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3편 (13/59)
"네 놈은 아형 낭자의 뜻에 맡기겠다. 아형이 찔러 죽이라면 찔러 죽이고, 토막내어 죽이라면 그대로 따를 것이다!" 학 영감은 악에 받쳐 대꾸했다. "좋아, 좋아. 보아하니 네 놈에겐 빼어난 술법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솜씨를 보여 봐라!" 말을 마친 학 영감은 아협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면서 한 보 한 보 미화에게 다가들었다. 미화가 아랑곳없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 학 영감은 오산했어……." 학 영감은 다소 놀란 듯 흠칫했다. 미화가 큰소리를 쳤다. "학 영감은 내가 치음이처럼 어리석은 줄 아는가?" 학영감이 여전히 다가오자 미화는 벽력같이 소리쳤다. "거기 멈춰 서지 못할까!" 학영감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죽이려고 들면 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지 어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 봐라!" 미화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쇠노를 잡은 실명한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순간 그 사내는 삽시에 기색이 돌변하면서 얼굴의 살가죽이 경련을 일으키듯 푸들푸들 떨었다. 이윽고 그는 단말마작으로 비명을 세 번 올리더니 데굴데굴 구르다가는 급기야 킬킬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점차 뻗뻗하게 굳어져 갔다. 태호방의 무리들은 그가 졸지에 돌처럼 굳어 버리는 것을 보고는 하나같이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못박인 듯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미화는 넋 나간 듯 멍청하니 서 있는 태호방 무리들을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다가는 다시 학 영감을 노려보았다. "학 영감, 방금 내 생각이 달라졌어. 만일 영감이 다시 아형 낭자를 건드리는 날에는 그 자리서 죽는 줄로 알라구!" 제8장 미화와 병묘 태호방의 무리들은 모두 이 미화 공자를 잘 알고 있었다. 미화에게 있어서 꽃은 남을 제압하는 극약이었다. 사람이 꽃에 혹하면 정독(情毒)이요, 사람이 꽃에 취하면 심독(心l毒)이다. 태호방 무리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미화의 화독(花毒)이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너무나 강하며 누구나 취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 꽃향기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미화가 겁을 주자 학 영감은 더는 아형을 미끼로 미화를 협박하지 못했다. 미화는 태호방 무리들을 둘러보면서 호통을 쳤다. "네 놈들은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종들이다! 모조리 죽여 없애야 내 속이 시원하겠어!" 그의 말에 쇠사슬을 거머쥔 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자식의 말대로라면 난 49일 동안 견디기 어려운 시달림을 받다가 죽게 돼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는 거 시간을 끌며 고통받기보다는 싸워 보기라도 하다가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마음을 굳히고 두 손을 휘둘러 미화의 정수리를 향해 쇠사슬을 날렸다. 그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휘두르니 쇠사슬은 미화의 목과 정수리를 향해 윙윙 소리를 내며 번개같이 이쪽저쪽으로 내리꽂혔다. 미화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몇 발짝 물러서면서 겁을 주었다. "원래 네 놈은 49일 만에 죽게 돼 있었는데 이처럼 기운을 다 뺐으니 기가 대혈로 빠지고 기가 온몸에 흘러서 독성은 당장 네 온몸에서 발작할 것이다!" 하지만 놈은 믿지 않고 계속 쇠사슬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미화는 요리조리 피할 뿐 손을 쓰지 않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갑자기 놈은 두 눈을 커다랗게 흡뜨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가락들이 안으로 굽어 들더니 완전히 오그라졌고 동시에 목 안에서도 숨이 막히는 소리가 꺽꺽 들려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의 두 눈알이 개구리눈깔처럼 밖으로 튀어나오더니 급기야는 두 줄기의 피가 왈칵 쏟아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태호방 무리들은 하나같이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 미화가 드리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꽃이 향기롭다고들 말하지만 난 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싶다. 꽃이 향기롭다면 이상할 게 조금도 없지만 꽃이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다들 아마 무슨 뜻이냐고 머리를 갸우뚱할 거야." 미화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면서 학 영감 쪽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차 영감은 그의 손을 아형의 등에 얹은 채 미화를 주시했다. 학 정감이 손바닥에 장력을 넣기만 하면 아형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게 된다. 학 영감은 미화의 일거수일투족을 바짝 눈여겨 보았다. 미화가 암암리에 술법을 피워서 언제 자기를 죽일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학 영감, 아형을 놓아주기만 하면 난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난 영감의 태호방 일흔두 봉우리의 무리들을 하나도 날기지 않고 몽땅 씨를 말려 버릴 테요." 미화의 이 위협에 학 영감fall 대꾸했다. "미화 공자, 사람들이 모두들 공자를 어리석다 하지만 난 여지껏 이 말을 믿질 않았네. 그런데 지금 보자니 그게 사실이구만." 미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허허, 내가 어리석다구? 그럼 학 어른님께서 잘 일깨워 주시구려." "사람이 꽃밭에서 죽으면 귀신이 되어도 풍류객이라고들 한다네. 듣자니 자네한테는 계집이 백도 넘는다면서? 그리구 계집들마다 다 그럴듯한 꽃이름이 붙여져 있구. 대관절 자넨 그 중에서 어느 계집을 제일 좋아하나?" 학 영감의 물음에 미화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집엔 실로 백에 가까운 계집들이 있지. 그 계집들은 시골의 촌뜨기들과는 달리 저마다 미목이 청수하고 몸매도 아름답지. 난 그 계집들에게 난초며, 매화, 국화 등의 꽃이름으로 아명(雅名)을 붙여 주었지. 그러니 학 영감의 말처럼 내가 꽃밭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백에 가까운 계집들 중에 아형을 능가할 계집은 하나도 없어. 아형은 영리하고 총명할 뿐더러 취미가 고상하고 떡자로서의 결벽함과 오기도 갖추고 있어 보통 계집들과는 확실히 달라.' 미화가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학영감이 그의 생각을 깨뜨렸다. "미화 공자께서는 꽃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있고, 또 그러다 보니 천하의 어여쁜 꽃들을 숱하게 독차지하지 않았소? 그 많은 꽃 같은 계집들 속에서 공자는 한평생 얼마든지 재미를 볼 수 있을텐데 뭣 땜에 아형이까지 끌어가지 못해 야단인가?" 미화는 더는 들은 체도 않고 계속해서 학 영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호방의 무리들은 누구 하나 감히 덤벼들 엄두를 못 내고 물끄러미 미화의 거동을 지켜 볼 뿐이었다. 미화는 곧 학 영감의 앞에 멈춰 섰다. 아형은 미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고 담담했다. 미화는 아형에게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아형 낭자, 그 꽃을 찾을 수 있겠소?" 아형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미화 도련님께서 전번에 오셨을 때 전 방안에 숨어서 나가지도 않았어요. 정말 실례를 했어요. 옛날 책을 들춰 보았더니 그 꽃에 대해 좋은 점이 많이 적혀 있더군요." "무슨 좋은 점들이 씌어 있었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학 영감은 부지중 속이 뒤틀렸다. '제기랄, 연놈들이 별지랄을 다하고 있네. 마치 제집 뒤뜰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학 영감은 한마디 하려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미화가 대뜸 소리쳤다. "입을 다물라구! 입을 열었다간 후회하는 일이 생길 테니까!" 학 영감은 찍소리도 못했다. 미화는 아형을 바라보며 계속 물었다. "그 고서에 무어라 적혀 있었소?" 아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첫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윽한 그 향기는 사향이나 난초에서 풍기는 듯하도다. 가까이 가면 은은하고 멀리서는 짙도다. 은은한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고 짙은 향기는 그윽한 상념에 잠기게 하는구나." 미화는 아형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훌륭한 문구로구만, 이것은 꽃의 향내를 말했지만 꽃의 기(氣)를 말한 것이기도 하오." 아형은 계속하여 고서의 문구를 이야기했다. "그 꽃을 보면 마치 친숙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하여라. 바람에 한들거리는 나뭇가지와 잎새들은 모두 무슨 말을 속삭이는 듯하여 일지일엽 (一枝一葉)은 모두 꽃의 마음을 드러낸 듯하도다." 미화는 또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훌륭한 문구로구만. 이것은 바로 화식(花識)과 화용(花容)을 말한 것이오." 아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꽃의 모양은 천태만상이다. 어여쁘지만 요염하지는 않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는 하지만 너무 혹하게는 만들지 않는다." 미화는 손뼉을 치면서 맞장구를 쳤다. "옳아. 이것은 꽃의 고아(高雅)함과 꽃의 정신을 말한 것이오." "진시(辰時)라고 말할 때면 이미 사시 (巳時)가 아니며 자시(子時)라고 말할 때면 축시(丑時)가 아닌 법이도다. 꽃은 피는 철이 있는 법이니 시일을 기다릴 수 있도다. 마치 점잖은 군자마냥 신의를 지키나니 절대 변심치 않을 것이로다." "훌륭하오. 이것은 꽃의 신의와 꽃의 품위를 말한 것이오." "고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조목들에 다 맞는 꽃이야말로 천하의 꽃들 중의 왕이라는 거였어요." 아형의 말에 미화는 갑자기 멍청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중지왕, 화중지왕……. 난 너무 아둔해. 왜 여태껏 이건 생각지 못했을까?" 학 영감은 미화가 멍청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눈치채고 이 틈에 손을 쓸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만일 손을 잘못 썼다가 미화를 꺼꾸러뜨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던 것이다. 이때 미화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 들었다. '나는 여지껏 헛수고를 한 게 아닌가. 만물은 스스로 이루어진다 것을 모르고 억지로 꽃들을 떠다 집에다 옮겨 화중지왕으로 키우려 했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방도로 화중지왕을 얻으려 하는 것 은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아형의 말대로 인간세상에서 화중지왕을 찾으려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천연(天綠)에 달렸지 사람의 힘으로는 어 쩔 수 없는 모양이다. ' 이쯤 생각한 그는 학 영감을 건너다보며 구슬리기 시작했다. "아형 낭자를 놓아주기만 하면 난 절대 영감을 성가시게 굴지 않겠소." 학 영감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형을 놓아주면 무슨 수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잔말 말구 냉큼 사라지라구. 난 꼭 아형을 내 마누라로 만들 테니까.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어!" 미화가 이죽거렸다. "속담에 붉은 꽃은 푸른 잎이 받쳐 주어야 한다고 했어. 학 영감, 오줌을 싸서 그 오줌물에 낯짝을 한번 비춰 보라구. 그 쭈글쭈글한 낯가죽을 가지고 아형과 함께 살겠다니 소 웃다 뱃고래 터질 일 아닌가?" 미화는 못 참겠다는 듯 껄껄 웃어댔다. 웃음 소리는 석실 안에서 오래오래 메아리쳤다. "이 놈아, 닥치지 못할까!" 학 영감은 크게 노하여 아형의 대혈 세 곳을 찌른 뒤 몸을 날려 미화에게로 덮쳐 들었다. 미화는 슬쩍 몸을 피해 일장을 갈겼다. 학 영감은 한쪽으로 나뒹굴면서 잽싸게 아형을 끌어당겼다. 바로 이때 둘이 선 땅바닥에서 널빤지 하나가 툭 솟아오르더니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미화는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물론 한쪽에서 지켜 보고 있던 태호방 무리들까지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때였다. 동굴 문이 우릉우릉 소리를 내더니 꽉 닫혀 버렸다. 미화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돌문이 닫히면 그는 꼼짝없이 이 석실 안에 갇히게 된다. 그는 잽싸게 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문을 밀어 보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휑뎅그렁한 석실 안에는 미화 한 사람만 남았다. 사방이 온통 석벽으로 돼 있는 석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 나갈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는 체념한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아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호방 학 영감의 손아귀에 든 이상 아형의 운명도 절망적이었다. 이제 누가 나서서 아형을 구할 수 있겠는가. 병묘는 태호방의 졸개들에 의해 작은 쪽배에 처박혀진 후 바람따라 물결 따라 반나절이나 정처없이 표류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혈도들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는 그는 허기까지 겹쳐 배에 몸을 맡긴 채 쿨쿨 잠만 잤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눈앞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어른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 배는 호수 기슭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갑판에 널린 빨래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옷들은 울긋불긋한 여자 옷이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자유자재로 나부꼈다. 큰 배에서 웬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저길 봐. 웬 쪽배가 떠오네!" 부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대꾸했다. "저 배에 무슨 좋은 물건이라도 있을 것 같나 부지?" "저 따위 작은 배에 있긴 뭐가 있겠어?" "아마두 빈 밸 거야. 있어 봤자 죽은 사람 시체 정도겠지." 병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내가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데 시체로 보다니……." 쪽배는 바람에 밀려 큰 배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병묘는 죽은 듯이 누워 큰 배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배는 돈 많은 부잣집에서 나 갖출 수 있는 훌륭한 것으로 고기잡이나 하는 배는 아니었다. 한 아리따운 처녀와 사내아이의 모습이 병묘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아이가 소리쳤다. "저것 봐! 묘하게도 맞췄네. 정말 죽은 사람이 누워 있잖아?" 처녀와 사내아이가 고개를 잔뜩 빼고 병묘가 탄 허를 내려다보았다. 병묘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숨소리마저 낮추었다. 사내애가 다사 입을 열었다. "와, 되게 잘생겼는데? 누난 언제나 남자는 살갗이 너무 희고, 여자처럼 곱게 생기면 못쓴다구 했지 않았어? 그런 사내는 사내답지 못하다구 말이야. 사내라면 눈썹이 짙고 두 눈이 부리부리해야 한다구. 누나 말대로 이 사람은 눈썹은 아주 짙은데 눈이 부리부리한지는 알 수 없군." "어머, 가엾어라. 무슨 고초를 당했길래 이 모양이 되었을까?" 처녀는 온통 상처투성이인 병묘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삿대를 가져다가 저리로 밀어 버릴까?" "아니야,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지도 모르잖아." "누나도 참, 보면 몰라? 죽은 시체가 분명해." "내가 내려가서 보고 오겠어." 처녀는 뱃머리에 나와 섰다. 그녀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병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한참 망설이다가는 마음을 다잡아 작은 배에 뛰어내렸다. 부드러운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어 보는 처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병묘는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위안을 받았다. 처녀는 손을 옮겨 병묘의 팔목과 발목도 만져 보았다. "어떤 놈들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까지 만들었을까? 정말 지독하군……." 병묘는 처녀의 말속에서 자기에 대한 한없는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는 감히 눈을 뜨지 못한 채 코끝에 감겨 오는 처녀의 체취를 가만히 음미했다. 병묘가 한참 황홀경에 빠져 있는데 '퉁!'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몹시 흔들렸다. 다름아닌 사내애가 배에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는 병묘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죽은 지 오래 라니까? 암만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야!" 처녀는 대꾸를 하지 않고 병묘만 지켜 보았다. 사내애가 다시 말했다. "혹시 태호방한테 모해를 당한 게 아닐까?" "조용히 해." 처녀가 나지막한 소리로 나무랐다. 그러나 사내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내 생각엔 수장(水葬)을 하는 게 좋겠어. 누구든지 이 꼴을 보면 간이 떨어지게 생겼거든." 사내애의 말에 처녀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병묘는 속으로 당황했다. '나를 물 속에 던져 수장을 하겠다구? 가만 있다간 물귀신이 되게 생겼군.' 사내애가 마땅찮은 듯 투덜거렸다. "누난 뭘 그렇게 자꾸 들여다봐? 생판 모르는 죽은 사람을 자꾸 들여다보면 돈이라도 나오나?" 병묘는 여전히 숨을 죽이고 죽은 체했다. 이때 사내애가 갑자기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옳지, 좋은 수가 있어. 이 시체에다 몇 번 더 칼질을 해서 물 속에 처넣으면 고기들이 좋아라고 모여들어 깨끗하게 먹어 치울 거야? 어떻게 생각해, 누나?" 처녀는 성이 나서 사내애의 팔을 집어뜯었다. "허튼 짓 말어!" 처녀는 병묘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세요, 숨이 붙어 있으면서 왜 죽은 척해요?" 그러자 병묘는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농담을 던졌다. "난 죽었댔소. 한데 낭자의 어진 마음에 의해 다시 살아난 거요." 병묘는 큰 배에 올랐다. 그는 몹시 놀랐다. 이 배는 밖에서 보기보다 직접 선실에 들어가 보니 그 호화로움이 비길 데가 없었다. 배의 갑판은 침향목(沈香木)으로 깔았고 탁자와 걸상은 모두 배에 고정시켜 놓았으며 수많은 골동품과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병묘는 선반 위에 진열된 골동품들과 진주, 보석, 옥기들이 흔치 않은 것들이며 그 가치는 돈으로는 계산할 수도 없는 것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처녀와 사내애는 병묘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차를 가져왔다. 병묘는 찻잔을 들어 단숨에 쭉 마셔 버리고는 말했다. "차보다는 술이 나은데." "맞아요. 과연 사내 대장부다우신 말씀이에요." 사내애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사내애는 곧장 선실 뒤쪽으로 달려가 술단지를 안고 왔다. "술 생각이 나시면 사양 말고 마시세요." 사내애가 이렇게 권하자 병묘는 빙그레 웃으면서 술단지를 봉한 뚜껑을 뜯었다. 그가 기뻐하며 말했다. "좋은 술이로구만. 정말 좋은 술이오!" 원래 이 술은 소문난 명주로 유난히 물처럼 맑았으나 술맛이 향기롭고 짙어서 서너 잔이면 누구나 취하게 돼 있었다. 사내애가 병묘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술시중을 들어 본 적이 없는지 술을 따르는 솜씨가 매우 서툴렀다. 병묘는 술을 받기가 무섭게 걸신들린 사람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를 지켜 보던 처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는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성은 병( )씨구 이름은 묘(苗)라서 병묘라구 한답니다. 더러는 사안묘라고도 부르지요." "손님의 모양을 보아서는 태호에서 배나 다루는 뱃사람 같지는 않고 부잣집 도련님 같아요." 처녀의 말에 사내애가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 손님이 도련님 같으면 나는 왕자님 같겠네?" 사내애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병묘를 시답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병묘는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한 병모를 보며 처녀가 만류했다.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워요." 이때였다. 사내애가 갑자기 술단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내기 안 할래?" 내기를 하자는 말에 병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리멍텅하던 두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는 대뜸 사내애를 건너다보았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사내애는 자기를 보고 말을 걸어 온 게 아니라 처녀를 보고 한 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어. 손님이 계신데 내기는 무슨 내기야?" 처녀가 나무라자 사내애가 퉁명스레 대구했다. "내기를 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기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처녀는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무…… 무슨 내긴데?" 사내애가 가슴팍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난 이분이 술고래라는 걸 첫눈에 알아봤어. 난 이분이 한꺼번에 이 술단지를 바닥낼 수 있다고 믿어! 누나 생각은 어때?" 처녀는 빙긋이 웃으며 병묘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이 애 말처럼 그렇게 술을 잘 마시나요?" 병묘는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 먹는 재주야 둘째가라면 서럽지요." 병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내애가 말했다. "어떤 잔으로 마시겠어요?" 그는 곧장 다람쥐처럼 뛰어가서 선반 위에 있는 표주박들을 가져왔다. 이런 표주박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제일 작은 것은 사람의 귀만 했고 제일 큰 것은 큰 바가지만 했다. 사내애는 작은 것부터 차례로 병묘 앞에 내밀면서 물었다. "이 잔이 어때요?" 이렇게 물을 때마다 병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내애는 결국 제일 커다란 표주박에 술을 철철 넘치게 따랐다. 병묘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는 마치 황소가 강물이라도 들이켜듯 벌컥벌컥 마셨다. 잔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처녀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으세요……?" 그러나 병묘는 온몸에 술기운이 퍼지기 시작하자 술만이 더욱 당겼다. "이 술단지를 마저 비워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 그는 처녀와 사내애가 대답할 새도 없이 두 손으로 술단지를 받쳐들고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처녀와 사내애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번갈아 쳐다볼 뿐 말을 못했다. 술 한 단지를 다 비우고 나자 병묘는 비로소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뒤로 제끼고 처녀와 사내애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병묘의 눈에 비친 처녀의 용모는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다. 두 눈은 호수처럼 크고 맑았고 오똑한 콧날에 얌전하게 다물어진 입매가 언제나 웃는 듯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