상관위가 아닌가? 상관위가 모용쟁을 구해 줬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고 구해 준 건가? 그저 모용쟁이 들어 있는 보물함을 훔쳐 가지고 가다가 우연히 그녀가 들어 있음을 알고 놓아주었을 뿐이지. 그만한 일은 지나가던 농부도 할 수 있어. 그 따위 은혜 같지 않은 은혜를 입고 울고불고 할 게 뭐 있어?' 구양봉은 모용쟁이 하는 언행들이 못마땅했다. 제갈정을 죽인 후로 모용쟁은 한 번도 그를 웃는 얼굴로 대한 적이 없었다. 모용쟁은 구양봉과 마주치기만 하면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하며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다 죽어 가는 늙은이와 눈물을 짜 가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끓었다. '상관위 이 놈아, 다 죽어 가는 주제에 새파랗게 젊은 계집과 무슨 개수작이냐? 네 놈이 스스로 죽지 않는다 해도 이 구양봉이 죽여 버릴 테다!' 모용쟁은 구양봉이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상관위의 얼굴을 자꾸만 어루만졌다. 상관위의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려는 듯했다. 상관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용쟁에게 당부했다. "모용 낭자, 이 늙은 것이 보기에 아가씨는 백타산장에서 마음만 썩이고 있는 것 같구먼. 거기서 지내기가 어려우면 여기 철장방 사람들한테로 오시오. 우리 철장방이 차지하고 있는 오지봉 기슭에 가서 지내면 설사 구양봉이란 녀석이 찾아와도 별일 없을 거요. 당연히 우리 사람들이 나가서 물리쳐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하시겠소?" 모용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더니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구양봉은 분해서 입 언저리를 푸들푸들 떨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찢어 죽일 상관위 놈아, 네 놈과 모용쟁이 무슨 사이길래 나를 해치고 그 계집을 철장방으로 데려간다는 거냐? 네 놈과 모용쟁은 만나면서 스쳐 버린 사이지만 나와 모용쟁은 살을 섞고 백년을 기약한 사이다. 네 놈이 모용쟁을 꾀어 데려가기 만 하는 날엔 네 놈들 철장방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을 테다! ' 상관위는 더욱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누구를 찾는 것 같았다. 깡마른 몸매의 젊은 사내가 한 걸음 나서서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방의 요인들이 다 모였사온데 누구와 말씀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상관위는 부축해 달라는 눈짓을 했다. 젊은 사내가 부축해 일으키자 상관위는 향로 옆에 서서 한동안 숨을 돌리고는 엄격한 시선으로 빙 둘러선 무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마침내 상관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철장방이 일어선 후 이 오지봉 기슭에서는 신기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소. 하지만 이 상관위의 대에 와서 그만 강호에 악명을 남기게 되었소. 여기 모인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철장방의 명성을 더럽혔는지는 일을 저지른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 거요. 구태여 추궁하지는 않겠소. 애오라지 이 방주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우리 철장방이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무림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기 를 바랄 뿐이오." 모두들 꿇어앉아 숨을 죽이고 방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문득 상관위가 품속에서 거무스름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얼핏 보니 사람에게서 잘라 낸 팔 같았다. 바로 철장방 방주의 신물(信物)인 철장(鐵掌 ; 무쇠손)이었다. 좌중은 철장을 보기가 무섭게 일시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상관위는 철장을 든 채 후들후들 떨면서 말을 이었다. "여러분, 잘 들어 주시오. 본인은 철장방의 최고 신표인 이 철장을 다음 대의 방주에게 물려주고자 하오. 다음 대의 방주로는 수상표(水上飄) 구천인을 세우고자 하오." 좌중은 흠칫 놀랐다. 실로 예상 밖이었다. 군천인을 포함하여 이 자리에 모인 열아홉 명은 모두 철장방에서 난다 긴다 하는 호걸들이었다. 그 중 세 사람은 상관위의 사숙뻘 되는 늙은이들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상관위와 함께 무예를 배운 사형제들이었다. 유독 구천인 만이 제자뻘 되는 애송이인데 철장방의 신표를 구천인에게 물려준다고 선포하자 모두들 깜짝 놀라면서 반대의 뜻을 비쳤 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성큼 나섰다. "잠깐만, 상관위 어른, 혹시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오?" "사숙 어른, 대를 물리는 막중한 일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상관위의 말에 늙은이는 버럭 성을 냈다. "나보고 사숙이라고 부를 염치나 있나? 우리 철장방은 자네 대에 와서 기가 꺾였네. 지난번 술집에서 소씨 거렁뱅이 녀석이 거들먹거릴 때도 자네는 꼼짝 못하고 괄시만 받았었지. 한데 오늘은 방주 자리를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녀석에게 물려주겠다고 하니 어찌 정선이 제대로 박혔다고 볼 수 있겠나? 이 사람아, 대관절 철장방의 위신을 어떻게 세우며 어떻게 강호에 발붙이라는 겐 가?" 상관위는 노인을 민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숙 어른, 그래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구천인을 방주로 내세운단 말씀이시오?" "그렇잖고! 저 젊은이가 철장방에 가담한 지 고작 몇 해인가? 이제 스무 살도 안 되는 풋내기가 철장방의 방주가 되다니! 실로 소 웃다 뱃고래 터질 노릇이네. 경력은 그만두고라도 무예만 해도 무어 볼 게 있단 말인가?" 상관위는 숨이 가빠졌다. 그는 한참 숨을 몰아쉬고 나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들도 사숙과 똑같은 생각이시오?" "그렇소이다. 구천인은 저희들의 방주가 될 수 없소이다." 열일곱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구천인 만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상관위가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천인, 자네는 왜 말이 없는가?" "사부님께서 큰 사숙님을 비롯하여 여러 사숙님들과 말씀하시는데 제자가 어찌 끼여들 수 있겠습니까?" 구천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발끈 성을 냈다. "뭣이? 네 놈이 입을 봉하고 있는 건 우리를 시답지 않게 보고 방주가 되려는 속셈이 아니냐?" 이 광경을 가만히 훔쳐보고 있던 구양봉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철장방 방주 상관위는 강호에 이름을 날린 일류 호걸이다. 한데 새로운 방주를 세우는 일에서는 어찌 이다지 어리석은 태도를 보이는 걸까? 아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숭이가 어찌 방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얘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에 어느 술집에서 구천인이 상관위를 구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 일로 해서 구천인은 철장방 사람이 되었고 그동안 구천인의 무공이 대단해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위가 좌중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사코 자기를 구해 준 애숭이 제자를 방주 자리에 앉히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관위가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모용쟁이 얼른 부축했다. 상관위가 인상을 잔뜩 지푸리혀 물었다. "사숙 어른, 구천인의 무예가 약하기 때문에 모두들 불복한다 그 말씀이시겠지요?" "그렇네."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상관위는 모용쟁에게 청을 했다. "모용 낭자, 날 좀 부축해서 저리로 가 주오." 모용쟁도 강호 바닥의 생리를 아는지라 이런 사나이들의 말다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마디 험한 말이 오가다가 여차하면 칼부림이 나고 두서넛씩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사였던 것이다. 모용쟁은 상관위를 부축했다. 몸이 무거워 운신하기 어려운데다가 상관위마저 비틀거려서 두 사랑은 간신히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사람들은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하느라고 상관위를 돌볼 경황이 없었다. 모용쟁은 내심 화가 나서 속으로 구천인을 욕했다. '저 구천인이라는 녀석도 믿을 놈이 못 돼. 사부님이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는데 어째 부축해 드릴 생각조차 않는 게야? 저런 자세로 방주 노릇을 한다구?' 상관위는 자라를 잡고 앉자 철장을 들어 향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철장방의 호걸들이오. 철장방의 호걸이라면 칼부림으로 승부를 내는 법은 없소. 단지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세상과 대결할 뿐이오. 당신들은 구천인이 방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누가 자격이 있소? 지금부터 모두들 저 무쇠 향로에 손바닥을 찍어 보시오. 깊게 자국을 낸 자만이 방주가 될 자격이 있소." 사람들은 모두 고개들을 끄덕이며,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내가 방주가 되지 못한다 해도 저 구천인이 될 리는 만무해. 엊그제 입문한 놈이 장력이 세면 얼마나 세겠어? 여기 모인 어른들은 장력만 수십 년을 연마했는데 저 따위 애숭이가 상대나 돼?' 사람들은 차례로 걸어 나가 향로에 손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맨 먼저 나선 것은 상관위의 사제였다. 그는 상관위에게 가볍게 읍을 하고 한마디 던졌다. "사형, 이 아우는 사형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어 왔소. 하지만 이번의 처사만은 타당치 않은 줄로 아오. 늘그막에 노망을 부리는 것 같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팍!' 하고 향로에 손바닥을 찍었다.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과연 20년 연마한 장력다웠다. 밖에서 훔쳐보던 구양봉도 감탄했다. '과연 철장이로군!' 나머지 열여섯 명도 뒤질세라 성큼성큼 걸어 나가서 향로에 손바닥 자국을 내자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