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54편 (54/64)
장님이 된 그녀의 눈동자는 눈이 감겨 있어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다정한 눈길로 모용쟁의 잠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때 또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마치 망향대에서 귀신이 소리를 지르고 염라전에서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처럼 길게 여운을 끌며 들려 왔다. 구양봉은 한참 귀를 기울이다가 자기도 음성을 한 가닥으로 모아 아주 강한 내력으로 소리를 냈다. "누구요―!" 이렇게 소리를 내면 산장 밖에 숨어 있는 목소리의 임자가 들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임자는 구양봉의 음성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인지 여전히 구양봉만을 소리쳐 불러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목소리의 임자는 누굴까? 나를 불러서 무얼 하려는가? 구양봉은 또 대답했다. "넌 난쟁이 임일천의 패거리냐? 만일 난쟁이를 위해 복수하러 왔으면 직접 나를 찾아오너라. 이 구양봉은 언제든지 응할 각오가 돼 있으니까!" 그러자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웃음 소리로 미루어 난쟁이 임일천의 일당은 아닌 것 같았다. 구양봉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넌 백타산장 사람이냐?" 이윽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왜 내가 백타산장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구양봉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때론 강하게 들려 오다가도 때론 약하게 들려 오곤 했다. 보아하니 목소리의 임자는 경공을 써서 날아다니며 위치를 자꾸 바꾸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은근히 놀랐다. 그렇다면 목소리 임자의 공력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양봉은 오늘밤에는 예감이 좋질 않아 가급적 모용쟁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더 급박해지자 천리전음지법 (千理傳韻之法)을 써서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무엇 때문에 날 찾는 건가?" "구양봉, 우리는 구면이다. 내가 여기 찾아온 것은 절대 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산장 남쪽의 수림에서 기다릴 테니 거기로 나와라." "용무가 있으면 직접 찾아올 것이지 산장 밖으로 날 불러내려는 까닭이 뭐지?" 목소리의 임자는 구양봉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천천히 말했다. "구양봉, 네 집사람을 절대 다치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만일 내가 너의 집사람한테 딴마음을 품었다면 네가 아무리 조심하고 방비를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산장 밖에 나을 생각은 있나?" 구양봉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만일 목소리의 임자가 작정만 하면 몸을 숨기고 모용쟁을 얼마든지 기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좋아, 당장 산장 남쪽에 있는 수림으로 가겠다."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구양봉은 모른다. 적인지 친구인지 아직은 짐작할 수 없는데 모용쟁을 깨워 봤자 걱정밖에 더 시키겠는가? 갔다가 즉시 돌아오면 아마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구양봉은 가볍게 문을 밀 쳤다. 밖으로 나온 그는 몇몇 하인들을 불러 마나님이 놀라는 일이 없도록 방을 잘 지키라고 분부했다. 구양봉은 이것저것 점검하고 정비시킨 뒤 봉황력 경공을 써서 바람처럼 빠르게 산장 남쪽의 수림을 향해 달려갔다. 수림에 다다르자 교교한 달빛 아래 나무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다리겠다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함정에 빠진 거나 아닌가 싶어 그는 급히 몸을 돌려 백타산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수림 속엔 역시 사람의 그림자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나무들 사이사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문득 한 그루의 교목 옆에 장대처럼 곧게 서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잿빛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몹시 야윈 모습이 얼핏 봐서는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구양봉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밝은 달빛을 빌어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구양봉의 사형 속문성이었다. 구양봉은 다가서다 말고 쌀쌀하게 물었다. "요즘 재미가 어떠시오?" 속문성이 코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어찌 자네하고 비기겠나? 자낸 합마공을 몸에 지녔고 또 백타산의 주인까지 되었으니 위풍과 권세를 모두 혼자 차지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버젓하게 사는가 말이야. 하지만 난 비참하지, 비참해 ……." 원래 제갈정과 속문성은 꼬마 사숙 사자우를 따르기로 했었다. 두 사람이 사숙과 함께 세상을 한번 흔들어 보겠다는 속셈에서였다. 사실 유운장의 무리들치고 심보가 바로 박힌 놈은 하나도 없었다. 속문성은 겉으로는 공손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어린 사숙을 깔보았다. 그는 언제든 때만 되면 꼬마 사숙을 죽여 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사자우를 따라 중원으로 갔다. 중원에는 소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하 무학의 정종(正宗)이었다. 이들 셋은 소림사에서 무예를 배우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소림사 방장(方丈)을 배알하려 했다. 그러나 방장인 현의(玄衣)대사는, 이 세 사람이 북강의 유운장 사람들이라 하자 만나 주지 않았다. 이들의 더러운 명성이 중원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셋은 대로하여 허락도 없이 소림사에 뛰어들어갔다. 소림사 나한당(羅漢堂)의 몇몇 고승들이 손을 써서 이들 셋을 절 밖으로 몰아냈다. 이들 셋은 중원의 첫 대결에서 이런 망신을 당하고는 기분이 잡쳤다. 그래서 소림사 밖의 수림 속에서 노숙하면서 다시 기회를 엿보아 소림사를 피로 물들여 놓으리라 작심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모닥불을 피우고 농가에서 훔쳐 온 닭 세 마리를 굽게 되었다. 사숙은 제갈정이 구운 닭을 뒤집으며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 닭에 독을 뿌린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고기 색깔도 변하지 않고 냄새도 변하지 않게 독을 뿌리는 방법은 우리 유운장에서 고안해 낸 방법만 해도 열일곱 가지나 된다. 이를테면 흑사우(黑 雨), 여인미(女人媚), 소교환혼(小橋還魂), 귀망향(鬼望鄕), 일어불토이자(-語不吐二字), 삼성단장(三聲斷湯), 몽리사타척일도(蔘里思他隻一度), 귀주(鬼酒), 삼생연(三垈緣) 같은 것들이지. 제갈 정 이 놈, 솔직히 말해 봐라. 여기에다 대관절 어떤 독을 뿌렸느냐?" 제갈정은 아주 공손하게 굽실거렸다. "이 제자가 아무리 담이 크다 한들 언감생심 거기다가 독약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참말로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사숙님 앞에서 주제넘게 훈장 노릇을 하려는 거나 다름이 없지요." 이어서 제갈정은 속문성을 향해 말했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그 가을날 내가 자네를 사부님께 천거하던 때로부터 오늘까지 어언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 여보게 아우, 20여 년 동안이나 사귀어 온 정을 봐서라도 자넨 나한테 독을 넣지 않았겠지? 만일 자네가 나를 해칠 마음이 있다면 제발 일어불토이자나 삼성단장에는 중독되지 말게 해 주게……." "형님, 내가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소. 그날 내가 문에 들어서자 형님은 나를 힘껏 네 번이나 걷어차지 않았소? 이게 다 내가 잘되라고 한 것이지요. 만일 형님이 그때 날 네 번씩이나 걷어차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행세를 하면서 다닐 수 있겠소? 이런 과거지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형님께 감사해서 절이라도 올리고 싶소. 이러한 내가 어찌 형님을 해치려 하겠소?" 속문성은 이번에는 사숙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숙님의 이 닭을 제가 먹겠습니다. 먹고 내가 주어도 사숙님의 은덕이지요. 하지만 지금 사숙님께서 한창 사람이 필요할 때이니 우리가 다 죽는 걸 바라시지는 않겠지요?" 사숙은 대범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구말구. 우리 세 사제간은 일심협력하여 소림사의 중놈들과 싸워야 하네. 이런 판에 제집 사람끼리 물고 뜯어서야 되겠나? 내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지. 기분 잡치는 소리들은 그만 하구, 다들 닭고기나 뜯자구." 셋은 각각 닭다리 하나씩을 뜯어서 입을 벌리고 먹으려다가 또 입을 다물고는 자기 손의 닭고기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숙이 개탄했다. "모두 안심을 하지 않으니 내가 하나둘셋을 불러야만 하겠구나. 내가 하나, 둘, 셋을 세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누구든지 안 먹으면 딴 심보를 품은 게 분명하니 다짜고짜 손을 써서 죽여 버리기로 하자." 사숙이 하나, 둘, 셋을 세자 세 사람은 일제히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셋은 배가 고프던 터라 일단 입에 대자 미친 듯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세 사람 앞에는 순식간에 뼈다귀만 남았다. 속문성은 아직도 속이 차질 않는지 닭뼈를 쥐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새하얀 뼈다귀를 살펴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이번엔 내가 이겼어. 사숙 네 놈이 아무리 잔인하고 꾀가 많아도 이번엔 내 올가미에 걸렸다, 걸렸어!' 그런데 한창 웃음 주머니가 흔들흔들하던 속문성의 낯빛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손에 들린 닭뼈가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숙을 쏘아보며 외쳤다. "네 놈이 독을 뿌렸구나. 독을 뿌렸지? 삼생연, 삼생연이다……." 그는 천방지축 수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숙은 냉소하면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삼생연'이라는 극약에 중독되면 이승에서 인간과 인연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내세에 재생해도 그 독이 몸에서 채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극약의 이름이 삼생연인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사숙을 바라보는 제갈정의 두 눈에도 공포와 불안의 빛이 가득했다. 바로 이때 둘은 모두 크게 놀랐다. 사숙의 손에 들린 닭뼈도 시커멓게 색깔이 변했던 것이다. "제갈정, 여기에다 무슨 독약을 뿌렸지? 흑사우냐, 아니면 일어불토이자냐? 어서 말해라!" 사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제갈정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닭뼈에도 잿빛 반점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제갈정은 사숙의 말은 아랑곳없이 속문성한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속문성, 이 개 같은 놈! 널 발로 찬 걸 여태 앙심을 품고 있었구나. 너 같은 놈은 그때 독살을 시켰어야 했어! 사부님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뒈지게. 사숙님, 그놈한테 극약을 잘 안겼소이다!" 그러나 사숙은 와락 덮쳐 들어 제갈정의 숨통을 조였다. "제갈정, 이 놈아! 내가 극약을 잘 안겼으면 네 놈은 그래 나보다 못하단 말이냐? 빨리 실토해! 흑사우냐, 일어불토이자냐?" 제갈정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여보 마누라, 아들아, 그리구 며늘아기와 두아야, 내가 오늘에야 너희들을 위해 복수를 하는구나." 두 사람의 마음은 모두 얼어붙었다. 생이 이렇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틈만 나면 서로를 죽이려 하다가 결국은 셋 다 동시에 황천객이 되게 된 것이다. 제갈정은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숙의 독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쓴 이 일어불토이자는 다른 사람들은 먹자마자 거품을 토하며 죽는데 사숙은 중독되고도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으니 대단해. 난 여기서 죽지만 여한은 없다. 사숙이 죽는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망향대에서 기다리리라. 아마 거기서는 꼭 만나겠지.' 이렇게 생각한 제갈정의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고 사숙이 마음대로 목을 조이도록 몸을 내맡겼다. 거의 숨이 끊어지려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그렇게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이고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둘은 모두 독성이 발작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속문성은 생각에서 깨어나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구양봉, 내가 널 찾아온 것은 큰 부탁이 있어서이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등뒤에서 검을 휙 뽑아 들었다. 구양봉은 속문성이 손을 쓰려는 줄 알고 몸을 날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속문성은 그 검을 자기의 목에 갖다 대며 비장하게 말했다. "너도 잘 알지만 난 유운장의 악인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쾌재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넌 아마 다를 거야. 내가 지금 네 앞에서 죽으면 넌 불안할 게야." 구양봉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유운장의 무리들은 죄다 악종이고 망종들이다. 난 사부님의 제자이고 독물이다. 네가 죽으면 내가 사부님을 대신하여 크게 세 번 웃으면 그만이지 불안할 게 뭐냐?" "구양봉, 악인들 사이에는 도의와 정이 없다고 하지만 제 집 사람들끼리는 너처럼 매정하지 않은 법이다. 네가 유운장에서 두 가지 절기를 배우고 사부님의 60년 공력을 넘겨받은 것은 기실 내가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내가 점복 난전을 벌여 놓고 있다가 네 점괘를 뽑아 보고 사부님한테 천거하지 않았다면 너한테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 네가 사부님 앞에서 두꺼비 주련을 맞 춘 것도 내 천거가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속문성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만일 속문성이 없었다면 그는 북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천하의 무림 영웅들 속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신독행 같은 인물을 사부로 모시고 무예를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며, 봉황력과 합마공이란 두 가지 절기를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모용쟁도 구할 수 없었고 백타산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구만. 사형이 나한테 그런 은혜를 베푼 적이 있으니 무슨 부탁이든지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뜻밖에도 구양봉이 이렇게 말하자 속문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크게 비통해 했다. "여보게 구양 동생, 나를 도와 복수를 해 주게. 사부님께서 운명하실 때 자네에게 나를 죽여 버리라고 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사부님께서 나에게는 사숙과 제갈정을 죽이라고 했네. 내가 자네를 천거해 준 것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한번 도와주게. 사숙을 죽여 나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 주게. 일단 사숙이 죽고 나면 난 자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네. 절대 식언이 아니야." 구양봉이 속문성에게 물었다. "사형, 무슨 좋은 수가 있소?" "구양봉, 나하고 함께 가세. 우리 함께 힘을 합쳐 사숙을 없애 버리자구. 그는 지금 무방비 상태이니 그자를 죽이기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네. 그는 제갈 형이 뿌린 독에 중독된 상태라 누구하고든 싸울 경황이 없지." 구양봉은 이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선뜻 대답했다. "그럽시다. 내가 당장 달려가서 그자를 죽여 버리겠소." 구양봉은 속문성을 따라 자그마한 연못가에 이르렀다. 가만히 살펴보니 연못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달빛에 비쳐 보였다. 키가 어린아이처럼 자그마해 보이는 게 틀림없는 사숙이었다. 구양봉은 그가 봉황력으로 수면 위에 서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다시 자세히 보니 그는 연못의 자그마한 섬에 서 있었다. 사숙은 구양봉을 발견하고 속문성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속문성, 구양봉을 데려오면 네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속문성이 마주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사자우 이 놈아! 네 놈이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봐라!" 속문성은 자기의 손을 내보였다. 그 손은 마치 자그마한 고깃덩어리처럼 오그라들어 있었다. "우린 모두 같은 유운장 사람들인데 이렇게 기어코 나를 죽여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거냐?" 속문성의 말에 사자우가 대꾸했다. "무슨 득을 보겠냐구? 유운장 사람들이 남을 해칠 때 언제 좋은 점, 나쁜 점을 따지더냐? 너희들이 내 곁에 있는 한 내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게다. 그러니 먼저 손을 쓰는 수밖에. 이게 뭐가 그리 이상하냐?" 속문성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자우 이 놈아! 네 놈은 나를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난 매일 나무에 기대어 나무의 음기로 목숨을 연명해야 해. 나무 곁만 떠나면 난 죽는다……." 사숙은 빙그레 웃으면서 속문성의 말을 듣다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속문성, 간사한 여우놈 같으니. 그 동안 매일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느라고 고생이 오죽하였을까. 그 지극정성을 봐서 내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마.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손목에다 나무칼을 차고 다녀라. 그리고 네가 사는 곳에 나무가 있을 테니 밤에도 침대에서 잘 생각을 말고 나무를 끌어안고 자는 게 좋을 거다. 서서 나무를 부둥켜안고 자면 편안할 거야……." 속문성은 약이 올랐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무릇 '삼생연'에 중독된 사람은 살아 남는 사람이 없는데, 속문성은 다행히도 노독물 신독행의 제자인지라 그런대로 죽음은 면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봤자 죽는 것보다 나을 게 뭐 있겠는가. 속문성은 이를 갈았다. "사자우, 네 놈도 제갈정이 뿌린 독약에 중독됐다. 오늘 구양봉을 만났으니 죽을 각오나 단단히 해라!" 사자우는 입을 쩝쩝 다시고는 대꾸했다. "내 입이 다 쓰다. 구양봉이라? 구양봉이 무슨 물건이더라? 그렇지, 내가 깜빡 잊었네, 속문성, 방금 너한테 한 가지 빠뜨린 말이 있다. 넌 계집과 재미를 봐서는 안 돼. 계집과 그 짓거리를 한 번만이라도 하면 네 몸뚱이는 당장 썩어문드러지고 말지. 그러니 난 너에게 절에 가서 중이나 되라고 권하고 싶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으하하하……." 사자우는 생각할수록 통쾌하다는 듯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구양봉은 속문성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 독에 중독되면 해독할 수가 없으니 속문성의 신세가 여간 딱한 게 아니었다. 그러한 속문성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사자우, 네 놈은 제갈정의 독에 중독됐어. 네 놈이 물 밖으로 감히 나오지 못하는 걸로 보아 흑사우나 일어불토이자에 중독된 게 분명해. 그러니 네 놈의 처지도 나보다 별로 나을 게 없지. 무엇보다 큰 문제는 네 놈이 둘 중에 어느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야. 일어불토이자의 해독약을 흑사우에 중독된 자가 쓸 경우 온몸이 마비되어 죽고 말지. 또한 네가 일어 불토이자에 중독되었다면 아무 해독약이나 쓰는 게 아니야. 잘못 썼다가는 먼저 뼈가 녹아서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로 변하고 말테니까. 네 놈은 날마다 눈만 뜨면 '난 대관절 흑사우에 중독된 건가, 아니면 일어불토이자에 중독된 건가'하고 골머리를 썩여야 할 게야, 지금처럼 언제나 음수(陰水)에 서서 죽을 때까지 떠나서는 안되지." 그의 말에 사자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속문성이 소리쳤다. "웃긴 왜 웃어?" "저길 보아라! 저게 무엇이냐?" 사자우가 연못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그 나무에는 사람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시체 같았다. 속문성은 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눈알을 무섭게 위로 부릅I뜨고 있다가 속문성이 다가서자 사납게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횐 거품이 구질구질 새어 나왔다. 그는 다름아닌 구양봉과 속문성의 큰 사형 제갈정이었다. 속문성은 깜짝 놀랐다. "사자우 이 놈아! 네가 우리 큰 사형을 어떻게 한 거냐?" "보면 모르냐? 이미 매달린 지 오래다. 거의 죽게 됐을 거다." 속문성과 제갈정은 몇십 년 간이나 한 사부 밑에서 무예를 닦아 온 동문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나가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자 속문성은 가슴이 아팠다. "사형, 날 알아보겠소? 내가 둘째 사제요……." 그러나 제갈정은 속문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구양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두아야, 네가 두아지? 왜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는 거냐? 네가 두아가 맞지?" 사자우가 외쳤다. "문성아, 제갈정은 네 놈이 넣은 독약에 중독됐어. 네 놈의 극약에 저 모양이 됐단 말이야……." "내 독약에 중독되면 당장 죽지 이 모양으로 되진 않어!" "하긴 그래. 독약을 쓰는 데는 네 놈이 날 못 따르지. 네 놈의 독약에 중독된 데다가 내가 좀 독기를 보탰더니……" "독기라니?" "난 원래 숨통을 조여 죽이려고 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지 ." 얼마 전, 사자우가 제갈정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데 큰 비가 내렸다. 억수로 퍼붓는 이 비에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그 빗물 덕분에 몸에 스며든 독소가 얼마쯤 씻겨 나갔던 것이다. 그 후 사자우는 어느 정도 정신이 좀 들었는데 제갈정은 아예 얼이 빠진 듯했다. 그는 사자우한테 목이 졸리다 보니 미처 해독할 겨를이 없었고, 자연 중독이 깊어져 결국 미쳐 버리고 만 것이다. 속문성은 다시 사자우를 위협했다. "아무튼 좋다. 사자우, 구양봉이 너를 찾아온 건 술이나 먹자고 찾아온 건 아닐 거다." 그의 말에 사자우가 소리쳤다. "구양봉, 넌 왜 왔냐? 날 죽이려구?" "사부님의 유언에 따라 네 놈들을 하나하나 깡그리 죽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