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4편 (14/59)
이 밖에도 담황색 저고리와 보라색 치마는 그녀의 용모와 청초한 몸매를 더욱 돋 보이게 했다. 사내애는 걸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병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병묘는 이제 눈길을 돌려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선실은 침대 네 개를 놓을 만한 크기였는데 삼면은 벽이고 한쪽에만 창문이 두 개 있었다. 삼면 벽에는 정교하게 만든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고 선반 위에는 처음 들어을 때와 마찬가지로 희귀한 골동품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병묘가 보기에 처녀와 사내애는 이 배에서 일하는 하인들 같았다. 이들의 차림새로 보아 절대로 배의 주인인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배의 주인님은 어디 사는 누구요?" 병묘의 물음에 사내애는 처녀에게 눈길을 주다가는 다시 병묘를 바라보았다. "그…… 그분은 안 계세요." "아가씨와 젊은이는 이 배에서 심부름을 하는 게지요?" 처녀는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사내애는 팔딱 뛰어 걸상에 앉으면서 놀랍다는 듯 물었다. "손님께선 어떻게 우리가 배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병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과연 내 짐작대로군. 한데 이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처녀가 남의 배에서 심부름이나 하다니 너무 아까운데?' 병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처녀가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무슨 연고로 배에 실려 여기까지 표류해 오신 건가요?" 처녀의 물음에 병묘는 난감해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내막도 잘 모르는 처녀와 사내애 앞에서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어물거리자 처녀도 더는 캐묻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병묘는 처녀를 슬며시 훔쳐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처녀도 아형처럼 솜씨가 있고 마음이 착한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아형만큼은 아냐. 어떤 여자도 아형을 능가하진 못해.' 그는 아형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아형은 지금 그 늙다리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그 늙다리는 여전히 성혼하자고 아형을 못살게 굴고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당장 찾아가서 아형을 구하지 않으면 그녀의 운명은 불 보듯 뻔하리라. 병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녀와 사내애를 향해 읍을 했다. "난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게 있소. 폐를 많이 끼쳤는데 실로 감사하오." 이렇게 인사를 한 병묘는 처녀와 사내애가 만류할 새도 없이 선실 밖으로 나갔다. 선미에 나가 서서 사방을 살피던 병묘는 절망감을 느꼈다. 타고 온 배를 고물에 단단히 매어 놓지 않은 탓에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병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처녀와 사내애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처녀가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급한 용무가 계신지요? 만일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힘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병묘는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했다. 처녀에게 자기의 상황을 털어놓는 게 어떨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남의 배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므로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난 복수를 하려는 것이오. 태호방 무리들을 찾아서 복수해야 할 일이 있소. 두 분은 남의 배에서 일을 보시는 처지에도 내게 술도 주고 잘 쉬게 해주어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아무튼 정말 고맙소." 그는 말을 마친 뒤 다시 읍을 하고 몸을 돌렸다. 헤엄을 쳐서라도 다른 배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물에 뛰어들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아랫배에 통증이 엄습해 온 것이다. 그는 너무 아파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지쳤으니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여기고는 뱃머리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공자님, 낯색이 말이 아니군요. 몸조리를 잘 하신 후에 태호방을 찾아가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스러운 듯 처녀가 말했다. "난 하루라도 빨리 태호방 놈들을 찾아가야 하오. 우선은 나를 철판봉까지 데려다 줄 배를 찾는 게 시급하오." 병묘는 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병묘를 바라보는 처녀의 눈길에는 동정과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태호방을 찾아가 복수를 해요?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하지 않아요? 하루나 이틀을 쉰다 해서 복수를 못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병묘는 처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했으나 당장 아형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생각해 주어 감사하오, 하지만 당장 가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럴만한 사정이 있소." 병묘는 그 말을 마치자 풍덩 물에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몸이 물 위에 떠 주지를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 몸에 힘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 처녀가 얼른 물 속에 뛰어들었다. 처녀의 수영 솜씨는 대단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병묘에게 다가와서 그의 목덜미를 거머쥐고는 큰 배 옆으로 끌고 갔다. 사내애가 배 위에서 밧줄 두 가닥을 던져 주자 처녀는 그 밧줄로 병묘를 묶은 뒤 잡아당기라고 눈짓을 했다. 사내애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병묘를 배에 끌어 올렸다. 병묘는 온몸이 물에 젖어 후줄근한 채 갑판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확연히 깨달았다. 태호방 놈들은 그가 모르는 새에 그를 독약에 중독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놈들이 어찌 그처럼 간단히 그를 놓아줄 수 있었겠는가. 병묘는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아팠다. 무공을 상실한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아형을 구할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헤엄도 치지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아형을 구하겠는가. 처녀는 허리를 굽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병묘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보기에 공자님께선 병이 들었어요. 가벼운 병이 아닌 것 같아요. 선실 안에 들어가 푹 쉬시는 게 좋겠어요." 병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철판봉에 가는 일은 거의 포기상태였다. 아형을 구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건사하기 어려운 판에 태호방 놈들을 찾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처녀와 사내애는 병묘를 부축하여 선실에 데려다 눕혔다. 처녀가 말했다. "어서 옷부터 바꿔 입으세요. 여기에 갈아입을 옷들이 있어요. 그 젖은 옷을 벗고 몸을 말려야 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사내애는 병묘가 젖은 옷들을 벗는 것을 거들었다. 병묘는 옷을 갈아입고는 사내애에게 물었다. "이봐, 젊은 친구. 누님은 이름을 뭐라고 부르나?" 사내애는 한심하다는 듯 병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손님께선 정말 딱하시군요.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 이름이 필지도 모르고 있다니요? 실례도 그런 실례가 어딨어요?" 병묘는 민망해져서 더는 캐묻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처녀는 갑판에서 대나무로 만든 바지랑대에 걸려 있던 옷들을 거두어 가지고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처녀가 물었다. 병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공자님 안색을 보아서는 병이 가벼운 것 같지 않아요. 저희들과 함께 의원을 찾아가 맥을 짚어 봐야겠어요." 병묘는 거절하려 했으나 여전히 끊어질 듯 배가 아픈데다 기진맥진하여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처녀와 사내애는 모두 선실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절커덕거리면서 닻을 감아 올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병묘는 배가 곧 떠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쯤 지나자 찰싹찰싹 물소리가 가볍게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배가 물을 가르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병묘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배엔 자기말고 사람이 둘뿐이고 그나마 하나는 섬약한 처녀에다 다른 하나는 아직은 풋내기 소년인데 이 큰 배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무침대에 누운 채 열려진 선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연달아 뒤로 물러서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보아 달리는 배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 배는 오랫동안 달리다가 좌우로 뱃머리를 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병묘가 다시 밖을 내다보니 배는 끝없이 펼쳐진 갈밭 속을 요리조리 헤치며 물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갈꽃이 한창인 계절일지라 흩날리는 갈꽃가루들이 끝없이 선창 안으로 날아들었다. 병묘는 시선을 돌려 선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 보았다. 아무리 화려한 선실이라 할지라도 병든 환자가 혼자 누워 있기엔 썰렁하기만 했다. 병묘의 가슴은 재가 된 듯했다. 이제 그에겐 아무런 욕구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죽은 듯이 누워서 이미 흘러간 자기의 반평생을 들이켜보았다. 이 몇십 년 동안 그는 강호바닥을 누비며 일단 마음먹은 일이면 반드시 해치웠으며, 또 감히 방해하는 자도 얼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지경으로까지 되었으니 강호의 옛 친구들을 무슨 낯으로 대한단 말인가? 그는 암담한 생각에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그는 이 배를 나서는 대로 사람들이 모르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 조용히 목숨을 끊으리라 마음먹었다. 제9장 사불과 악귀 배는 낭하처럼 뻗어 나간 비좁은 물길에 들어섰다. 배가 지나는 양편에는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배는 이렇게 한참을 전진하다가 드디어 뭍에 닿았다. 이 뭍에는 이상하게도 줄기와 가지들이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다. 닻을 내리자 처녀가 선실에 들어섰다. "도착했어요." 그녀는 병묘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병묘가 선실 밖에 나가서 둘러보니 이 개활지는 그다지 넓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마치 물 속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았는데 인가 하나 없이 온통 나무들뿐으로 그나마 너무나도 빽빽하게 모여 있어 마치 몽땅 한 뿌리에서 돋아난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은 배를 떠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들어가니 나무 숲은 더욱 무성했다. 비집고 나갈 틈새가 없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사람의 위엄 있는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에헴, 그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오? 여긴 왜 찾아왔소?" "저희들은 태호의 보선(寶船)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여기 한 분이 독약에 중독되어서 선배님을 찾아오는 길이에요." 처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위엄 있는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태호의 보선에서 산다니 그대는 사불이겠군?" 병묘는 들려 오는 음성을 듣고 음성의 주인은 적어도 육칠십 세쯤 되는 노인일 거라고 단정했다. 처녀는 양팔을 엇갈아 앞가슴에 가져다 대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래요, 소녀가 바로 사불이에요." "그럼 그대와 함께 동행한 사람은 악귀이겠구만? "그래요, 제가 바로 악귀랍니다." 사내애는 기뻐서 이내 대답했다. "그대 둘의 음성을 들으니, 비록 내력은 쓰지 않았지만 숨소리가 평온하니 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은 누구지?" "상처를 입은 분은 태호에서 이름있는 병씨네 도련님이에요. 태호방의 놈들과 무슨 일로인지 싸우다가 독약에 중독되어 이 지경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배님을 찾아왔어요. 불쌍히 여기셔서 목숨을 구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처녀가 이렇듯 간청하자 상대방은 대답은 하지 않고 껄껄 웃어댔다.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웃음 소리였다. 이윽고 그는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난 남을 도와도 절대 그저 도와준 적이 없어!" 처녀가 대답했다. "소녀는 전부터 선배님의 이런 법도를 잘 알고 있지요. 소녀는 선배님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태호 보선에는 쓸 만한 물건들이 적지 않으니깐요. 병 도련님의 목숨만 살려 주시면 무엇이든 선배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골라서 드리겠어요." 처녀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웃음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 왔다. 이 웃음 소리에는 분명히 야유와 조소가 섞여 있었다. "태호 보선? 그 배에 대관절 무슨 물건들이 실려 있기에 태호 보선이라고 해? 사불과 악귀는 내 말을 잘 들어라! 그 따위 헐망한 배 한 척을 타고 다니면서 우쭐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 안 드느냐?" 그는 또다시 한바탕 웃어댔다. 사내애는 부지중 부아가 났다. "남의 배 안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나 알구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아. 아무튼 그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는 보여 주어야겠어. 다시는 허풍을 떨면서 돌아다니지 못하게 말이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세 사람의 눈앞이 환해졌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니 목소리의 임자가 그들이 서 있는 주변의 나무들을 뽑아 멀찍이 던져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창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 앞으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훤히 나타났다. 셋은 서로 부축하면서 그 통로를 따라 나무숲 복판에 닿았다. 그들의 눈안에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무숲 복판에는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두 층으로 나뭇가지들이 자라고 있었다. 첫층은 땅에서 7,8척이 되었는데 나뭇가지들은 몽땅 옆으로만 뻗어 있었다. 바로 이 첫층의 나뭇가지들이 얽힌 곳에 목판이 걸쳐져 있고 웬 사람 하나가 그 목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긴 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려 등과 앞가슴을 가렸는데 그 백발은 신비로운 빛을 자아냈으며 백설같이 흰 눈썹 또한 말할 수 없이 신령스러워 보이게 했다. 그는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무 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가슴 언저리에만 자그마한 물고기 껍질이 붙어 있었다. 처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금 공손히 청을 했다. "선배님께 부탁하옵니다. 병 도련님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나무 위의 사람이 물었다. "내가 병 도령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면 넌 나한테 뭘 주겠느냐?" "이건 소녀의 태호 보선에 실려 있는 금은보화들과 골동품들을 일일이 다 적어 넣은 물목단자이옵니다. 선배님께서 어느 것이든지 마음에 드시는 것이면 이 단자에 표시를 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처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손을 휘익 저었다. 그녀의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임과 동시에 얇은 가죽 한 장이 나무 위의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병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난 이 처녀와 사내애를 지금껏 남의 배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종쯤으로 여겼는데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 가죽장을 받아 쥔 백발의 사나이는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 가죽장을 몇 번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고는 대답했다. "사불아, 아무래도 네 흥을 깨야 하겠다. 이 물목단자에 적혀 있는 물건들이 2백여 종은 족히 되는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 따위 물건들이 대단한 보물로 보일지 모르겠다만 내 눈엔 죄다 폐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이번에는 그가 손을 휘익 저었다. 그 엷은 가죽장은 다시 허공을 날았다. 처녀가 손을 내밀어 받아 쥐려고 하는데 그 가죽장은 묘하게도 방향을 획 바꾸어 사내애의 옆을 뱅그르르 돌더니 다시 처녀 앞으로 날아왔다. 사내애는 허우적거리면서 겨우 그 가죽장을 잡았다. 순간 그는 거대한 힘에 밀린 듯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나무 위에 올라앉은 괴인이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악귀야! 그 가죽장을 받아 쥐는 걸 보니 네 공력이 대단하구나." 병묘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이 사내애도 과연 괴인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큰 힘을 가진 가죽장을 받아 쥐었으니 말이다. 처녀는 잠자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놀라운 재주에 저희들은 실로 탄복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선배님께서는 대관절 무슨 보물들을 가지고 계시기에 저희들의 태호 보선을 이토록 멸시하십니까?" 괴인은 다시금 크게 웃어댔다. 괴인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사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이 소인(巢人)의 재물들을 보여 주지!"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사불아, 너희들 셋이 왼쪽으로 몇 발자국만 가면 나의 첫번째 보물인 침대를 볼 수 있을 거다." 그들 셋은 소인의 말대로 몇 발짝 움직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침대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눈앞에는 크기가 거의 침대만한 조개 껍데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조개 껍데기가 아니라 딱딱한 거북이등 같아 보였다. 사내애가 호기심에 주먹으로 몇 번 치자 댕댕댕 괴상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셋은 서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이따위 거북이 등 같은 물건이 왜 보배라고 자랑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처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배께서 저희들한테 보이신 이 물건이 대관절 어째서 희귀한 보물이라고 하십니까? 저희들은 영문을 잘 모르겠으니 똑똑히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거북이 껍질에서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셋은 그 거북이 껍질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거북이 껍질이 침대만큼이나 큰데도 움푹하게 패인 곳에는 물 한 방울도 없었고 티끌 하나 없었으며 심지어 풀잎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셋 중에서는 그래도 사내애가 가장 약삭빨랐다. 그는 땅에서 마른 풀 한 개를 집어서 거북이 껍질 안에 던졌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마른 풀은 나풀거리면서 거북이 껍질 안에 날아 들어가기는 했으나 바깥 쪽으로 뱅뱅 돌면서 마치 거북이 껍질 안에 들어가기 싫은 듯 좀처럼 내려앉지를 않았다. 풀은 결국 거북이 껍질 가장자리로 밀려 나오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들 셋은 모두 크게 놀랐다. 사내애는 다시 허리를 굽혀 옆 웅덩이에서 물 한 움큼을 떠서 거북이 껍질 안에 부어 넣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마치 벌겋게 달구어진 솥 안에 물을 붓기라도 한 듯이 거북이 접질 바닥으로부터 찌르륵찌르륵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얼마 안 가 물 한 방을 남지 않았다. 사내애는 손을 뻗쳐 거북이 껍질을 만져 보았다. 몹시 뜨거우리라고 여겼 는데 오히려 차가웠다. 이 커다란 거북이 껍질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선배의 이 거북이 껍질은 기이한 보물임에 틀림없어요. 하지만 저희들은 안목이 짧아서 도대체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처녀의 말에 소인이 개탄했다. "요새 세상에는 진짜 보배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 실로 드물단 말이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아주 기이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지. 그 책 이름은 《수신기(搜神記)》라고 하는데 이 책에는 나사귀시(羅煞鬼市)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어. 한 사람이 귀신시장에서 원수구퇴( 讐 退)라는 거북이 껍질을 내놓고 팔았지만 누구도 그 보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 사불이는 태호 보선 의 주인이니까 이 고사종이야 알고 있겠지?" 처녀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더니 갑자기 기색이 크게 변했다. "선배께서 방금 말씀하신 원수구퇴란 용왕의 아홉째 아들이 벗어 놓았다는 그 거북이 껍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처녀가 말한 고사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진(晋) 시절에 한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하루는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전혀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창 배가 암초에 부딪치지 나 않을까 가슴을 조이는데 갑자기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붉은 등불들이 죽 나타나더니 뱃길을 밝혀 주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붉은 등불이 밝혀 주는 대로 배를 몰아 한참 후에 해안에 닿게 되었다. 뭍에 올라 둘러보니 땅이 왜 넓었고 사 람들이 해안에서 오락가락했다. 이곳은 바로 장터였는데 장터에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코가 크고 눈동자가 파랗고 머리칼이 샛노란 사람들로 키도 훨씬 크고 지껄이는 말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장터에는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소인이 가지고 있는 원수구퇴란 거북이 껍질을 팔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 장터에서 제일 귀중한 물건 이었다. 사람들은 멀리서 건너다볼 뿐 감히 값도 묻지 못했다. 이때 누군가 "동해의 용태자가 왕림하셨사옵나이다!" 하고 소리쳤다. 이윽고 궁등(宮燈)이 길을 안내하는데 그 뒤로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알이 푹 꺼져 들어간, 이를 데 없이 추하게 생긴 사람이 걸어왔다. 그 사람은 진주 백 말과 금은보화를 잔뜩 주고 그 원수구퇴라는 거북이 껍질을 샀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원 수구퇴는 바로 용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용왕 모양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거북이의 모양을 타고난 것이다. 용왕의 아홉 째 아들은 9백99년을 살다가, 얼마 전인 9월 9일 중양절(重陽節)날 해 뜰 무렵에 이 거북이 껍질을 벗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보통사람들이야 어떻게 이런 보배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거북이 등에는 아홉 갈래의 줄이 나 있는데 그 줄이 끝난 데마다 한 쌍의 진주가 있다고 하며 이 한 쌍은 자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