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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2편 (12/59)

2026-09-24 21:27:20 조회 31
계집의 마음이 다 그런 거야. 무엇 한 가지도 남한테 뒤지고 싶지 않은 거지. 하지만 육례를 다 갖추자면 얼마나 번잡스러운가. 전안례를 갖추고는 사주팔자 단자를 보내야 하고……. 이것저것 챙기다가 세월이 다 가겠는걸? '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영감님께서 저와 성혼하시려면 먼저 병묘 오라버니를 놓아주셔야 해요. 저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저 역시 영감님 뜻을 따를 수가 없어요.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어요?" 학 영감은 워낙 병묘를 놓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아형이 슬슬 구슬리는 바람에 어리석게도 아형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낭자가 놓아주라니 놓아주겠어!" 학 영감은 당장 병묘를 놓아주라고 영을 내렸다. 그의 졸개들이 못에서 병묘를 끄집어 내어 한쪽으로 던졌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병묘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기진맥진하여 연신 물을 토해내더니 이윽고 학 영감을 노려보며 말했다. "언제든지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는지 한번 기다려 보지." 학 영감은 이렇게 빈정대더니 병묘를 끌어내게 했다. 졸개들은 병묘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그들은 돌아와서 학 영감에게 병묘를 놓아준 일을 보고했다. "작은 배에 태워 아무데로나 흘러가도록 띄워 보냈습니다. 학 영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형 말대로 병묘를 놓아주었네. 이제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 주겠는가?" "영감님한테 몇 번이나 말씀 올렸어요? 숫처녀와 성혼하려면 육례를 갖추어야만 한다니까요." 아형의 말에 학 영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낭자가 나더러 자꾸 육례를 갖추라구 하는데 누구에게 갖춘단 말인가? 듣자니 낭자네 집엔 낭자와 하녀, 단 두 사람뿐이고 딸린 식구라고는 하나도 없다던데 내가 육례를 갖춘다 한들 그걸 받을 사람이 있기나 한가? 어디 대답해 보라구." 학 영감의 말에 아형은 새삼 마음이 쓰려 왔다. 계집애와 단둘이서 보내던 평온한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아형은 계집애가 태호방 무리들한테 억울하게 생죽음을 당하던 처참한 광경을 회상하고는 불현듯 진저리를 쳤다. 학 영감은 아형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형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형이를 총명한 여자라고들 하더구만. 하지만 일이 이쯤 되고 보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소용없어.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는 게 아형에게도 좋을 거야." 순간 아형의 가슴속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나쁜 놈…… 죽으면 죽었지 네 놈과는 안 산다. 네 놈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형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쌀쌀하게 내쏘았다. "내가 왜 미화 공자와 치음 공자의 청혼을 거절했는지 알고나 계세요?" 학 영감은 얼떨떨해졌다. "글쎄…… 낸들 알 수가 있나. 어쨌거나 마음에 안 드니까 그랬겠지?" "치음 공자는 너무 말랐어요.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것 같지 뭐예요?" 학 영감은 자기 가슴을 탁 치면서 떠벌렸다. "이 구두신취는 이만하면 보기에 괜찮지?" 아형은 경멸에 찬 눈길로 학 영감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영감님께선 장가를 들려면 왜 태호 주변에서 마누라를 찾으시지 않지요? 아무 노파든지 몸이 아직 건강하고 인품이 괜찮으면 되지 않아요?" 학 영감은 아형이 자기를 조롱한파는 것을 알고는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덮쳐 들어 아형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형 낭자, 내가 낭자를 중히 여기고는 있지만 낭자가 무서워 이러는 게 아니야. 낭잔 오늘 나와 성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낭자를 굴복시키고 말 테니까." 이때였다. 어디선가 웬 사람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 웃음소리는 이상야릇하게 높아졌다가 낮아지곤 하면서 마치 고저와 장단을 갖춘 노랫가락처럼 들려 왔다. 학 영감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러나 상대방은 대꾸는 하지 않고 여전히 웃어대기만 했다. 학 영감은 갑자기 짚이는 게 있었다. "네 놈이 치음이지? 숨어 있지만 말고 냉큼 나와 봐라!" 그제야 웃음 소리의 임자가 점잖은 음성으로 대꾸해 왔다. "구두신취, 네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냐? 그 나이에 너무 주책이라는 생각 안 드냐?" 학 영감은 냉소했다. 그의 웃음 소리는 석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학 영감이 대단한 내력을 썼음이 분명했다. 그는 이 웃음 소리로 사람의 정신을 혼란시키려 했던 것이다. 커다란 석상 앞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그는 짐작대로 치음 공자였다. 치음이 아형을 향해 말했다. "아형, 그대의 운명은 왜 이다지 불운하오? 이 태호방의 소굴에까지 잡혀 와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오." 아형의 두 눈에서는 삽시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치음을 만나게 되니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치음 공자는 그녀에게 여러 번이나 청혼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형을 좋아했으며 학 영감처럼 혼인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아형의 말이 옳소. 난 사실 너무 말랐소……." 치음이 말했다. 그 음성은 풀이 죽은 듯 조용했다. 아형은 치음이 나타나리라는 생각을 못하고 학 영감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그러한 말을 치음이 엿들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치음에게 몇 마디 변명의 말을 하려 했지만 치음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형, 더는 말하지 말아 주오." 치음은 대범하게 땅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돌려 석벽에 새겨져 있는 독수리를 보았다. "이 꽁지 빠진 수탉 같은 짐승이 태호에서 우쭐거리려 하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 치음은 이렇게 냉소를 하더니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그 독수리에게 덮쳐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아형은 치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학 영감은 눈썰미가 빨라서 치음이 독수리의 두 눈에 박아놓은 야광주를 뜯어냈음을 알아챘다. 두 눈이 빛을 잃자 독수리의 흉맹스럽던 기세는 맥없이 사그라졌다. 치음은 자기 손바닥에 놓인 야광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한텐 계집이 하나 있는데 그 계집의 이름은 소희아라고 불러. 이 야광주를 그 계집애의 머리에 달아 주면 더욱 아름다워 보일 거야……." 말을 마친 치음은 그 야광주를 품속에 넣었다. 학 영감은 치음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말을 건했다. "치음 공잔 정말 취미가 고상하군. 그 야광주는 세상에 보기 드문 보배야. 공자가 탐내고, 또 애첩한테 선물하겠다니 이 늙은이는 비록 아깝기는 하지만 달갑게 선물하겠네." 치음은 사실 학 영감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를 격노시키려 했다. 그가 격노하여 손을 쓰게 되면 허점을 찾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 학 영감은 참을성이 대단해서 그가 우상으로 섬기는 독수리의 눈알을 빼 냈는데도 성깔을 부리지 않고 태연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치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품속으로부터 금으로 만든 가느다란 줄을 꺼냈다. 그는 그 금줄의 한쪽 끝을 발밑에 눌러 고정시키고는 왼손으로 다른 한쪽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윽고 그가 오른쪽의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금줄을 튕기자 금줄에서는 가락이 흘러 나왔다. 치음이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본래 천상의 신선인데 평생토록 삼현육각을 좋아했네 옥황상제가 나를 천상에 내려보내 혼란한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라 했네 기묘한 가락을 내가 만들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놀음으로 여기네 내가 그대 위해 한 곡조만 타면 붉은 해는 서산에 질 줄 몰라 불야천 (不夜天)을 이루고 내가 그대를 위해 한 곡조만 부르면 그대는 평생토록 잠들지 못하리. 금줄은 한 가닥뿐이었지만 별의별 기묘한 음조가 다 흘러 나왔다. 때로는 급류가 흐르는 듯 잦은 가락으로 울리다가도 때로는 잔잔한 호수마냥 느린 가락으로 은은하게 울리기도 했다. 아형과 학영감은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게 그 음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치음은 마지막 소절을 거의 불렀을 즈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디 맛 좀 봐라!" 그는 줄을 휘둘러 학 영감을 후려쳤다. 학 영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아형의 대혈 두 곳을 찔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급히 몸을 돌려 치음과 맞섰다. 천하의 무학에는 정해진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밭을 갈고 베를 짜고 노를 젓고 광주리를 짜고, 여하튼 아무 일에서나 모두 무예의 술법을 터득해 낼 수 있다. 자기의 손에 익은 물건이면 차차 표리가 생겨 그것을 병장기로 바꾸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듯 치음 공자 역시 한 가닥의 금줄로 별의별 술법을 다 부렸다. 찌르고, 휘감고, 때리고 하면서 달려드는 바람에 학 영감은 몸을 피하기에 급급해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치음의 자태는 아주 유연했다. 그는 두 발로 걸어도 궁상칠음(富商七韻)에 맞추어 다섯 발자국은 길고 두 발자국은 짧았는데, 이처럼 장단에 맞춘 그의 보법은 그야말로 절묘했다. 그는 진공을 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시까지 읊었다. 백아(伯牙)의 거문고 하나에 소근(昭君)의 여러 날 밤 아쟁 소리 문군(文君)의 백 가지 공후( )에 치음의 만 가닥 금줄이 울부짖네. 학 영감은 치음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음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와 아형 사이의 혼사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는가. 그는 당장이라도 치음을 잡아죽이고 싶었지만 금줄이 휙휙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날아오는지 라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 자신의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 잡는' 법수를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치음과 10여 합을 싸우는 동안 계속해서 몰리기만 했다 . 금줄이 그의 몸뚱이에 두 가닥의 길다란 상처를 남겼다. 양쪽 바짓가랑이도 치음의 금줄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너덜거리는 바짓가랑이가 자꾸 발목을 휘감는 통에 발을 움직이기가 아주 불편했다. 어느덧 그의 등도 금줄에 맞아 적삼이 다 찢어졌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학 영감은 대노하여 크게 세 번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석실 사면의 벽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시커먼 동굴이 나타났다. 그 동굴로부터 괴한 일곱이 날쌔게 달려 나왔다. 이들은 모두 태호방 일흔두개 봉의 두령들에 속하는 자들로 저마다 무예가 만만치 않았다. 학 영감이 두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소리쳤다 "이 놈을 죽여라!" 일곱 놈들은 치음을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일제히 덮쳐 들었다. 치음도 금줄을 더욱 잽싸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때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사나이가 양손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치음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내리찍으려 했다. 이는 이른바 '화산을 내리 찍는다〔力劈華山〕'는 술법이었는데 그 내리찍는 힘은 누구도 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치음은 태연하게 몸을 슬쩍 비키면서 금줄을 날려 그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금줄은 곧장 그의 면상으로 날아가서 두 눈을 후려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남은 여섯 놈은 고기잡는 작살이며 배에서 쓰는 큰 노, 긴 쇠사슬, 수화방패(水火 牌) 같은 것을 휘두르면서 달려 들었으나 치음의 술법에 기가 질려 함부로 설치지는 못했다. 놈들은 일제히 치음을 에워싸고는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치음도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태호방에는 일흔두 개의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만만치 않은 두목들이 있을 것이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 그들을 당해 내겠는가. '얼른 손을 써서 이 몇 놈을 죽여 버리면 태호방 놈들이 나만 보면 겁이 나서 벌벌 떨거야.' 이렇게 생각한 치음은 더욱 거세게 금줄을 휘두르면서 〈큰 바람이 몰아치네〉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원래 한고조 유방이 지은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금줄을 날리자 금줄은 마치 화살처럼 노를 들고 있는 자를 향해 날아갔다. 놈은 힘이 장사로 그가 손에 든 노는 무게가 쉰 근도 넘는 무쇠노였다. 금줄에 맞자 놈은 처음에는 모기한테 물린 듯이 가렵기만 했으나 갑자기 온몸이 마구 아파 왔다. 졸지에 왼쪽 팔소매가 찢어지더니 팔뚝의 근육이 천천히 갈라 터지면서 뼈까지 드러났다. 놈은 팔을 부둥켜안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치음은 다시 그 금줄을 거두어 들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몇 송이의 꽃을 만들어 냈다. 이제 그는 〈구름아 날아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다른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몇 떨기의 꽃송이처럼 변했던 금줄이 다시 송이송이 구름덩이처럼 다섯 놈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송이 구름이 검을 휘두르는 자 앞으로 흘러갔다 놈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금줄 복판을 찔렀다. 한데 놀랍게도 놈이 검으로 찌른 꽃송이는 환영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금줄은 복판이 비어 있었는데, 놈이 검으로 찌르자 오히려 동그랗게 된 금줄이 놈의 검을 따라 솟구쳐서 그의 손목을 옥죄었다. "악―!" 비명 소리가 남과 동시에 놈의 오른손이 잘려 검과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치음의 이 선풍식 술법은 그야말로 무서웠다. 싸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셋이나 꺼꾸러뜨리자 남은 넷은 모두 멀리 그를 피했다. 그와 계속 싸우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던 것이다. 아형은 치음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도 이토록 미묘한 술법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녀는 한편으론 소름이 끼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치음이 이기면 자기는 태호방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치음은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했다. 그는 금줄을 손에 쥐고 호통을 쳤다. "태호는 일망무제하고 일흔두 개의 봉이 솟아 있어 살기는 어렵지 않은 곳이다. 네 놈들이 아형을 놓아주면 편안히 살게 내버려두겠지만 아형을 놓아주지 않으면 태호의 일흔두 개 봉우리를 몽땅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 "잠깐만!" 학영감이 소리쳤다. 그는 한 손으로 아형을 움켜잡고 치음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나두 치음 공자가 아형 낭자한테 빠졌다는 얘긴 들었어. 한데 그게 정말인가?" 치음이 대꾸하지 않자 학영감이 말을 이었다. "태호 기슭에 계집들이 하늘의 잔별처럼 많지만 아형이 제일로 예쁘지. 네가 아형이를 좋아하고 그토록 흠모하지만 아형의 진짜 모습은 아마 보지 못했을걸?" 영감은 다짜고짜 손을 뻗쳐 아형의 뒤통수에서 은비녀를 뽑아 석벽 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순간 아형의 삼단 같은 머리가 폭포처럼 양어깨로 흘러내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미녀의 모습이 가장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여 주지. 치음 공자, 내 말이 틀리나?" 치음의 두 눈에는 갑자기 긴장의 빛이 어렸다. "지금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가 더듬거렸다. 학 영감은 또다시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흐……. 너한테 아형 낭자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려는 거야……." 그는 이번에는 독수리발톱 같은 손가락을 들어 거리낌없이 아형의 옷을 찢어 냈다. 순간 상의가 홀랑 벗겨지더니 동실한 양어깨로부터 상반신이 여실이 드러났다. 봉긋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치음의 두 눈에 안겨 왔다. 치음은 얼른 그녀를 외면했다. 그는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는 길게 웃으면서 천천히 머리를 숙인 채로 몸을 돌리더니 체념조로 말했다. "아형이를 난처하게 굴지 말아라. 내가 네 말을 들을테니." "계집에 대한 사랑에도 이 세상에선 치음이를 따를 사내가 없을거야. 이처럼 사랑을 쏟는 사내가 있으니 아형 남잔 여한이 없겠구만. 으흐흐흐……." 학 영감은 한참이나 너털웃음을 웃어대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 놈을 죽여라!" 치음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석벽을 마주하고 서서 아형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한사코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평소에 날이면 날마다 아형의 알몸을 그려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형의 청초한 모습이 떠올라 그의 머리 속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꿈속에서의 상상일 뿐, 그는 오매불망 아형을 사모해 오면서도 아형에 대해 더러운 욕심을 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 다. 이러한 치음이 어떻게 아형의 알몸을 두 눈 버젓이 뜨고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겠는가. 치음은 몸을 기울여 두 손으로 석벽을 어루만지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다 싶은 쇠사슬잡이가 달려들면서 치음의 등판을 향해 쇠사슬을 냅다 후려갈겼다. 단번에 치음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왼쪽 어깨뼈가 부서지고 입에서는 왈칵 피가 쏟아졌다. 치음은 두 손으로 석벽을 더듬으며 천천히 일어서더니 얼마 서 있지도 못하고 스르르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아형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치음 도련님,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요……." 아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네 놈들은 저마다 병 장기들을 휘두르면서 마음껏 후려치고 찔러댔다. 치음은 거의 반주검 상태가 되었다. 급기야 치음의 금줄에 맞아 장님이 된 자까지 허우적거리며 달려들더니 쉰 근도 넘는 무쇠노로 치음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치음은 찍소리도 못하고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형은 더는 울지도 못하고 멍청히 치음을 바라보았다. 치음이 죽고 나자 학 영감은 암내를 맡은 수캐처럼 욕정이 발동했다. 그는 음흉한 눈길로 아형의 알몸을 구석구석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아형의 앵두알 같은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슬슬 건드렸다. '무수한 영웅 호걸들이 목숨을 바쳐 가면서라도 얻으려 하던 계집이 끝내 이 어른의 노리개가 되는구나.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네 년을 굴복시키고야 말 테다……." 이렇게 생각한 학 영감은 독수리발톱마냥 두 손을 좌악 벌리고 덮쳐 들려 했다. 아형은 온몸이 조여드는 듯했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아형의 마음은 치음의 혼을 따라 훨훨 나는 듯싶었다. 아형은 여지껏 치음이 자기를 찾는 것을 한때의 욕정으로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만 여겨 왔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치음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형은 자기가 치음의 마음을 곡해하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치음의 죽음이 순전히 자기 때문이라 여기고 자신도 마땅히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그토록 사모하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린 사내를 따라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형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학 영감은 아형을 할퀴려다 말고 이상한 듯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두 눈을 살며시 감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학 영감은 대뜸 짐작이 갔다. 그의 얼굴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치음이를 따라 죽으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 난 네 년을 반드시 내 계집으로 만들고야 말 테다! 네 년한테 사내만 보면 미치는 미약(媚藥)을 먹여서 나만 보면 사족을 못쓰게 만들 테야!" 학 영감은 거칠게 아형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는 아형의 아랫도리마저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석실 안에 꽃향기가 가득 풍겨 왔다. 학 영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 사내가 동굴 입구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꽃향기는 휜 장삼 차림의 그에게서 풍겨 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동굴 입구에 꿇어앉더니 치음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치음, 자넨 언제나 나와 겨루었지. 한평생 겨루어 왔단 말이네. 하지만 자네의 죽음을 보고 난 내가 졌음을 인정하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연거푸 삼배를 올리더니 몸을 일으키며 태호방의 두목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는 쇠사슬을 거머쥔 자를 향해 물었다. "치음의 어깨뼈는 자네가 부스러뜨렸나?" 놈이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네 놈이 50일에서 하루 모자라는 49일 동안 고통을 겪게 해주마. 네 놈의 몸은 살점들이 한 점 한 점 썩어 들어가 나중에는 네 놈 스스로 마구 후비고 긁어 온몸이 상처와 고름투성이로 될거다!" 쇠사슬을 잡은 자는 이 말을 듣고는 부지중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네가 악에 받쳐 치음을 무쇠노로 때려죽였지? 네 놈은 죽어도 제일 처참하게 죽어 마땅하지만, 두 눈깔이 그 모양이 되었으니 널 기분 좋게 죽여 주겠다. 킬킬거리면서 웃다가 죽게 해주겠단 말이다!" 미화 공자는 그 밖의 몇 놈들에게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일일이 알려 주었다. 미화가 안하무인격으로 거들먹거려자 학영감이 비양거렸다. "오호, 그럼 난 어떻게 죽일 작정이지?" 미화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치맛자락으로 간신히 알몸을 가린 채 수치심으로 떨긴 있는 아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른 시선을 거두며 씹어 뱉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