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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5편 (15/59)

2026-09-24 21:27:20 조회 24
이 아홉 쌍의 진주는 각기 야명주(夜明珠), 겁독주(祛毒珠), 벽화주(酸欠珠), 분수주(分水珠), 구사주(驅邪珠), 명목주(明目珠), 양심주(養心珠), 정안주(定顔珠), 모주(母珠)이다. 이 열여덟 알의 진주는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있고 늙은 사람은 장수할 수 있게 하고 물과 불 속에서도 사람을 구해 낼 수 있으므로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보배라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호에도 용의 족속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이한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천년이나 살았다는 용왕의 아홉째 아들이 남기고 갔다는 원수구퇴를 소인이 수중에 넣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소인은 여전히 나무 위에 앉아 입을 열었다. "사불아, 나한테 이 침대가 있기에 천지만물은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비가 쏟아져도 몸이 젖는 법이 없고 하늘에서 벼락이 쳐도 나를 어쩌지 못하고 그 어떤 극독약으로도 나를 중독시키지 못한단 말이다." 득의양양하여 자랑을 늘어놓는 소인의 말허리를 끊으며 처녀가 말했다. "선배께서는 이 보물을 가지고 계시니까 저의 태호 보선의 물건 같은 건 눈에 차지 않으실 만도 하군요. 하지만 병 도련님이 독약에 중독되었으니 선배께선 죽는 사람을 살려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통쾌하게 대답했다. "근심을 말아라. 그 침대를 보았듯이 매일 오시(午時)에 그 침대에 올라가 앉아 한쪽 손은 위로 올려 다섯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의 중로궁혈(中勞宮穴)이 겁독주(祜毒珠)를 마주하기만 하면 열흘 안으로 온몸의 독기가 말끔히 가실 것이다." 처녀는 몹시 기뻐했다. "선배께서 병 도련님을 해독시켜 주시기만 하면 저는 앞으로 선배의 말씀이라면 무슨 일이든 따르겠사옵니다." "나중에 딴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소인이 정색을 하고 다짐받으려 했다. 처녀는 조금도 주저없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대답했다. "선배께서 병 도련님을 구해 주시기만 하시면 무슨 일이든 선배의 분부를 따르겠사옵니다." 사내애가 옆에서 처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자꾸만 말리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처녀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병묘는 마음속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아가씨가 낯선 사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이렇듯 헌신적일 수 있단 말인가. 소인이 처녀를 향해 물었다. "듣자니까 사불에게는 자기의 징표로 구슬꽃〔珠花〕두 떨기가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처녀가 사실이라고 대답하자 소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 구슬꽃 두 떨기 중에서 한 떨기만 나를 다오. 내가 무슨 용무가 있으면 널 불러서 알려 주겠다. 그럴 때 넌 내가 시키는 일들을 해주어야 한다. 아까 약속한 대로 말이야." 그 구슬꽃은 처녀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머리에서 꽃을 뽑아냈다. 구슬꽃은 한 떨기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만지자 두 떨기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한 떨기를 소인에게 넘겨주고는 말했다. "선배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시든지 죄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열흘 후에 와서 병 도련님을 모셔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읍을 한 뒤 사내애와 함께 돌아갔다. 소인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을 지그시 감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병모는 소인이 무슨 술법을 연마하는 중임을 알아챘다. 병묘는 몸을 돌려 처녀와 사내애의 뒤를 따라 호숫가에 이르렀다. 사내애는 닻줄을 풀어 힘껏 배를 향해 던지고는 몸을 날려 배에 뛰어올랐다. 처녀는 배에 오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병묘를 바라보았다. 처녀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병묘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처녀는 병묘를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병묘 도련님, 몸을 잘 돌보세요. 열흘 후에 제가 모시러 오겠어요." 병묘가 대답할 새도 없이 처녀는 힘껏 몸을 날려 배를 향해 날아갔다. 호수 기슭에 서서 병묘는 생각에 잠겼다. '소인과 아가씨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두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걸 봐서는 초면인 것 같지만 소인에 대해 그토록 공손한 걸 봐서는 진작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인 것 같은데…….' 병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배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배는 질풍같이 미끄러져 잠깐 사이에 나무숲이 울창한 섬으로부터 멀어졌다.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갑판 위에 서 있었다. 사내애가 배를 조종하며 훔쳐보니 처녀는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수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애는 잡았던 키를 놓고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처녀는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여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사내애가 개탄했다 "한심하군, 한심해. 부처님마저 범속한 인간의 정에 사로잡혔으니 한심한 일이지 뭐냐?" 사내애가 이렇게 이죽거렸지만 처녀는 여전히 못 들은 체하고 멀거니 뒤만 돌아다보았다. "어허, 참말루 병 도련님인지 뭔지 하는 사내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했는가 보군. 하지만 소인이 서로 좋아 지내게 가만히 놔둘까?" 처녀는 사내애의 말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멍청히 떠나온 쪽에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사내애는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배는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 어느덧 호숫가에 닿았다. 그들 둘은 배에서 내려 호수 기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위에는 고즈넉이 정적이 깃들었다. 어느 결에 하늘에는 둥근 달이 솟아올라 태호의 수면에 교교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처녀가 갑자기 손을 위로 올렸다가 손바닥을 뒤집으면서 무언가 받아드는 시늉을 하자 놋사발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그 놋사발에는 물고기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부싯돌을 그어 기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연거푸 놋사발 네 개에 불을 붙여 한쪽에다 죽 늘어놓았다. 이때 멀리서부터 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사불―! 악귀―!" 그 소리는 한참을 태호 기슭에 메아리치더니 호수에서 갑자기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들려 왔다. 가만 눈여겨보니 자그마한 쪽배 하나가 물을 가르면서 나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쪽배가 기슭에 닿자 웬 사람이 뛰어내리더니 허둥지둥 두 사람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네 개의 놋사발을 향해 일일이 절을 했다. "태호방 방주 필소해가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사옵니다!" 그가 절을 마치고 일어서자 졸개 둘이 배 안에서 궤짝 하나를 들어 내렸다. 궤짝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뚜껑이 덮여 있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궤짝을 날라 온 두 사람이 뚜껑을 열려고 하자 처녀가 열지 못하게 손짓했다. "됐어. 궤짝은 여기에 내려놓고 너희들은 물러가라!" 처녀가 이렇게 분부하자 필소해는 희색이 만면했다. "사불님께서 이 궤짝만 받으시면 우리 태호방은 금년에도 무사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필소해는 기쁜 마음으로 처녀와 사내애한테 다시 꾸벅 절을 하고는 물러가려 했다. 처녀가 필소해를 불러 세웠다. "필 방주, 자네 태호방에서 최근에 독약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해쳤다면서?" 필소해는 처녀의 말투에서 뭔가 상서롭지 못한 조짐을 느끼고는 급히 무릎을 꿇으면서 대답했다. "사불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태호방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처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필소해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변명을 했다. "우리 태호방에서는 요즘 들어 매사에 아주 조심들을 하고 있습니다. 값 나가는 금은보화나 재물들을 얻으면 사불님과 악귀님을 잊어 본 적이 없지요. 저희들이 무얼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앞으로라도 시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필소해는 매우 놀란 듯 처녀의 눈치를 살폈다. 사내애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일부러 위엄을 부렸다. "듣자니 태호방이 항주부 삼공자를 못살게 굴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사내애의 물음에 필소해는 속이 섬뜩해졌다. '사불과 악귀가 이 일을 어떻게 알았지?' 필소해는 몹시 놀랐으나 사불과 악귀에게 방내의 내막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아형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그였다. 한데 태호방의 총타주인 구두신취 학영감이 가로채서는 한사코 아형과 성혼하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는 도리상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학영감이 몹시 미웠다. 그러나 아무리 학영감이 미워도 이런 불만을 사불과 악귀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사불과 악귀는 이런저런 내막을 묻고 싶었으나 필소해를 따라온 졸개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두 졸개는 태호방의 총타주인 구두신취의 심복들이었다. 평소에는 필소해의 시종으로 따라다녔지만 암암리에는 필소해를 감시하고 그 행적을 낱낱이 학 영감에게 고해 바치도록 돼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눈치를 챈 사불은 악귀에게 두 사람을 처치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악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졸개들을 불러 한쪽으로 끌고 갔다. "긴히 물어 볼 말이 있으니 날 따라 오너라." 두 졸개는 도적 무리에 몸을 담은 지 오래로 강남의 사불과 악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둘은 악귀의 부름에 잔뜩 긴장하여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뒤를 따랐다. 필소해는 평소에 이 두 시종을 제일 미워했다. 그러한 두 놈이 악귀에게 불려 가자 두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이 대충 짐작이 갔지만 짐짓 모르는 체했다. 사불이 필 방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필 방주, 자네가 사람을 죽이려 하니 우리가 대신 죽여 주겠네. 이젠 속에 숨겼던 말을 실토해도 거리낄 게 없겠지?" 이때였다. '악!' 하는 비명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잠시 후 악귀 혼자 손을 탁탁 털며 돌아왔다. 필소해는 은근히 후련한 기분이 들어 작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태호방의 무리는 그 수효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일흔두 봉우리의 두령들 중에서도 따져 보면 시시껄렁한 좀도둑이 적지 않지요. 이런 오합지졸이 모여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자연히 말썽도 많이 생깁니다. 전 원래부터 항주부의 삼공자들과 원수로 지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태호방의 총타주 학영감이 호심장에 사는 아형이란 아가씨를 눈독들이 고는 억지로 붙잡아다가 성혼 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일로 항주성이 불안해졌고 태호 인근에서도 분위기가 살벌해졌지요. 총타주님께선 지금 아형이란 아가씨를 잡아 놓고 빠른 시일 내에 성혼을 하자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시켜 치음을 죽이고, 미화를 가두고, 도박쟁이한테도 독약을 안겼지요. 이렇게 해놓고 보니 학 영감은 꿩 먹고 알 먹고 등지 털어 불 땐 셈이 되었습니다. 어여쁜 계집을 차지하게 됐고 평소 눈엣가시이던 항주부 삼공자들마저 일거에 제거했으니 말입니다." 사불은 조용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아형이란 여자가 그렇게도 아름다운가? 소문에 의하면 항주부의 그 내노라 하는 도련님 세 분이 하나같이 그 여자를 사모했다던데. 세 사람이 하도 그 여자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한때는 태호의 뱃길마저 붐빌 정도였다고 들었지. 세 분만이 아니라 강남의 숱한 사내들이 다 그 여자만 보면 오금을 쓰지 못한다던데, 사실인가?" 필소해는 누구든지 구두신취 학 영감과 맞붙어 그가 아형과 성혼하지 못하게 했으면 하고 바라던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항주부에는 학 영감과 겨루어 이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사불과 악귀를 대하고 보니 희망이 생기는 듯 싶었다. 사불과 악귀 정도면 학 영감을 능히 처치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부추겨 학 영감과 싸움을 붙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필소해는 이런 엉큼한 궁리를 하면서 떠벌리기 시작했다. "아형의 용모는 실로 대단해서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지요." 사불은 짐짓 태연한 척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 필소해는 사불의 눈치를 살펴 가면서 아형의 입술이 앵두 같다느니, 이빨은 박속같이 희다느니, 살갗은 백옥 같다느니 하면서 마구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사불은 잠자코 머리를 숙인 채 듣고만 있었다. 한창 떠들어대던 필소해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혹시라도 사불의 비위를 거슬리는 게 아닌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악귀가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 보게나." 그가 부드럽게 말하자, 필소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두 사람에게 절을 하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태호방의 두 졸개의 시체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필소해가 사라지고 나자 사불과 악귀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때였다. 호수 기슭으로부터 웬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 사람은 얼핏 관가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두 사람 앞에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항주부에서 문독압사(文牘押司)로 있는 문의 (文義)가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문의라고 자칭한 이 사람은 예를 마치고는 일어나서 놋사발이 놓여 있는 한쪽에 좌정하더니 중이 참선이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사불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는 품이 마치 잠이 든 것 같았다. 악귀는 어둠 속에 잠긴 태호의 수면에 눈길을 준 채 말이 없다가 한참 후 문의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문의, 자네가 금년에 질어난 큰 사건들을 좀 말해 보게!" 문의는 아문에서 오랫동안 밥을 먹어 온 사람답게 품속에서 공문장 하나를 꺼내더니 불빛을 빌려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년 정월에 항주 성주방(成綢坊)에 도난사건이 일어나 은과 금을 도합 만 냥이나 도난당하였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철장방 무리들이 한 짓이라고 하는데 항주 대옥에는 지금 철장방에 가담했던 도적 세 놈이 갇혀 있습니다." "그 세 놈을 놓아주도록 해라!" 악귀가 호기스럽게 분부를 내리자 문의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금년 봄, 항주부 외답청(外踏靑)에 살고 있는 대부자 전정인(鑛正仁)의 딸 전소소(錢素素)는 채화적(采花賊) 운지(雲智)라는 중농한테 능욕을 당했는데 나중에 전소소는 죽고 운지라는 중놈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몸을 피했습니다. 소인이 그 놈을 나포하여 사형수만 가두는 옥에 처넣었습니다." 악귀는 사불의 눈치를 살폈다. 사불이 양미간을 찌푸리자 악귀가 말했다. "그 놈한테 독사발을 안겨 옥 안에서 죽여 버리도록 하라!" 문의가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운지란 중놈이 저지른 이 겁탈사건에 대해 항주부에서는 이미 형부에 공문을 올려 가을에 참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약사발을 안기지 않아도 그 놈은 죽게끔 되어 있는데요……?" 악귀는 갑자기 새된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놈을 빨리 죽여 달라고 은전을 찔러 준 사람이 있어. 만일 자네가 가을까지 기다려서 참형을 한다면 그 은전을 쓴 사람이 얼마나 원통해 하겠나? 그래, 약사발을 안기겠나, 안기지 않겠나?" 문의는 사불과 악귀의 잔인한 수단을 잘 알고 있는지라 얼른 대답했다. "예, 빠른 시일 내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항주부에는 전번 달에 또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웬 놈이 관가의 은고(銀庫)를 털었는데 금은을 몽땅 도난당했습니다. 소인이 두 분을 배알하러 온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밝혀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해서입니다. 이 금은만 찾아 주신다면 일후에 두 분께 무슨 큰일이 생기실 때 소인한테 분부만 하십시오, 그럼 소인은 언제든지 명에 따르겠습니다." 사불이 머리를 끄덕이자 악귀가 장담을 했다. "좋네. 그럼 이 사건은 나한테 맡기게. 관가에 금은이 없어서는 안 되는 거구, 더구나 이따위 일로 자네가 벼슬 자리까지 내놓게 돼서는 안 되지 ." 문의는 몹시 기뻐하며 거듭 감사의 말을 했다. 이어서 그는 또 항주부에서 생긴 큰 사건들을 알리고는 사불과 악귀의 분부를 들었다. 악귀가 죽이라든가 혹은 살리라든가 하면 문의는 일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사건 처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 사람의 걸음은 아주 느렸다. 무쇠지팡이로 땅을 짚으면서 걸어오다 보니 한식경이나 걸려서야 겨우 사불과 악귀 앞에 당도했다. "항주의 귀수(鬼手) 진삼(陳三)이 사불님과 악귀님을 배알하러 왔사옵니다!" 이자는 절름발이로 걸을 때마다 몹시 기우뚱거렸다. 이자의 행색을 볼라치면 머리는 봉두난발이요, 두 눈은 마치 무슨 먹을 거라도 찾는 쥐새끼 눈깔처럼 쉴 새 없이 번들거렸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소문난 독각대도(獨脚大盜) 진삼이었다. 악귀는 역시 사불의 눈치를 살폈다. 사불이 양미간을 찌푸리자 악귀는 쌀쌀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진삼아, 요즘 사는 형편이 어떠냐?" 진삼이 한숨을 지었다. "항주가 비록 천하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는 하지만, 저같은 놈은 워낙 타고난 팔자가 그래선지 형편이 말이 아닙지요. 오늘 얼마 안 되는 금과 은을 가져와 두 분께 드리옵니다. 앞으로도 두 분께서 하시는 일들이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키가 훤칠하게 큰 사나이 넷이 조심조심 다가오더니 궤짝 두 개를 등잔불 앞에 갖다 놓았다. 진삼이 궤짝 뚜껑을 탁 치자 궤짝들이 벌컥벌컥 열렸다. 궤짝 안을 들여다보니 몽땅 황금과 은으로 꽉 찼는데 적어도 만 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악귀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술법을 피우더니 궤짝 가장자리에 날아가 걸터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궤짝 속의 금덩이와 은덩이들을 집어 올렸다가는 주르르 떨구면서 한참 장난하는 듯싶더니 불쑥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는 궤짝 안의 금과 은을 더욱 찬찬히 살펴보곤 역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진삼이 곰살궂게 웃으며 물었다. "무얼 찾으십니까? 소인이 도와드리지요." 악귀가 빙그레 웃으면서 반문했다. "듣자니까 네가 항주부 관가에서 조은(槽銀) 20만 냥을 훔쳤다고 하는데 나한테 가져온 건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진삼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잠시 후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사불님과 악귀 님께서는 모두 눈이 밝으신 분들이지요. 두 분의 눈은 정말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때 사불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진삼아, 내 보기에 이 조은을 도로 가져다가 관가에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관가에서 기황이든 고장에 보낼 수 있도록 말이야." 진삼이 한참 침묵을 지키고 섰다가 가볍게 탄식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늦기는 왜 늦었단 말이냐?" 악귀가 의아해 하며 묻자 진삼이 대답했다. "그것들을 몽땅 투전판에 밀어 넣었다가 잃고 말았습니다." 악귀는 혀를 끌끌 차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불이 물었다. "진삼아, 그럼 그 조은을 누구한테 잃었느냐?" "투전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항주부의 병묘란 도령한테 잃었지요. 그래서 지금 제 손엔 3만 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요." 진삼은 이렇게 대꾸하면서 사불을 곁눈질해 보았다. 사불의 용모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를 한낱 아름다운 아가씨로만 보았다가는 큰코다친다. 그녀처럼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잔인한 여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강호의 사람들은 그녀를 사악한 부처라는 뜻으로 사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사불은 진삼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됐다.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해라." 진삼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몇 발자국도 채 못 가서 사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진삼아, 가져온 물건들을 도로 가져가거라." 진삼의 얼굴은 당장 흙빛으로 변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서자 사불은 궤짝 두 개를 가리키면서 빙긋이 웃었다. "이 궤짝들은 진삼이가 가져온 것이니 도로 가져가." 진삼은 긴장하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서 되물었다. "사불님과 악귀 님께선 오늘따라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이전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두 분은 상관하지 않았지요. 한데 오늘은 전과는 달리 이상하십니다?" "나 사불이나 저 애 악귀도 때로는 한두 번씩 괴상한 짓거리를 할 때가 있지. 그러니 그렇게 이상하게까지 생각할 건 없다." 진삼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그는 궤짝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않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부터는 서쪽에서 해가 뜨겠소이다. 사불님과 악귀님께서도 선행을 베풀려 하시니 말입니다. 보아하니 세상이 정말 변했소이다. 변해도 이만저만 변한 게 아니야……." 진삼이 변했다는 말을 하자 장승 같은 사내 넷은 마치 군령이라도 떨어진 듯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사불과 악귀에게로 덮쳐 들었다. 넷의 도법(刀法)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칼을 휘두르면서 사불과 악귀를 공격했다. 바로 이 틈을 타서 진삼은 잽싸게 놋사발 쪽으로 달려갔다. 사불과 악귀한테는 괴상한 법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