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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52편 (52/64)

2026-09-24 21:22:51 조회 26
동굴 속에 들어온 두 사람은 형과 백면라살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선배님―!" 구양봉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메아리쳤다. 거듭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구양봉은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형도 떠났고 백면라살 수라아도 떠나 버렸다. 그들 둘은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그들은 살 만한 고장을 찾아가 함께 살림을 꾸리면서 잘 살아갈 것이다. 모용쟁은 몸이 오싹해지며 추워졌다. 무슨 영문일까? 방금 전에 구양봉과 땀을 흘리면서 살을 섞고 난 뒤로는 어쩐지 조금만 추워도 몸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추운 줄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얼음 동굴 속에서 그녀는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오돌오돌 떨면서 말했다. "이봐요, 그만 나갔으면 좋겠어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 난…… 난 추워서 죽겠다구요……." 구양봉은 그녀를 품에 안고 몸을 날려 동굴에서 빠져 나왔다. 제29장 대사막의 주인 구양봉과 모용쟁은 구양 가문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백타산장의 난쟁이 임일천이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산 위의 돌집에서 기거할 수는 없었다. 구양적이 없어선지 집은 전보다 훨씬 썰렁했다. 백타산장은 아주 평온한 것 같았다. 저번의 큰불로 피해가 적지 않았을 텐데, 멀리서 보면 백타산장은 여전히 그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산장 주변의 촌락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쟁기를 메고 돌아와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처럼 평화로운 것으로 보아 난쟁이 임일천이 구양봉에게 복수하려고 찾아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밤, 얼음 동굴에서 돌아온 구양봉과 모용쟁은 구씨 할멈과 가시를 불러서 구양적과 백면라살의 행방을 물었으나 둘 다 우물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부님과 먼 곳으로 떠나신다며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고……." 가시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길 바란다고만 전해 달라셨어요."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전혀 없으셨고?" 구양봉이 묻자 계집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구양봉도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자기가 형수와 살을 섞었으니 형을 대할 면목도 없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와 모용쟁은 밤마다 한 몸으로 뒤엉켜 정신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다. 두 사람의 욕정은 채워도 채워도 수그러들 것 같지가 않았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정사가 끝나자 모용쟁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그녀는 구양봉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옆구리를 꾹 찔러 보기도 하고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간지럼을 태우기도 하며 교태를 부렸다. 남녀간의 정사란 그 재미와 낙이 이처럼 끝이 없었다. 그녀는 밤이 되면 언제나 열망에 가득 찬 눈길로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구양봉의 온몸을 통째로 집어삼켜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듯한 눈길이었다. 어떤 날은 일이 끌난 후에 눈물을 주루룩 흘리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일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에 대한 정이 점점 깊어 갔다. 하지만 구양봉은 모용쟁과는 달랐다. 일단 정사가 끝나 조용히 침대에 눕기만 하면 그의 머리 속은 온통 형 생각으로 가득 찼다. '형은 백면라살과 행복할까? 이곳을 떠나서 자그마한 초가 농가라도 마련했을까?' 정말 형은 밭에 나가고 백면라살은 길쌈하면서 깨끗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과 모용쟁이 함께 살게 된 지도 어느새 여러 날이 지났다. 어느 날 정오 무렵, 구씨 할멈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고 가시는 부엌에서 식탁에 올릴 생선을 손질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둘은 일을 하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구양봉과 모용쟁도 밖안에서 한가로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둘이 사막에서 지내던 옛이야기가 나왔다. 두 사람은 모용쟁이 구양봉을 냉대하다 못해 오랏줄로 묶어 놓기도 하고 모래를 뿌려 눈을 못 뜨게 만들던 이야기들을 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눈에다 모래를 던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괄시를 했으니까 이런 사이가 됐지. 그게 다 연분이라는거야." 둘이 한창 재미있게 말을 주고 받는데 갑자기 부엌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의 임자는 가시가 분명했고 무슨 큰 일이라도 난 듯했다. 구양봉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간 그는 구씨 할멈과 가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할멈의 두 손은 마치 먹물에 담갔다가 꺼내기라도 한 듯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시커맸는데 두 팔은 시커멓다 못해 윤이 반지르르 돌았다. 그 검은 색 나는 칠은 괴상하게도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를 않았다. 할멈은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그는 뻘겋게 핏발선 눈을 하고 연신 비명을 지르며 이빨로 혓바닥을 마구 깨물어 댔다. 얼마나 지독하게 깨물어 댔는지 혓바닥이 절반이나 끊어져 입가에서 덜렁거렸다. 그는 가시를 보더니 와락 덮쳐 들었다. 가시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피해 도망쳤다. 구씨 할멈은 구양봉이 들어서자 가시를 내버려두고 미친 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방비 상태이던 구양봉은 얼결에 구씨 할멈한테 두 팔을 잡혔다.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할멈의 손에 잡힌 두 팔에 통증이 엄습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할멈의 손이 닿은 팔소매 부분이 어느새 썩어 너덜너덜 조각이 나고 있었다. 소맷자락은 물론 할멈의 손이 조금만 스치기만 하면 천들은 여지없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구양봉이 놀라 소리쳤다. "할멈, 나야! 나, 둘째 도련님이야!" 구씨 할멈은 도무지 누가 누군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눈치였다. 물에 빠진 놈처럼 구양봉의 두 팔을 거머쥐고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구양봉은 기를 모아 할멈을 떼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할멈의 두 손에서 시커먼 살점들이 뭉팅뭉팅 일어나더니 주르륵 땅바닥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할멈의 팔과 손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이 소름이 끼치는 광경을 보며 비명을 질러 대던 가시 는 곧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달려가 할멈을 부축하려 하자 할멈은 소리도 내지 않고 썩은 나무토막처럼 쿵 하고 넘어져 버렸다. 뒤늦게 달려나온 모용쟁도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이봐요, 그…… 그 팔이……." 구양봉이 자기 팔을 내려다보니 할멈이 쥐었던 팔뚝에 검은 줄이 가득했다. 그제야 구양봉은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이렇게 강한 독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 독성은 난쟁이 임일천의 뱀 상자 속에 갇힌 독사의 그것보다 더 독했다. 살에 닿기만 하면 살이 다 문드러져서 뼈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조심해요, 중독된 것 같아요!" 모용쟁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자기의 합마공으로 이 극독을 이겨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가 모용쟁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이 주방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구양봉은 말하다 말고 가시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계집애가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주방에서 빙빙 맴을 도는 게 아닌가? 계집애는 걸으면서 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둘째 도련님, 큰마님! 날 보세요, 날보라구요." 그녀는 음탕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둘째 도련님과 큰도련님께서는 소녀를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진지 드실 때만 소녀를 곁눈질해 보시더군요. 그러니까 배고플 때만 소녀를 생각하고 배부를 때는 소녀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시나부죠? 둘째 도련님, 좀 봐 주세요. 이 소녀의 몸매도 날씬하지 않나요?" 그녀는 계속해서 구양봉에게 추파를 던지더니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옷을 활활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틈에 속곳마저 홀딱 벗어 버린 알몸이 되었다. 문어귀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 모용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봐요, 그 계집애를 그냥 두면 어떡해요!" 구양봉은 멀리서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두 손가락에 힘을 넣어 가시 계집애의 전중(壇中), 기해(氣海) 두 대혈을 찔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집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알몸동이를 배배 꼬면서 구양봉에게 다가들었다. 크게 놀란 구양봉은 한 손에 합마공을 넣어 가시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계집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눈물이 아니라 붉은 피눈물이었다. 이어서 계집애의 칠규에서도 피가 흐르더니 온몸이 삽시에 한 무더기의 핏덩이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주방은 어느새 질펀한 피바다가 되었다. 모용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구양봉에게로 달려갔다. 구양봉은 얼른 한 손바닥을 펼쳐 들어 모용쟁을 멈춰 세웠다. "움직이지 마!" 구양봉의 외침 소리와 함께 모용쟁은 주술에 걸린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사자우, 냉큼 나오너라!" 구양봉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곧 코흘리개 어린애의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하하, 네가 어떻게 이 어르신이 오신 줄 알았느냐? 구양봉, 노독물이 죽은 후 우리 유운장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구양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사자우, 이 놈아, 냉큼 나서라!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면서 독을 뿌리다니, 이 무슨 졸렬한 짓이냐?"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대꾸했다. "구양봉, 네 놈은 이제 끝장이다. 내가 뿌린 독약이 무슨 독약인지 알기나 해?" "네가 할멈한테 쓴 극약은 '흑사우(黑絲雨)'라는 거다. 이 독에 닿기만 하면 피부가 먼저 시커멓게 되고 두 눈이 시뻘개져서 보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삼키고 물어 뜯으려 하지. 중독이 되어 조금만 지나면 살점이 몽땅 썩어문드러지고. 이 독약에 중독된 제일 뚜렷한 증세는 중독자가 자기의 혓바닥을 물어 끊는 것이다. 네 놈이 가시 계집애한테 쓴 것은 '여인미(女人媚)'란 것으로, 이 독 약은 미약(媚藥)이자 극독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이 독약에 중독되면 음탕한 생각이 일게 되고, 사내와 교합을 하면 그 독성을 얼마간 없앨 수 있지만 이런 계집과 살을 섞은 사내는 영락없이 죽어 버리지. 내 말이 틀린가?" "구양봉, 과연 노독물의 수제자답구나. 하지만 넌 이미 흑사우에 중독되었으니 너한테 합마공이 있다 해도 그걸 써서 독을 몰아 낼 순 없을 거다. 그러니 네 놈이 어찌 나한테 손을 댈 수 있겠느냐?" 양봉은 흠칫 놀랐다. 이때 코맹맹이 웃음소리가 들려 오더니 창살이 와지끈 부서졌다. 이윽고 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대더니 사람 하나가 뛰어들었다. 역시 짐작대로 유운장의 사숙이었다. 구양봉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사숙, 당신 패거리들은 어쩌고 혼자 왔소? 여러 사형들은 모두 어딜 간 거요?" 사자우가 대꾸했다. "모두 어딜 갔냐구? 글쎄? 유운장의 무리 중에서 누가 제일 악인이냐? 네가 잘 모르면 알려 주지. 제갈정도 악인이야. 그자는 사람을 죽일 때 먼저 스스로 관을 갖추고 무덤도 파놓으라고 협박할 정도지.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야. 속문성은 한술 더 뜨지. 이 자는 앞에서는 해죽거리면서 뒤로 음흉을 떨지. 이런 악질 두 놈과 자네의 사숙이신 이 어르신이 어찌 손을 잡을 수 있겠나? 이 두 놈과 일을 도모한다는 건 그야말로 늑대와 고기 흥정을 하고 호랑이와 한 방에서 자는 것과 다름이 없지." 구양봉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갈정과 속문성을 이렇게 욕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과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내막을 어찌 알겠는가? "예쁜데? 정말 예쁜데? 낭자, 그 정도 얼굴이면 유운장의 색시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어. 정말이야. 한데 낭자는 왜 하필이면 구양봉 같은 놈팽이한테 들러붙었나? 저 자식은 좋은 놈이 아냐. 내 흑사우에 중독됐으니 죽을 시각도 머지 않았어. 설사 뒈지지 않는다 해도 양쪽 팔엔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을 텐데,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지 않나? 이 세상의 사내와 계집들이 그 짓거리를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것이 뭐야?" 모용쟁은 열두어 살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 사숙이라는 자가 어른 흉내를 내고 몹쓸 소리를 지껄여 대는 것이 놀랍고도 의아했다. 모용쟁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는 계속해서 지껄여댔 다. "이 낭잔 얼굴은 쓸 만한데 머리는 아둔한 모양일세? 그럼 하는 수 없이 이 어르신이 가르쳐 드려야겠구만. 제일 많이 쓰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 손이란 말이야. 생각해 보라구. 사람들이 사내와 계집 사이의 정사를 입에 올릴 때 어떤 말을 제일 많이 쓰던가? 애무한다, 그러지 않던가? 애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행위지. 그런데, 애무하는 데 손이 없어서야 되겠나? 손이 없는 자는 귀신과 같지. 낭자가 깊은 밤중에 피가 끓어 사내하고 그 짓거리를 몹시 하고 싶어 한다구 치자. 촛불을 밝혀 놓고 휘장을 드리우고 두 연놈이 엉키는 순간 불쑥 손이 건너왔다고 하자.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보고 기분이 어떻겠나? 아마 낭자는 놀라 까무러칠 것이야. 재미를 보기는커녕 자칫하다간 놀라서 황천객이 될걸? 그 예쁜 얼굴을 가지고 저 놈과 붙어 있을 게 아니라 숫제 날 따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모용쟁은 그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드는 한편 어이가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쬐끄만 녀석이 벌써 이렇게 계집을 밝히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아이는 이제 구양봉을 향해 말했다. "구양봉, 해독제가 몹시 필요할 텐데, 내가 너의 대혈 세 곳을 찌를 때까지 가만 있으면 주겠다. 그게 싫다면 오늘 난 너를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고!" 구양봉은 자기 팔에 찍힌 검은 자국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한테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이만한 독상 정도는 거뜬히 치료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저자가 절대 틈을 줄 리가 없지. 만일 내가 저자와 맞붙는다 해도 저자는 슬슬 몸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내 홈에서 독성이 크게 발작할 때에야 본때를 보이려 할 것이야. 비열한 놈 같으니…….' 사숙은 구양봉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깔깔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다 알아. 이 어르신을 대처할 궁리를 했지? 안 그런가? 내 계획을 속시원히 알려 주지. 네가 달려들면 난 도망치고 네가 잠자코 있으면 다시 내가 덤벼들 생각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난 두 가지를 기다리지. 첫째는 네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화공대법(化功大法)을 써서 네 몸에 지닌 노독물의 60년 공력을 내 몸에 옮겨 오는 것이고, 둘째는 네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너의 이 예쁘장한 색시를 내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야밤 삼경에 이 어르신의 차가워진 두 발을 네 색시의 따끈한 품속에 찔러 넣겠단 말이다." 구양봉은 화가 났다. 자기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모용쟁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악에 받쳐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악해지지 않으면 남들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똥을 싸려 하는구나. 난 바보다. 남의 수모를 받고만 있으니. 난 네 놈을 꼭 죽여 버리고야 말 테다…….' 구양봉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사숙은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구양봉, 다가서지 말아라. 네가 다가오면 난 도망치겠어. 내가 멀리 도망치면 누가 너한테 해독제를 주겠나?" 구양봉은 멈춰 섰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모용쟁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사숙과 결판을 낼 생각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구양봉이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저 놈한텐 온통 독이 묻어 있소. 임자가 싸운다면 죽는 길밖엔 없소!" 모용쟁은 주춤 멈춰 섰다. 구양봉의 말을 듣고 나니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해졌다. 사숙이 이죽거렸다. "과연 의좋은 부부로구만. 하지만 네가 네 색시한테 다정하게 굴면 굴수록 이 어르신은 화가 난단 말이야. 난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네 색시를 빼앗고야 말겠어." 그와 실랑이하는 동안 구씨 할멈한테 잡혔던 구양봉의 팔뚝은 점점 더 새까매지면서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렇게 방치해 뒀다가는 머지않아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악이 받쳤다. 몸이 그 지경인 형편에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구양봉은 천천히 앉아서 사숙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사숙, 내가 합마공으로 상처를 치료하겠으니 나를 건드리지 마오!" 말을 마친 구양봉은 한 손을 하늘로 뻗쳐 해와 달의 정기를 끌어온 다음 두 손을 합장하여 음과 양이 교합되게 한 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숙은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했다. '합마공이 기이한 술법이라고는 하나 눈을 감고 내시(內視)하면서 상대방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 상대방이 옆에서 빙빙 돌면서 호시탐탐 노리는데 저렇게 눈을 감고 내시만 하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으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게 아니고 뭐야?' 하지만 구양봉한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그는 감히 손을 쓰지는 못하고 살금살금 다가가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널 죽여야겠다. 계속 그러구 있을 테냐? 이제는 손을 써야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여전한 자세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사숙은 마치 한 마리의 여우가 함정에 빠진 토끼를 잡아먹자니 함정이 무섭고 내버리고 가자니 아쉬워하는 것처럼 구양봉 주위를 세 바퀴나 돌았다. "구양봉, 내가 날쌘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이 네 천령혈(天靈穴)을 치면 네 놈은 끝장이야. 그리고 참, 내가 소군출색(昭君出塞) 수법으로 네 놈의 앞가슴에 있는 귀음(歸陰), 유혼(游魂), 흑호(黑虎), 혈저(血阻), 참명(斬命), 촉명(捉命) 이 여섯 개 대혈을 찔러 버리면 네 놈의 목숨이 그냥 붙어 있을까? 그리고 네 놈의 뒤통수에……." 그는 이렇게 떠벌리면서 구양봉의 등뒤에 가 섰다. 그는 식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구양봉의 등허리를 겨냥했다. 그가 손가락을 내찌르기만 하면 구양봉은 그대로 송장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데다가 구양봉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어 감히 앞으로 내찌르지 못했다. 그는 구양봉이 노독물의 수제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노독물은 한평생 매사 에 조심스러웠고 섣불리 모험을 하지 않았다. 이런 스승 밑에서 무예를 익힌 구양봉이 어찌 손쉽게 제 목숨을 빼앗아 가도록 아무런 수도 쓰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겠는가? '이 놈이 무슨 놀라운 술수를 쓰려고 이렇게 능청을 부릴 수도 있어. 멋모르고 함부로 대했다가 송장이 되는 건 구양봉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은 구양봉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지기(地氣)가 미려혈(尾閻穴)로 들어와 중추를 거치고 두 어깨를 지나 수소음심맥(手少陰心脈)에까지 뻗치게 함으로써 합마공을 두 팔에 집중시켰다. 어느새 두 팔은 수천 수백 근의 물건을 들기나 한 듯 무거워져서 위로 쳐들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구양봉은 갑자기 머리를 번쩍 쳐들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꾸르륵 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두꺼비 울음 소리를 내자 사숙은 깜짝 놀랐다. 그는 봉황력 신법을 써서 훌쩍 몸을 날려 한쪽으로 비켜섰다. 과연 구양봉은 몸에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여전히 대단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손을 썼더라면 사숙은 이미 황천객이 되었을 것이다. 구양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사숙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득의양양해진 그의 몸이 웃음 소리와 함께 마구 앞뒤로 흔들거렸다. "웃긴 왜 웃어?" 사숙이 묻자 구양봉이 대답했다. "네 놈이 너무나 둔해서 웃었다. 그렇게 야들하니까 키도 자라지 못하고 철도 들지 못하는 게야. 또, 그렇게 야들하니까 우리 사부님도 이기지 못했던 거구. 네 놈은 정말 바보 중의 바보다. 이걸 보아라." 구양봉이 한 손을 쭉 뻗치자 시커먼 피가 통리(通里)를 지나 음극(陰隙), 신문(神門), 소부(少府), 소충(少沛)을 거쳐서 손가락끝에서부터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바로 이렇게 왼손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오른손까지 검은 독혈(毒血)을 몽땅 빼 버렸다. 일이 다 끝나자 구양봉은 빙그레 웃으면서 사숙을 건너다봤다. 사자우는 확실히 철부지 어린애였다.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자근자근 씹으면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구양봉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왼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바보, 넌 정말 바보다! 넌 왜 저 놈이 저런 수작을 피우는 걸 미처 생각을 못했어? 네가 저 놈의 대가리만……." 그는 구양봉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후려치기만 했으면 대가리가 묵사발이 됐을 거고, 대혈만 찔러 놓아도 저 놈은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고 살려 해도 살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