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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1부(서독구양봉편) - 50편 (50/64)

2026-09-24 21:22:51 조회 20
백면라살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오르고 두 눈에는 대견스러워하는 빛이 가득 찼다. "적아, 정말 생각 밖이다. 네 아우가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와는 반대로 난쟁이 쪽에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욱 빠른 가락으로 피리를 불어 댔다. 그러나 구양봉은 여전히 끄덕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양은 마치 입선(入禪) 한 중을 방불케 했다. 또 반식경이 지나자 구양봉은 난쟁이를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임 장주, 이제는 나가도 되겠소?" 난쟁이는 대경실색했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지 못 하자 구양봉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려 상자에서 뛰어나와 난쟁이의 앞에 버티고 섰다. 임일천은 할말이 없었다. "네가 이겼다. 약속대로 모용쟁을 너에게 넘겨주겠다. 단, 네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구해 낸 계집이니 절대 네 형에게 주진 말아라." 말을 마친 난쟁이가 손을 번쩍 쳐들자 '탁'하는 소리와 함께 궤짝이 갈라졌다. 난쟁이는 모용쟁을 끌어내어 구양봉에게로 던졌다. 난쟁이가 이런 수작을 부리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구양봉은 공중에서 날아오는 모용쟁을 받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팔을 벌려 모용쟁을 받아 안는 순간 뭉클한 촉감이 온몸에 전해짐과 동시에 향긋한 여인의 살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그의 가슴은 후두둑 뛰었다. 그는 차마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용쟁의 알몸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형님을 부르며 모용쟁을 구양적에게로 던졌다. 구양적이 멍청히 서 있자 백면라살이 눈치 빠르게 날아오는 모용쟁을 받아 안았다. "빨리! 옷, 옷을……." 백면라살이 이렇게 소리를 쳐서야 구양적은 허둥지둥 옷을 찾으러 달려갔다. 난쟁이는 본디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위인인지라 여인의 옷들이 수두룩했다. 뿐만 아니라 옷가지들마다 깔끔하고 화려했다. 백면라살은 옷들 중에 알맞은 것을 골라 모용쟁의 몸에 씌운 다음 혈도를 풀어 놓았다. 셋이 모용쟁을 둘러싸고 서두르는 틈을 타서 임일천은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이 대청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셋은 의논 끝에 대청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여기저기서 수많은 독사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청 안은 불에 타 죽어 가는 뱀들의 소름 끼치는 소리와 노린내로 가득 찼다. 세 사람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불길은 삽시간에 산장 안의 집들로 옮겨 붙었다. 불길은 점점 기승을 부리며 타올랐고, 뛰쳐나온 마을 사람들과 가축들로 산장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28장 시동생과 형수 간의 치정 백면라살과 구양적, 구양봉은 모용쟁을 데리고 함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고장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구씨 할멈과 가시한테 귀띔한 후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얼음 동굴 아래에는 돌로 지은 작은 집이 있었다. 기근을 만난 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던 집이 아니면 산에서 양을 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거처였다. 그들은 이 돌집에 거처하면서 백타산 쪽의 동정을 살폈다. 모용쟁은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그녀는 날마다 밖에 나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았다. 산너머에는 백타산장이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있는 대 사막까지 바라보였다. 하지만 아스라이 넓은 사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용쟁은 저 사막 너머에 있는 강남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암의 멋들어진 지붕과 붉은색 나는 담벽과 푸른 기와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법당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와 목탁 소리들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돌집에는 자그마한 방이 여섯 개나 되었다. 그녀는 자진하여 제일 작고 누추한 방을 차지했다. 밤이 되면 그녀는 누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다. 구양적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구양적은 밤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럴때면 은은한 달빛이 수심에 잠긴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바위 아래에서 그는 한숨을 내쉬며 돌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여섯 개의 방이 모두 어두워져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방에 돌아가 누워도 그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양적은 바위 위에 앉아 산 아래 있는 백타산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다. 난쟁이만 보아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수집하여 궤짝 속에 가둬 두고 장난감이나 인형처럼 가지고 놀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난쟁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 알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데도 함께 지낼 수도 없고 가서 볼 수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여 인이 얼음동굴 속에서 날마다 추위와 고독 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왜 그녀를 안아 주고, 애무해 주고,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지 못하고 이곳에서 쓸쓸한 밤을 지새는 것인가.' 그는 모용쟁에 대해서도 미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용쟁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용쟁이 무서웠다. 그녀의 쌀쌀한 눈길이 무서웠다. 그는 모용쟁의 눈에서 일종의 절망을 보았던 것이다. 모용쟁은 그에 대해 절망했다. 명색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밤에 빠져 나가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녀는 구양적을 원망하며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구양적도 모용쟁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구양적이 한참 시름에 잠겨 있는데 익숙한 내음과 함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적아, 여기서 뭘 하고 앉았느냐? 색시 방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냐?" 구양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백면라살이었다. "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자기한테 죄를 지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적아, 네 마음을 알 만하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니 내 가슴이 쓰리구나……." 구양적은 가슴이 뭉클했다. 굳센 성미를 가진 그였으나 백면라살의 따뜻한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백면라살은 그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구양적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백면라살은 가볍게 구양적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적아, 죄는 너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있다. 그날 밤 내가 어떻게든 널 네 아내한테 돌아가게 했어야 했는데……." 백면라살은 모용쟁이 난쟁이한테 납치되어 간 것은 그날 밤 자기가 구양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적아, 네가 너무 괴로워 보이는구나. 내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니……?" 구양적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쓰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자기를 소 닭 보듯 하며 함께 있는 것조차 꺼려 하지 않는가. 구양적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적아, 내가 보기에 넌 네 아내와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쉬워하는 눈치로구나." 구양적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넌 모용쟁을 네 아우와 짝지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서 설득해 볼까?"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사부님은 이런 일을 가지고 아우를 찾아서 어떻게 말하겠다는 것인가? 백면라살은 결심한 듯 말했다. "적아, 이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내가 구양봉을 만나 말해 보겠다. 지금 당장 말이다." 구양봉은 돌집 안에서 한창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공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무림의 명수들과 겨룬다 해도 두려울 게 없었으며 합마공만은 이미 스승을 능가했다고 여겼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는 대뜸 형이 아니면 형의 스승일거라고 짐작했다. 아니나다를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형의 스승이었다. 백면라살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구양봉 앞에 다가오더니 말했다. "자네와 할말이 좀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자네한테 하려는 말은 자네들 구양씨 가문의 앞날과 큰 관계가 있는 거네. 내 말을 들어 볼 생각이 있나?" "선배님께서는 형님의 사부이신데 저 같은 까마득한 후배가 어찌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며 백면라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 적이한테 네가 장래에 꼭 대성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자네가 무예를 익히겠다고 했을 때 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한 걸 너는 내가 널 잘못 봤거나 혹은 너에 대해 경계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때 나나 네 형은 네게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였지. 이제 솔직히 말할 때가 온 것 같아. 나와 적이 는 그 얼음 동굴에서 한사공(寒邪功)을 연마했지. 한사공을 익히다 보면 인체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사내는 온전한 사내구실을 못하고 여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교합조차 불가능해지지. 이건 우리들이 언제까지든 덮어 두고 싶었던 한사공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내가 이 사실을 오랫동안 자네한테 숨겨 왔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 이었어. 너도 이 점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면라살의 말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남자가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다면 그 이상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형은 왜 동생인 나에게조차 전혀 내색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알리기가 싫어서였을까?' 구양봉의 머리 속에는 이어 모용쟁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용쟁은 그의 형수이다. 형이 사내 구실을 못한다면 형수는 어찌하는가? 구양봉은 이제야 모용쟁이 그토록 수심에 잠겨 있었던 까닭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늘 혼자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자기의 고향인 강남 땅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네게 솔직히 말하마.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마는, 나와 적이는 이미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을 만큼 각별한 사이다." 구양봉은 갑자기 멍청해졌다. 그는 백면라살의 말뜻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각별한 사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양봉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서 백면라살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처량한 느낌을 주었다. "너는 선비라서 무인들의 어려운 점들을 모를 수가 있어. 내가 서역에 온 것은 마음의 고통을 어쩌지 못해서야. 한때 난 누군가를 사랑했었어, 그가 준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어 난 그 길로 얼음 동굴에 들어가 천년 묵은 현빙 위에서 얼음 찜질로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지. 하루는 네 형이 얼음 동굴 속에 떨어진 걸 내가 구해 됐지. 그때부터 우린 서로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나 역시 여자이고 네 형 역시 남자인지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싹트기 시작했지. 우리 둘의 마음은 날로 가까워졌어. 우린 이제 서로 헤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지. 더구나 우리 둘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다 같은 불구의 몸이야. 그래서 둘의 마음이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르지. 말하자면 동병상련인 게야. 우리들의 고충을 너도 얼마쯤 알 수 있으리 라 생각한다." 구양봉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조실부모한 그에게 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형은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매우 융통성이 있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어려서부터 형을 따르고 존경했다. 그에게 있어서 형은 사내 중의 사내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형에게 이처럼 큰 불행이 오래 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형의 불행은 어느 한때의 불행이 아니라 일생 의 불행인 것이다. 구양봉은 할말을 잃은 채 고통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적이가 나서서 모용 낭자를 구한 것은 전적으로 너를 위해서였지……." "저를 위해서라니요?" 백면라살은 처량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적이가 내게 말한 적이 있지. 모용 낭자가 네게 아주 호감 있어 하고 좋아하는 눈치라고 말이야. 내가 적이에게 모용쟁을 구해 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그런데 너는 중원에 갔다가 늙은 독물 신독행한테 납치당해 생사불명이 됐지. 나와 적이는 북국에 달려가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어. 우린 유운장이 불타서 폐허가 된 것을 보고는 자네가 죽은 줄로만 여겼지. 그후 로 적이는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지. 그를 보다못한 내가 그에게 모용 낭자와 성혼하라고 권했어. 그 까닭은, 첫째로는 모용 낭자가 천하기한(天下奇寒)인 빙잠지독( 蠶之毒)에 걸려서 그 독을 빼지 않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형편이었고, 둘째로는 네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적이라도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방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지. 대를 이으려면 적이가 장가 드는 방법밖에 달리 뭐가 있었겠어?" 구양봉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자기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백면라살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백면라살과 형은 모두 불구의 몸으로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한 형이 모용쟁과 결혼한들 무슨 수로 대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한 데는 나대로 계획이 있었지. 기회가 있으면 투량환주지계를 써서 사내를 데려다가 씨를 받게 할 생각이었지." 구양봉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불쑥 물었다. "선배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들을 형님께서도 다 알고 계신가요?" 백면라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이 성격에 이런 사실까지 다 알면 큰일나게?" 구양봉은 다시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백면라살이 빙빙 둘러대면서 많은 말을 했지만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백면라살을 똑바로 보면서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선배님께서 씨내리로 찾는 사내가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야유와 함께 분노가 섞여 있었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허탈하게 웃어대더니 역시 쌀쌀하게 대꾸했다. "네가 아니라는 법도 없지. 구양봉과 구양적은 본디 친형제가 아닌가? 네 일은 곧 네 형의 일이고 형의 일은 곧 네 일이 아니냐? 형제간에 무슨 분별이 있다는 거지?" 구양봉은 할말을 끊었다. 백면라살은 정말 놀라운 여자였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찌 이런 일을 생각이나 해낼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용쟁을 좋아했으며 모용쟁 역시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수는 어디까지나 형수가 아닌가? 시동생과 형수가 동침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만 같았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묵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모습이 어쩐지 섬뜩했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네가 유운장에 가서 북강의 일절(一絶)이라고 불리는 늙은 독물 신독행의 제자로 있었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구양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백면라살은 냉소했다. "노독물 신독행은 한평생 나쁜 짓거리만 하고 돌아다닌 대악인이야. 그자는 스스로가 기꺼이 악인이 되려 했지. 네가 그런 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악인 중에서 최고는 아니어도 둘째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방금 네 태도를 보니 여간 실망스럽지 않군. 이런 손톱만한 일에도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어떻게 대악인이 될 수 있겠느냐?" 백면라살은 백방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구양봉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형님은 어디까지나 형님이시다. 형님의 아내와 어떻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강호에 떠다니며 뭇계집들과 놀아날 수는 있지만 형님의 아내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송조(大宋朝)는 지금 엉망이 됐어.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그 어느 왕조 때보다 쓸데없는 규범만 잔뜩 늘어왔지. 정이(程 )와 정호(程顥), 그리고 주희(朱熹) 이 세 망나니들은 자기들은 금준미주로 질탕거리고 밤마다 삼처사첩(三妻四妾)들을 끼고 자면서 백성들한테는 하지 말라는 것뿐이지. 도대체 무슨 이학의 더러운 법도를 지키라는 게야? 자넨 총명한 사람 같은데 어째서 이 따위 사기에 말려들려 하나? 자낸 모용쟁을 차지하고 싶지 않은가? 모용쟁에게 행복을 주고 싶지 않아? 구양씨 가문이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모용쟁과 살아야 해. 남녀간에 둘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모용쟁한테서 아직 얼음누에의 독이 채 빠지지 않았으니 자네의 그 신공으로 말끔하게 해독을 시켜 줘야 해. 자네가 정말로 모용쟁을 좋아한다면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어." 子양봉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을 거듭했으나 여전히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악인이었다. 합마공으로 그의 사형인 석초수와 벙어리 형제들을 죽였고, 또 백타산장의 대사막의 4걸을 죽였다. 특히 쌍환 기노의 두 팔을 생으로 뽑아서 잔인하게 죽여 버린 그때부터 그는 완전한 악인이 되었다. 그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말을 지껄여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 은 형님인 구양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모용쟁을 유혹하러 찾아갈 수 있겠는지, 모용쟁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지, 그럴 경우 형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구양봉은 임안에도 다녀오고 중원 땅도 두루 밟으면서 많은 미인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고요한 밤중에 잠 못 이루며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리따운 모용쟁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사막에서 모용쟁과 함께 보낸 그 낮과 밤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으며, 삼단 같은 머리를 드리우고 빙옥같이 새하얀 알몸으로 난쟁이 임일천의 궤짝 안에 앉아 있던 모용쟁의 모습 은 더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돌집 안에 앉아 있었다. 한적한 집 안에 등잔불이 가물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착잡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구양적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하지만 모용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구양적은 한참 서성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난 사부님한테 갔더랬소……." 모용쟁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구용적과 말하기도 싫을 뿐더러 마주보기조차 싫었다. 구양적은 그러한 모용쟁의 태도를 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모두 털어 놓고야 말리라고 결심했다. "난 사부님을 보러 갔댔소. 임자와 성혼한 뒤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으니 사부님께서 외로워하실까봐……." 모용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양미간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날 밤 웬 영문인지 가슴이 뛰고 살이 떨려서 나는 사부님께 무슨 변고가 있지 않나 생각했더랬소. 내 예감은 틀림없었소. 내가 얼음 동굴에 들어가 보니 사부님께선 이미 혼절해 쓰러져 있었소. 사부님께선 스스로 경혈을 막아 얼음 바위 위에 누운 채 거의 죽어 가고 계셨지.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셨을 거요……." 모용쟁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부님, 사부님……. 말끝마다 사부님 타령이고 꿈속에서까지도 잠꼬대를 하며 사부님을 찾으시더군요. 사부님이 그렇게 맘에 들면 사부님하고 결혼할 것이지 왜 나하고 결혼했어요? 자기 사부님을 맘에 두고 왜 다른 여자는 건드려요? 그렇게 사부님을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나를 아내로 맞아들인 건 무슨 심보예요? 사내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아내는 왜 맞아들였어요?" 욕설을 다 퍼붓자 그녀는 돌침대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얘기가 이쯤 이르자 구양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성례를 올린 첫날밤 수줍음을 타던 모용쟁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 구양적이 거듭 불렀지만 상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마음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터 말은 안 해도 구양적이 달려 들어 자기를 끌어안아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얼마 후 구양적은 모용쟁이 바라던 대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로는 그 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건장한 두 다리로 그녀의 하반신을 휘감은 뒤 서툴게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