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8편 (18/59)
그녀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치음 공자만을 담고 있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기네 열 여섯 자매를 옥소 하나로 거뜬히 물리쳐 내는 황약사의 뛰어난 재주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군들 죽은 치음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황약사는 미화 옆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미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보게, 미안하지만 잠깐 고생을 좀 해야겠구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뻗쳐 미화의 혈도 두 곳을 가볍게 튕겼다. 미화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이윽고 황약사도 일부러 큰소리로 소리쳤다. "네……네 년들이 사, 사람을 죽이는구나!" 황약사마저 땅바닥에 쓰러지자 자매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필소해를 속여넘길 수 있을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희아는 자기들이 계속 싸운다 해도 황약사를 죽여 버릴 수 없음을 잘 아는지라 되든 안 죄든 일단 부딪쳐 보기로 작정했다. "모두들 악기들을 챙기도록 해요. 나갈 준비를 해야겠어." 희아는 이렇게 지시하고는 동굴 입구께로 다가가서 소리 높여 외쳤다. "필 방주님―! 필 방주님―!" 필 방주는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석실 안의 동정을 엿듣다가 동굴 문을 약간 밀쳐 보았다. 그는 희아의 눈길과 마주치자 얼른 물었다. "미화와 황약사를 죽였느냐?" "저길 보세요!" 필소해는 희아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석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미화와 황약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워낙 산전수전을 다 겪은 놈인지라 쉽사리 희아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치음이가 아니야, 시도 읊을 줄 모르고 풍류도 모르지. 그런데 자색이 뛰어나고 풍류의 대가인 너희들이 나 같은 사람을 거들떠나 보겠나?" 희아가 교태를 부리며 대답했다. "필 방주님께서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태호방 방주님이시라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는데 우리 열 여섯 자매들이 항주부에서 필 방주님한테 몸을 의탁하지 않으면 무슨 방도로 살아가겠어요?" 필소해는 풍류남아로서의 기질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여색을 밝혔다. 그러니 아름다운 계집의 교태 앞에서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으랴.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주머니를 흔들며 석실 안에 대고 소리쳤다. "너희들이 이 환약을 먹으면 당장 이곳을 나가게 해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정말로 이 필소해를 따를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필소해는 득의양양해져서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만일 열 여섯 자매가 이 태호의 어독(魚毒)을 삼키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필소해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희아가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필 방주님께서는 생각을 잘못하셨어요." "뭘 잘못 생각했단 말이냐?" "방주님께선 우리들이 어떤 여 자들인지 잘 모르셔요. 치음 도련님께서도 생전에 우리들을 마음대로 다루진 못했어요. 언제나 우리들을 깍듯이 대해 주셨죠. 제가 이렇게 말하면 믿으시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열 여섯 중에 도련님과 잠자리를 같이해 본 사람은 불과 서넛에 지나지 않아요. 그 밖엔 죄다 깨끗한 숫처녀들이지요. 우리들에게 몽혼약을 먹여 놓고 마음대로 다루어 보자는 생각이 신 모양인데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희아는 잠깐 말을 멈추고 필소해를 쌀쌀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필 방주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저로서도 달리 할말이 없군요. 우리 열 여섯 자매의 송장이나 치울 채비를 하시랄밖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해. 필 방주님의 판단에 따라 우리들의 생사가 결정될 테니까." 여인들은 희아의 말에 따라 각자의 악기들을 들고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입적할 채비를 하고 앉은 여승들을 방불케 했다. 필소해는 이 열 여섯 자매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저마다 옷 한 가지씩을 벗어서 치음의 시체 위에 덮어 놓은 상태라 모두 속옷과 몸에 착 붙는 엷은 속적삼 바람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욕정이 끓어올랐다. 이전 절세 미녀들의 알몸에 가까운 요염한 자태를 어디서 또 구경하겠는가. '그래,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천하의 계집들은 그 성미가 다 물과 같다는데 내가 치음이처럼 잘만 대해 주면 고분고분 나를 따르지 않을라구. 그렇게 되면 멀지 않아 전부 내 사람이 될 텐데, 아까운 계집들을 괜히 죽게 할 건 없지.' 생각을 고쳐 먹은 필소해는 석실 안에 대고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들일랑 그만두어라. 내가 너희들을 몽땅 풀어 줄 테니까!" 이윽고 석실 밖 문어귀에 태호방 무리들이 잔뜩 몰려오더니 돌문이 드르릉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석실 밖에는 태호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에 속하는 자들 가운데 일여덟 명 가량 지켜 서 있었는데 이들은 계집들이 석실에서 걸어 나오기가 무섭게 그녀들의 혈도를 재빨리 찔러 놓았다. 열 여섯 자매들은 혈도를 찔려 옴쭉달싹 못하고 석실 밖에 몰려 섰다. 필소해는 흐뭇했다. 혈도를 찔러 놓았으니 아무리 사나운 계집들이라도 새장에 갇힌 새나 다름없지 않은가. 희아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필소해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희들은 이제 내 명령을 듣지 않을래야 듣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니 모두 이 알약을 삼키고 맹세를 해라. 한평생 태호방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희아는 더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필소해를 쏘아보면서 마구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호방의 두령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징글맞게 웃어대면서 열 여섯 자매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이들이 발정난 수캐들처럼 마구 덮쳐 들자 삽시에 여인들의 욕설과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개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별안간 한 사내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필소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미화를 부축한 황약사가 석실 문앞에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필소해는 이내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여우 같은 년들! 과연 내가 짐작했던 대로구나! ' 그는 황약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황약사 이 놈아! 네가 석실 안에서 요행히 살아 나오긴 했다만 우리 태호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긴 어려울 거다!" "좋다. 어디 한번 겨뤄 보자!"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몸을 훌쩍 날려 태호방패거리들과 여인들이 몰려 서 있는 복판에 뛰어내렸다. 황약사는 열 손가락을 쫘악 펴들고 여인들의 혈도를 눈 깜짝할 새에 전부 풀어놓았다. 혈도가 풀려 몸이 자유로워진 희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태호방 놈들을 깡그리 잡아죽여 도련님의 복수를 하자!"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거문고를 휘두르며 태호방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였다. 황약사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휘파람 소리에 태호방 무리들과 열 여섯 자매들은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몇 놈 안 되는 태호방 놈들을 처치하는데 아가씨들의 손을 빌릴 필요까진 없다!" 황약사는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는 필소해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러자 태호방의 두령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황약사를 둘러쌌다. 필소해는 흐뭇한 시선으로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우쭐거리며 황약사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황약사와 필소해 일행이 한창 어울려 싸우는 것을 지켜 보던 여인들은 한 사람을 상대로 개떼처럼 덮쳐 드는 태호방 무리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여인들이 황약사를 돕기 위해 달려 나가려 하자 미화가 조용히 만류했다. "아가씨들은 가만히 보고나 있어요. 태호방 놈들은 오늘 잠자는 범을 건드려 놓은 거나 진배없소. 두고 보면 알겠지만 황약사란 사람은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오. 아가씨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여인들은 미화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에 땀을 쥐며 싸움을 지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황약사의 두 눈에 별안간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무섭게 고함을 지르면서 옥소를 번개같이 휘둘렀다. 그는 먼저 태호방의 귀두도(鬼頭刀)를 잡고 있는 자를 겨냥하고 돌진했다. 황약사의 옥소가 놈의 정수리를 후려 갈기자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피를 쏟으며 땅에 고꾸라졌다. 태호방 놈들은 모두 악착스런 비적들이어서 한 놈이 고꾸라졌다 해서 무서워 도망칠 놈들은 아니었다. 놈들은 더욱 악이 받쳐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황약사가 다시금 번개처럼 옥소를 휘둘렀다. 태호방 놈 하나가 여지없이 쓰러져 나갔다. 놈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쏘아보면 서 왈칵 피를 토하더니 황약사의 발밑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쯤 되자 태호방 무리들은 모두 주춤거리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태호방에 가담하여 지금껏 숱한 싸움판에 뛰어들어 보았지만 황약사와의 싸움처럼 어렵고도 무서운 싸움은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도 없고 그런다고 계속 싸울 용기도 없어 한동안 어쩔 바를 몰라 했다. 황약사가 식은 죽 먹기로'태호방의 사내들을 죽여 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열 여섯 자매는 하나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미화도 한쪽에 앉아서 황약사의 뛰어난 무예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파리를 잡는 것보다 더 쉬우니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황약사의 노기는 여전히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난 네 놈들에게 진 빚이 있다. 내 오늘 기필코 그 빚을 갚아 주고야 말 테다!" 그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천천히 필소해를 향해 다가들었다. 필소해의 가슴속에는 적개심이 타올랐다. '아무래도 내 힘으로는 이 놈을 당해 랠 수가 없겠군. 그러나 내가 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이 놈이 나를 죽일 테니 달리 방법이 없구나.' 필소해는 갑자기 큰소리로 길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고함소리는 다른 태호방 무리들을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눈 깜짝할 새에 이삼십 명 가량의 태호방 무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필소해는 자기 편 한 무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황약사를 향해 거들먹거렸다. "황약사, 감히 우리 태호방을 건드리는 걸 보니 네 놈은 과연 영웅호걸이다. 이 필소해도 그 용기에 탄복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 해도 우리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들을 전부 상대해 내긴 어려울걸?" 황약사는 대꾸하지 않고 굽이굽이 뻗은 돌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했다. "너희 일흔두 봉의 인마들이란 대관절 어떤 놈들인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보나마나 자라 거북이 새끼 같은 놈들이겠지 만 이 동해 도화도 황약사의 솜씨를 한번 보여 주도록 하지." 황약사는 한 계단 한 계단 되짚어 내려오면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조나라 협객 모자에 붉은 술 날리고 허리에 찬 검날 서릿발 같구나 말잔등에 은빛 안장 얹으니 백마는 유난히 날렵하구나 십 보에 한 놈씩 목을 자르니 천리에 도적떼 사라졌어라 의로운 일 한 후엔 옷매무새 바로잡고 심산에 숨어서 몸과 이름 숨기네 이 이백(李白)의 〈협객행(依客行)〉을 읊노라니 황약사 가슴속에는 호기가 넘치고 용기가 백 배해졌다. 그는 필소해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 태호방 일흔두 봉의 인마들이 전부 모였느냐? 그럼 다들 황천길 떠날 채비나 하여라!" 말을 마친 황약사는 길게 휘파람을 불더니 태호방 무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태호방 무리들을 향해 날아가면서 옥소로 연거푸 두 놈의 머리를 내리갈겼다. 두 놈은 당장에 머리가 묵사발이 되어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태호방 무리는 그래도 무서워하지 않고 우르르 몰려들어 땅 위에 내려선 황약사를 둘러쌌다. 태호방 무리 중에는 천수여래 (千手如來)라는 암기를 잘 쓰는 놈이 있었다. 그는 황약사가 태연하게 무방비 상태로 서 있자 그 틈을 타 슬그머니 어골침(魚骨針) 열네 개를 꺼내어 황약사를 향해 날렸다. 이 어골침에는 극독약이 발라져 있어 누구든 그 침에 맞기만 하면 꼼짝없이 죽게끔 되어 있었다. 어골침들은 휙휙 소리를 내면서 황약사에게로 날아갔다. 황약사는 대뜸 널따란 팔소매를 날리면서 손을 획 내저었다. 이 어골침들은 곧장 방향을 바꿔 어골침을 뿌린 자를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어골침은 눈 깜짝할 새에 놈의 두 눈과 숨통에 꽂혔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자기가 던진 어골침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어골침 열네 대는 태호방의 일여덟 놈을 연거푸 꺼꾸러뜨렸다. 황약사는 상대방이 암기를 쓰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격분한 그는 자기가 올라서 있던 큰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태호방 놈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옥소를 휘둘렀다. 잠깐 사이에 30여 명 중에서 일여덟 놈이나 꺼꾸러졌다. 태호방 놈들은 더는 덤비지 못하고 버터 선 채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황약사는 별안간 크게 너털웃음을 웃더니 숱한 눈길이 쏘아보는 가운데 태연하게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옷자락으로 옥소에 묻은 핏자국을 슬슬 닦으며 말했다. "네 놈들은 태호에서 배 타고 노략질을 일삼아 왔으니 태호의 과도 소리야 익히 들어 왔겠지? 그리고 태호의 광풍과 파도의 맛도 많이 보았을 테지? 그럼 내가 지금부터 네 놈들한테 동해의 파도소리를 들려주겠다." 황약사는 옥소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불기 시작했다. 옥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필소해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네 놈이 아무리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예를 지녔다 해도 우리 태호방을 이렇게 깔볼 수가 있느냐? 네 놈이 아무리 안하무인이기로서니 태연히 앉아서 퉁소를 불기까지 하다니. 우리 스물이 힘을 합쳐 싸우면 네 놈 하나쯤은 얼마든지 꺼꾸러뜨리고도 남아.' 필소해는 당장 몸을 날려 황약사에게로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황약사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마치 앞에 철벽이라도 막아 선 듯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게 된 그는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올라 쩔쩔맸다. 희아는 황약사의 이 〈벽해조생곡〉은 소리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동료들을 몽땅 한자리에 모여 앉도록 지시하고는 서로의 손을 잡고 저마다 숨결을 조절하면서 내력으로 이 옥소 소리를 막게 했다. 미화는 몸이 허약해져서 이 옥소 소리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는 옷자락을 찢어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태호방 놈들은 차츰 옥소 소리에 정신이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황약사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황약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집채 같은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한복판에 앉은 듯 오장육부가 온통 뒤집혔고 염통이 목구멍에라도 걸린 듯 피가 역류했으며 머리는 빠개지는 듯 아파 왔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귀를 막으며 옥소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바다의 성난 파도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제압할 수 있으며 바위나 산마저 칼로 도려내듯 모양을 바꾸어 놓는다. 그렇듯 옥소 소리는 점차 더욱 기승을 부리며 칼이나 검처럼 태호방 무리들의 가슴을 후벼 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태호방 놈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아 들고 제 몸을 푹 찔렀다. 다른 한 놈은 큰 바위 위에 기어오르더니 손을 뻗쳐 황약사의 옷자락을 거머쥐고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이윽고 놈은 품속에서 어독(魚毒)을 꺼내어 입 안에 집어 넣고는 마구 씹어 대기 시작했다. 놈은 어독을 삼키기가 무섭게 꽥꽥거리며 구역질을 하다가 피를 토하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황약사의 옥소는 더욱 힘차게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과 땅을 몽땅 삼키기라도 할 듯이 무섭게 요동쳤다. 희아네 열 여섯 자매들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들은 황약사의 이 〈벽해조생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손을 맞잡고 있어 내력이 합쳐져서 그런대로 견뎌 낼 수 있었지만 옥소 소리가 계속 이어지니 여간 괴롭지가 않았다. 희아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조로 유명한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한나라 황제는 여색을 밝히는지라 경국지색에 빠져 지냈네, 그녀의 동료들은 희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치음이 살아 있을 때 그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에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연습하게 했었다. 누구든 이 노래를 부르며 그 음률을 마음속으로 되살리노라면 황약사의 옥소 소리를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아의 오른쪽에 앉은 계집이 희아의 노래를 받았다. "궁중에서는 여러 해나 찾을 수 없어……." 열 여섯 자매들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장한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성난 파도 소리와 폭풍우 쏟아지는 것 같던 황약사의 옥소 소리가 별안간 느려지면서 그 대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 술법은 더욱 지독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오장육부가 뒤집혀 피를 토하던 태호방 무리들은 별안간 고요해진 옥소 소리에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 희아는 계속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임금도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며 구하지 못하는데……." 다른 한 계집이 응수했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피눈물이 흐르는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매들은 마외역(馬嵬驛)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양옥환(楊玉環)을 생각하면서 오로지 그녀의 비참한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황약사의 옥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또 그 옥소 소리로 인해 몸과 마음도 괴롭지 않게 되었다. 황약사는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태호방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네 놈들은 오늘 몽땅 내 손에 죽을 텐데, 내세에 다시 태어나거든 다시는 악한 짓들을 하지 말아라."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더니 태호방 놈들 중 한 놈의 머리에 있는 백회대혈 (百會大穴)을 겨냥하고 한 장 내갈겼다. 살인을 장난하듯 하는 황약사를 바라보고 있던 미화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황약사, 이제 그만해 두게! 사람을 죽여도 너무 지독하게 죽이는군! 그러나 그의 소리는 맥이 없어 마치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황약사는 쓴웃음을 웃으며 대꾸했다. "어리석은 소리 그만두게, 나 아니면 여태껏 자네 목숨이 붙어 있었을 것 같은가?" 그리고는 필소해를 향해 물었다. "그 구두신취 학 영감은 지금 어디 있느냐?" 황약사의 물음에 필소해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네 놈한테 그런 건 말해 주어 뭣 하겠느냐?" 그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죽일 테면 죽이라는 듯이 대들었다. 황약사는 쓴웃음을 웃었다. "네 놈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하는 수 없구나. 나한텐 뼈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부골침(附骨針)이란 독침이 있다. 내가 그 독침을 네 등허리에 꽃아 놓기만 하면 네 놈은 살아 있어도 차라리 죽은 것만 못한 나날을 보내게 될거다. 그 독이 하루하루 몸에 퍼지면서 고통을 겪을 텐데 마지막 죽을 무렵에 당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지. 자, 어떡하겠느냐? 학 영감의 거 처를 순순히 대했느냐, 아니면 부골침을 맞겠느냐?" 필소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구두신취 학 영감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로 말하면 아형까지도 가로챈 원수 같은 영감태기가 아니던가? 그런 영감태기를 위해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고통을 당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학 영감은 응취봉(默鷲蜂)에 있다. 밧줄을 타고 오르면 봉우리 위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자칫하다간 학 영감을 만나기도 전에 봉우리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런 줄 알아라." 그의 말이 끝나자 황약사는 필소해의 정수리에 손을 畿었다. "네 놈은 아형이를 죽였지? 네 놈을 죽이지 않으면 아형이 어찌 황천에서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그는 대뜸 손에 힘을 주었다. 필소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지러지는 소리로 떠듬거렸다. "아형은…… 아형은……."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두개골은 묵사발이 되었으며 삽시에 칠규로 피를 쏟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황약사는 미화 앞에 다가오더니 한마디 던졌다. "나란 사람은 보다시피 성미가 사납고 행동이 괴팍한 사람이오.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그런 줄 알고 되도록 말을 삼가는 게 좋겠소." 그리고는 희아를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치음 공자는 실로 복 있는 사람이오." 황약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곧장 응취봉을 향해 떠나갔다. 여인들은 옷자락을 날리며 달려가는 황약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한달음에 호수 기슭에 닿은 황약사는 쪽배에 몸을 싣고 급히 노를 저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