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7편 (17/59)
"아가씨네 도련님이 없어진 게 우리 태호방과 무슨 상관이지?" 필소해가 시치미를 때자 희아가 말머리를 돌렸다. "듣자니까 필 방주님께서는 호심장의 규수 아형 낭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신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필소해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이름만 들어도 역정이 나는 사람이 따로 아형이 아니던가. 그는 희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뭐라구? 네깐 년이 그런 건 물어 뭘 어쩌겠다는 거냐?" 필소해가 화를 버럭 내자 희아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걸로 보아 아형 낭자가 여기 있는 게 분명하군요. 그러면 우리 도련님 역시 여기에 계실 테고, 미화 도련님 역시 여기에 계실 거예요." 필소해는 희아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엉뚱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형이야 내가 먼저 눈독들인 계집이지. 그런데 엉뚱하게 학 영감태기가 나서서 가로챘으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나?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내 대신 복수를 해줄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 계집들이라도 열 여섯이나 되니 출시할 수 없고, 게다가 여기에 온 적이 있는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도 저기 보이는데, 저 연놈들이 힘을 합쳐 싸운다면 혹시 학 영감을 죽여 버릴 수도 있 을지 몰라…….' 생각이 이쯤 미치자 필소해는 희아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아. 그렇게 생각된다면 날 따라 산에 올라가 찾아보면 될 거 아닌가?" 필소해는 당장 아가씨들을 이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멀지 않아 어둠침침한 석굴 안에 들어섰다. 필소해가 입을 열었다. "이 석굴은 우리 태호방의 중요한 밀실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못해. 내가 아가씨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태호방은 아가씨들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 함이야. 치음 공자와 미화 공자는 여기 온 적이 없어. 아가씨들이 믿든 말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하라구." 황약사는 석실 안을 둘러보면서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석실은 네 벽이 다 외부와 통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 석실 안에 갇히기만 하면 빠져 나가기 힘들겠어. 이 계집들이 필소해의 속생각을 눈치나 채고 있는지 모르겠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고초를 당해도 큰 고초를 당하겠는걸?' 이때였다. 희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필 방주님께서 우리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오신 진짜 이유는 뭐죠? 단순히 우리 도련님이 여기에 안 계시다는 걸 알려 주시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허, 아가씨 생각엔 그런가?" 필소해는 능청맞게 웃으며 재빨리 구석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황약사는 예감했던 대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쏜살같이 뒤쫓아가서 필소해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필소해는 옆으로 몸을 피해 땅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더니 '쾅!'하는 굉음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 아가씨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아우성을 치며 허둥댔다. "조용히들 해!" 희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석실 안은 삽시에 잠잠해졌다. "불을 밝혀요!" 희아가 다시 영을 내리자 누군가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탁탁 쳐서는 횃불에 불을 밝혔다. 횃불들에 불을 붙이니 석실 안의 진면목이 환하게 드러났다. 석실 안은 무척 넓었으나 한편에 높은 석대가 하나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석대 위의 석벽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독수리의 날개 아래에 새겨져 있는 성난 파도가 바로 태호였다. 그 파도 한복판에는 태호의 일흔두 개의 봉우리와 일부 촌락들이 새겨져 있었다. 황약사는 이상하게도 독수리의 눈이 없이 그 자리가 뺑 뚫려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황약사는 당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문앞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다름아닌 치음이었다. 온통 피투성이인 그는 죽은 지 오래인 듯했고 등뒤에 큰 상처가 있었으며 머리는 무슨 무거운 병장기에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여인들은 모두 멍청해졌다. 그녀들은 말없이 치음의 시체 앞에 꿇어 엎드렸다. 희아가 나서서 치음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자기의 긴 옷자락으로 치음의 철굴을 천천히 닦아 주기 시작했다. 희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어 여인들의 통곡 소리가 석실을 온통 뒤흔들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속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석실 안에 갇힌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눈앞에 보이는 듯했던 것이다. 그는 여인들처럼 치음의 죽음을 비통해 하기보다는 석실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에만 골몰했다. 구석을 살피며 돌아다니던 황약사는 벽 모서리태서 또 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황약사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름아닌 미화였던 것이다. 황약사는 미화를 안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입술은 말라 터져 있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들어 죽은 것이 분명했다. 황약사는 기황지술(岐黃之術)에도 정통했는지라 미화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해보고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미화의 몸에는 아직까지 흘러 다니는 유기(游氣)가 얼마간 남아 있었고 염통 부위가 가냘프게나마 아직은 뛰고 있었던 것이 다. 그는 미화의 뒷잔등에 자기의 두 손바닥을 붙이고는 내력으로 미화를 구하려 했다. 아가씨들은 치음을 안아 일으켜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석벽 아래에 앉힌 후 자신들의 눈물로 치음의 얼굴과 손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그녀들은 치음의 깔끔한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치음은 자기의 옷에 티끌 한 점만 묻어도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들은 하나하나 치음을 향해 절을 올렸다. 희아가 허리를 펴고는 입을 열었다. "도련님, 안심하세요. 우리 열 여섯 자매들이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 테니까요." 여인들의 가슴속엔 비분이 넘쳐흘렀다. 희아가 손바닥에 커다란 야광주를 받쳐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열 여섯 자매들 중에서 누구든지 도련님을 위해 복수를 하기만 하면 이 야광주는 그 애한테 주겠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남은 열다섯 자매는 그 사람을 두령으로 모시겠어요. 만일 외인이 했다해도 역시 그렇게 하겠어요." 이 야광주는 치음의 움켜쥔 손가락을 펴다가 발견한 것인데, 다름아닌 석벽에 새겨진 독수리의 눈에서 뽑아 낸 것이었다. 열 여섯 자매는 일제히 맹세를 하고 나서 모두 각자의 악기들을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들은 숙연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가락의 한 소절이라도 어긋날까 봐 정성을 다해 악기들을 다루었는데 마치 치음의 음령(陰靈)이 자기를 꾸짖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황약사는 몹시 난처해졌다. 미화의 목숨을 살리자면 조용해야만 하는데 열 여섯 자매가 합주를 하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인들에게 연주를 멈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어 보았다. 황약사가 미화를 살리기 위해 내력을 쏟고 있는 동안 어느새 음악이 끝났다. 연주를 끝낸 여인들은 이제 차례차례 치음의 시체 앞에 다가가 아홉 번씩 절을 올렸다. 희아가 선참으로 예를 올리고는 자기의 긴 옷을 벗어서 치음의 시체 위에 덮어 놓고 물러서자 남은 열다섯도 그대로 따랐다. 어떤 옷들은 치음의 머리 위에 덮여졌고 어떤 옷들은 치음의 팔에 매 여지기도 했다. 또 어떤 여인들은 자기 옷을 치음의 허리에 둘러 주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여인들은 자기 속 옷마저 벗어서 치음의 몸에 감아 놓기도 했다. 그것은 평소에 자기의 알몸을 치음에게 맡겨 보지 못했던 한을 죽은 치음의 시체를 통해서나마 풀어 보자는 심사였다. 오래지 않아 치음의 온몸은 열 여섯 자매의 하얀 옷들에 온통 감싸였다. 이때 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언제부턴지 석실 입구가 약간 벌려져 있었는데 그 틈새로 음흉하게 웃고 있는 필소해의 모습이 바라보였다. "희아야, 난 네가 치음의 열 여섯 희첩 중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었다는 걸 알고 있다. 너희들을 풀어 주면 너희 열 여섯 자매가 나를 따르겠느냐?" 열 여섯 자매들 중에는 성미가 불 같은 계집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치음 공자와 함께 이 석실 속에서 죽을지언정 태호방의 노리개가 되지는 않겠다고 소리쳤다. 필소해가 위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동굴 입구를 막아 버리기만 하면 너희들은 몽땅 죽고 말아! 이삼십일이 지나서 다시 와 보면 시체들이 수두룩할 거야." 필소해는 당장이라도 동굴 입구를 막아 버릴 듯 서둘렀다. "잠깐만!" 희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냉큼 필소해 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필 방주님, 우리 열 여섯 자매에게 원하시는 게 뭐죠?" 필소해가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이 세상에 치음이나 미화와 병묘 같은 자식들만 풍류를 즐기라는 법이 있느냐? 태호방도 천하대방(天下大 )이야. 나 필소해도 강호의 영웅이란 말이야. 술 처먹고, 계집질하구, 바람이나 피우는 걸 누구라고 못해? 너희들 열 여섯 자매가 우리 태호방에 들어오면 난 너희들을 내 곁에 두고 시중을 들도록 하겠어!" 필소해는 득의양양해서 히죽거렸다. 희아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한참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도련님은 이미 죽었으니 저희들은 이제 둥지 잃은 새나 다름없어요. 의탁할 데라고는 전혀 없는 저희들을 필 방주님께서 거둬 주시겠다니 실로 감사해요." 이때 열 여섯 자매들 중 하나가 그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희아야, 도련님께선 생전에 너를 제일 아껴 주셨어. 그런데도 련님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제 살 궁리만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그녀의 말에 희아가 대뜸 소리쳤다. "입 다물지 못해? 도련님께선 모든 일을 내게 맡기셨어. 이제 도련님이 안 계신 이상 모두 내 말에 따라야 해. 알아듣겠어?" 자매들은 흠칫하고는 찍소리도 못했다. 동료들이 조용해지자 희아가 다시 필소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필 방주님, 저희들을 거둬 주시기만 한다면 저희들은 당연히 방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 필소해는 크게 기뻐하며 대꾸했다.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너희들 생각이 그렇다면 우선 저 놈을 좀 보아라." 필소해는 한쪽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선 황약사가 한창 내력을 넣어 미화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 열 여섯 자매가 일제히 손을 써서 저 두 놈들을 죽여 버리면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가도록 해주겠다!" 필소해의 말에 희아는 미화와 황닥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돌려 자기 동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겠어요!" 제11장 동사 황약사의 악명 희아는 자그마한 계집이었지만 어지간한 사내보다 마음이 더 모질었다. 필소해가 돌아가고 나자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약사와 미화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 열 여섯 자매는 이 석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열 여섯 자매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여인들은 황 약사와 미화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석실 안에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미화는 종이 한 장 들 힘도 없었다. 황약사가 얼마쯤 내력을 넣어 주기는 했으나 남과 싸울 만한 힘은 여전히 없었다. 희아가 황 약사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난 호심장에서 네 놈이 어떤 놈인가 이미 알아봤어. 아형의 몸에서 그 음탕한 눈길을 때지 못하는 걸 보고 말이야. 네 놈만 없었더라면 아형인 우리 도련님한테 시집을 왔을 거야. 도련님이 비명횡사하시게 된 데는 네 놈의 죄가 크다!" 황약사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꾸미느라 애를 쓰고 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아는 이번엔 미화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네 놈도 역시 나쁜 놈이다! 삼대 공자라구? 삼대 공자는 무슨 얼어 죽을 삼대 공자! 우리 도련님을 제외하곤 다 망나니들이야. 한 놈은 계집들의 궁둥이만 쫓아다니는 오입장이구, 한 놈은 투전에 미친 놈이니 망나니도 그런 망나니들이 없지. 네 놈만 없었다면 아형인 벌써 우리 도련님의 아내가 됐을 거야. 그랬으면 우리 집 도련님이 황천객이 되지도 않았을 테구. 우리 도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도 네 놈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미화는 희아를 멀거니 건너다볼 뿐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황약사는 그런 희아를 바라보면서 태연스레 웃었다. 열 여섯 자매는 수중의 악기를 들더니 악기를 감쌌던 보자기들을 벗겨 던지고는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희아는 두 사내를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들은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나을 거다. 우리가 손을 쓰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열 여섯 자매는 한 쌍씩 짝을 지어 팔괘진(八掛陣)을 친 후 두 사내를 조일 듯이 다가들었다. 황약사와 미화는 서로 등을 맞대고 열 여섯 자매가 손을 쓰기만 기다렸다. 이때 미화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노형, 난 노형의 배후에 저 년들이 범접 못하게 할 수 있네." 황약사가 빙그레 웃었다. "황약사는 손을 검처럼 내밀고 '낙영신검 (落英神劍)'이라는 검법을 쓸 태세를 취했다. 이 검법은 가장 변화무장한 검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는 거듭 술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한 검이 열 여섯 개로 변하여 동시에 열 여섯 자매의 진공을 물리쳤다. 그의 정면에서 진공해 오던 계집 여덟이 당해 내지 못하고 비실비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배후에서 진공하는 넷은 미화를 상대로 덤 벼들었다. 미화는 내력이 다 빠졌는지 라 계집들의 공격에 방어만 할 뿐 달리 힘을 쓰진 못했다. 몇 합 안 되어 미화는 그나마도 감당해 낼 수 없어서 쩔쩔 매기 시작했다. 싸움에 한창 열을 올리던 황약사는 문득 속으로 개탄했다. '허허, 네 신세가 이 지경이 되다니. 비록 점잖은 군자라고는 할 수 없으나 헌헌장부가 한 무리 계집들과 싸워서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황약사는 점차 기세를 늦추기 시작했다. 황약사의 뛰어난 무예와 용맹에 겁에 질린 열 여섯 자매는 황약사를 싸고 있을 뿐 누구 하나 섣불리 손을 쓰진 못했다. 이때였다. "황 형, 난…… 난……." 미화가 몇 마디 더듬거리다가 앞으로 콱 고꾸라졌다. 황약사는 재빨리 손을 뻗쳐 미화를 부축했다. 그는 미화를 품에 안고는 네 계집들을 향해 연거푸 장을 내갈겼다. 그의 장에 넷은 하는 수 없이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의워 놓았다. 황약사는 문앞 까지 뛰어갔으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황약사는 석벽에 기대어 천천히 앉으면서 거의 정신을 잃어 가는 미화를 무릎에 앉혔다. 그는 석벽에 등을 기대고는 계집들을 쏘아보았다. 계집들은 모두 그의 무예 실력을 아는지라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희아는 별안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련님께서 한평생 우리들한테 무예를 가르치셨는데 저 놈 하나도 죽일 수 없다니……." 희아를 바라보던 다른 계집들도 방어하기 좋게 이십팔성숙공위 (二十八星宿拱位)로 둘러앉았다. 희아는 거문고를 끌어당기며 다시 중얼거렸다. "도련님께서는 거문고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가르쳤어요. 오늘 전 도련님의 가르침대로 저 두 놈을 죽이고 말 테예요. 그럼 도련님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말을 마친 희아는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다른 열다섯 계집들도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악기들을 다루기 시작하자 일시에 풍악소리가 진동을 했다. 살기가 가득 찬 풍악 소리를 들으며 황약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이 풍악 소리로 날 죽이려 하지만 그건 망상이야. 너희들 열 여섯 자매가 아니라 너희들의 그 치음 공잔지 뭔지 하는 작자가 환생한다 해도 이 어르신을 어쩌지는 못할 거다!' 그런데 미화를 들여다보니 창백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있는 품이 이 풍악 소리에 도취되었음이 분명했다. 황약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난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중상을 입은 미화가 이 풍악 소리에 견뎌 내긴 어렵겠어. 저 년들이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어 풍악을 울리면 미화는 심맥이 울려 터지면서 목숨을 잃고 말 거야.' 황약사는 품속에서 옥소를 꺼냈다. 그가 옥소를 꺼내는 것을 본 희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 따위 옥소로 우리 십육인 합주를 당해 낼 성싶으냐? 만일 이 십육인 합주의 힘을 당해 낸다면 음률에서의 조예가 천하 제일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만한 재주를 가진 분은 이 세상에 치음 도련님 밖엔 없어.' 희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문고줄을 힘껏 잡아뜯자 다른 계집들도 더욱 힘을 내어 악기를 다루었다. 삽시에 석실 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 내릴 것 같은 요란한 풍악 소리로 가득 찼다. 이 열 여섯 자매가 연주하는 것은 〈북리지무(北里之舞)〉라는 가락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은나라 주(紂)왕은 주색잡기에 빠져서 나라까지 망친 임금이었는데, 그는 자기 수하의 악공들을 시켜 이 〈북리지무〉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 곡이 만들어지자 주왕은 또 악공들에게 이 곡을 연주하게 했다. 당시 주왕의 곁에는 궁녀 10여 명이 있었는데 이 곡을 듣고는 저마다 음탕한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서 갖은 추태를 다 부렸다. 주왕은 몹시 만족하여 악공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도록 분부했다. 이때부터 궁궐 깊숙한 곳에서는 음탕한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주황과 궁 안의 궁녀들은 더욱 음탕스러워졌다. 이리하여 주색잡기에 빠진 주왕은 끝내 나라를 망치고 역사에 오명을 남긴 것이다. 이렇듯 〈북리지무〉는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 인성을 흐리게 하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절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곡은 처음에는 잦은가락으로 북 장단마저 경쾌하게 들려 오더니 점차 가락과 장단이 느려지면서 유연하고 처량하게 울려 왔다. 이 곡조는 마치 절세의 미인이 자기의 아리따운 용모와 몸매를 자랑하면서 한 보 한 보 춤추며 다가오는 것만 갈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황약사는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미화는 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별안간 아형을 부르며 얼 빠진 소리를 하더니 이윽고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심금을 울리는 풍악소리에 크게 내상을 입은 듯했다. 황약사는 부랴부랴 옥소를 입술에 대고 〈고풍(古風)〉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약사의 옥소 소리는 열 여섯 자매의 합주와 맞서 힘을 겨루었다. 옥소는 때로는 낮고도 느리게 때로는 높고도 빠른 가락으로 열 여섯 자매의 합주보다 더 힘있게 울렸다. 얼마 안 가 열 여섯 자매 중의 몇몇 여인들은 악기를 다루던 손길을 멈추고 황약사의 옥소 소리에 취해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그 눈길들에는 흠모의 정이 담뿍 담겨져 있었다. 계집 중 하나가 별안간 손에 잡았 던 빈고(拏鼓)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북채를 쥐고 푹 찔렀다. 북채 두 개가 동시에 가죽을 꿰뚫으면서 빈고에 박혔다. 그녀는 이렇게 성깔을 부리고 나서는 다시금 황약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른 계집 서넛이 수중의 악기들을 팽개치고는 서로 끌어안고 볼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어떤 계집은 제 손으로 자기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기까지 했는데, 솟구치는 음욕을 누를 길이 없는 듯 신음을 삼키며 음탕한 눈길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희아는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을 느끼고 더욱 미친 듯이 거문고를 튕겨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황약사의 옥소 소리를 눌러 버리려 했다. 황약사는 한 곡을 다 불고는 옥소를 무릎 위에 슬며시 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한텐 또 〈벽해조생곡〉이라는 곡이 있어. 이 곡만 불면 너희들은 전부 크게 다칠 텐데 이쯤에서 그만두기를 권고한다. 순순히 타이를 때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네가 뭐냐? 우리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이 세상에서 우리보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분밖에 없어. 치음 도련님 딱 한 분 뿐이라구!" 희아가 이렇게 대꾸하자 황약사가 계속 타일렀다. "참 답답하구나, 너희들이나 난 모두 같은 처지야. 다 같이 필소해의 함정에 빠졌단 말이다. 네가 날 죽이고 태호방의 계집이 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너희들의 그 치음 도령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 계집들 중의 일부는 황약사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약사는 자기 말에 동조하는 계집들이 적지 않음을 눈치채고 넌지시 희아에게 말했다. "내게 한 가지 묘안이 있다. 필소해가 다시 오면 너는 필소해를 보고 이 황약사가 죽었다고 해라. 그럼 너희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고 나는 나대로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대책을 강구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희아는 내심 황약사의 태도에 탄복하며 그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