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화산논검2부[동사황약사편] - 11편 (11/59)

2026-09-24 21:27:20 조회 31
이때 다른 한 마리의 독수리가 황약사의 어깨를 꽉 틀어잡았다. 독수리의 발톱이 살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 란 독수리는 엉겁결에 황약사의 어깨를 움켜쥔 채로 푸드득 날아 올랐다. 독수리가 어찌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지 거친 바람이 황약사의 얼굴을 때리며 씽씽 지나갔다. 황약사는 놀란 가슴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가집과 산봉우리들이 그의 눈 아래로 휙휙 지나갔다. 황약사는 급히 옥소를 허리춤에 집어 넣고 두 손 으로 독수리의 발목을 틀어쥐었다. 놀란 독수리가 몇 장이나 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황약사는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만일 독수리가 다쳐 떨어지게 되면 자기의 목숨이라고 붙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황약사를 끌고 질풍같이 날아갔다. 응취봉은 갈수록 멀어져 좁은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다가 드디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몇십 리나 왔을까. 다시금 태호의 수역이 황약사의 시야에 들어 왔다. 독수리는 몹시 지친 듯 황약사를 놓아 버리려고 했다. 황약사는 필사적으로 독수리의 발목에 매달렸다. 독수리는 괴상한 소리로 울어 대며 아래로 급강하하다가는 발을 마구 흔들어 대기도 하고 다시 꼿꼿이 날아오르는 등 몸부림을 쳤지만 황약사를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놈은 성이 나서 발톱에 힘을 주어 황약사의 어깨뼈를 부스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황약사가 놈의 발목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는 바람에 더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안되겠는지 태호의 물결을 향해 급강하했다. 독수리가 수면을 스치듯 날면서 황약사를 끌고 가는 바람에 물보라가 일어나 황약사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독수리는 황약사를 호수 수면 위를 한참 동안이나 끌고 다니다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황약사도 더는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아형은 뱃머리가 몹시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쪽배가 반쪽으로 쫙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황약사는 그녀의 곁에 서 있었는데 몸을 휘청거리다가 곧 평형을 유지하였다. 이때였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선미에서 태호방 놈 하나가 입에 비수를 물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입에 물었던 비수를 들고 곧장 아형 쪽으로 달려왔다. 아형은 자기도 모르게 호수로 몸을 던지면서 황약사를 소리쳐 불렀다. 아형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곁으로 헤엄쳐 왔다. 그 사람의 손길이 아형을 잡아 끌었다. 순간 아형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형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물에서 건져 올려져 배에 실려 있는 상태였다. 이 배는 강호의 유람선 같아 보였는데 울긋불긋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형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좌우 사방을 둘러보았다. 호수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태호의 수면에는 물그림자가 출렁이며 수많은 고기 떼들이 배 주위에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아형은 선창에 기대어 노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창 물고기에 정신을 뺏기고 榮는데 누구인가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구두신취 학 영감이었다. 학 영감이 아형의 맞은편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 배를 타 보니 어떤가? 이 배는 태호에서 가장 호화로운 배야. 이 배엔 이런 작은 방이 수없이 많아. 이건 내가 수많은 황금을 주고 페르시아에서 사들인 수정이야. 낭자는 아마 이렇게 크고 훌륭한 수정은 생전 처음 볼걸?" 아형은 물끄러미 학 영감을 바라보았다. "아형 낭자, 낭자가 나한테 시집오기만 한다면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옷을 즐기면서 온갖 향락을 다 누릴 수 있어. 그래도 날 따라갈 생각이 없나?" 아형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웃으며 계속 지껄여 댔다 "아형 낭자, 태호의 일흔두 개의 봉우리는 주위의 둘레가 만 경이나 되는데, 낭잔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 "……." "태호의 천리나 되는 넓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낭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야." 아형은 어이가 없는 듯 학 영감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학 영감은 수정으로 된 선실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오만하게 지껄여 댔다. "아형 낭자, 낭잔 지혜와 재주도 뛰어나지만 이 태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미인이야. 나는 이 태호에서 풍운을 질타하는 절세의 영웅이고.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아형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학 영감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어댔는데, 입을 벌릴 때마다 몇 대 남지 않은 이빨들이 볼썽사납게 드러나 보이곤 했다. 아형은 그의 형편없는 몰골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머리털도 다 빠지고 이빨도 없는 주제에 젊은 총각이기나 한 듯 호기를 부리는 데는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형 낭자, 선인들이 하는 말이 미인의 웃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더니만 과연 그렇군. 낭자의 웃음은 내게 시집오는 것을 쾌히 승낙한다는 뜻이겠지?" 아형은 그의 말에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철면피한 늙으니 같으니, 告어 죽을 때가 되니 망령이 난 모양이지?" 아형은 기가 막혀서 또다시 실소했다. 학 영감은 태호에서 총타주 노릇을 하면서 이처럼 불손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형이 자기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던지는 것을 보자 학 영감은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학 영감은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팔목과 두 주먹에 힘줄이 툭 솟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비치는 것을 보고 아형은 속으로 은근히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학영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에서 부유한 고장은 모두 항주 부근에 집중되어 있고 교통운수는 모두 운하에 의거하고 있는데 태호가 바로 그 운하의 중심지이지. 그러나 태호의 중심을 틀어쥐고 있는 게 바로 나야. 나는 제왕들도 부럽지 않을 만큼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지. 아형 낭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구." 아형이 웃으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태호에서 태어나고 자라기는 하였지만 여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부귀와는 인연이 없소! 노인장께선 날 내가 살던 호심도로 보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학 영감은 말로 해서는 안 되자 험상궂은 기색을 드러내면서 시꺼먼 갈고리 손으로 아형의 옷을 거머쥐었다. "이 년이? 이 태호에선 내가 바로 황제인 거야. 좋건 싫건 간에 넌 날 따라야만 해!" 학 영감은 아형을 확 밀쳐 버렸다. 아형은 속으로 설움이 왈칵 치밀어 올랐으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학 영감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늙어 빠져 송장을 치울 날도 멀지 않은 놈이 나와 동방화촉을 꿈꾸다니…….' 하지만 아형은 그와 계속 맞서다가는 신상에 해로울 것 같아 사뭇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날 데리고 배 위에 올라가 태호를 구경시켜 주세요." 학 영감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진작 이렇게 나을 것이지. 결국엔 날 따르게 될 거면서 뭣 땜에 괜한 앙탈을 부리는 거냐? 이 구두신취가 네 년 하나를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한다면 어찌 태호의 총타주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아형에게 말했다. "올라가 보고 싶으면 올라가 봐도 돼.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지 뭐 볼 것 있다구 그래?" 아형은 뱃머리로 올라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남쪽 방향에 태호의 큰 부락인 귀운장(歸雲莊)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을 바라보니 그쪽은 바로 세 공자가 배를 타고 그녀를 찾아오던 방향이었다. 북쪽을 바라보니 뭍이 어슴푸레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호심도였다. 아형은 호심도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을 금치 못했다. '병묘 오라버닌 어디 있나요? 살았나요, 죽었나요? 그리고 그토록 재주가 많은 황 공자는 태호방 놈들한테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이때였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 있는데 멀리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수면을 스치며 날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놈의 발톱 밑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걸려 있는 듯했는데 독수리가 날아올랐다가 내리꽂히곤 할 때마다 그 큰 물고기도 발톱에 매달린 채 따라 움직였다.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갑판에 몰려 나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러나 독수리가 배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독수리의 발톱에 걸려 있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한 학 영감은 소리 없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 독수리는 바로 그가 기르고 있는 네 마리의 피독수리 중의 한 놈이었던 것이다. 그 피 독수리는 사람을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는데 발톱이 살 속 깊이 파고들어 누구라도 견뎌 낼 수 없을 것이었다. 학 영감은 몹시 기뻐하면 독수리를 뱃전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바로 이때였다. 아형의 실성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황 공자가? 저건 황 공자가 아닌가요?" 그러자 학 영감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도 피 독수리의 발톱에 걸려든 사람이 바로 전날에 자기와 싸우던 그 선비, 동해 도화도의 도주라고 자칭하던 황약사임을 알아보았다. 학 영감은 질투심으로 속이 끓어올랐다.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형이 황약사를 발견하자 안타깝게 불러 대는 모습이 여간 눈꼴사납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형이 보는 앞에서 독수리를 불러들여 황약사를 죽여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약사를 죽이는 것을 목격하면 아형은 그를 더욱 미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피 독수리에게 맡겨 두는 게 현명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저 놈은 결국 죽게 될 테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을 고쳐 먹고는 입을 꾹 다물고 피 독수리의 거동을 주시했다. 피 독수리는 황약사를 끌고 하늘로 솟아올랐다가는 다시 곤두박질치듯 하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황 공자님―!" 아형의 애끓는 듯한 음성이 태호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내 출렁이는 물결 소리에 잦아들었고 황약사의 모습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황약사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아형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7장 늙다리 악마와 처녀 독수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는 아형의 마음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제 황약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병묘도 이미 태호방에 잡혀 갔고 황 약사마저 독수리한테 채여 갔으니 자기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것 같았다. 그녀는 학 영감이 억지로 자기와 성혼하려 하면 목숨을 걸고 반항하리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반항하다가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나 학 영감은 그다지 아형을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뱃머리에 앉아서 술만 마시면서 졸개 세 놈을 시켜 아형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할 뿐이었다. 배는 꼬박 이틀이나 지나서야 태호 일흔두개 봉우리 중의 하나인 철판봉에 닿았다. 배가 뭍에 닿자 일흔두 개 봉우리의 두령들이 달려 나와 일일이 학 영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속에는 태호방 방주 필소해도 있었다. 학 영감은 배에서 내려 오만하게 턱을 치켜 들고는 뭇두령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봉우리 앞으로 걸어갔다. 철판봉은 그야말로 괴상하게 생긴 봉우리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복판을 커다란 도끼로 내리찍어 놓은 듯이 양쪽으로 갈라진 봉우리가 하늘에 치솟아 있었는데 그 사이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봉우리 앞자락으로 쏟아져 내리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폭포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수가 괴어서 이루어진 못에는 다리가 가로질러 있었는데 철판교라 불리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철 판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동앗줄로 꼬아 만든 것에 불과했다. 학 영감은 졸개들과 함께 아형을 데리고 이 다리 앞에 이르렀다. 학 영감이 좌우를 둘러보면서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거라." 태호방 두목들은 고분고분 영을 따랐다. 그들은 저마다 술법을 부리면서 흔들거리는 다리 위를 날아 넘었다. 자기와 아형만이 남자 학 영감이 말했다. "아형 낭자, 태호방으로 가려면 이 철판교를 건너야 해. 낭자가 무예를 모르니 내가 건너 주어야 하겠구만." 학 영감은 재빨리 손을 뻗어 아형의 대혈 세 군데를 찔러 그녀로 하여금 옴쭉달싹 못하게 하였다. 아형은 어쩔 수 없이 학 영감의 등에 업혀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아형이 다리 아래를 굽어보니 몇 길 되는 다리 밑에는 집채 같은 바위들이 울뚝불뚝 솟아 있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바위들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형이, 눈을 뜨고 보라구!" 아형이 학 영감의 말에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이미 철판봉의 두 봉우리 사이에 이르러 있었다. 바위틈 사이로 올려다 보니 하늘이 마치 실오라기처럼 가늘어 보였다. 여기서 다시 바위 틈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는데 몇 굽이를 돌고 나자 어마어마하게 큰 석실이 나타났다. 줄곧 아형을 품에 안고 올라온 학 영감은 그녀를 내려놓고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피독수리가 그 선비 놈을 붙잡아 가긴 했지만 녀석은 무예가 출중한 놈이다. 여기까지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니 요 며칠은 만사에 조심하도록 해라!" 부하들은 읍을 하며 공손히 대답을 올리고는 하나씩 물러갔다. 이 석실은 실로 컸다. 석실의 정면 복판은 평평한 석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석벽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독수리의 날개는 길이가 천리나 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번개가 이는 듯한 두 눈으로 땅 위의 창생들을 흉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독수리의 몸 아래에는 태호의 노한 파도와 크고 작은 일흔두 개 봉우리가 마치 실물을 떠다 옮겨 놓기라도 한 듯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특히 그 큰 독수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학 영감은 공포에 사로잡혀 석벽을 응시하는 아형을 보면서 지껄였다. "아형 낭자, 저 석벽에 새겨져 있는 신령스러운 독수리는 바로 날세. 태호의 만경 파도와 일흔두 개의 봉우리는 모두 내 날개 밑에 있다는 뜻이지 ." 말을 마친 학 영감은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아형은 사실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학 영감은 청혼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치음 공자나 미화 공자처럼 순순히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형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학 영감은 한사코 성혼하자고 떼를 썼다. '어떻게 하면 이 영감태기의 청혼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냥 무턱대고 거절하다가는 영감태기의 성질만 건드리기 십상이야. 무슨 묘안이 없을까? ' 아형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선 태호방의 최고 두령이시고 태호방에서 제일로 유명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시어 소녀가 병묘를 한 번만 만나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실 수는 없사옵니까?" "그자를 보구 신다구? 그럼 좋아." 학 영감은 선뜻 아형을 데리고 다른 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석실을 벗어나 몇십 층의 돌계단을 밟아 올라가니 높다란 돌기둥이 나타났다. 그 돌기둥의 모양은 마치 죽순처럼 생겼는데 낭떠러지 위에 곧게 치솟아 있었고 돌기둥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못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병묘가 돌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봉두난발을 한 채 기진맥진하여 머리를 가누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태호방 놈들은 죄다 망종들이야! 태호엔 자라들이 많지. 네 놈들이 바로 이런 자라들을 퍼뜨린 종자들이란 말야!" 이어서 병묘의 입에서는 도저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이 터져 나왔다. 병묘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는 아형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오라버니, 저 아형이에요!" "아형이, 아형이! 정말 아형이란 말이오?" 병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여기예요, 오라버니. 여기 이렇게 아형이 왔어요!" 며칠째 공포와 불안으로 가슴을 조이면서 고통을 하소연할 데도 없이 지내 오던 아형은 오빠와도 같은 병묘를 만나자 일시에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금세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병묘는 표범과도 같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아형을 건너다보며 소리쳤다. "내가 황약사에게 아형일 잘 보살피라구 신신당부했는데, 그 자식은 어딜 갔나? 아형이, 얼마나 고생했어?" 학 영감이 냉소했다. "나의 피 독수리는 천성적으로 용맹하고 잔인해서 황약사 따위가 견뎌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워낙 성미가 급한 병묘는 학 영감의 말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학 영감은 가소롭다는 듯 히죽거렸다. "병묘 이 놈아, 네 놈은 명색이 태호 삼공자 중의 한 놈으로 이 구두신취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는 눈치구나. 내 오늘 네 놈에게 된맛을 보여 주마!" "마음대로 해봐라! 난 하나도 무섭지 않다!" 병묘는 기진맥진한 소리로 대꾸했다. 이리들 오너라!" 학 영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호방의 무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알아서 병묘를 끌어내려서는 그의 몸뚱이를 길다란 밧줄로 칭칭 동여맸다. 그들은 다시 병묘를 매달아 올리는 듯싶더니 돌기둥 아래의 물 속에 처박았다. 쏟아지는 폭포수가 병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병묘는 눈을 뜰 수도 없었고 숨이 컥컥 막혀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으나 물이 차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아형은 그에게로 달려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그는 다름아닌 학 영감이었다. "아형아, 만일 네가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넌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거다. 하하하……." 학 영감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아형은 학 영감을 빤히 마주보았다. 그녀는 불현듯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학 영감을 향해 태연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영감의 머리를 매만지며 교태를 부리듯 말했다. "이런 나이에 성혼을 하시겠다니, 나 원 참……." 학 영감은 아형의 행동에 부지중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태호의 간웅으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으면서 무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아리따운 처녀의 부드러운 손길은 처음 접한 것이다. 맑고 새까만 두 눈으로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자기를 쳐다보는 아형의 눈길에 학 영감의 마음은 둥둥 떠올랐다. "영감님께선 저 같은 계집들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요. 제 사람으로 만들려면 먼저 계집의 맘을 사로잡아야 하는 거예요." 아형이 계속해서 달콤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그녀의 말에 학 영감은 귀가 솔깃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 듯싶었다. "영감님께선 너무 늙으신 건 아니에요. 아직도 혈색이 이렇게 좋으신걸요? 하지만 여인들한테 곰살궂게 굴 줄도 알아야 해요. 웃는 남자들은 언제나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영감님께선 왜 언제나 성난 얼굴을 하고 계세요?" 학 영감은 본디 태호를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아 온 화적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에는 전족을 하지 않은 계집을 얻어서 아들까지 하나 본 적이 있었으나 그 후 태호에 화적 무리가 들끓기 시작하자 마누라와 아들을 칼로 찍어 죽이고는 다시는 고기잡이, 배몰이 같은 허드렛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누라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박색인데다 심보마저 고약해서 입만 벌리면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래서 학 영감은 줄곧 계집이란 죄다 제 마누라 같은 물건인 줄로만 여겨 오던 터에 다 늦게 아형 같은 여자를 만나고 보니 온몸이 절로 녹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요? 영감님께서 저더러 영감님한테 시집을 오라고 합니다만, 청혼이란 육례를 갖추어 법도에 맞게 하여야 성사가 되는 거예요. 영감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먼저 예장을 보내 와야 해요. 사람을 보내어 우리 집에 비단필 같은 걸 예장으로 가져와야 해요. 비단필이 아니더라도 전안례는 갖추어야 하지요. 만일 우리 집에서 들고 온 기러기를 받는다면 청혼을 어느 정도 수락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연후에 영감님께서는 매파를 보내어 궁합을 맞추어 봐야 해요. 우리 둘의 사주팔자를 붉은 종이에 써서 점쟁이한테 보여야 하지요. 다들 닭띠와 원숭이띠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영감님께선 원숭이띠고 소녀는 닭띠니 우리 두 사람의 궁합은 맞지 않아요……." 학 영감이 바보 같은 말투로 자긴 원숭이띠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형이 기쁜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원숭이띠가 아니면 다행이에요. 하지만 절차로 보아선 먼저 청혼을 하고 예장을 보내고 길일을 택하고 나서야 색시를 맞아올 수 있어요. 절차가 복잡하지만 다들 그걸 따르고 있지요." 학 영감은 아형의 속을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저 좋은대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아형이 나를 완전히 꺼리는 것은 아니구나.